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어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알고 있듯이 저자는 대한민국 엔터계의 한 획을 그은 인물이고, 최근에는 새로 들어선 정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다는 기사를 보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예전에 TV나 유튜브 등을 통해 저자의 인터뷰 또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같은 것들도 봤던 기억이 있다. 책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저자의 답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증을 가지고 시작해본다.




왜 태어난지도 모른 채 태어나,
왜 사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죽어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 채 죽기 때문이다. - P8

가장 중요한 건 진실을 ‘아는 것‘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답을 알려고 하지 않고, 무언가를 ‘하려고‘ 한다. 친구를 만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재미있는 일을 하거나, 불우이웃을 돕거나, 종교 행위를 하면서 공허한 마음을 달랜다. 마음의 병은 그대로 있는데 진통제를 먹으면서 증세를 누그러뜨리는 것이다. 그러면 물론 잠시 괜찮아지긴 하지만 근본적인 병은 고쳐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모르기‘ 때문이다. - P9

(・・・・・・)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전도서 9장 3절 - P9

우린 이 미친 마음에서 벗어나 답을 찾아봐야 한다.
왜 태어났는지, 왜 사는지, 죽으면 어디로 가는지. - P10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장 32절 - P10

나는 책에 빠져 살았다. - P17

사랑에 대한 나의 환상이 남들과 달리 유난히 컸다 ...(중략)...  남들에게 사랑이 막연한 환상이라면, 나에게는 꼭 이뤄야 하고 또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환상이었으며, 남들에게 사랑이 이뤄야 할 여러 목표 중의 하나라면, 나에게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공부도, 가수도, 음악도, 사업도 나에겐 언제나 이 목표를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 P27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이 얼마나 파워풀한 것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이 사랑으로까지 이뤄지는 것이 내 인생의 확고한 목표가 되었고, 그걸 위해서 나는 반드시 정말 특별하고 멋진 남자가 되어야 했다. - P28

남들에게 사랑이 막연한 환상이라면, 나에게는 꼭 이뤄야 하고 또 이룰 수 있다고 믿은 환상이었으며, 남들에게 사랑이 이뤄야 할 여러 목표 중의 하나라면, 나에게는 단 하나의 유일한 목표였다. - P30

나는 내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 P31

멀어져야 할 그와 그녀의 사이는 더 깊어졌고, 좁혀져야 할 나와 그의 간극은 더 벌어졌다. 내 기준점이 더 올라가버린 것이다. 여신을 만나려면 내가 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 신이 더 대단해져 있었다. 난 오히려 안에서 의욕이 더 불타올랐다. 반드시 그보다 더 특별하고 멋진 남자가 되겠다고. - P47

내 인생의 목표가 사라지니 나 자신을 미친듯이 드라이브했던 원동력도 사라졌다. - P53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희열을 느끼면서 이게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일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 P57

이 남자가 내가 그동안 좇고 있던 목표였단 말인가? 갑자기 두려웠다. 만일 그가 신이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면, 그녀가 여신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착각이었을까…………… 그럼 그들이 갖고 있다고 믿었던 ‘특별한 사랑‘도 혹시 환상이었을까……………. - P67

광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나는 연예인의 길에 들어선 것에 대한 회의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다른 동료들은 모두 어느 시점이 되면 ‘연예인이 정말 내 적성에 맞나?‘ 하고 회의가 든다는데, 나는 점점 더 신이 났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꾸었던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꿈을 잃어버렸다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 P71

‘20년 뒤를 보자‘ - P72

20년 뒤에 최고의 위치에 오르기 위해 나는 몸 관리, 춤 연습, 노래 연습, 음악 공부를 매일 할 수밖에 없었고, 다른 가수들이 놀 때, 쉴 때, 잘 때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간을 아껴 썼다. 불규칙한 가수생활 속에서도 매일 해야 하는 루틴들을 빠짐없이 했고, 가수활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무조건 음악 작업을 했다. - P73

나는 지금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남들이 보기에는 이상할 정도의 일들을 한다. 계절당 옷 두 세트를 정해놓고, 그 두 세트만 교대로 입고, 바지는 고무줄로 되어 있는 바지만 입으며, 신발도 발을 한 번에 쏙 집어넣을 수 있는 것만 신는다. 시간에 대한 강박이 이때부터 생겨난 것 같다. - P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설 속 화자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와 함께 희랍어 수업을 듣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여자와 함께 수업을 듣던 한 대학원생이 한 질문인데, 역시 대학원생이라 그런지 질문에서 예리함이 느껴졌다. 지금 학습하고 있는 희랍어의 의미를 활용하여 신의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도출해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독자인 나 또한 신의 본질적인 속성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어서 두번째 밑줄친 문장은 여자와 같은 수업을 듣던 철학과 학생의 질문인데, 앞서 대학원생이 했던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학생의 질문도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공통된 속성을 언급한 뒤 이와 비슷한 속성을 가졌지만 예외가 되는 사례를 언급함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파고들려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느껴졌다.

