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시에 나오는 문구들을 하나하나 곱씹어보며 그 의미를 음미할수록 시의 맛(?)을 좀 더 깊이 느낄 수 있는 듯하다. 아무래도 시의 특성상 소설이나 비문학 책에 나오는 것과 같은 긴 문장은 아니지만, 짧은 문장 속에 깊은 의미가 농축되어 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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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8부터는 이 책과 관련된 해설이 나온다. 해설자는 막스 피카르트의 철학 에세이《인간과 말》이라는 책의 내용에 근거하여 ‘인간과 말言‘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보탠다. 이러한 설명은 나 같은 일반인들이 쉽게 생각하기 힘든 인간과 말의 관계에 대한 좀 더 심오한 속성까지도 생각해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어지는 해설에서는 ‘인간과 말‘이라는 키워드에 기반하여 한강 작가의 소설 중《희랍어 시간》이라는 작품에 대한 얘기가 잠깐 나온다. 아무래도 이 소설과 오늘 읽고 있는 시집의 작가가 동일하다보니 감정선이라든지 말하고자하는 바가 공통되는 부분들이 없을 수가 없는데, 해설자께서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주셔서 나중에《희랍어 시간》을 읽을 때 좀 더 깊이있게 읽어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았다.

뒤이어서는 이 시집에 나왔던 시들 중 몇 가지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볼 수 있었다. 핵심 시구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좀 더 명료하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어떤 종류의 슬픔은 물기 없이 단단해서, 어떤 칼로도 연마되지 않는 원석(原石)과 같다. - P87

나는 손을 내밀지 않아
너도
손을 내미는 걸 싫어하지 - P93

이 도시의 고통이 가만히 앞질러 가면
나는 가만히 뒤처져 가고 - P95

파르스름한 불꽃심이 흔들리는 건 혼들이 오는 거라는데요 혼들이 내 눈에 앉아 흔들리는데요 흥얼거리는데요 멀리 너울거리는 겉불꽃은 더 멀어지려고 너울거리는데요 - P96

그러니까. 인생에는 어떤 의미도 없어
남은 건 빛을 던지는 것뿐이야 - P97

어떤 꿈은 양심처럼
무슨 숙제처럼
명치 끝에 걸려 있었다 - P97

숙제를 풀지 못하고 몇 해가 갔다 - P98

지금 나는
거울 저편의 정오로 문득 들어와
거울 밖 검푸른 자정을 기억하듯
그 꿈을 기억한다 - P99

태양보다 400배 작은 달이
태양보다 400배 지구에 가깝기 때문에
달의 원이
태양의 원과 정확하게 겹쳐지는 기적에 대하여 - P102

마주 보는 두 개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서로를 가리는 순간
완전하게 응시를 지우는 순간 - P103

시계를 다시 맞추지 않아도 된다.
시차는 열두 시간 - P104

사물이 떨어지는 선,
허공에서 지면으로
명료하게

한 점과
다른 점을 가장 빠르게 잇는

가혹하거나 잔인하게,
직선

깃털 달린 사물,
육각형의 눈송이
넓고 팔락거리는 무엇
이 아니라면 피할 수 없는 선 - P105

로카 : 남미 대륙 남부의 원주민들을 절멸시키고 아르헨티나를 건설한 군인. - P107

거울 이편과 반대편의 학살을 생각하는 나는

난자하는
죽음의 직선들을 생각하는 나는 - P106

단 한 군데에도 직선을 숨겨놓지 못한
사람의 몸의 부드러움과

꼭 한 번
완전하게 찾아올
중력의 직선을 생각하는 나는 - P106

나를 공격할 생각은 마 - P109

마주 볼 수 없는 걸 똑바로 쏘아볼 것
그러니까 태양 또는 죽음,
공포 또는 슬픔 - P111

비스듬한 행성의 축을 타고
그토록 멀리 미끄러져 내려왔으니
시선의 각도에 맞추어
달의 윗면이 오므라든 거라고 - P113

어린 고라니들이 나무 아래 비를 피해 노는 동안
조금 떨어져서 지켜보는 어미 고라니가 있었다
사람 엄마와 아이들이 꼭 그렇게 하듯이 - P115

가거라

망설이느냐
무엇을 꿈꾸며 서성이느냐 - P121

꽃처럼 불 밝힌 이층집들,
그 아래서 나는 고통을 배웠고
아직 닿아보지 못한 기쁨의 나라로
어리석게 손 내밀었다 - P121

가거라

무엇을 꿈꾸느냐 계속 걸어가거라 - P121

하늘은 어두웠고 그 어둠 속에서
텃새들은
제 몸무게를 떨치며 날아올랐다
저렇게 날기 위해 나는 몇 번을 죽어야 할까
누구도 손잡아줄 수는 없었다 - P122

