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속 화자이자 이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한 여자가 있는데, 이 여자와 함께 희랍어 수업을 듣는 몇몇 사람들이 있다. 처음 밑줄친 문장은 여자와 함께 수업을 듣던 한 대학원생이 한 질문인데, 역시 대학원생이라 그런지 질문에서 예리함이 느껴졌다. 지금 학습하고 있는 희랍어의 의미를 활용하여 신의 본질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도출해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를 통해 독자인 나 또한 신의 본질적인 속성에 대해 잠시나마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어서 두번째 밑줄친 문장은 여자와 같은 수업을 듣던 철학과 학생의 질문인데, 앞서 대학원생이 했던 질문과 마찬가지로 이 학생의 질문도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공통된 속성을 언급한 뒤 이와 비슷한 속성을 가졌지만 예외가 되는 사례를 언급함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대해 좀 더 깊이있게 파고들려는 태도가 바람직하다고 느껴졌다.

신령한 것, τὸ δαιμόνιον, to daimonion과 신적인 것, τὸ θεῖον, to theion 의 차이가 궁금한데요. 전 시간에 θεωρία , theoria에 ‘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하셨는데, 신적인 것, τὸ θεῖον , to theion도 ‘본다‘는 동사와 관련되어 있습니까? 그렇다면 신은 보는 존재이거나, 시선 그 자체인 건가요? - P104

모든 사물은 그 자신을 해치는 것을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걸 논증하는 부분에서요. 안염이 눈을 파괴해 못 보도록 만들고, 녹이 쇠를 파괴해 완전히 부스러뜨린다고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들과 유비를 이루는 인간의 혼은 왜 그 어리석고 나쁜 속성들로 인해 파괴되지 않는 겁니까? - P105

허기 때문에 냉장고 문을 열 때마다, 눈부신 조도 때문에 그 안에 있는 것들이 비교적 또렷하게 보인다는 사실에 놀라곤했어. 그 차갑고 선명한 공간이 마치 얼어붙은 낙원 같아서,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시간을 끌었어. - P109

고대 희랍인들에게 덕이란, 선량함이나 고귀함이 아니라 어떤 일을 가장 잘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고 하잖아. 생각해봐. 삶에 대한 사유를 가장 잘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일까? 언제 어느 곳에서든 죽음과 맞닥뜨릴 수 있는 사람...... 덕분에 언제나, 필사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사람………… 그러니까 바로 나 같은 사람이야말로, 사유에 관한 한 최상의 아레테를 지니고 있는 거 아니겠니? - P113

찬란한 것,
어슴푸레하게 밝은 것,
그늘진 것. - P115

이해할 수 없어.
네가 죽었는데, 모든 것이 나에게서 떨어져나갔다고 느낀다.
단지 네가 죽었는데,
내가 가진 모든 기억이 피를 흘린다고, 급격하게 얼룩지고 있다고, 녹슬어가고 있다고, 부스러져가고 있다고 느낀다. - P116

문학 텍스트를 읽는 시간을 견딜 수 없었어. 감각과 이미지, 감정과 사유가 허술하게 서로서로의 손에 깍지를 낀 채 흔들리는 그 세계를, 결코 신뢰하고 싶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어김없이 그 세계의 것들에 매혹되었지. - P117

내가 감동한 것은. 오직 그 중첩된 이미지의 아름다움 때문이었어. - P117

플라톤의 후기 저작을 읽을 때, 진흙과 머리카락, 아지랑이, 물에 비친 그림자, 순간순간 나타났다 사라지는 동작들에 이데아가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내가 그토록 매혹되었던 것도 마찬가지였어. 오직 그 의문이 감각적으로 아름다웠기 때문, 아름다움을 느끼는 내 안의 전극을 건드렸기 때문이었어. - P117

모든 이데아는 아름다움이며 선함이며 숭고함이라고 너는 말했지. - P118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니. 그러니 바로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이데이는 좋음의 이데아와 관계맺을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니. 서울과 베네치아와 프랑크푸르트와 마인츠의 광장들이 같은 하루에 모두 존재하는 것과 같이. - P118

하지만 말이야. 만일 소멸의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말이야.... 그건 깨끗하고 선하고 숭고한 소멸 아닐까? 그러니까. 소멸하는 진눈깨비의 이데아는 깨끗하게, 아름답게, 완전하게,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진눈깨비 아닐까? - P118

이것 봐. 죽음과 소멸은 처음부터 이데아와 방향이 다른 거야. 녹아서 진창이 되는 진눈깨비는 처음부터 이데아를 가질 수 없는 거야. - P118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 정말 모르겠어? 가장 미약한 아름다움, 가장 미약한 숭고함이라도 좋으니, 어떻게든 플러스의 빛이 있어야 하는 거야. 죽음과 소멸의 이데아라니! 너는 지금 동그란 삼각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 P119

