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거의 2달 전이었는데, 초반부만 살짝 읽다가 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먼저 읽다보니 본의 아니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었다. 가장 최근에는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이 수록된 책인《빛과 실》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그간 작가님이 써오신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에세이에 수록된 작품들을 그냥 생각나는대로 읊어보자면,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별하지 않는다》정도가 떠오른다.

《빛과 실》을 읽기 전에 개인적으로는《작별하지 않는다》외의 다른 작품들은 완독을 이미 한 상태였기에 그간 읽었던 작품들의 스토리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보면서 작가님의 의도나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에세이를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아서 근 2달만에 다시 집어들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잡설이 굉장히 길었고,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경하가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인선은 목공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하게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상태인데, 자신의 집에 있는 앵무새 한 마리(아마)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자신의 집으로 가서 자기 대신에 그 새를 봐달라고 급하게 경하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에 함박눈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인선의 집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 힘든 와중에 경하는 인적이 드문 길에서 우연히 어떤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데, 경하는 그 할머니에게 말을 건넬지 여부를 마음 속으로 재고 있다. 그러면서 경하는 인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인선은 붙임성이 좋아서 처음보는 할머니를 만나도 금세 친해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경하가 인선에게 처음 보는 할머니들과 금방 친해지는 비결을 물었을 때 인선이 답한 것인데, 확실히 사람이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더 빠르게 적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는 말도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 같은 엄마가 키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 P97

그날 밤에 대해 당신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 사람이 묻습니다. - P97

이 섬에서는 손윗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선은 나에게 말해줬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외지인밖에 없어. 삼춘이라고 일단 부르면, 설령 그다음에 제주 말을 못한다 해도 섬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싶어 경계를 덜 하게 되지. - P98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 P99

입맛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101

꼭 생시 같은 꿈이 있으니까. - P104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그 밤에 군인들이 왔지. - P108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P109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P109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낭氣囊이라고 - P109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 P109

왜 그때 내 눈앞에 발생 초기 태아의 형상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심장박동이 감지될 무렵의 몸무게가 그 정도(이십 그램)라고 오래전에 들었다. 그 시기, 알에 담긴 듯 동그랗게 웅크린 태아의 형상은 새끼 새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해 보였다. - P110

새들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공룡이라는 과학잡지의 기사도 그 무렵 읽었다. 거대한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의 표면이 불타며 끓어오를 때, 대기층을 덮어 지상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물론 식물들까지 절멸시킨 화산재 속에서 몇 달을 날아 버틴 생명체가 깃털 공룡ㅡ새들이라는 것이었다. - P111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 P112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같은 걸까. - P114

그러니까 지금 인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녀의 집으로 가는 거다. - P120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야, 이래가지고.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 P120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 - P121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츰 마비되어, 그 낯선 할머니와 작별한 일이 어느 사이 멀어진다.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 P122

내가 잘못 들어서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지금 누워 있는 이 길은, 길이 아니라 건천인 것 같다. 우묵하게 파인 지형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고 그 위로 눈이 쌓인 것이다. 이 화산섬에는 하천이 거의 없고 폭우와 폭설에만 흐르는 마른 물길이 드물게 있다. 이 건천을 경계로 원래는 마을이 나누어졌다고 인선은 산책길에 말했었다. 내 너머로 사십 호 안팎의 집들이 모여 있었다고, 1948년 소개령 때 모두 불타고 사람들이 몰살되며 폐촌되었다고 했다. - P127

그러니까 그때까진 외딴집이 아니었던 거지. 내 하나 건너면 마을이 있었으니까. - P127

그 버스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 P128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 P135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 P136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6

삼만 명이었어요. - P136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 P136

그 숫자들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곳들이 모두 고립된 섬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 P137

생생한 기억들이 동시에 재생된다. 순서도, 맥락도 없다. 한꺼번에 무대로 쏟아져나와 저마다 다른 동작을 하는 수많은무용수들 같다.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 P137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 P138

잠들고 싶다.
이 황홀 속에서 잠들고 싶다.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P138

