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몇 일전 읽기 시작한 동저자의《채식주의자》 와 오늘 읽기 시작한 이 책《작별하지 않는다》의 공통분모를 하나 꼽자면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 듯하다. 《채식주의자》에서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아내가 꾼 꿈이 나오고, 오늘 읽기 시작한《작별하지 않는다》에선 소설 속 1인칭 화자가 자신이 꾼 꿈에 대해 직접 말한다. 물론 두 소설 속 꿈의 내용은 완전히 다르지만, 꿈이라는 소재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저자의 상상력이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밑줄친 짧막한 문장은 기존에 내가 많이 접해보지 못했던 신박한 표현이라고 느껴져서 밑줄쳐보았다. 관련 상황을 잠깐 언급하자면 무더운 여름날 해가 본격적으로 뜨기 전인 새벽 5시 경에 기온이 치솟기 전 약 1시간 정도를 저자가 표현한 것인데, 무더운 여름 그 시간에 일어나보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그 시간만큼 기온이 괜찮은 때가 없다. 가끔 새벽에 산책을 나가면 그 이른 시간에 산책하러 나오신 분들을 적지 않게 봤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시간이 지나면 기온이 급격히 치솟으면서 길거리에 사람이 잘 보이지 않는다. 야외활동하기엔 너무 더우니까.

때마침 날씨도 지금은 많이 괜찮아졌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위에서 언급한 무더위와 기온 변화를 몸으로 경험했던 터라 ‘짧게 찾아오는 은총‘이라는 표현이 좀 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뭐 요즘 날씨는 하루종일 은총 그 자체다. 물론 낮에 기온이 좀 올라가긴 해도 한여름만큼 더운 것은 아니고 전반적으로 너무 덥지도 너무 춥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냥 딱 좋다.

어쨌든 독자인 나는 그 시간에 산책을 했으나 소설 속 화자는 그 은총(?)의 시간에 어떤 꿈을 꾼 듯하다.

본문에 나온 꿈 얘기를 살짝 해보자면, 눈이 내리는 어느 날 화자가 길을 걷는데 그저 넓은 벌판인줄로만 알았던 곳에 여러 개의 무덤들이 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곳은 밀물이 들어오는 바닷가였다. 소설 속 화자가 잠시 밀물이 빠져나간 사이에 그곳이 바닷가인 줄 모르고 들어갔다가 물이 다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서 다시 육지로 도망치는 그런 꿈(?)이었다.

꿈이었다는 걸 알게 된 화자는 안도하지만 꿈을 꾼 이후에도 그 꿈과 관련된 생각이 멈추질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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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별도로 밑줄치진 않았지만 본문을 읽다보니 맥락상 소설 속 화자가 저자 본인이라고 생각할만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저자가 쓴《소년이 온다》라는 책은 5.18 광주에 대한 이야기인데, 그 책과 관련된 언급이 본문에 나왔기 때문이다. 소설 속 화자이자 저자는 오늘 본문에 나온 꿈이 그 소설과도 어느정도 연관이 있음을 고백한다. 다만 그 소설에만 국한해서 해석하는 것은 경계하는 눈치다. 독자인 내 느낌상으로는 그 꿈에 대해 좀 더 확장시켜 생각하길 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짧게 찾아오는 은총이었다. - P11

감은 눈꺼풀 속으로 별안간 그 벌판이 밀려 들어왔다.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 위로 흩어지던 눈발이, 잘린 우듬지마다 소금처럼 쌓여 빛나던 눈송이들이 생시처럼 생생했다. - P11

그때 왜 몸이 떨리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마치 울음을 터뜨리는 순간과 같은 떨림이었지만, 눈물 같은 건 흐르지도, 고이지도 않았다. 그걸 공포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불안이라고, 전율이라고, 돌연한 고통이라고? 아니, 그건 이가 부딪히도록 차가운 각성 같은거였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칼이 ㅡ사람의 힘으로 들어올릴 수도 없을 무거운 쇳날이ㅡ 허공에 떠서 내 몸을 겨누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걸 마주 올려다보며 누워 있는 것 같았다. - P12