무슨 꿈이 곱더냐
무슨 기억이
그리 찬란하더냐 - P122

어서 가거라 - P123

첫새벽에 바친다 내
정갈한 절망을,
방금 입술 연 읊조림을 - P124

아아 첫새벽,
밤새 씻기워 이제야 얼어붙은
늘 거기 눈뜬 슬픔,
슬픔에 바친다 내
생생한 혈관을, 고동 소리를 - P125

모든 것이 남은 천지에
남은 것은 없었던 그해 늦봄 - P127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 P131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 P132

무엇이 나를 걷게 했는가, 무엇이
내 발에 신을 신기고
등을 떠밀고
맥없이 엎어진 나를
일으켜 세웠는가 - P134

무엇이 내 속에 앓고 있는가, 무엇이 끝끝내
떠나지 않는가 내 몸은 - P134

살아라, 살아서
살아 있음을 말하라 - P135

작가란 누구인가. 일상적 소통을 위해서든 심오한 진리의 전달을 위해서든 모든 인간이 점차 기능적으로 완벽한 말만을 추구해갈 때, 말의 효용성에 무심한 채 그 효용성을 제외한 다른 모든 가능성을 탐색하는데 집중하고 있는 자가 바로 작가이다. - P138

될 수 있는 한 언어를 비효율적으로 다루려는 문학적 행위와 관련된 인간의 욕망은 결코 줄거나 퇴화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사실은 말과 관련된 인간의 능력과 욕망이 대체 불가의 것임을 확인시켜준다. 인간이 지닌 다양한 능력을 완벽하게 대체하고 그것을 멋지게 초과하는 다양한 매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능력만큼은 그 대체물을 찾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 P139

인간은 살아 있는 내내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말한다. 침묵하는 순간에도 자기 자신을 상대로 말하고 있으며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마치 무성영화처럼 펼쳐지는 꿈속에서 말하고 있다. ‘말할 수 있음‘과 더불어 놀라운 사유를 창조해내고, ‘말할 수 없음‘과 더불어 언어 너머 심연의 존재를 증명하기도 한다. 인간의 조그만 육체 안에는 이처럼 엄청난 말이 존재한다. 우리가 실제로 감지하는 말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말에 비하면 지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 P139

작가는 이처럼 기능적인 것으로 퇴화한 언어를 붙잡고 그로부터 진리를 발견하려는 자이다. - P139

"커다란 유혹이자 동시에 위험" - P139

말을 그 원천으로부터 새롭게 퍼 올리는 작업은 유혹적이지만, 시인은 말과 더불어 자기 안의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듯한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 P139

"시를 쓴다는 것은 자신 안의 심연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것이다.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심연을 잠재우고, 심연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 P140

시를 쓴다는 것은 심연을 열어젖히는 행위인 동시에 심연을 메우는 행위이기도 하다. 시인은 이 같은 유혹과 불안 사이에서 고통스러울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어느 정도는 언어를 기능적으로 활용하는 소설가와 달리 시인은 언어를 결코 수단화하지 않고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점에서 저 유혹과 불안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자이다. - P140

인간에 대한 탐색은 언어에 대한 탐색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지어주는 유일한 종차가 바로 언어라는 당연한 사실 때문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 모든 특징들이 이 언어에서 파생된다. - P142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고통 - P142

이미지 없는 관념의 세계는 온전히 말로만 이루어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 P142

이미지와 소리를 상실한 남자와 여자는 암흑과 침묵 속에서 언어 그 자체와 투명하게 대면한다. 이들이 지닌 언어는 각각 한 가지의 물질성을 상실했다는 한계로 인하여 오히려 더 순수한 것으로 거듭난다. - P142

언어를 통해 다양한 감각을 재현하는 것만을 가리켜 시적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강의 소설이 시적이라면 그것은 말과 동거하는 인간의 슬픔과 고통을 근본적인 차원에서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해야한다. - P143

소설을 읽는 우리라면 고통의 원인에 관심이 많겠지만 시를 읽는 우리는 고통이 드러나는 양상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 P143

각자 지니고 있는 영혼의 순도나 크기와 무관하게 인간은 누구나 영혼의 부서짐을 어떤 형태로든 겪는다. 대부분의 사람은 영혼의 부서짐에 대해 애초에 둔감하거나 그것을 애써 모른 척한다. 아마도 평범하고 건강한 삶을 위해서 일것이다. 영혼의 부서짐을 예민하게 감지하는 일도, 그리고 그 이후의 삶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일도 쉽지는 않다. - P144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실감이 마치 밥 먹듯 반복된다는 사실 - P145

영혼의 부서짐에 대한 분명한 실감은 깨어 있는 영혼에 대한 증거이기도 하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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