신령한 것, τὸ δαιμόνιον, to daimonion과 신적인 것, τὸ θεῖον, to theion 의 차이가 궁금한데요. 전 시간에 θεωρία , theoria에 ‘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신적인 것, τὸ θεῖον , to theion도 ‘본다‘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 - P104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 P105

허기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눈부신 조도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비교적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라곤했어. 그 차갑고 선명한 공간이 마치 얼어붙은 낙원 같아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시간을 끌었어. - P109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 P113

찬란한 것,
어슴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 - P115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느낀다.
단지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가고 있다고, 부스러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 P116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 P117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 P117

플라톤의 후기 저작을 읽을 때, 진흙과 머리카락, 아지랑이, 물에 비친 그림자,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작들에 이데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오직 그 의문이 감각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 안의 전극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어. - P117

모든 이데아는 아름다움이며 선함이며 숭고함이라고 너는 말했지. - P118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러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데이는 좋음의 이데아와 관계맺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니. 서울과 베네치아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의 광장들이 같은 하루에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이. - P118

하지만 말이야.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 P118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눈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 - P118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가장 미약한 아름다움,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라니! 너는 지금 동그란 삼각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 P119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ㅡ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ㅡ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 P120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 P120

그 새벽에, 왜 나는 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왜 너처럼 용기를 내서, 대범하게 상처를 감수하며 되물을 수 없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 P120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 P120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 P120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P121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華嚴. - P121

물리적 실재와 시간.
무無에서 뜨겁게 폭발하며 태어난 세계.
전진하기 전에 영원히 서성이고 있었던 시간의 씨앗.
그래, 시간.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고 불렀던 것.
그 수수께끼를 한 순간 쏘아져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을, 그 안에서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너는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했지. - P122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 P123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살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 P124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P124

ἐπὶ χιόνι ἀνὴρ κατήριπε
χιὼν ἐπὶ τῇ δειρή.
ῥύπος ἐπὶ τῷ βλέφαρῳ.
οὐ ἐστι ὁρᾶν

αὐτῷ ἀνὴρ ἐπέστη
οὐ ἐστι ἀκούειν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P127

그렇지 않다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할 거라고. 단지 아주 뿌옇게 될 뿐이라고.
그게 뭔지 나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어요.
오른쪽 눈을 감으면, 그때 이미 아주 나빴던 왼쪽 눈으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으니까. - P146

혈육들을 추억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어둡고 단단하던 그의 얼굴이 연해진다. 어렴풋이 밝아진다. - P146

아무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탈리아의 다른 어떤 것도. 미술품이며 성당, 음식 같은 것도. 단지 거기, 카타콤베 묘지만은 잊을 수 없어요.
..... 그곳은 죽은 자들의 도시더군요. - P153

여러분 눈앞에,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면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 - P153

・・・・・・ 토할 것 같았어요.
내가 보고 있는 흙이 무서워서.
그 흙이 내 몸에 묻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어요.
너무 어두웠어요.
모조리 똑같아 보이는 세 갈래 갈림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 P154

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핏자국 위에 핏자국이 덧씌워진다. 담담함 위에 담담함이, 미소 위에 미소가 짓눌러진다. - P155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호......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 P157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시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 암석들의 단층처럼 날카롭게 어긋나 다시는 그녀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과 겹쳐질 수 없을 것 같았다. - P160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어떤 감정도 없이, 먼 친분이 있을 뿐인 타인을 기억하듯 그녀는 그날의 자신을 기억한다. - P164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 P165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 P166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 P167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 P167

안개 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려온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야 하던 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려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 P168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 P169

가늘게 떨리는 획과 점 들이 두 사람의 살갗을 동시에 그었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 입술도 눈도 없다. 떨림도, 따뜻함도 곧 사라진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 P170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P175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 P177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 - P183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184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 P18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어느 한 요리사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처음 밑줄친 문장에서 느낄 수 있듯이 창의성이 남달라 보이는 요리사인 듯하다.

저자는 이 요리사의 창의성과 관련된 얘기를 함과 동시에 그녀가 직접 개발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게 된 대표 메뉴가 어떤 한 요리 경연 프로그램에서 제한된 시간의 압박을 이겨내고 만들어낸 것이라는 점을 언급한다.

지난번 포스팅에서 결핍과 관련된 얘기들이 많이 나왔었는데 그것들을 오늘 나온 내용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시간이 결핍되어 있다고 느낄 때가 오히려 시간이 무한정 주어질 때보다 좀 더 주의를 기울여 어떤 것에 집중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음을 느끼게 된다.

글을 쓰다가 문득 이와 유사한 사례 하나가 생각났다. 우리가 학창시절에 평소에는 공부를 안하다가도 시험이 임박하면 주의력과 집중도가 급격히 상승했던 경험들이 다들 있을 것이다. 이것도 어쩌면 나에게 남은 시간이 부족하다는 결핍감으로 인해 나오는 집중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슬슬 이 책에 조금씩 흥미가 붙기 시작했는데, 뒤이어지는 내용들은 어떤 것들이 있을지 기대가 된다.