하지만 새가 있어. - P138

손끝을 건드리는 감각이 있다.
가느다란 맥박처럼 두드리는 게 있다.
끊어질 듯 말 듯 손가락 끝으로 흘러드는 전류가 있다. - P138

더 만져달라는 거야. - P141

더, 계속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 P141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 P141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 P142

조금씩 다른 농도로 칠해진 그 검은 나무들이 어떤 말을 하는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P145

움직여봐.
내가 구하러 왔어. - P149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는다.
더이상 따스하지 않은 것이.
죽은 것이. - P149

방금까지 따뜻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 - P151

솜요를 밟고 옷장에 다가서며 생각한다. 지금도 실톱이 아래에 있을까. 톱날들이 악몽을 물리치는 건가, 그 날카로운 걸 미리 꿈이 피해가는 건가. - P151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 P152

어디에 묻어야 할까.
처마 아래 상자를 두고 삽을 들며 나는 생각한다.
인선이라면 어디 묻으려 할까. - P153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 P155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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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도입부에는 화자인 나와 나의 아내로 지칭되는 사람이 등장한다. 한 가지 특이사항은 아내의 몸에 그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는 피멍이 군데군데 들어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여기 별도로 자세하게 밑줄치진 않았지만, 아내로 나오는 사람의 캐릭터가 굉장히 감성적인 듯 보였다. 무언가 자기만의 감상에 젖어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나 할까?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간선도로를 달리는 수많은 차들을 보면서 아내가 내뱉은 말인데,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아내라는 사람의 스타일을 어느정도는 대략적으로 짐작해볼 수 있었다. 뒤이어지는 내용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결코 평범하게만 흘러가지는 않을 듯하다.

......다들 어디로 저렇게 달려가는 거야? - P20

허기와 피로 때문에, 밥 떠먹을 깨끗한 숟가락 하나도 남김없이 싱크대의 개수통 안에서 썩어가고 있는 식기들 때문에 나는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게 먼 곳에서 돌아왔는데 아무도 없다는 것 때문에, 긴 비행 시간 동안 겪은 소소한 일들과 이역의 기차에서 본 풍경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에, ‘피곤해?‘라고 물어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괜찮아‘라고 강인하고 참을성 있게 대답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외로웠다. - P28

외로움 때문에 화가 났다. 내 몸이 보잘것없어 세상의 어떤 것도 나에게 엉겨붙지 않는 듯한 느낌, 어떤 옷으로도 가릴수 없는 한기, 무엇으로도 누구로부터도 위로받을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용케 스스로에게 숨겨왔을 뿐이라는 생각 때문에 화가 났다. 언제 어디에서나 혼자이며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미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 P29

이상하지요 어머니,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고 맛보는 것이 없어도 모든 것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져요. - P32

모든 것이 마음 탓이라고 - P35

나는 그것을 힘주어 깨물었다. 내가 지상에서 가졌던 단 한 여자의 열매를. 그것의 첫맛은 쏘는 듯 시었으며, 혀뿌리에 남은 즙의 뒷맛은 다소 씁쓸했다. - P39

.......지겨워, 진저리가 나. - P46

그러나 이제 이 고요한 방에 혼자 있자니 아이는 그렇게 지겨운 아빠라도 곁에 있었으면 싶다. 연신 일회용 종이 잔을 비우며 우두커니 앉아 있어도 좋고, 앞이빨로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이 연놈들을......하고 뇌까려대도 좋다. - P48

지겨워... 지겨워, 정말. - P54

기다리기로 마음먹으면 시간의 속력이 더 느려지는 것을 안다. - P57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나, 이 세상에서 더 바라는 것 없는놈입니다. 미련도 없는 놈입니다. - P59

엄마는 어떻게 아빠 같은 남자와 결혼했을까. - P61

우는 것과 좋아지는 건 뭔가 분명한 관계가 있는 거라고 - P61

꼬챙이로 붕어빵 틀을 들출 때마다 노릇노릇하게 익어 있는 물고기들을 아이는 지느러미 끝을 잡고 끄집어냈다. 아직희끗한 붕어들의 뚜껑은 도로 덮어놓았다. 태어나려면 그 뜨거운 틀 속에서 더 견뎌야 했다. 옆엣것들과 똑같이 견디지 않고는 그 안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 P76