봉분 아래의 뼈들을 휩쓸어가기 위해 밀려들어오던 그 시퍼런 바다가, 학살당한 사람들과 그후의 시간에 대한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때 처음 생각했다. 다만 개인적인 예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물에 잠긴 무덤들과 침묵하는 묘비들로 이뤄진 그곳이 앞으로 남겨질 내 삶을 당겨 말해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바로 지금을. - P12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 - P13

나는 무언가를 목격하고 있다고 느꼈다.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날의 날씨를. 공기 중의 습도와 중력의 감각을. - P14

유리문 밖으로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육체가 깨어질 듯 연약해 보였다. 생명이 얼마나 약한 것인지 그때 실감했다. 저 살과 장기와 뼈와 목숨 들이 얼마나 쉽게 부서지고 끊어져버릴 가능성을 품고 있는지. 단 한 번의 선택으로. - P15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 P15

인생과 화해하지 않았지만 다시 살아야 했다. - P15

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 P17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 P17

오랫동안 깊은 잠을 자지 못했으며 악몽과 생시가 불분명하게 뒤섞인 시기를 통과하고 있는 사람에게 믿기지 않는 장면이 포착될 때, 아마도 그의 첫번째 반응은 자신에 대한 의심일 것이다. 내가 정말 저것을 보고 있는가? 이 순간은 악몽의 일부가 아닌가? 나의 감각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 P20

이제는 오히려 의아하게 생각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ㅡ뻔뻔스럽게ㅡ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P23

처음부터 다시 써.
그건 언제나 옳은 주문呪文이다. - P25

처음부터 다시 써.
진짜 작별인사를, 제대로, - P25

아직 무사해. - P26

그때 알았다.
파도가 휩쓸어가버린 저 아래의 뼈들을 등지고 가야 한다. 무릎까지 퍼렇게 차오른 물을 가르며 걸어서, 더 늦기 전에 능선으로. 아무것도 기다리지 말고, 누구의 도움도 믿지 말고, 망설이지 말고 등성이 끝까지. 거기, 가장 높은 곳에 박힌 나무들 위로 부스러지는 흰 결정들이 보일 때까지. - P26

시간이 없으니까.
단지 그것밖엔 길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계속하길 원한다면.
삶을. - P27

내 이름만 먼저 부르는 것은 안부 인사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급한 용건이다. - P30

자신의 삶을 스스로 바꿔나가는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쉽게 생각해내기 어려운 선택들을 척척 저지르고는 최선을 다해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이들. 그래서 나중에는 어떤 행로를 밟아간다 해도 더이상 주변에서 놀라게 되지 않는 사람들. - P33

전기 장비를 쓸 땐 아무리 손이 시려도 목장갑을 끼면 안 되는데. 전적으로 내 실수야. - P38

거의 기적 같은 건 가깝게 지내던 아랫동네 할머니가 마침 제주병원에 갈 일이 있어서 아들이 모시러 온 거야. - P39

이제부터 중요한 건 피가 멈추지 않게 하는 거야. - P40

봉합 부위에 딱지가 앉으면 안 된대. 계속 피가 흐르고 내가 통증을 느껴야 한대. 안 그러면 잘린 신경 위쪽이 죽어버린다고 했어. - P40

의료진은 내가 당연히 포기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특히 오른손 집게손가락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니까. - P41

의사가 환지통에 대해 말했을 것이다. 지금은 물론 손가락을 지키는 편의 통증이 더 강하지만, 손가락을 포기할 경우 통증은 손쓸 수 없이 평생 계속될 거라고. - P42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 P44

눈은 거의 언제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 속력 때문일까, 아름다움 때문일까? 영원처럼 느린 속력으로 눈송이들이 허공에서 떨어질 때,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이 갑자기 뚜렷하게 구별된다. 어떤 사실들은 무섭도록 분명해진다. 이를테면 고통. 유서를 완성하겠다는 모순된 의지로 지난 몇 달을 버텨왔다는 것. 자신의 삶이라는 지옥에서 잠시 빠져나와 친구를 병문안하고 있는 이 순간이 기이하게 낯설고 선명하게 느껴진다는 것. - P45

문자로 안부를 물으면 며칠 뒤에야 답이 왔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짧고 담담한 문장들을 읽을 때마다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럼, 나야 똑같이 지내지. 너도 잘 지내. - P46

