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시에 나오는 문구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며 그 의미를 음미할수록 시의 맛(?)을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시의 특성상 소설이나 비문학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긴 문장은 아니지만, 짧은 문장 속에 깊은 의미가 농축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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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8부터는 이 책과 관련된 해설이 나온다. 해설자는 막스 피카르트의 철학 에세이《인간과 말》이라는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인간과 말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탠다. 이러한 설명은 나 같은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기 힘든 인간과 말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심오한 속성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어지는 해설에서는 ‘인간과 말‘이라는 키워드에 기반하여 한강 작가의 소설 중《희랍어 시간》이라는 작품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온다. 아무래도 이 소설과 오늘 읽고 있는 시집의 작가가 동일하다보니 감정선이라든지 말하고자하는 바가 공통되는 부분들이 없을 수가 없는데, 해설자께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주셔서 나중에《희랍어 시간》을 읽을 때 좀 더 깊이있게 읽어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뒤이어서는 이 시집에 나왔던 시들 중 몇 가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핵심 시구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명료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다. - P87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아
너도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 P93

이 도시의 고통이 가만히 앞질러 가면
나는 가만히 뒤처져 가고 - P95

파르스름한 불꽃심이 흔들리는 건 혼들이 오는 거라는데요 혼들이 내 눈에 앉아 흔들리는데요 흥얼거리는데요 멀리 너울거리는 겉불꽃은 더 멀어지려고 너울거리는데요 - P96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 P97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 P97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 P98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 P99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 P102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 P103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 P104

사물이 떨어지는 선,
허공에서 지면으로
명료하게

한 점과
다른 점을 가장 빠르게 잇는

가혹하거나 잔인하게,
직선

깃털 달린 사물,
육각형의 눈송이
넓고 팔락거리는 무엇
이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선 - P105

로카 : 남미 대륙 남부의 원주민들을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 P107

거울 이편과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하는 나는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 P106

단 한 군데에도 직선을 숨겨놓지 못한
사람의 몸의 부드러움과

꼭 한 번
완전하게 찾아올
중력의 직선을 생각하는 나는 - P106

나를 공격할 생각은 마 - P109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 P111

비스듬한 행성의 축을 타고
그토록 멀리 미끄러져 내려왔으니
시선의 각도에 맞추어
달의 윗면이 오므라든 거라고 - P113

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
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 - P115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 P121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 P121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 P121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 P122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 P122

어서 가거라 - P123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 P124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 P125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 P127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 P131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 P132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 P134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 P134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 P135

작가란 누구인가.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해갈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 - P138

될 수 있는 한 언어를 비효율적으로 다루려는 문학적 행위와 관련된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줄거나 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사실은 말과 관련된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대체 불가의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능력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멋지게 초과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만큼은 그 대체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 P139

인간은 살아 있는 내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한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마치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 꿈속에서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음‘과 더불어 놀라운 사유를 창조해내고, ‘말할 수 없음‘과 더불어 언어 너머 심연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조그만 육체 안에는 이처럼 엄청난 말이 존재한다. 우리가 실제로 감지하는 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말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P139

작가는 이처럼 기능적인 것으로 퇴화한 언어를 붙잡고 그로부터 진리를 발견하려는 자이다. - P139

"커다란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 - P139

말을 그 원천으로부터 새롭게 퍼 올리는 작업은 유혹적이지만, 시인은 말과 더불어 자기 안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 P139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 P140

시를 쓴다는 것은 심연을 열어젖히는 행위인 동시에 심연을 메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같은 유혹과 불안 사이에서 고통스러울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느 정도는 언어를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가와 달리 시인은 언어를 결코 수단화하지 않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저 유혹과 불안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자이다. - P140

인간에 대한 탐색은 언어에 대한 탐색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지어주는 유일한 종차가 바로 언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모든 특징들이 이 언어에서 파생된다. - P142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고통 - P142

이미지 없는 관념의 세계는 온전히 말로만 이루어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 P142

이미지와 소리를 상실한 남자와 여자는 암흑과 침묵 속에서 언어 그 자체와 투명하게 대면한다. 이들이 지닌 언어는 각각 한 가지의 물질성을 상실했다는 한계로 인하여 오히려 더 순수한 것으로 거듭난다. - P142

언어를 통해 다양한 감각을 재현하는 것만을 가리켜 시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라면 그것은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해야한다. - P143

소설을 읽는 우리라면 고통의 원인에 관심이 많겠지만 시를 읽는 우리는 고통이 드러나는 양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P143

각자 지니고 있는 영혼의 순도나 크기와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부서짐을 어떤 형태로든 겪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혼의 부서짐에 대해 애초에 둔감하거나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한다. 아마도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 일것이다. 영혼의 부서짐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 P144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마치 밥 먹듯 반복된다는 사실 - P145

영혼의 부서짐에 대한 분명한 실감은 깨어 있는 영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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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멸종 - 거꾸로 읽는 유쾌한 지구의 역사
이정모 지음 / 다산북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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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난해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지구과학, 생명과학 분야와 관련된 내용들을 비전공자들도 이해하기 쉽게 저자께서 써주셔서 읽는 것이 크게 부담스럽진 않았다. 하지만 다루는 내용 자체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또한 인간의 관점이 아닌 각 시대에 살았던 생명체들의 관점으로 글이 쓰여있기에 그들의 관점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도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고, 이 책을 통해 지구의 자연환경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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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무성생식과 유성생식에 대한 얘기를 했었다. 유성생식은 무성생식에 비해 회복탄력성이 높고 다양성을 키울 수 있다는 장점 덕분에 진화 과정에서 자연선택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만들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단점도 함께 가지고 있다.