채소는 땅에서 나는 사탕이라는 신념 - P-1

그녀는 오랜 세월 동안 기량을 연마해 온 요리사였지만, 사실 이 요리사의 대표적인 요리는 두 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의 극심한 압박 속에서 탄생했다. - P-1

창의력의 폭발은 여러 달 혹은 여러 해 동안 각고의 노력과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간 제한이라는 압박이 정신을 집중하게 만들고, 이전의 노력을 당장 급한 어떤 결과물로 압축해 내도록 만든다. - P-1

아이디어야 많지만 이것들을 한데 묶어서 최종적인 완성본을 만들려면 이런 저런 힘든 선택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마감 기한이 임박하면 꾸물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결핍이 그 모든 선택들을 강제한다. 추상적이던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 바뀐다. 이 마지막 압박이 없다면, 당신은 여러 생각만 떠올릴 뿐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없다. - P-1

결핍이 우리를 보다 효율적으로 만든다 - P-1

사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요소가 부족할 때 그리고 무언가에 제한을 받는다고 느낄 때 멋진 성과를 거두며 성공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 P-1

결핍이 정신을 사로잡을 때 결핍은 우리가 가진 것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킨다. 이 말은, 결핍이 비록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긴 하지만 어떤 이득을 안겨 줄 수도 있다는 뜻이다. - P-1

중간 궤도 수정은 결핍이 정신을 사로잡을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잘 보여준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사실이 명백해지면 사람들은 집중을 한다. 이런 일은 심지어 혼자서 일할 때도 일어난다. - P-1

결핍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학생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관리하는 방식 자체를 바꾸게 했다. 시간이 얼마남지 않았다고 느끼는 학생들은 대학 생활의 모든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며 하루하루를 더 알차게 보내려고 노력했다. 또한 이들은 더욱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보고했다. 아마도 대학교가 제공하는 것을 보다 많이 즐기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 P-1

시간 결핍이 없는 바람에 관심을 덜 받고, 심지어 잊히기까지 한 것이다. - P-1

영업직 사원들은 전체 매출 주기의 마지막 몇 주 (혹은 마지막 며칠) 동안에 가장 열심히 일한다. - P-1

급료 지급일이 다가올수록 더 열심히 일한다 - P-1

‘영국인의 정신은 시간적으로 거의 너무 늦었다 싶을 때 가장 잘 작동한다.‘ - P-1

마감 기한이 생산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정확한 이유는 시간의 결핍 상황이 생겨나고 이것이 정신의 집중을 유도하기 때문이다. - P-1

제2차 세계 대전 때의 굶주림 연구에서 배고픔이 배고픈 사람의 정신 맨 꼭대기에 음식을 올려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마감 기한은 현재 진행하고 있는 과제를 정신의 맨 꼭대기에 올려놓는다. - P-1

회의 시간이 몇 분 남지 않았든 혹은 대학 생활이 몇 달 남지 않았든 간에 마감 기한은 거대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해당 과제에 보다 많은 시간을 쓴다. 온갖 산만한 생각들에는 덜 빠져든다. 써야 할 원고의 마감 기한이 코앞일 때는 한가하게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지 않는다. 회의가 이제 막 끝나려고 할 때는 대화가 안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졸업이 코앞이니만큼 남은 대학 생활을 보다 알차게 보내려고 최선을 다한다. - P-1

시간이 부족할 때면 사람들은 그 남은 시간에서 보다 많은 것을 얻어낸다. 그게 업무의 성과이든 즐거움이든 간에 말이다. 우리는 이것을 ‘집중배당금focus dividend‘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정신을 사로잡는 결핍이 가져다주는 긍정적인 결과이다. - P-1

어떤 종류의 결핍이든 결핍은 당연히 집중배당금을 낳는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일상적으로 목격한다. - P-1

‘결핍이 정신을 사로잡는다‘ ...(중략)... 여기에서 ‘사로잡는다 capture‘ 라는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 이는 인간이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초월해서, 즉 불가피하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 P-1

결핍은 사람이 자의적으로는 쉽게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할 수 있게 해준다. - P-1

결핍 상태에 놓여 있지 않으면서 결핍 상태에 놓인 것처럼 꾸미기란 매우 어렵다. 집중배당금이 발생하는 것은 결핍이 자기 스스로를 우리에게 부과함으로써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여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이 개인의 의식적인 통제 범위를 초월해서(수천분의 1초라는 짧은 순간에) 일어난다 - P-1

마감 시한 그 자체가 유혹과 잡생각을 떨쳐 낸다. - P-1

자기 자신을 간지럽히기가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마감 기한이 없는데 마감 기한이 설정된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서 자기를 더욱 열심히 일하게 하기란 매우 어렵다. 상상의 마감 기한은 그냥 상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실제 마감 기한만큼 사람의 정신을 사로잡지는 못한다. - P-1