좀전에 병원 로비에서 이미 깨닫지 않았던가, 제대로 들여다볼수록 더 고통스럽다는 걸? - P49

계속해봐야지, 일단은. - P51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게. - P51

시작하고 싶을 때 시작해. - P51

뭐, 일단 나는 계속하고 있을 테니까.
그 말이 주문처럼 나를 안심시키곤 했다. - P51

옆눈으로 끝없이 흘러가는 나무들을 보면서 지금 한라산을 넘어가고 있나 짐작했을 뿐이야. - P56

까무러칠 것같이 아팠는데.
정말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는데, 왜 그때 네 책 생각이 났는지 몰라.
거기 나오는 사람들, 아니, 그때 그곳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말이야.
아니, 그곳뿐만 아니라 그 비슷한 일이 일어났던 모든 곳에 있었던 사람들 말이야. - P57

총에 맞고,
몽둥이에 맞고,
칼에 베여 죽은 사람들 말이야.
얼마나 아팠을까?
손가락 두 개가 잘린 게 이만큼 아픈데.
그렇게 죽은 사람들 말이야. 목숨이 끊어질 정도로
몸 어딘가가 뚫리고 잘려나간 사람들 말이야. - P57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 새들이 수평선에 바싹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 P59

앵무새가 사람의 발음뿐 아니라 음색까지 따라 할 수 있다 - P64

이들은 어떻게든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사흘은 불가능해. 오늘 안에 가면 살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내일은 죽어, 반드시. - P66

가장 재미있었던 것은 육지 말과 다르게 활용되는 동사와 형용사의 어미들이었다. 가끔 회화 연습도 했는데, 하다 - 핸 - 하멘 - 하잰으로 이어지는 시제 활용을 내가 틀릴 때마다 인선은 웃음 띤 얼굴로 교정해주었다. 언젠가 그녀는 말했다.
바람이 센 곳이라 그렇대, 어미들이 이렇게 짧은 게. 바람소리가 말끝을 끊어가버리니까. - P73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 P75

그런데 그해엔 왜 그렇게 엄마가 미웠는지 몰라. - P76

그날 똑똑히 알았다는 거야. 죽으면 사람의 몸이 차가워진다는 걸. 맨뺨에 눈이 쌓이고 피 어린 살얼음이 낀다는 걸. - P84

내가,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힌디 너가 그날 밤 꿈에 그추룩 얼굴에 눈이 히영하게 묻엉으네..... 내가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이 애기가 죽었구나, 생각을 했주. 허이고, 나는 너가 죽은 줄만 알아그네. - P86

명치에 걸려 그토록 이글이글 타던 불덩이가 무엇을 향한 것이었는지. - P87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내가 직접 본 것도 아닌데,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 다녔다는 여자애가. 열일곱 살 먹은 언니가 어른인 줄 알고 그 소맷자락에,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하고 그 팔에 매달려 걸었다는 열세 살 아이가. - P87

하나의 눈송이가 태어나려면 극미세한 먼지나 재의 입자가 필요하다고 어린 시절 나는 읽었다. 구름은 물분자들로만 이뤄져 있지 않다고, 수증기를 타고 지상에서 올라온 먼지와 재의 입자들로 가득하다고 했다. 두 개의 물분자가 구름 속에서 결속해 눈의 첫 결정을 이룰 때, 그 먼지나 재의 입자가 눈송이의 핵이 된다. 분자식에 따라 여섯 개의 가지를 가진 결정은 낙하하며 만나는 다른 결정들과 계속해서 결속한다. 구름과 땅 사이의 거리가 무한하다면 눈송이의 크기도 무한해질 테지만, 낙하 시간은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한다. 수많은 결속으로 생겨난 가지들 사이의 텅 빈 공간때문에 눈송이는 가볍다. 그 공간으로 소리를 빨아들여 가두어서 실제로 주변을 고요하게 만든다. 가지들이 무한한 방향으로 빛을 반사하기 때문에 어떤 색도 지니지 않고 희게 보인다. - P93

이렇게 눈이 내리면 생각나. 그 학교 운동장을 저녁까지 헤매다녔다는 여자애가. - P95

눈만 오민 내가, 그 생각이 남져. 생각을 안 하젠 해도 자꾸만 생각이 남서.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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