오늘 시작하는 부분에서는 유성생식의 단점인 비용이 많이 든다는 점에 착안하여 다세포 생물이 취하는 행동 전략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핵심만 간략히 적어보자면 짝을 찾을 때 세포로 이루어진 개체 전체가 움직일 경우 에너지 소모가 많기에 일부 세포들만 선별하여 그들만 짝을 찾아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자원이 한정된 기업에서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시장에 침투하려는 마케팅 전략과도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뒤이어지는 글에서는 유성생식의 근본인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것이 왜 진화적으로 가장 바람직한지에 대한 이유가 나와있는데, 이를 통해 동성애보다는 이성애가 왜 좀 더 일반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성적 취향의 문제로 접근하기보다는 생물학적으로 가장 바람직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 근래에 이와 관련한 이슈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생물학적으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게 사회전체적으로도 좋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조심스레 해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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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바이러스에 대한 얘기가 잠깐 소개되는데, 본문을 통해 바이러스라는 것의 속성에 대해 좀 더 잘 알게 되었다.

저자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유명한 문구에 빗대어 ‘바이러스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기억에 남을 만한 명언을 남기는데, 이것은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이 말은 너무나도 미미한 나머지 생명 활동을 못 하는 바이러스의 특성에 기초해서 나온 말이다. 생명 활동을 못한다는 것은 생명이 없다는 것이고 생명이 없으니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본문에 따르면 바이러스는 단지 식물과 동물에 얹혀 있을 때만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기에 이러한 것들에 기생하지 못할 경우 우리에게 보이지 않고 사라지는 것이다.

위 문구의 의미를 내가 이해한 대로 정리해서 쓰다보니 다시금 저자가 쓴 위의 문구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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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서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비관적으로만 볼 이유가 없음을 느끼게 하는 내용들이 나온다. 본문에 직접 나온 표현은 아니지만,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는 말처럼 세포가 노화되고 기능이 떨어지면 그것을 고쳐쓰기보다는 새롭게 갈아끼우는 것이 개체의 기능을 유지하는데 훨씬 더 유리하다. 본문에서는 이것을 ‘세포의 자멸‘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개체의 발달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게 본문의 핵심 내용이다.

무언가를 비워내야 새로운 것이 들어올 수 있듯이, 개체 내에 속해있는 세포들뿐만 아니라 어떤 기계 속에 있는 부속품들도 마모가 되고 노후화되면 갈아끼우는 건 인지상정이다. 물론 기계는 무생물이고, 살아있는 개체는 생물이기에 좀 다르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만, 그 이면에 있는 근본 바탕은 동일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내용이 나오는 챕터의 마지막 부분에서 저자가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덤블도어 교장선생님의 말씀을 인용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이 말이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조금이나마 걷어내는데 한 몫했다. 하단에 밑줄도 치긴 했지만 다시 한 번 써본다.

˝죽음이란 또 하나의 위대한 모험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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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도달했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저자가 달과 바다를 의인화하여 둘이 대화를 나누면서 지구의 역사를 간단히 되짚어보고 향후 지구의 미래를 인간들에게 당부하는 내용이 나온다. 중간중간 지구과학과 관련된 상식들을 다시 확인해볼 수 있었고, 마지막 대화에선 우리 인간이 지구의 상속인이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지구를 잘 부탁한다는 당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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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완독할 때마다 언제나 시원섭섭함이 느껴진다. 다 읽었다는 후련함과 함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책에서 만났던 이야기들과 이제 작별을 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시 읽는 방법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한 번 읽을 때 꼼꼼하게 읽는 편이라 가끔 생각날 때 밑줄쳤던 문장들을 다시 읽어볼 수는 있겠으나 완독한 책의 경우 일단 한동안은 잠시 잊고 지내는 편이다.

어쨌든 이 책을 읽는 시간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게 해준 저자께 감사드린다. 일반적으로 딱딱하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 지구과학 분야를 좀 더 흥미롭게 접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이 책을 완독한 것을 계기로 이 쪽 분야에도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질 수 있게 된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든다.

눈에 보이는 커다란 생명체가 아니라 단순한 다세포 생물도 마찬가지다. 나름대로 커다란 다세포 생물이 다니면서 짝을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략을 세웠다. 전체 개체가 짝을 만나러 헤매기보다는 단세포로 된 대표선수를 보내어 이들이 짝짓기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배우체다. 영화배우映畵俳優 의 그 배우가 아니라 배우자配偶者의 배우다. 쉽게 말하면 짝 세포다. - P317

초기 진핵생물은 다양한 배우체를 발명했다. 하지만 자연은 가장 효율적인 배우체를 만들어낸 생명을 선택했다. 그게 바로 정자와 난자다. - P318

왜 정자와 난자 짝으로 만나야 할까? 정자-정자, 난자-난자 쌍은 왜 안 될까? 우선 수컷과 암컷을 정의해야 한다. 정자를 만들면 수컷, 난자를 만들면 암컷이다. 배우체 중 작아서 운동성은 있지만 영양분은 난자를 만나러 가는 데 필요한 만큼만 있는 것을 정자라고 한다. 반대로 덩치가 커서 운동성은 없지만 수정 후 개체로 성장할 만큼 충분한 영양분이 있는 것을 난자라고 한다. - P318