붕어를 다 꺼낸 다음에는 틀들을 세로로 세워둬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눕혀놓으면 그 부분이 너무 달궈져서 반죽과 고물을 붓고 나면 그쪽만 타버린다. - P76

틀의 얼굴 모양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에 붕어들은 하나같이 웃는 입꼬리를 하고 있었다. 제가 웃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져있기 때문이다. - P76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 P77

.......이렇게는 못 살아! - P79

언젠가부터 아이는 모든 일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저 생겨난 일대로 숨소리를 크게 내지 않고 견디는 데익숙해져 있었다. - P91

해질녘의 개들이 어떤 기분일지 아이는 궁금하지 않다. 너무 아팠기 때문에, 오래 외로웠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이 순간 두려운 것이 없다. - P99

눈을 떠라.
눈을 떠! - P105

"......혼자 초를 그리게 되기까지는, 이렇게 삼천 장을 그대로 베껴야 된단다." - P117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거다. 부처님 앞에 절하듯이 한 장 한 장 그대로 베끼기부터 해야 되는 거야. 주름 하나 어깨선 하나 다르지 않게 하려면 그렇게 해선 안 된다." - P118

눈물로 세상을 버티려고 하지 마라. - P119

눈물 따위로 버틸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마. - P119

내 살아온 동안 쌓아온 것들이 고스란히 내 병이야...... 이제 와서 보니 후회가 되는구나, 한평생 칼을 품고 살아왔던 것 같으니. - P120

말해야 한다.
나는 다짐했다.
망설이지 말고 지금 물어야 한다. - P122

"저는 바라는 게 없어요. 그쪽이 바라는 대로 하세요" - P125

나는 그의 흉터와 용기를 함께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니, 바로 그 흉터가 나에게 안겨준 충격 때문에, 평생 숨기고 싶었을 알몸을 보여줄 만큼 나를 신뢰해준 데 대한 고마움 때문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 P127

하루하루를 인내하고 있는데, 네 몸을 견디며 살아주고 있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니. - P128

나는 처음부터 그를 사랑하지 않았다. - P134

믿기지 않는 일이었지만 나는 그의 흉터 때문에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이제 그 흉터 때문에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그의 흉터가 다만 한 겹 얇은 살갗일 뿐이라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안다는 것이 내 마음의 얇은 한 겹까지 벗겨내주지는 못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죄가 있다면 모두 나의 것이었다. - P134

삶이 얼마나 긴 것인지 몰랐던 죄. 몸이 시키는 대로 가지 않았던 죄. 분에 넘치는 정신을 꿈꿨던 죄. 분에 넘치는 사랑을 꿈꿨던 죄. 자신의 한계에 무지했던 죄. 그러고도 그를 증오했던 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가학했던 죄. - P135

나는 타인의 그것처럼 그의 흉터를 보았다. 타인에게 호의를 베풀듯이 그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 P135

세계가 다른 방식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모든 것을 낯설게, 그리고 오래 바라보았다. 선한 것과 악한 것, 의무와 책임과 방기, 진실과 거짓 따위가 내 눈앞에서 경계선을 무너뜨려갔다. 나는 그 혼란에 더 이상 놀라거나 당혹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잠자코 바라보았다. 그 간격이 나를 구해주었다. - P135

우리는 더 이상 싸우지 않았다. 나는 더 이상 그를 미워하지않았다.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나는 다시 작업에 열중할 수 있있으며, 예전보다 더욱 내 일을 사랑하게 되었다. - P135

작업실에 온종일 틀어박혀 있으면 나는 자유로웠다. 몰입만큼 자유를 주는 것이 어디 있는가? - P135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사는 것은 시간 낭비잖아요" - P137

아주 높이 올라간 상태에서 뒤돌아봤을때 후회될 만한 짓들은 하고 싶지 않았어. - P139

일단 목표가 생기면 그는 최선을 다했다. - P140

그 애는 날 원해. 상대방이 날 원한다는 걸 느낀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까마득히 잊고 지냈어. - P143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은 나 자신이었다. - P144

