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한 것은 거의 2달 전이었는데, 초반부만 살짝 읽다가 작가님의 다른 책들을 먼저 읽다보니 본의 아니게 우선순위에서 밀려났었다. 가장 최근에는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감이 수록된 책인《빛과 실》이라는 에세이를 읽었는데, 그 책에서 그간 작가님이 써오신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만나볼 수 있었다. 에세이에 수록된 작품들을 그냥 생각나는대로 읊어보자면, 《채식주의자》,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바람이 분다, 가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별하지 않는다》정도가 떠오른다.

《빛과 실》을 읽기 전에 개인적으로는《작별하지 않는다》외의 다른 작품들은 완독을 이미 한 상태였기에 그간 읽었던 작품들의 스토리들을 다시금 머릿속에 떠올려보면서 작가님의 의도나 생각을 되짚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에세이를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샘솟아서 근 2달만에 다시 집어들게 된 것이다.

개인적인 잡설이 굉장히 길었고, 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이 책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경하가 제주도에 있는 인선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인선은 목공일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인해 손가락이 절단되어 급하게 서울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상태인데, 자신의 집에 있는 앵무새 한 마리(아마)가 죽을 수도 있다면서 자신의 집으로 가서 자기 대신에 그 새를 봐달라고 급하게 경하에게 부탁한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제주도에 함박눈이 내리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인선의 집까지 가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 힘든 와중에 경하는 인적이 드문 길에서 우연히 어떤 할머니를 만나게 되는데, 경하는 그 할머니에게 말을 건넬지 여부를 마음 속으로 재고 있다. 그러면서 경하는 인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는데 인선은 붙임성이 좋아서 처음보는 할머니를 만나도 금세 친해지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경하가 인선에게 처음 보는 할머니들과 금방 친해지는 비결을 물었을 때 인선이 답한 것인데, 확실히 사람이란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서 더 빠르게 적응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추가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 좋다는 말도 복잡다단한 세상살이에 조금이라도 빨리 적응하는데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할머니 같은 엄마가 키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 P97

그날 밤에 대해 당신이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지 이 사람이 묻습니다. - P97

이 섬에서는 손윗사람을 삼촌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인선은 나에게 말해줬다.
아저씨 아주머니, 할머니 할아버지. 이렇게 부르는 사람은 외지인밖에 없어. 삼춘이라고 일단 부르면, 설령 그다음에 제주 말을 못한다 해도 섬에서 오래 산 사람인가 싶어 경계를 덜 하게 되지. - P98

어떤 기쁨과 상대의 호의에도 마음을 놓지 않으며, 다음 순간 끔찍한 불운이 닥친다 해도 감당할 각오가 몸에 밴 듯한, 오래 고통에 단련된 사람들이 특유하게 갖는 침통한 침착성으로. - P99

입맛을 쉽게 잃지 않는 사람은 오래 산대. 엄만 오래 사실 거야. - P101

꼭 생시 같은 꿈이 있으니까. - P104

인내와 체념, 슬픔과 불완전한 화해, 강인함과 쓸쓸함은 때로 비슷해 보인다. 어떤 사람의 얼굴과 몸짓에서 그 감정들을 구별하는 건 어렵다고, 어쩌면 당사자도 그것들을 정확히 분리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05

그 밤에 군인들이 왔지. - P108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이 물방울만큼.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 P109

이상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닿았던 감각은 불에 데었던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아닌데 살갗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 P109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낭氣囊이라고 - P109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 P109

왜 그때 내 눈앞에 발생 초기 태아의 형상이 떠올랐는지 모른다. 심장박동이 감지될 무렵의 몸무게가 그 정도(이십 그램)라고 오래전에 들었다. 그 시기, 알에 담긴 듯 동그랗게 웅크린 태아의 형상은 새끼 새와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비슷해 보였다. - P110

새들은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공룡이라는 과학잡지의 기사도 그 무렵 읽었다. 거대한 소행성과의 충돌로 지구의 표면이 불타며 끓어오를 때, 대기층을 덮어 지상의 거의 모든 동물들은 물론 식물들까지 절멸시킨 화산재 속에서 몇 달을 날아 버틴 생명체가 깃털 공룡ㅡ새들이라는 것이었다. - P111

건강해 보여도 방심할 수 없어.
아무리 아파도 새들은 아무렇지 않은 척 횃대에 앉아 있대. 포식자들에게 표적이 되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견디는 거야. 그러다 횃대에서 떨어지면 이미 늦은 거래. - P112

그렇게 두 개의 시야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건지 나는 알고 싶었다. 저 엇박자 돌림노래 같은 것, 꿈꾸는 동시에 생시를 사는 것같은 걸까. - P114

그러니까 지금 인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든,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그녀의 집으로 가는 거다. - P120

이게 운좋은 거냐. 날씨가 야, 이래가지고. 이 좋은 운을 타고 어떤 위험 속으로 떨어지고 있는 건가? - P120

언제나 그렇듯 통증은 나를 고립시킨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몸이 시시각각 만들어내는 고문의 순간들 속에 나는 갇힌다. 통증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시간으로부터, 아프지 않은 사람들의 세계로부터 떨어져나온다. - P121

두통의 강도가 높아질수록 내 마음은 차츰 마비되어, 그 낯선 할머니와 작별한 일이 어느 사이 멀어진다. 불안도, 구해야 할 새에 대한 생각도, 인선에 대한 마음까지도 통증이 예리하게 그어놓은 금 바깥으로 빠져나간다. - P122