정자-정자 조합은 둘 다 운동성이 좋아서 수정될 확률은 높지만 개체로 성장할 양분이 없다. 난자-난자 조합은 영양분은 충분하지만 운동성이 없으니 수정될 확률이 낮다. 그래서 운동성 있는 배우체와 영양분이 충분한 배우체의 짝, 바로 정자-난자가 최선의 조합이다. - P318

정자와 난자를 만드는 과정도 복잡하다. 자기 유전자를 반만 자손에게 넘겨주어야 하므로 감수분열이라고 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때 유전자들이 서로 꼬이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 유전자가 뒤섞이면서 새로운 유전자 조합이 만들어진다. - P318

개체군 안에서 유전적 다양성이 증가하는 것은 종의 존속에 매우 중요하다. 질병이나 환경 스트레스에 대한 회복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모든 개체가 유전적으로 똑같다면 단일병원체나 환경 변화로 개체군이 전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다양한 자손이 있으면 이런 위험에서 비켜나는 개체가 있기 마련이다. - P318

유전적 변이가 반복되고 누적되면 어느 순간 같은 종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의 변이가 커진다. 즉 조상들과는 다른 새로운 생명이 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진화라고 부른다. 즉 섹스를 통해 다양한 생명이 지구에 탄생할 단초가 마련된 것이다. 섹스가 없다면 진화도 없고 생명의 다양성도 없다. - P319

바이러스는 ‘살았다‘ 또는 ‘죽었다‘라고 표현하기 어려운 존재다. 왜냐하면 딱히 생명이라고 말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는 전자현미경으로 보면 아름답게 보이고 단백질 껍질 안에 DNA 또는 RNA로 된 유전자도 들어 있지만 스스로 생명 현상을 유지하지 못한다. 바이러스는 식물과 동물에 얹혀 있을 때만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 P319

바이러스는 왜 스스로 생명 현상을 유지하지 못할까? 작기 때문이다. 세균이 동물의 몸에서 병을 일으키려면 동물 세포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니 한참 작아야 한다. 대략 세균은 동물 세포의 100만분의 1정도 크기다. 그런데 세균은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바이러스는 세균보다도 한참 작다는 말이다. - P320

얼마나 작을까? 한 변의 길이가 1센티미터인 주사위 옆에 볼펜으로 점을 하나 찍어보자. 이때 주사위가 소금 알갱이 한 알이라고 한다면 볼펜 점이 동물 세포인 셈이다. 그러니 바이러스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 P320

너무 작아서 생명 활동을 할 수 없다. 생명 활동을 못 하니 생명이 아니다. 생명이 없으니 죽을 수도 없다. 그게 바로 바이러스다. 바이러스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무한히 자기 복제를 하는 세균과 고세균도 마찬가지다. 죽을 틈이 없다. 언제나 사본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수명이 없으니 죽을 수는 없다. 다만 파괴되고 사라질 뿐이다. - P321

지구 생명체의 장대한 연극에서 죽음은 별 볼 일 없는 조연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죽음은 생명의 진화와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주연이다. - P321

최초의 죽음은 개체의 죽음이 아니라 세포의 자멸自滅, apoptosis이었다. 그리스어 ‘apo-‘는 영어의 ‘from‘에 해당하고 ‘ptosis‘는 ‘떨어진다‘는 뜻이다. 즉 자멸이란 스스로 떨어져 나간다는 뜻이다. 개체 안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가는 게 바로 세포의 자멸이다. - P322

자멸은 부상이나 질병 때문에 우발적으로 일어나는 사멸과는 다르다. 정교한 통제 속에서 스스로 죽는 것이다. - P322

미토콘드리아 기능장애가 발생하면 그 현상을 알려주는 신호 물질이 미토콘드리아에서 생기고 이것이 세포 표면에 있는 수용체와 결합한다. 그렇게 되면 세포도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포는 그때부터 세포 수축, 염색체 수축, DNA 단편화 같은 생화학 반응을 연쇄적으로 일으킨다. 결국 세포는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 파괴된 세포는 청소부 역할을 하는 식세포에 의해 완전히 제거된다. 즉 어떤 세포가 사멸할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은 미토콘드리아라는 말이다. - P322

굳이 왜 나(미토콘드리아)는 세포 자멸이라는 과정을 발명했을까? 다세포 생물을 구성하는 어떤 세포가 망가졌다고 하자. 어떻게 하는게 좋을까? 고쳐 쓰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때로는 고쳐 쓰는 대신 그냥 제거해 버리는 편이 훨씬 편리하고 효율적일 수도 있다. 밭에서 고추를 키우는 데 아픈 개체가 있으면 고치는 것보다 그걸 뽑아 버리는게 훨씬 효율적인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야 밭에 있는 다른 개체에 주는 나쁜 영향을 차단할 수 있다. - P322