"그 스님이 그러더라. 관세음보살은 내 속에 있다고. 내 몸이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득해지면 그게 바로 관세음보살이라더라." - P148

어디서 이 묵묵한 인내가 나오나. - P149

어떻게 이토록 고요한 얼굴인가. - P150

"뭘 준다고 하면 ‘그럼, 그럴까?‘ 하고 좀 받어. 원, 주는 사람 성의도 생각해야지!" - P151

"의료보험료는 괜히 내? 이럴 때 쓸려구 내는 거 아냐." - P152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어야 했던 것을 어리석게 버텨왔을 뿐 - P155

......지나가는 아픔 하나 견디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다는거냐? - P156

그 가죽 안에서 악취 나는 거품처럼 부글거리고 있는 것은 오래 묵은 분노와 후회와 증오, 억울함과 자책과 부끄러움이었다. 그것들이 내 살을 속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부식시켜왔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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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 수록,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지 에크리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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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작가님이 써왔던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나볼 수 있으며, 거기에서 파생된 어떤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해서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 나오는데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투입되며, 그 퀄리티를 조금이라도 더 높이기 위한 작가님의 숨겨진 노력이 어떠했는지도 짐작해볼 수 있는 책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읽었던 작가님의 작품들에 대해 좀 더 심도있는 이해를 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 책의 중후반부 이후에는 작가님이 조그마한 정원을 가꾸며 썼던 일기를 만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작가님의 진솔함과 소박함도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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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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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제목처럼 ‘흰‘ 것과 관련된 다양한 키워드들을 소제목으로 하여 이에 관한 저자의 생각이나 에피소드를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저자의 실제 가족사史와 관련된 얘기들이 실려있기에 본문에 나온 내용들이 좀 더 진솔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뒷부분에 수록된 문학평론가의 해설은 한강 작가님이 그동안 써왔던 여러 작품들을 보다 더 심도있게 바라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맨 뒤에 수록된 작가의 말을 통해 《흰》이 나오게 된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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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평론가가 ‘시간‘의 진정한 의미와 그 본질에 대해 잠시 언급했었는데,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진다. 책에는 직접적으로 나와있진 않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불가역성‘ 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이 시간이 가진 대표적인 특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평론가는 이러한 ‘시간의 불가역성‘으로 한정지어 생각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의 시간에 대해서도 추가로 언급한다. 이는 다소 철학적인 개념이라 이해하는 것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본문을 따라 쭉 읽어나가다보면 평론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부분은 철학자 하이데거의《시간개념》 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평론가가 평론한 것인데, 한강 작가의 작품을 한층 더 심도있게 바라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확실히 평론가가 바라보는 관점이 나같은 일반인들과는 그 깊이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 - P165

현재의 살아남은 자가 회복되는 것은 과거의 죽어가고 있던 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현재의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소년이 오는 것이다. 소년의 도움으로 인간은 본래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시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키는 것이다. - P166

우리는 시계가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의 바깥에서 과거와 만날 수 있으며 이 만남을 통해서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 P166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 P166

죽은 자의 도움으로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끌어안으며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궁극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본래적 시간으로 뛰어드는 것,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 일상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시간의 바깥에 있는 것이니까. 시간의 바깥에서 시계는 멈추고 눈 한 송이는 전혀 녹지 않는다. - P167

달콤한 것을 먹여 사랑스럽게 보살펴도 우리 육신은 반드시 무너지고, 비단으로 감싸 곱게 보호해도 목숨에는 끝이 있네. _원효 스님의《발심수행장》 - P173

와지엔키 공원의 숲길을 목적 없이 걸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흰》이란 책에 대해, 그렇게 걸으며 생각했다. - P174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 P174

1944년 구월 시민 봉기 이후 히틀러가 본보기로 절멸을 지시했던 도시, 폭격으로 95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 부서진 흰 석조건물들의 잿빛 잔해만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던 칠십 년 전의 그 도시 - P175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 이 책이 나에게 숨처럼 불어넣어준 것 - P176

우리 안의 깨어지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어떻게 훼손되지 않는 부분을 믿어야 했다ㅡ믿고자 할 수밖에 없었다ㅡ.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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