수천 분의 1초에서부터 시작되는 결핍의 영향력은 여러 행동으로 축적되며, 이 행동은 그보다 훨씬 긴 시간 단위로 확대된다. - P-1

결핍은 우리가 빠르게 생각할 때나 느리게 생각할 때나 항상 우리의 정신을 사로잡는다. - P-1

어떤 한 가지에 집중한다는 것은 다른 것들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 P-1

집중의 힘은 뒤집어 말하면 다른 것들을 지우는 힘이다. 쉽게 말해 결핍이 ‘집중을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로 하여금 터널링tunneling을 하도록, 즉 임박한 결핍을 제어하는 데만 집중하도록 유도한다고 할 수 있다. - P-1

터널링은 터널 시야tunnel vision 현상을 연상하도록 일부러 선택한 용어다. 긴 터널 안에 들어가면 오로지 멀리서 빛을 발하는 출구만 보이고 주변의 사물은 보이지 않는다. 이처럼 관심을 두는 대상만 보이고 나머지는 보이지 않는 현상을 터널 시야 현상이라고 부른다. - P-1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틀을 만든다는 것이고, 틀을 만든다는 것은 (나머지 것들을) 배제한다는 것이다." _미국의 소설가 수전 손택Susan Sontag - P-1

‘집중‘은 긍정적이다. 결핍은 우리로 하여금 현재 가장 중요해 보이는 것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터널링‘은 긍정적이지 않다. 결핍은 사람들로 하여금 터널링을 유도해서 어쩌면 더 중요할 수도 있는 다른 것들을 무시하게 만든다. - P-1

터널링은 우리가 무언가를 선택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 P-1

마감 기한이 좁은 범위의 집중을 만들어낸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날 때 당신의 정신은 이미 가장 급한 그 필요성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 P-1

터널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바꿈으로써 작동한다. - P-1

어떤 것 하나에 집중하면 이것과 경쟁할 가능성이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억제된다. - P-1

억제는 누군가에게 화가 나있을 때 발생하는 일과 비슷하다. 이런 때에 그 사람이 가진 장점을 기억하는 일은 어쩐지 한층 어렵다. 당신을 신경 쓰게 하는 어떤 특성에 집중할 때 좋은 기억은 억제된다. - P-1

정신은 단지 말이나 기억만 억제하는 게 아니다. - P-1

자기에게 중요한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면 신경 써야 하는 다른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덜 할 수밖에 없어진다. - P-1

목표 억제는 터널링에 내재하는 기제(메커니즘)이다. 결핍은 어떤 강력한 목표(현재의 급박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목표)를 생성하고, 이 목표는 다른 목표들이나 고려해야 할 것들을 억제한다. - P-1

억제는 결핍이 가져다주는 편익(집중배당금)의 이유인 동시에 결핍이 주는 비용의 이유이기도 하다. 잡생각을 억제하면 집중이 가능해진다. - P-1

우리가 무언가에 집중하고 터널링에 사로잡히며 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고 무시하기도 하는 이유는 하나다. 터널 속에서는 오로지 출구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 P-1

우리의 정신은 비용 편익 분석이라는 미묘한 문제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마감 기한이다. 터널 시야 안에 들어오는 고려 사항은 매우 세밀하고 조심스럽게 살피지만, 그 시야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은 깡그리 무시한다. - P-1

사람은 긴장할 때보다 산만할 때 더 많은 칼로리를 소모 - P-1

‘결핍에 대한 집중은 비자발적이며, 또 이 집중이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 탓에 다른 일에 집중하는 우리의 능력은 방해를 받는다.‘ - P-1

심지어 결핍은 우리가 다른 일을 하려고 할 때조차도 우리를 터널 안에 가두고 놓아주지 않는다. 어떤 사회적 계급에 속한 사람의 결핍을 경험한다는 것은 이 사람이 사는 삶의 나머지 영역에서 주의력이 부족해지고 정신이 딴 데 팔려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1

대역폭bandwidth은 우리가 가진 계산 능력, 즉 주의를 기울이고 좋은 판단을 내리며 앞서 세웠던 계획을 고수하고 유혹에 저항하는 능력의 척도이다. - P-1

결핍은 우리를 끊임없이 터널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우리의 대역폭에 세금을 매기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이 결핍은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역량이 발휘되는 걸 가로막는다. - P-1