세포 자멸은 손상되거나 오작동하는 세포를 스스로 제거해서 생명체의 건강과 기능을 보장하는 과정이다. - P322

세포 자멸은 개체의 발달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수정란이 배아가 되어 발달할 때 세포 자멸은 조직과 기관을 형성시킨다. 예를 들어 초기 배아의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는 세포들이 채워져 있다. 그 세포들이 자멸해서 손가락과 발가락이 마치 조각되듯이 형성된다. 오래되거나 손상되어 기능 장애가 있는 세포를 제거해 조직의 건강과 기능을 유지한다. 또 세포 수가 지나치게 늘어서 과도하게 성장하는 것을 막으며 잠재적인 암을 예방한다. 면역체계는 세포 자멸을 통해 감염되거나 비정상적인 세포를 파괴해 질병으로부터 생명체를 보호한다. 세포 자멸은 개체를 유지하는 결정적인 과정이다. - P323

세포 자멸이 확장되면 개체의 죽음이 된다. - P323

자연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 P323

도대체 개체의 죽음에는 어떤 이점이 있을까? 죽음이라는 능력은 생명 다양성과 적응력의 원동력이다. 무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생명체의 다양성은 자기 복제 과정에서 발생하는 돌연변이의 결과로 한정되지만 유성생식으로 번식하는 생명체는 정자와 난자가 만나는 과정에서 독특한 유전적 조합을 가진 자손이 등장한다. - P323

죽음이 삶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면 자연선택은 개체군에 더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자연선택이란 무엇인가? 유리한 형질이 있는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에 유리해져 후대에 자신의 형질을 물려줄 가능성이 높아지고, 환경에 적합하지 않은 형질은 유전자 풀pool에서 제거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전제가 없으면 자연선택은 있을 수 없고, 진화도 불가능하다. - P323

죽음은 단순한 종말이 아니라 발달, 유지, 적응을 촉진하는역동적인 과정이다. 정교하게 프로그램된 세포의 자멸은 세포의 생명 주기를 조절하며, 보다 넓은 개념의 죽음은 유전자 변이와 자연선택에 의한 생명의 영속과 생태계의 다양성을 보장한다. 따라서 죽음이라는 생명의 능력은 지구 생명체의 복잡성과 회복력의 원천이다. - P324

세포 안의 작은 기관인 미토콘드리아는 자연사에서 엄청난 사건을 일으켰다. 최초로 성공적 공생을 이뤄냄으로써 지구에 에너지 효율을 높인 생명체를 등장시켰으며, 세포들이 협력해 하나의 개체를 이루는 다세포 생명을 발명했고, 개체가 조직과 기관을 갖추게 했으며, 섹스를 발명해 생명의 회복탄력성과 진화의 기회를 획기적으로 높였다. - P324

미토콘드리아의 역할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을 포함한 진핵생물의 건강과 기능에 여전히 필수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세포 안에서 에너지를 만드는 발전소 역할을 한다. 근육, 심장, 뇌처럼 에너지 수요가 많은 조직의 기능에 특히 중요하다. 미토콘드리아의 영향력은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 건강과 수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미토콘드리아는 에너지 생산, 물질대사, 세포 조절에 있어서 근본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 P325

미토콘드리아는 고유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미토콘드리아는 난자를 통해서만 후손에게 전달된다 ...(중략)... 즉 후손은 수컷보다 암컷에게서 더 많은 유전자를 받는다 - P325

미토콘드리아는 생명의 세계에 많은 선물을 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선물은 죽음이다. 미토콘드리아는 스스로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인식하며 세포의 자멸을 이끌고 개체의 노화를 유도한다. 나이가 들수록 미토콘드리아의 기능이 감소해 노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미토콘드리아의 기능 장애는 알츠하이머병, 파킨슨병, 심혈관 질환으로 이어진다. 결국 미토콘드리아는 개체의 죽음을 이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의 사멸을 이끌어 개체의 건강을 유지하고, 개체의 죽음을 이끌어 개체군의 건강을 지키는 것이다. - P325

"죽음이란 또 하나의 위대한 모험이란다." - P326

죽음은 언제나 또 다른 생명의 탄생을 불러온다. 죽음이 있기에 생명도 있다. - P326

"내가 네 아빠다 (I am your Father)!" - P326

달 : 초기 지구 가이아Gaia가 원시 행성 테이아Theia와 충돌한 후 지구와 함께 탄생한 천체다. 자세가 안정되어 있고 차분한 성격이다. 지구의 자전축 기울기를 결정하고 지구 기후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달의 중력은 지구 바다에 밀물과 썰물을 일으켜 생물이 살아갈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고 진화를 지원한다. - P328

바다 : 지구 표면의 대부분을 덮고 있는 광대한 수역으로 주로 혜성과 소행성이 가져다준 선물이다. 열수분출구 환경에서 생명을 탄생시켰으며 진화의 본고장이었다. 현재도 지구 생명의 원천이다. 달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면서 생명이 번성할 수 있는 안정적이고 역동적인 다양한 환경을 제공한다. - P328

달의 중력은 바다에서 생명이 탄생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P332

밀물과 썰물은 에너지와 영양분을 분배해서 생명이 시작되는 데 필요한 조건을 만들었어. - P332

혜성과 화산 폭발도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어. 물과 광물을 가져왔고 생명체가 출현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었으니까. 그 무대가 바로 자네, 바다지. - P333

