밑줄친 문장 중에 ‘삶이라는 배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노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라는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회사에서 나를 챙기지 않는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름대로 보험을 들어놨다.
야근을 할 때면 꼭 사진이나 동영상 따위를 찍었다. 누가 내 밥그릇을 챙겨주지 않는다는 것쯤은 머리가 굵어질 즈음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지난 6년 7개월 동안 입사했다가 뭐 같다며 그만둔 사람들의 연락처도 알고 있다.
자주 연락을 하거나 만나지는 못해도 사이는 괜찮다. 누군가 얼마나 가깝냐고 묻는다면, 내 근무시간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만큼은 가깝다.

지방간에 좋은 것들과 고지혈증에 좋은 것들이 수십 가지가 떠올랐다. 떠오르는 것들 모두 도움이 될 것은 확실했다.

"일단 식초를 드시면 좋으실 겁니다."

"아무 식초나 드시면 되는게 아니고, 사과식초여야 합니다. 그중에서도 유기농 천연발효식초로 드세요. 점심 저녁으로 식전에 한 숟가락씩 드시는데, 그냥 드시기는 힘드니까 미지근한 물에 타서 드세요."

"한 가지 더요. 쐐기풀이랑 질경이를 같이 넣어서 차로 우려서 드세요."
"쐐기랑 질경이를?"
"예. 신체 내의 항염에도 좋고, 대사기능을 자극하여 지방간에도 도움을 줍니다. 식후에 한 잔씩 드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그래? 쐐기랑 질경이는 얼마나 넣으면 되지?"
"한 잔에 각각 4그램에서 6그램 사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술 드시면 안 됩니다. 당분간 가능하면 붉은 고기도 좀 자제하시고요. 아무리 좋은 치료법을 써도 근본적인 게 안 고쳐지면 아무 소용없어요."
"아, 알았어. 노력해 볼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노력해 보시는 게 아니라,
술은 무조건 끊으셔야 합니다. 적어도 당분간만이라도 끊으세요. 그리고 나아지시면 조금씩, 가끔만 드시는 거고요. 일단 건강 챙기셔야죠."
"알았어. 거, 우리 집 마나님처럼 잔소리하네."

"잠도 푹 주무시고요. 그럼 고지혈증이랑 지방간 둘 다 좋아질 겁니다."
"그래, 고마워."

당장 건강원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조금 막막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막막함은 아주 얇디얇아 판자 정도에 불과했고, 마그마처럼 솟아오르는 설렘이 더 컸다.
능력 같은 것들 떠나서 새로운 시작 자체에 큰 의미를 가졌다. 평생 남 밑에서만 오지게 굴렀는데, 처음으로 사장이 되는 거였으니까.

나는 건강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싫어하는 편에 가까웠다. 그 특유의 약 달이는 냄새와 후끈한 열기가 싫었다.

-건강원이 뭔데?
-강아지랑 염소, 개구리, 달팽이, 토끼, 자라, 고양이 같은 거 죽여서 먹는 데야.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게 중요했다.

계속 놀림감이 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계속 당하게 될 거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나는 처음 얘기를 꺼낸 녀석의 가슴팍을 밀치면서 성질을 냈다. 그러자 녀석이 건드리면 안 되는 곳을 건드렸다.
-엄마도 없는 새끼가!
그 말에 곧바로 주먹을 내질렀다. 녀석이 눈으로 투명한 즙을 짜고, 코에서는 포도즙을 콸콸 쏟아낼 때까지 흠씬 두들겨 팼다.

할머니가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던 말들을 곱씹고, 할아버지가 강조했던 게 무엇인지를 되새긴다.
삶이라는 배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노를 쥐고 있는 것은 분명히 나였다.

혈색도 좋고, 피부도 깨끗하니 크게 문제가 될 것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얼굴만 본다고 해서 전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체 다른 부위를 살펴야되기도 했고, 특정 증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더욱 정확한 진단이 가능했다. 그러다 노무사의 오른쪽 귀밑, 턱뼈 뒤쪽이 살짝 부어 있는 게 보였다.
침샘염 혹은 침샘비대증.
운이 나쁘다면 결석이 생겼을 수도 있었다. 최악의 경우 종양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잠시 실례 좀 해도 되겠습니까?"
"어떤......."
"귀아래가 좀 부으신 거 같은데."
"아, 이거요."
노무사는 부은 쪽을 손으로 어루만지며 멋쩍게 웃었다.
"요즘 계속 피곤해서 임파선이 좀 부은 거 같아요."

"제가 좀 살펴봐도 될까요?"
"예? 의료 계통 종사자는 아니시잖아요?"
"의사는 아닌데, 이쪽으로 조금 알아서요."
"예, 뭐...... 그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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