집중을 하고 생각을 모으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 P-1

소음이 집중과 성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음 - P-1

아주 사소한 산만함이 빚어내는 강력한 영향 - P-1

잡생각들이 빚어내는 소음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 잡생각들은 누가 부르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기차보다 더 자주 출몰한다. 그리고 이 잡생각의 기차는 당신을 강제로 붙잡아 태운다. 세컨드 카를 처분해야 하나 하는 생각은 또다른 생각으로 이어진다. - P-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책의 초반부를 읽고 있는데, 아직 각각의 인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까지 살펴본건 아니지만 예상외로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았다. 내 나름대로 정리해서 하나씩 적어보자면 일단 이 책의 화자는 이정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인데, 본문에 나온 내용들을 통해 추론해보니 소설 속 인물임과 동시에 저자의 분신같다는 생각도 들게 하는 인물이었다. 실제 저자의 인적사항과 관련된 내용이 본문에 나와있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화자의 친구이자 이 소설의 핵심 인물인 서인주라는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어릴 때 나름 유복한 가정(아버지가 의사였다고 한다)에서 자랐으나 어떤 이유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린 나이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연이어 여의고 외삼촌 밑에서 자라게 된다. 근데 소설을 읽다보니 이 외삼촌(이동주)도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고 한다. 뭔진 몰라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서인주는 결혼을 해서 민서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또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결혼 후 얼마지나지 않아 남편과 이혼을 해서 별거를 한다. 남편(정선규)은 과거에 건축사무소를 운영했다고 하는데, 이혼 후에는 한국을 떠나 호주로 이민을 간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이 소설의 또다른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강석원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미술정신‘이라는 잡지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나온다. 여기서 미술이라는 소재가 등장하는 이유는 서인주와 서인주의 외삼촌(이동주)이 그림을 그렸던 것과 관련이 있다.

소설속에서 서인주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사망한 것으로 나오는데, 그녀 혹은 그녀의 외삼촌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미술작품에 대해 강석원이 평론같은 것을 썼다. 그런데, 강석원이 쓴 글을 읽은 서인주의 친구이자 이 책의 화자인 이정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강석원이 쓴 글의 내용에 차이가 많다는 것을 인지하고 그를 직접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들을 나눈다.

뭐 여기서 그들의 자세한 대화 내용까지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대화의 분위기만 간단히 언급하자면 뭔가 어두침침하고 담담하면서도 긴장감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다. 아직 소설의 초반부라 뒤에 나오는 내용이 어떤 식으로 이어질지는 알 수 없지만, 전반적인 분위기가 한동안은 비슷하게 이어질 듯하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화자인 이정희가 남긴 말인데, 이는 소설 속 인물의 말임과 동시에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밑줄쳐보았다. 맨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소설 속 등장인물들이 꽤나 많다고 느껴져서, 개인적으로 별도의 종이에 소설 속 인물들의 관계도를 간단하게 끄적여보면서 본문을 읽어나갔는데, 이렇게 읽다보니 내 머릿속도 고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뒤범벅되어 읽어나가는 것이 결코 호락호락하진 않지만 큰 흐름을 놓치지 않고 한 번 잘 따라가봐야겠다.
.
.
.
본문을 읽다보면 우주와 관련된 얘기들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예전에 읽었던 칼 세이건 저자의《코스모스》를 통해 우주와 관련된 내용들을 조금이나마 읽어봤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보면 과학 분야에 완전 무지했던 나였기에 본문을 읽을 때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아 무지 힘들었던 생각이 난다. 하지만 그 때 그렇게 고생스럽게 읽었던 내용들이 오늘 이 소설을 읽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만약 내가 과거에 《코스모스》를 읽지 않고 지금 이 소설을 읽었다면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지금보다는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거나 혹은 설령 읽더라도 내용에 대한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것 같다.

이런 경험을 통해 고생이라는 걸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느끼게 되었다. 고생끝에 낙이 온다는 속담의 의미가 오늘따라 더 깊이있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고생을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특권인지도 모르겠다.

고요하지 않은 것은 내 기억들뿐이다. - P50

자명종 시계의 야광 바늘은 완고하게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다. 이 시각에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연인이 아니라면 원수일 것이다. 밤새 뒤척이며 모욕을 곱씹은 자. 돌려받아야 할 전 재산 때문에 눈이 뒤집힌 자. 빼앗긴 애인 때문에 죽거나 죽이기를 결단한 자. - P51

말해봐. 뭐가 당신을 잠 못 이루게 하는지, 어떤 죄, 어떤 후회인지. - P51

침묵은 이미 깨어졌다. 다시 울릴지 모르는 휴대폰을 옆에 두고 나는 호주의 국가번호와 지역번호 일곱 자리의 전화번호가 적힌 메모지를 들여다본다. - P51

어둠은 무겁지 않다. 단단하지도 않다. 허물처럼 가벼운 어둠의 속을 더듬어 옷장의 손잡이를 찾는다. - P51

난 말이지, 정희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 P52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막아달라는 말일 수도 있어. - P53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 P53

달리고 있으면 언젠가부터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져 - P54

늙어가는 사람은 점점 어린아이 같아진다 - P55

한 번의 획에 모든 걸 담아봐 - P55

네가 경험한 모든 것이 한 번의 획에 필요하다고 생각해봐. 자연, 너를 키운 사람, 기르다 죽은 개, 네가 먹어온 음식들, 걸어 다닌 길들...... 그 모든 게 네 속에 있다고. 네가 쥔 붓을 통과해 한 획을 긋는 사람은, 바로 그 풍만한 경험과 감정과 힘을 가진 사람이라고. - P56