달의 존재는 바다만큼이나 중요했어. 우리는 함께 생명으로 가득한 행성을 위한 토대를 만든 거야. - P333

열수분출구는 열과 미네랄이 풍부해서 유기 분자 합성을 위한 완벽한 공장이야. 여기가 초기 생명의 요람이 되었지. - P333

열수분출구 주변은 극한의 조건이잖아. 깊은 바다니 수압이 매우 높을 테고 수압이 높으면 끓는점도 당연히 높아져서 아주 뜨거운 액체에서 온갖 화학작용이 일어났을 거야. 그러다가 생명체들이 만들어졌겠지. 그러고 보면 심해야말로 진정한 생명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을것 같아. - P333

열수분출구 : 해저의 화산 활동으로 생긴 구멍으로, 300도 정도의 뜨거운 물과 검은 연기를 뿜어낸다. - P334

자네(달)의 중력은 물을 섞어 영양분을 분해하고 다양한 서식지를 만들었어. 조석의 혼합은 생명체 증식에 필수적이었지. 그게 다가 아니야. 자네의 영향력은 지구 자전을 안정화시켰어. 낮과 밤의 주기가 일정해졌지. 지구 운동이 안정되니까 최초 생명체들이 생체 리듬을 발달시킬 수 있게 되었어. - P335

시아노박테리아의 화석인 스트로마톨라이트. 지구상에 출현한 최초의 생명 가운데 하나로, 산소를 생산해 지구 환경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 P337

에너지 효율이 높아지면 더 복잡한 생명체가 등장하더라고. - P338

지구의 대기에 산소가 생기면서 오존층이 만들어지더라고. 오존층은 자외선을 많이 차단해. 드디어 육지도 잘하면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지. - P339

시아노박테리아는 실제로 바다와 대기를 변화시켰어. 생명이 살 수 있는 곳을 늘리고 생명이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줬지. 진화를 위한 넓은 길을 열어준 거야. 한낱 세균이라고 우습게 보면 안 되지. - P340

바다가 물만 있다고 생명의 요람이 되는 것은 아냐. 여기에는 많은 물질이 녹아 있어야지.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산소라고 봐. - P341

바다의 산소화는 새로운 생태적 틈새를 만들어서 생물의 다양성을 촉진했어. 결국 캄브리아기 대폭발로 이어졌지. - P342

산소는 호흡에 꼭 필요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독이거든. 쇠에 산소가 결합하면 빨갛게 녹스는 것과 마찬가지지. 산소는 영양분을 태울 때 필요한거지, 아무 데나 침투하면 생명은 파괴될 수밖에 없어. - P342

처음 만들어졌을 때 붉은색이었던 지구는 산소와 생명체의 활동 때문에 점차 푸른색을 띠게 되었다. - P342

산소 농도가 높아질수록 더 튼튼하고 안전한 구조를 만들면서 산소의 독성에서 자신을 보호하고 동시에 산소호흡을 해서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방향으로 진화가 일어난 거지. - P343

한 방울의 비에도 자연의 영광이 담겨 있습니다. - P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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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책 제목이《여수의 사랑》이라 그런지 초반부에 여수 앞바다의 풍경을 묘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비바람이 치는 날씨 탓인지 ‘울부짖는다‘, ‘빗물이 눈물처럼 내린다‘, ‘가슴이 찢어진다‘, ‘고통을 인내한다‘ 등의 표현들을 연이어 접하게 된다. 뒤에 나올 내용을 아직 알 순 없지만 이런 표현들이 무언가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어느정도 대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좀 더 읽다보니 등장인물의 이름이 나온다. ‘정선‘과 ‘자흔‘이라는 이름을 가진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진다.

독자인 내가 예상했던 것 느낌이 어느정도 들어맞는 것 같다. ‘정선‘이 어떤 것이 계기가 되어 갑자기 욕지기가 올라오고 끝내는 구토를 하기 시작한다. 뭔가 역한 느낌이 있는 것인데.. 아직 읽지 않은 이야기 속에 숨겨진 그 이유들이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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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나온 ‘어둠의 사육제‘ 라는 이야기에선 영진, 인숙, 강명환 이렇게 세 사람이 주요 인물이다. 이 중에서도 전체적인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핵심 인물은 영진인데, 여기서 자세한 스토리를 일일이 다 말하긴 힘들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던 영진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던 일말의 희망이 산산조각 나버리는 뼈아픈 경험을 한다.

한편 강명환이라는 인물도 비운의 인물로 나오는데, 결혼 후 아내의 임신 5개월 차에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아내와 뱃속의 태아를 잃어버리고 자신의 한 쪽 다리를 심하게 다치게 되는 비극을 경험한다. 강명환 부부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린 사람은 나름 돈이 좀 있는 사람이었기에 강명환에게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하고 사건이 일단락되는 것으로 보였는데, 강명환은 그 받은 보상금으로 자신을 들이받은 사람이 사는 곳에 집을 얻어서 그들에게 자신의 울분을 표출하기에 이른다. 이에 강명환에게 가해를 입혔던 사람은 정신적인 고통을 호소하다가 결국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강명환은 이 사람들을 끝까지 좇아가서 그들을 계속 고통스럽게 만들 수도 있었으나 이내 그 마음을 접는다. 대신 자신이 지속적으로 관찰하면서 어려운 처지에 있다고 판단한 영진에게 자신의 집을 주겠다고 말한다. 이 제안을 받은 영진은 강명환의 기구한 스토리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을 거절한다. 하지만 강명환은 계속해서 영진에게 제안하는데, 그 과정에서 영진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이 복잡미묘하게 전개된다.