라틴어를 곧잘 하는 친구들도 희랍어의 문법에는 두 손을 들었으니까. 바로 그 복잡한 문법체계가ㅡ수천 년 전에 죽은 언어라는 사실과 함께ㅡ나에겐 마치 고요하고 안전한 방처럼 느껴졌어. 그 방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차츰 나는 희랍어를 잘하는 신기한 동양애로 알려지기 시작했지. 자력에 이끌리듯 플라톤의 저작들에 이끌린 건 그 무렵부터였어. - P120

한칼에 감각적 실재를 베어내버리는 불교에 매료되었던 것처럼. 그러니까 내가, 보이는 이 세계를 반드시 잃을 것이기 때문에. - P120

그 새벽에, 왜 나는 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지 못했을까. 왜 너처럼 용기를 내서, 대범하게 상처를 감수하며 되물을 수 없었을까. 나의 조건이 그렇다면 너의 조건은, 바로 너의 조건은 너의 생각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쳐왔느냐고. - P120

우리가 가진 가장 약하고 연하고 쓸쓸한 것, 바로 우리의 생명을 언젠가 물질의 세계에 반납할 때, 어떤 대가도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 P120

언젠가 그 순간이 나에게 찾아올 때, 내가 이끌고 온 모든 경험의 기억을 나는 결코 아름다웠다고만은 기억할 수 없을 것 같다고. - P120

완전한 것은 영원히 없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세상에는. - P121

모든 존재의 뒤편에 물 위의 환한 그림자처럼 떠올라 있는.
모든 존재가 수천의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 세계를 싸안고 있는, 열여섯 살의 내가 온 힘으로 붙들었던 화엄華嚴. - P121

물리적 실재와 시간.
무無에서 뜨겁게 폭발하며 태어난 세계.
전진하기 전에 영원히 서성이고 있었던 시간의 씨앗.
그래, 시간.
보르헤스가 자신을 태우는 불이라고 불렀던 것.
그 수수께끼를 한 순간 쏘아져 영원히 날아가는 화살을, 그 안에서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을 너는 맨손으로 만지고 싶어했지. - P122

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 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 P123

네가 나를 처음으로 껴안았을 때, 그 몸짓에 어린, 간절한, 숨길수 없는 욕망을 느꼈을 때, 소름끼칠 만큼 명확하게 나는 깨달았던 것 같아.
인간의 몸은 슬픈 것이라는 걸. 오목한 곳, 부드러운 곳, 상처 입기 쉬운 곳으로 가득한 인간의 몸은. 팔뚝은. 겨드랑이는. 가슴은. 살은 누군가를 껴안도록 껴안고 싶어지도록 태어난 그 몸은. - P124

그 시절이 지나가기 전에 너를 단 한 번이라도 으스러지게 마주 껴안았어야 했는데.
그것이 결코 나를 해치지 않았을 텐데.
나는 끝내 무너지지도, 죽지도 않았을 텐데. - P124

ἐπὶ χιόνι ἀνὴρ κατήριπε
χιὼν ἐπὶ τῇ δειρή.
ῥύπος ἐπὶ τῷ βλέφαρῳ.
οὐ ἐστι ὁρᾶν

αὐτῷ ἀνὴρ ἐπέστη
οὐ ἐστι ἀκούειν

한 사람이 눈 속에 엎드려 있다.
목구멍에 눈雪.
눈두덩에는 흙.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한 사람이 그 앞에 멈춰 서 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 P127

그렇지 않다고 밝기도 하고 어둡기도 할 거라고. 단지 아주 뿌옇게 될 뿐이라고.
그게 뭔지 나는 대략 짐작할 수 있었어요.
오른쪽 눈을 감으면, 그때 이미 아주 나빴던 왼쪽 눈으로 모든 것이 뿌옇게 보였으니까. - P146

혈육들을 추억하는 것이 행복한 것이다. 어둡고 단단하던 그의 얼굴이 연해진다. 어렴풋이 밝아진다. - P146

아무것도 잘 기억나지 않아요. 이탈리아의 다른 어떤 것도. 미술품이며 성당, 음식 같은 것도. 단지 거기, 카타콤베 묘지만은 잊을 수 없어요.
..... 그곳은 죽은 자들의 도시더군요. - P153

여러분 눈앞에, 관 속에 보이는 흙을 분석하면 칼슘과 인 성분이 많이 나온다고 합니다.
수천 년이 흐르면, 사람의 뼈가 삭아서 이런 흙이 되는 겁니다. - P153

・・・・・・ 토할 것 같았어요.
내가 보고 있는 흙이 무서워서.
그 흙이 내 몸에 묻을 것만 같아서.
하지만 도망칠 수 없었어요.
너무 어두웠어요.
모조리 똑같아 보이는 세 갈래 갈림길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어요. - P154