내가 풍만한 경험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처음 호흡을 참으며 선 하나를 그었을 때, 내 몸속에 미처 몰랐던 공간이 있었던 것을 알았다. 그 안에 숱한 요철과 구멍들이 울퉁불퉁하게 일그러져 있었던 것을 알았다. 잠자코 선을 그어가는 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소한 일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침묵에 씻겨 사라졌다. - P56

꿈속에서 흰 새는 아무렇지도 않게 울었다. 그저 자신의 일이라는 듯이, 자신의 본성일 뿐이라는 듯이. 구슬프지도 처절하지도 않게 우는 동안 새의 머리에서 흰빛이 빠져나갔다. 모래시계의 모래알이 아래로 흘러내리듯이, 그저 담담히 중력의 법칙을 따르는 듯, 안 보이는 시간의 결을 어루만지는 듯 조용히. - P56

인주와 삼촌, 그들이 그린 그림ㅡ그것들이 내가 쓰려는 전부다. 단지 그들이 내 기억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이 냄새, 소리, 색깔 들이 한꺼번에 뒤엉켜 불려나오는 것뿐이다. - P57

잘 숨을 수 있을까.
얼굴도, 목소리도, 발자국도 없이 이 부서진 조각들 사이를 아슬아슬한 난간들을 짚고 갈 수 있을까. - P57

삼촌이 그랬듯이 인주는 이 시간을 좋아했다. 고요한 푸른빛을. 푸른 시간을, 밤의 비밀과 낮의 명료함이 맞바뀌는 지진 같은 떨림을. 피와 뼈까지 파랗게 배어드는 서늘함을 잠든 사람들의 체온이 가장 내려가는 순간. 지표면이 가장 차가워지는 이 순간. - P57

아무렇지 않은 네가 걸어 나온다. 어둠보다 어둡게, 박명을 등지고 걸어 나온다. 이상하다. 아니, 당연하다. 얼굴에 눈물이 없다. 흐르는 피도 말라붙은 피도 없다. 너를 지나쳐서 나는 걷는다. 눈을 닫고 걷는다. 입을 닥치고 걷는다. - P58

우주의 나이는 얼마나 되었을까? 우주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천체들의 나이로 미루어 약 150억 년으로 추정된다. 예를 들어 우리 은하에는 수십만 개의 별들이 공처럼 뭉친 구상성단들이 있는데, 이들의 나이는 모두 100억 년이 넘는다. 그러나 150억 년보다 더 늙은 천체는 찾아볼 수 없다. - P61

비록 우주 공간이 무한하다 해도, 우주의 나이가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도 유한하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그 대상에서 나온 빛을 느껴 안다는 것이다. 이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빛이 150억 년간 달려온 거리보다 더 먼 곳에 있는 별을 볼 수 없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는 약 390억 광년으로 한정된다. 이것이 우주의 지평선이다. 그 너머의 별들이 낸 빛은 미래에 우리에게 도달할 것이다. - P61

천체물리학의 세계에 들어가면 시간과 공간이 같은 것을 말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 멀리서 반짝이는 별은 오랜 과거의 별이며, 이미 존재하지 않는 별일 수도 있다. 더 멀리 볼수록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우주의 지평선은 그렇게 우리가 멀리 볼 수 있는 한계, 더 오랜 과거로 거슬러 오를 수 있는 한계다. 그것이 없다면 우주가 태어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을 것이다. - P61

그러니까, 혹시...... 이 우주의 물질은 원래 하나인 거예요? 같은 중성자가 어떻게 양자와 결합했느냐에 따라 수소, 탄소………… 그런 게 되는 거예요? 이 종이랑 담벼락이랑 사람의 몸이랑 물이랑...... 이 모든 게?
그렇지.
삼촌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같은 구슬을 이렇게 묶느냐 저렇게 묶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 P62

나의 몸과 그의 몸이 같은 물질, 같은 알갱이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절실하게 느껴졌다. - P62

그런데, 그 알갱이는 거의 비어 있다고, 이 책에는..
그렇지.
그러니까. E=mc²이란 말은.....
비어 있다고 해서 그게 정말 비어 있는 게 아니고,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거지. 네가 말한 건 에너지가 곧 물질이라는 등식이니까.
수증기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온이 내려가면 물이 되고 얼음이 되는 것처럼요?
적절한 예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비슷해. - P62

그러니까, 여러 조건들, 시간까지 모두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눈이있다면 이 세상은...... 한 점인 거네요. 빅뱅 이전의 한 점, 아니, 점도 아닌, 비어 있지만 비어 있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우리가 산다는 건...... - P62

나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빠르게, 풍화되는 대지와 마르는 강물, 폭발하는 별들이 스쳐간 것을. 모든 것이 하나로 꿰어지는 순간의 격렬함을 경험한 것을. 슬픔도 고통도, 그렇다고 기쁨도 아닌 그 순간을. - P62