쓰다보니 본의아니게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읽으면서 등장인물들의 삶이 단순히 힘들다는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만큼 굉장히 고통스러웠겠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 소설 속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면 과연 삶을 지속해나가는 것이 가능하기는 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한 상황에 놓였을 때 마음을 웬만큼 단단히 먹지 않고서는 삶을 견뎌내기가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왜 그런 짓을 해요? - P12

손가락을 집어넣으면 멀쩡한 사람이라도 위경련을 해요. - P12

상관 말아요.
나는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더러워, 더러워서 견딜 수가 없다구요. - P12

......세상에 있는 모든 물은 바다로 흘러가고, 그 바다는 여수 앞바다하고 섞여 있어요. - P28

사랑이여, 그대는 내 영혼이 애타게 갈망하는 모든 것... _E. A. 포, 「하늘에 계신 그대에게」 - P33

난 어디에서든 머리만 바닥에 닿으면 잘 수 있어요. - P36

만일 그대가 나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그대를 사랑하오.
하지만 만일 그대가 날 사랑한다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달려와주오!
_가극 <카르멘> 중 「하바네라」 - P36

그제야 풀려있던 태엽이 감겼다는 듯이, 다 떨어진 배터리에 충전이 시작되었다는 듯이, - P37

젊다고 몸 함부로 굴리면 그 스트레스 어느 날 한꺼번에 터진다구. - P38

사람이 좀 허투루 살아봐,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면서...... - P39

자흔의 얼굴은 어느 사이엔가 의식을 비집고 돌아와 눈앞의 어둠 속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무엇인가를 안타까워하는 것 같은, 그러나 그 안타까움을 발설할 수 없음을 괴로워하는 것 같은 눈길로 그녀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뭐가 그렇게 두려워요? - P39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스쳐 가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의 지치고 외로운 얼굴에 여수(麗水) 아닌 여수(旅愁)가 어두운 그림자를 끌고 지나가는 것을 나는 보았다. - P42

・・・・・・어느 곳 하나 고향이 아니었어요. 모든 도시가 곧 떠나야 할 낯선 곳이었어요.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죠. 여수에 가보기 전까지는 그랬어요. 하루하루가 지옥이었어요. - P44

죽는 게 무섭지 않다는 걸 그때 난 처음 알았어요. 별게 아니었어요. 저 정다운 하늘, 바람, 땅, 물과 섞이면 그만이었어요. ・・・・・・ 이 거추장스러운 몸만 벗으면 나는 더 이상 외로울 필요가 없겠지요, 더 이상 나일 필요도 없으니까요...... 내 외로운 운명이 그렇게 찬란하게 끝날 거라는 것이 얼마나 기뻤는지, 얼마나 큰 소리로 그 기쁨을 외치고 싶었는지, 난 그때 갯바닥을 뒹굴면서 마구 몸에 상처를 냈어요. 더운 피를 흘려 개펄에 섞고 싶었어요. 나를 낳은 땅의 흙이 내 상처 난 혈관 속으로 스며들어오게 하고 싶었어요.…………… - P57

......그러니까 어디로 가든, 난 그곳으로 가는 거예요...... - P57

......저것 혼자서 살아난 것이 정말로 다행한 일인가 모르겄네. - P59

모두가 통화 중이었고, 모두가 자리를 비웠고, 모두가 바빴다. - P61

사는 곳과 옷차림이 남루했지만 나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비록 눈밭에서 잠들었을지라도 잠결에 흐트러진 의식 속에서는 뜨뜻한 이부자리 속에 누워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희망이어서, 그 솜털 같은 꿈에서 깨어날 때마다 나는 뒤끝이 쓴 행복감에 깔깔한 입맛을 다시곤 했다. - P76

"억울하면 출세해야지?" - P80

"넌 언제나 좋은 것만 생각하지? 좋은 방향만, 아주 잘되어나갈 것들만 말이야. 하지만 난 달라, 난 언제나 나쁜 쪽만 생각해. 내 인생도!" - P81

"언제나 나쁜 쪽으로만 흘러왔으니까." - P82

인숙언니가 빼간 전세금은 지난 사년간 내가 키워온 희망이었다. 내 대학이었고, 장래였고, 젊음의 담보였다. 그것은 내 인생 전부였다. - P86

내 모든 것을 끝장나게 만들어놓았으니, 인숙언니의 인생도끝장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인숙언니와 함께 보낸 몇 달이모조리 배신을 위한 준비였다고 생각하면 더욱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한 인간에게 살의를 느꼈다. - P87

악하게 살아남아야 한다. - P90

얼마나 세상에 밟히고 뒤둥그러지면 저렇게 되는 것일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동물적인 분노와 보복을, 번들거리는 눈과 기차 화통 같은 목소리를, 그 이상 철면피할 수 없을 되바라진 억양을 묵묵히 관찰하며 나는 연민이나 환멸이라고만은 설명하기 힘든 야릇한 슬픔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 P92

몸속의 혈관들은 모두 가문 저수지처럼 말라붙어 있었다. - P92

미술과 학생들이 석고 데생을 하다가 흰빛에 시력을 잃는 것처럼, 어둠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나는 차츰 어둠 속의 사물들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 P94