잉크 위에 잉크가 기억 위에 기억이, 핏자국 위에 핏자국이 덧씌워진다. 담담함 위에 담담함이, 미소 위에 미소가 짓눌러진다. - P155

오래전에는 해가 진 직후와 해가 뜨기 직전의 어스름을 호呼......로 시작되는 한자어로 불렀다고 했다. 멀리서 오는 사람을 알아볼 수 없어, 큰 소리로 불러 누구인지 물어야 한다는 뜻의 단어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란 서양식 표현과 비슷한 연원을 가진, 호......로 시작되는, 끝끝내 완전해지지 않는 그 단어가 목구멍보다 깊은 곳에서 뒤척인다. - P157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아보았다. 그녀의 시간과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시간이 어긋난 것 같았다. 암석들의 단층처럼 날카롭게 어긋나 다시는 그녀의 시간이 그들의 시간과 겹쳐질 수 없을 것 같았다. - P160

가끔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나요.

우리 몸에 눈꺼풀과 입술이 있다는 건.

그것들이 때로 밖에서 닫히거나,
안에서부터 단단히 걸어잠길 수 있다는 건. - P161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면,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면, 어떤 감정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어떤 감정도 없이, 먼 친분이 있을 뿐인 타인을 기억하듯 그녀는 그날의 자신을 기억한다. - P164

세 치의 혀와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들, 헐거운 말들, 미끄러지며 긋고 찌르는 말들, 쇳냄새가 나는 말들이 그녀의 입속에 가득 찼다. 조각난 면도날처럼 우수수 뱉어지기 전에, 막 뱉으려 하는 자신을 먼저 찔렀다. - P165

화해할 수 없었다.

화해할 수 없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었다. - P166

......당신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순간이 있어요.
더이상 아무것도 말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어요. - P167

어두운 초록색 흑판에 백묵으로 문장을 쓸 때 나는 공포를 느껴요. 방금 내가 쓴 글씨지만, 십 센티미터 이상 눈에서 떨어지면 보이지 않아요.
암기한 대로 소리내어 읽을 때 공포를 느껴요.
태연하게 내 혀와 이와 목구멍으로 발음된 모든 음운들에 공포를 느껴요.
내 목소리가 퍼져나가는 공간의 침묵에 공포를 느껴요.
한번 퍼져나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단어들, 나보다 많은 걸 알고 있는 단어들에 공포를 느껴요. - P167

안개 속을 나아가는 것 같을 때가 있어요.
그 도시의 겨울에 종종 찾아오던, 새벽에 호수에서 시가지로 밀려온 안개가 저녁까지 걷히지 않던 날처럼. 벽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 안개에 덮여 흔적도 보이지 않는 회색 건물들 사이를, 축축한 석벽에 바싹 몸을 붙이고 천천히 걸어야 하던 밤처럼. 아무도 자전거를 타지 않던 밤, 사람의 자취 없이 무거운 발소리들만 들려오던 밤, 아무리 더 나아가도 싸늘한 집에 다다를 수 없을 것 같던 밤처럼. - P168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 P169

가늘게 떨리는 획과 점 들이 두 사람의 살갗을 동시에 그었다가 사라진다. 소리가 없고 보이지 않는다. 입술도 눈도 없다. 떨림도, 따뜻함도 곧 사라진다.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 P170

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침묵이라면, 비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끝없이 긴 문장들인지도 모른다.
단어들이 보도블록에, 콘크리트 건물의 옥상에, 검은 웅덩이에 떨어진다. 튀어오른다.
검은 빗방울에 싸인 모국어 문자들.
둥글거나 반듯한 획들, 짧게 머무른 점들.
몸을 구부린 쉼표와 물음표. - P175

내가 말했지. 언젠가 너 자신이 성립 불가능한 오류가 되어버리고 말 거라고. - P177

그녀의 얼굴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을 찾기 위해 그는 눈을 감고 뺨으로 더듬는다. 선득한 입술에 그의 뺨이 닿는다. 오래전 요아힘의 방에서 보았던 태양의 사진이 그의 감은 눈꺼풀 속으로 타오른다. 타오르는 거대한 불꽃의 표면에서 흑점들이 움직인다. 폭발하며 이동하는 섭씨 수천 도의 검은 점들. 그것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면, 아무리 두꺼운 필름조각으로 가린다 해도 홍채가 타버릴 것이다. - P183

눈을 뜨지 않은 채 그는 입맞춘다. 축축한 귀밑머리에, 눈썹에. 먼 곳에서 들리는 희미한 대답처럼. 그녀의 차가운 손끝이 그의 눈썹을 스쳤다 사라진다. 그의 차디찬 귓바퀴에 눈가에서 입가로 이어지는 흉터에 닿았다 사라진다.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 - P184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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