당신의 손의 원소가 내 손의 원소와 같다는 것을 간절하게 실감했기 때문이라고. 아니, 모르겠다. 많은 시간이 흘러서가 아니다.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가왔다고밖에는. 스며들고 번져갔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 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처럼. - P63

먼저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내 눈물을 믿지 않는다고.
내 진실을 믿지 않는다고.
내 기억을, 고통을 믿지 않는다고. - P63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특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 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라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 P64

밥부터 먹고,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 - P65

모든 것이 수축되는 한 점에서, 시간과 공간, 물질과 비물질이 하나가 된 그 점에서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헤어진 적이 없었던 것이다. 죽은 적도 태어난 적도 없었던 것이다. - P67

이 모든 말들은 궤변에 불과하다. - P67

몹시 차가운 것은 첫 순간 뜨겁게 느껴진다. - P68

그 시절의 수학 시간에 결코 이해해낼 수 없었던 숫자들이 있다.
0과 무한.
어떤 숫자든 0을 곱하면 블랙홀에 빨려든 듯 0이 되고, 0으로 나누면 반대로 무한이 된다. - P69

가령 3이라는 숫자 속에 들어 있는 무한한 0을 생각하고 있자면, 서로를 끝없이 비춰주는 어두운 거울들을 지켜보는 것처럼 아득해졌다. - P69

우주가 태어났다는 것은 0이 스스로 무한이 되었다는 걸 뜻한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 공간 속에서 0이 끝없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는 뜻이다. - P69

우주의 비어 있는 공간을 0이라고 생각하니까 혼란스러운 것 아닐까? - P70

아마 물고기는 물이 텅 빈 공간이라고 생각할 거야. 우리가 공기를 마시면서도 허공이 텅 비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하지만 허공은 결코 비어 있지 않아. 바람이 불고, 벼락이 치고, 강한 압력으로 우리 몸을 누르지. 그러니까,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 더 높은 차원의 눈으로 우주의 공간을 볼 수 있다면, 모든 건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될 거야. - P70

삼촌의 책장에서 빌려간 딱딱한 책들을 건빵처럼 입속에서 불려 읽던 그 가을, 때로 나는 막막하게 되새겨보곤 했다. 내가 굳건히 딛고 걸어가는 땅이, 실은 전속력으로 회전하는 전자들이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핵과 전자들 사이의 공간은 소금 알갱이들이 흩어진 커다란 성당만큼이나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삼촌과 함께 있을 때 그것은 자연스러운 기적, 또렷한 현실이었다. 그러나 혼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에서부터 이미 나는 더 믿을 수 없었다. 0이 변한 텅 빈 무한 속에서 0을 딛고 걸어가는 0, 그것이 바로 나라니. 그 몸속에서 이토록 고통스럽게 두근거리는 심장이, 붉고 더운 피를 쉴 새 없이 뿜어내고 있다니. - P71

가끔은 부드럽고도 무정하게 말했다.
이 선은 죽었구나.
‘죽었다‘는 말이 엄하고 예리한 날로 가슴을 긋는 것 같아, 나는 귓불을 붉힌 채 주먹으로 심장께를 문질렀다. - P71

그래, 안 될 때는 쉬어야지. - P72

왜 그렇게 오래 그 그림을 들여다보았는지 나는 모른다. 볼수록 이상하게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화면에는 사람 하나, 짐승 하나, 발자국 하나 없다. 거대한 바위들은 곧 허공에서 얼어붙고 말 불길처럼 단단하게 타오른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림을 읽으면 꿈속의 꿈으로 걸어들어가 마침내 복사나무 숲을 만나게 되고, 당시의 독법으로ㅡ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으면ㅡ복사나무 숲을 빠져나와 현실의 벌판에 다다르게 된다. 가파른 협곡이 세로질러 삼킨 길, 화면 왼편의 먼 복사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길을, 나는 마치 꿈의 마지막 순간인 듯 거슬러 더듬어가보곤 했다. - P73

안견은 왜 꿈의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 부분을 그렸을까. 어떤 어두운 예감의 힘으로 꿈꾼 사람의 앞일을 그림에 담았던 걸까. 꿈을 꾼지 칠 년 뒤, 안평은 서른일곱의 나이에 친형 수양이 내린 사약을 받고 유배지 강화에서 죽었다. 당대의 명필이었던 글씨, 남다른 감각으로 수집한 수백 점의 서화들, 재주 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재동 집의 풍류로도 돌이킬 수 없는 경계를 넘어갔다. - P74

마지막 방에 전시된 몽유도원도 앞에 다다랐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화면 오른쪽에 무리 지어 선 복숭아나무들이었다. 비단에 그린 그림이니 물감들은 옷감과 함께 오랜 시간 퇴색해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그렸을 때는 얼마나 선명한 붉은 꽃들이었을까. - P74