천덕스러운 목소리로 웃어댔으며, 못 말릴 만큼 철없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박힐 때까지 태연을 가장했다. 그래야만 그곳에서 버텨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차츰 식구들은 내가 으레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직장의 동료들도 나에게 무척 변했다고 말했으나, 그 변한 모습이 오히려 상대하기에 편한 듯한 기색이었다. - P95

거실과 통하는 미닫이문을 닫고 밤 불빛 앞에 서는 것과 동시에 내가 하루 동안 가장했던 모든 천연스러움과 빈정거림은 흔적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 P96

세상 속에 있을 때에 나는 외로웠고 세상에서 돌아와 서면 더욱 그러했다. - P96

밤이 늦어 고개가 앞으로 고꾸라질 만큼 졸음이 밀려오면 스탠드를 꼈다. - P97

마지막이다.
나는 생각했다. 이 승강기를 타고 오르는 것도 마지막이다. - P98

정을 준다는 것도 정을 받는다는 것도 모두 어리석은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P99

You are like a flower that grows in the shade; the gentle breeze comes and bears your seed into the sunlight, where you will live again in beauty.

_K, Gibran, "Of the Martyrs to Man‘s Law"

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네 씨앗을 햇빛 속으로 나를 것이니, 너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다. - P100

마지막이라는 말은 이 집의 많은 것을 마음 편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것들을 그토록 괴로워했을까. 나는 자신의 약한 마음을 들여다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 P112

여기 사람이 살고 있어, 나 여기 숨 쉬고 있어, ・・・・・・ 여기도, 여기에도, 나도 여기서 밥 먹고 잠자며 살아가고 있어, 나도, 나도......
수천수만의 몸짓이 그 숫자만큼의 불빛으로 이슬처럼 맺혀있었다. - P115

서울에 올라와서 보낸 사 년 동안 나는 내 힘으로 산 것이 아니라 희망의 힘으로 살아왔었다. 나는 무엇이든 견디어낼수 있었다. 비록 지금은 미운 오리 새끼처럼 세상의 구석에 틀어박혀 원치 않는 일에 시달리고 있지만, 언젠가 진짜 삶이 시작되고 말 것이라고 주문처럼 믿어오고 있었다. - P115

나는 삶과 화해하는 법을 잊은 것이었다. 삶이 나에게 등을 돌리자마자 나 역시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잘 벼린 오기 하나만을 단도처럼 가슴에 보듬은 채, 되려 제 칼날에 속살을 베이며 피 흘리고 있었다. - P115

멍울이 맺혀 있던 그 자리에 모호한 미련들이 뒤이어 자리 잡기 시작했다. 눈도 없고 코도 없는 그 멍청스러운 미련이란 결국 내가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 아무것도 끝나지도 시작되지도 않았으며, 모든 것을 잊고 다시 시작한다기보다는 지금 이대로의 상태로라도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분명한 용기였다. - P116

"저 수많은 불 켜진 창들 속에, 내가 그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은 없다는 생각, 그런 거요?" - P116

"나는 그 반대요. 밤늦게까지 저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저곳 어디에건 나는 들어갈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든다오." - P116

몹시 앓고 난 사람이 힘없이 내뱉는 몇 마디 안부 인사에 무거운 그리움이 깃들어 있듯이, 명환의 낮은 음성에는 내가 미처 상상해보지 못했던 쓸쓸함과 안타까움이 깃들어 있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저 야경뿐이라는 거요......" - P117

"살고 싶었어." - P119

".......나는 쓸 만한 월급쟁이였소. 죽음은 나를 다 먹어치우지는 못했지." - P121

넌 여전히 바보로구나. - P122

"나 혼자 걸어보았던 싸움은 나 혼자 싱겁게 이겨버리고 말았소. ...... 그런데 이상하지, 그 식구들이 떠나니까 난 혼자가 되어버렸소." - P123

"....아직도 사람이 선해가지고 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있나?" - P124

어둠은 항암제 부작용으로 뽑혀 나간 인숙언니의 치렁치렁한 머리채 같았으며, 뱃속에 명환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는 얼굴 모를 여인의 하혈(下血) 같았다. - P125

어깨를 웅크리고 앉아 있던 나는 깨달았다.
그는 죽으려 하는 것이다.
집이 자신에게 필요 없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제의를 거절해온 바로 그 기간만큼 그의 죽음은 연기되어온 것이었다. - P126

내가 떠나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그때였다. 명환에게서 하루빨리 달아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의 어둠이 시시각각 점령해 들어오고 있는 베란다 방을 즉시 떠나야만 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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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5-09-13 22: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단편 몇 개 읽어서 이 책을 반은 읽은 것 같아요. 참 잘 썼다고 감탄했었죠.. 올해 안으로 완독 예정, 입니다. (이 페이퍼 보고 나서야 이 책이 생각났어요.ㅋㅋ)

