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포스팅의 마지막 부분에서 평론가가 ‘시간‘의 진정한 의미와 그 본질에 대해 잠시 언급했었는데, 오늘은 이와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진다. 책에는 직접적으로 나와있진 않지만 본문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는 ‘시간의 불가역성‘ 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뒤로 돌아갈 수 없는 어떤 것이 시간이 가진 대표적인 특성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평론가는 이러한 ‘시간의 불가역성‘으로 한정지어 생각하는 차원을 뛰어넘어 시공을 초월하여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의 시간에 대해서도 추가로 언급한다. 이는 다소 철학적인 개념이라 이해하는 것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지만 본문을 따라 쭉 읽어나가다보면 평론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부분은 철학자 하이데거의《시간개념》 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평론가가 평론한 것인데, 한강 작가의 작품을 한층 더 심도있게 바라보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확실히 평론가가 바라보는 관점이 나같은 일반인들과는 그 깊이에 있어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현재가 과거를 돕고 산 자가 죽은 자를 돕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돕는다. - P165
현재의 살아남은 자가 회복되는 것은 과거의 죽어가고 있던 자와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현재의 살아남은 자들을 위해 소년이 오는 것이다. 소년의 도움으로 인간은 본래적 미래를 향해 나아가며 시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질을 전개시키는 것이다. - P166
우리는 시계가 째깍거리며 흘러가는 시간의 바깥에서 과거와 만날 수 있으며 이 만남을 통해서만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 P166
"우리가 시간 밖에 있으니까요." - P166
죽은 자의 도움으로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끌어안으며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울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궁극의 가능성으로 되돌아가는 것, 본래적 시간으로 뛰어드는 것,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는 것, 일상인의 용어로 말하자면 시간의 바깥에 있는 것이니까. 시간의 바깥에서 시계는 멈추고 눈 한 송이는 전혀 녹지 않는다. - P167
달콤한 것을 먹여 사랑스럽게 보살펴도 우리 육신은 반드시 무너지고, 비단으로 감싸 곱게 보호해도 목숨에는 끝이 있네. _원효 스님의《발심수행장》 - P173
와지엔키 공원의 숲길을 목적 없이 걸었다.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쓰고 싶었던《흰》이란 책에 대해, 그렇게 걸으며 생각했다. - P174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과 ‘흰‘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흰‘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흰‘ 책이었다. - P174
1944년 구월 시민 봉기 이후 히틀러가 본보기로 절멸을 지시했던 도시, 폭격으로 95퍼센트 이상의 건물들이 파괴된 도시, 부서진 흰 석조건물들의 잿빛 잔해만이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던 칠십 년 전의 그 도시 - P175
고독과 고요, 그리고 용기. 이 책이 나에게 숨처럼 불어넣어준 것 - P176
우리 안의 깨어지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는, 어떻게 훼손되지 않는 부분을 믿어야 했다ㅡ믿고자 할 수밖에 없었다ㅡ. - P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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