삼촌이 들려주었던 인면도화(人面桃花)라는 말을 기억했다. 복숭아꽃처럼 어여쁜 얼굴이라는 뜻ㅡ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나지 못하면 그리움 때문에 얼굴이 아름답게 기억된다는 뜻이다. 그 그림의 복사꽃에는 어떤 귀기도, 농염함도 없었다. 그저 다시 못 볼 사람의 얼귤, 누구의 생시에도 얼비치지 않을 꿈으로 늙은 비단 위에 무리 지어 피어 있었을 뿐이다. - P74

이 선은 죽었구나.
온화한 그 온화함 때문에 도리어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로 그는 나무라곤 했다. 죽은 선을 그은 나는, 그 선을 긋는 동안 죽어 있었던 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또렷하게 살아 있는 그의 눈을 올려다보았다. 두려움과 고통이 뒤섞인, 가장 끔찍하고 가장 달콤한 순간이 파르스름하게 흔들리는 것을. 두 사람 모두 조용히 외면했다. - P75

알고 있었어, 라고 인주는 말했다.
두 사람, 다 알고 있었어.
인주는 무엇을, 어디까지 알았을까. 얼마나 어렵고 더딘 시작이었는지. 마지막 열흘 동안 우리가 얼마나 부끄러워했고, 얼마나 서슴없었는지. 서로의 몸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아 새들이 가슴털을 비비듯이, 불꽃이 당겨질 때까지 떨리는 손으로 성냥을 긋듯이, 어두운 방 가운데에서 어깨를 웅크린 채 수없이 입술을 포개었는지. - P75

때로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단 한 번도 믿지 못했다.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모든 것이 태어났다는 것을. 격렬히 고동치던 그 심장들이 실은 텅 빈 것이었다는 것을. 마른 입술, 두려워하는 손, 갓 꺼낸 밀빵 껍질같이 달아오른 네 개의 뺨조차, 어두운 꿈의 마지막 순간처럼 영원히 없는 것, 사라지기 전에 이미 없던 것, 없던 것이었다는 것을. - P76

일어서.
소리치지마.
참아.
다리를 끌지 마. 멈추지 마.
아픈 데를 만지지 마.
그래. 계속 걸어가.
너는 괜찮아. - P79

무엇이든 견딘다. - P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 세상에는 상반된 것들이 사방에 널려 있어서 반대말도 많다는 얘기가 나왔었는데, 유독 중력만큼은 반대 개념이 없다는 말을 했었다. 일반적으로 중력이라고 하면 인력 즉 잡아당기는 힘만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오늘 시작하는 본문에서는 이러한 일반적인 생각을 깨부수는 얘기가 나온다. 바로 중력이 밀어내는 쪽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근거한 것인데, 이어지는 본문 내용을 통해 그 원리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알아보면 좋을 듯하다.

그(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중력은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 옛날 뉴턴은 밀어내는 중력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우리도 그런 힘을 겪은 적이 없지만, 이론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인슈타인의 장방정식에 의하면 별이나 행성처럼 질량이 뭉쳐 있는 천체는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잡아당기는 중력을 행사하지만,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는 중력이 물체를 밀어낼 수도 있다. - P81

‘밀어내는 중력을 도입하면 우주의 오랜 미스터리가 풀린다‘ - P81

아인슈타인의 우주는 팽창하는 우주를 허용하고 있으며, 수십 년 동안 축적된 관측 데이터는 이것이 사실임을 확실하게 입증했다. 그렇다면 140억 년 전에 대체 어떤 힘이 팽창을 유발했을까? - P81

미국의 물리학자 앨런 거스Alan Guth는 공간이 ‘우주 연료 cosmic fuel‘라는 특별한 물질로 가득 차 있고, 그안에 포함된 에너지가 별이나 행성처럼 특정 지역에 집중되지 않고 공간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면, 중력이 밀어내는 쪽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의 계산에 의하면 지름이 10억 × 10억 × 10억분의 1미터밖에 안 되는 작디작은 영역에 특별한 형태의 에너지장이 형성되어 있고(이것을 인플라톤 inflaton이라 한다. 급속 팽창을 뜻하는 인플레이션inflation의 오타가 아니다!), 이 에너지가 욕실의 수증기처럼 균일하게 분포되어 있으면, 밀어내는 중력이 폭발적으로 작용하여 순식간에 현재의 관측 가능한 우주만큼 팽창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밀어내는 중력이 빅뱅을 일으켰다는 이야기다. - P82

본문에 언급된 ‘우주 연료(cosmic fuel)‘는 스칼라장(scalar field)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친숙한 전기장이나 자기장은 공간의 모든 점에 벡터가 할당되지만(벡터의 길이와 방향이 해당 위치에서 장의 세기와 방향을 나타낸다), 스칼라장은 각 점에 하나의 값만 할당된다(이 값으로부터 장의 에너지와 압력이 결정된다). 거스의 원조 논문과 그 후에 발표된 후속 논문들은 우주론의 심각한 장애물이었던 자기홀극문제(monopole problem)와 지평선문제 (horizon problem), 그리고 편평성문제(flatness problem)를 일거에 해결했다. - P46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