즐라탄이즐라탄탄 2025-09-13 23:01   좋아요 1 | URL
아ㅋ 그러셨군요. 저는 한강 작가님 책을 이번에 읽기 시작했는데, 몇 권 골라서 처음 나오는 부분들만 잠깐 읽어봤는데도 뭔가 사용하시는 어휘나 표현이 좀 색다른 느낌을 받아서 이후에 어떤 내용들과 표현들이 나올지 기대가 되더라구요. 페크님도 남은 부분 잘 완독하시길 응원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몇 일전 읽기 시작한 동저자의《채식주의자》 와 오늘 읽기 시작한 이 책《작별하지 않는다》의 공통분모를 하나 꼽자면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내가 꾼 꿈이 나오고, 오늘 읽기 시작한《작별하지 않는다》에선 소설 속 1인칭 화자가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직접 말한다. 물론 두 소설 속 꿈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꿈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상상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밑줄친 짧막한 문장은 기존에 내가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신박한 표현이라고 느껴져서 밑줄쳐보았다. 관련 상황을 잠깐 언급하자면 무더운 여름날 해가 본격적으로 뜨기 전인 새벽 5시 경에 기온이 치솟기 전 약 1시간 정도를 저자가 표현한 것인데, 무더운 여름 그 시간에 일어나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 시간만큼 기온이 괜찮은 때가 없다. 가끔 새벽에 산책을 나가면 그 이른 시간에 산책하러 나오신 분들을 적지 않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기온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길거리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야외활동하기엔 너무 더우니까.

때마침 날씨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무더위와 기온 변화를 몸으로 경험했던 터라 ‘짧게 찾아오는 은총‘이라는 표현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뭐 요즘 날씨는 하루종일 은총 그 자체다. 물론 낮에 기온이 좀 올라가긴 해도 한여름만큼 더운 것은 아니고 전반적으로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딱 좋다.

어쨌든 독자인 나는 그 시간에 산책을 했으나 소설 속 화자는 그 은총(?)의 시간에 어떤 꿈을 꾼 듯하다.

본문에 나온 꿈 얘기를 살짝 해보자면, 눈이 내리는 어느 날 화자가 길을 걷는데 그저 넓은 벌판인줄로만 알았던 곳에 여러 개의 무덤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은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였다. 소설 속 화자가 잠시 밀물이 빠져나간 사이에 그곳이 바닷가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물이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다시 육지로 도망치는 그런 꿈(?)이었다.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된 화자는 안도하지만 꿈을 꾼 이후에도 그 꿈과 관련된 생각이 멈추질 않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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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니 맥락상 소설 속 화자가 저자 본인이라고 생각할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저자가 쓴《소년이 온다》라는 책은 5.18 광주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책과 관련된 언급이 본문에 나왔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이자 저자는 오늘 본문에 나온 꿈이 그 소설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 소설에만 국한해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하는 눈치다. 독자인 내 느낌상으로는 그 꿈에 대해 좀 더 확장시켜 생각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짧게 찾아오는 은총이었다. - P11

감은 눈꺼풀 속으로 별안간 그 벌판이 밀려 들어왔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 P11

그때 왜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눈물 같은 건 흐르지도, 고이지도 않았다. 그걸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불안이라고, 전율이라고, 돌연한 고통이라고?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 ㅡ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 없을 무거운 쇳날이ㅡ 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 P12

봉분 아래의 뼈들을 휩쓸어가기 위해 밀려들어오던 그 시퍼런 바다가,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 P12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 - P13

나는 무언가를 목격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날의 날씨를. 공기 중의 습도와 중력의 감각을. - P14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 P15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 P15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 P17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지 못했으며 악몽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 믿기지 않는 장면이 포착될 때, 아마도 그의 첫번째 반응은 자신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내가 정말 저것을 보고 있는가? 이 순간은 악몽의 일부가 아닌가? 나의 감각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 P20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ㅡ뻔뻔스럽게ㅡ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처음부터 다시 써.
그건 언제나 옳은 주문呪文이다. - P25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 P25

아직 무사해. - P26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 P26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 P27

내 이름만 먼저 부르는 것은 안부 인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한 용건이다. - P30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전기 장비를 쓸 땐 아무리 손이 시려도 목장갑을 끼면 안 되는데. 전적으로 내 실수야. - P38

거의 기적 같은 건 가깝게 지내던 아랫동네 할머니가 마침 제주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아들이 모시러 온 거야. - P39

이제부터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 P40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 P40

의료진은 내가 당연히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특히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니까. - P41

의사가 환지통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 P42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 P44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와 친구를 병문안하고 있는 이 순간이 기이하게 낯설고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 - P45

문자로 안부를 물으면 며칠 뒤에야 답이 왔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짧고 담담한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럼, 나야 똑같이 지내지. 너도 잘 지내. - P46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 P49

계속해봐야지, 일단은. - P51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 P51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 P51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 P51

옆눈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지금 한라산을 넘어가고 있나 짐작했을 뿐이야. - P56

까무러칠 것같이 아팠는데.
정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는데, 왜 그때 네 책 생각이 났는지 몰라.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 P57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 P57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 P59

앵무새가 사람의 발음뿐 아니라 음색까지 따라 할 수 있다 - P64

이들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사흘은 불가능해. 오늘 안에 가면 살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내일은 죽어, 반드시. - P66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육지 말과 다르게 활용되는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들이었다. 가끔 회화 연습도 했는데, 하다 - 핸 - 하멘 - 하잰으로 이어지는 시제 활용을 내가 틀릴 때마다 인선은 웃음 띤 얼굴로 교정해주었다.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 P73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 P75

그런데 그해엔 왜 그렇게 엄마가 미웠는지 몰라. - P76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 P84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 P86

명치에 걸려 그토록 이글이글 타던 불덩이가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 - P87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 P87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 P93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다녔다는 여자애가. - P95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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