내가 잘못 들어서서 미끄러져 내려왔고 지금 누워 있는 이 길은, 길이 아니라 건천인 것 같다. 우묵하게 파인 지형에 살얼음이 얼어 있었고 그 위로 눈이 쌓인 것이다. 이 화산섬에는 하천이 거의 없고 폭우와 폭설에만 흐르는 마른 물길이 드물게 있다. 이 건천을 경계로 원래는 마을이 나누어졌다고 인선은 산책길에 말했었다. 내 너머로 사십 호 안팎의 집들이 모여 있었다고, 1948년 소개령 때 모두 불타고 사람들이 몰살되며 폐촌되었다고 했다. - P127

그러니까 그때까진 외딴집이 아니었던 거지. 내 하나 건너면 마을이 있었으니까. - P127

그 버스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 - P128

물은 언제까지나 사라지지 않고 순환하지 않나. 그렇다면 인선이 맞으며 자란 눈송이가 지금 내 얼굴에 떨어지는 눈송이가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인선의 어머니가 보았다던 학교 운동장의 사람들이 이어 떠올라 나는 무릎을 안고 있던 팔을 푼다. 무딘 콧날과 눈꺼풀에 쌓인 눈을 닦아낸다. 그들의 얼굴에 쌓였던 눈과 지금 내 손에 묻은 눈이 같은 것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3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다.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 P134

모른다. 새들이 어떻게 잠들고 죽는지.
남은 빛이 사라질 때 목숨도 함께 끊어지는지.
전류 같은 생명이 새벽까지 남아 흐르기도 하는지. - P135

물뿐 아니라 바람과 해류도 순환하지 않나. 이 섬뿐 아니라 오래전 먼 곳에서 내렸던 눈송이들도 저 구름 속에서 다시 응결할 수 있지 않나. - P136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 P136

삼만 명이었어요. - P136

대만에서도 삼만 명, 오키나와에서는 십이만 명이 살해되었는데요. - P136

그 숫자들을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곳들이 모두 고립된 섬이었다는 것에 대해서도. - P137

생생한 기억들이 동시에 재생된다. 순서도, 맥락도 없다. 한꺼번에 무대로 쏟아져나와 저마다 다른 동작을 하는 수많은무용수들 같다. 몸을 펼친 채 단박에 얼어붙은 순간들이 결정結晶처럼 빛난다. - P137

모르겠다. 이것이 죽음 직전에 일어나는 일인지.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결정이 된다. 아무것도 더이상 아프지 않다. 정교한 형상을 펼친 눈송이들 같은 수백 수천의 순간들이 동시에 반짝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모든 고통과 기쁨, 사무치는 슬픔과 사랑이 서로에게 섞이지 않은 채 고스란히, 동시에 거대한 성운처럼 하나의 덩어리로 빛나고 있다. - P138

잠들고 싶다.
이 황홀 속에서 잠들고 싶다.
정말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 P138

하지만 새가 있어. - P138

손끝을 건드리는 감각이 있다.
가느다란 맥박처럼 두드리는 게 있다.
끊어질 듯 말 듯 손가락 끝으로 흘러드는 전류가 있다. - P138

더 만져달라는 거야. - P141

더, 계속 쓰다듬어달라는 거야. - P141

저 너머에 뭔가 있다. 빛을 발하는 무엇인가가. - P141

철문이 활짝 열려, 마치 빛의 섬 같은 그곳에서 불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가 저기 먼저 와 있나, 몸서리치며 생각한 다음 순간 깨닫는다.
그날 이후 아무도 오지 않은 거다. - P142

조금씩 다른 농도로 칠해진 그 검은 나무들이 어떤 말을 하는 것 같다고 나는 느낀다. 먹을 칠하는 일은 깊은 잠을 입히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오히려 악몽을 견디는 사람들처럼 느껴지는 걸까? 칠하지 않은 생나무들은 표정도 진동도 없는 정적에 잠겨 있는데, 이 검은 나무들만이 전율을 누르고 있는 것 같다. - P145

움직여봐.
내가 구하러 왔어. - P149

부드러운 것이 손끝에 닿는다.
더이상 따스하지 않은 것이.
죽은 것이. - P149

방금까지 따뜻한 피가 돌았던 듯 생생한 적막에 싸인 조그만 몸을 들여다보는 동안, 그 끊어진 생명이 내 가슴을 부리로 찔러 열고 들어오려 한다고 느낀다. 심장 안쪽까지 파고들어와, 그게 고동치는 한 그곳에서 살아가려 한다. - P151

솜요를 밟고 옷장에 다가서며 생각한다. 지금도 실톱이 아래에 있을까. 톱날들이 악몽을 물리치는 건가, 그 날카로운 걸 미리 꿈이 피해가는 건가. - P151

이해할 수 없다. 아마는 나의 새가 아니다. 이런 고통을 느낄 만큼 사랑한 적도 없다. - P152

어디에 묻어야 할까.
처마 아래 상자를 두고 삽을 들며 나는 생각한다.
인선이라면 어디 묻으려 할까. - P153

내가 없는 그곳에 인선이 있고, 그녀가 없는 이곳에 내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 P155

나는 생각한다. 내가 건천으로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그전에 물을 먹일 수 있었을까. 그 순간 제대로 길을 택해 내처 걸어왔다면. 아니, 그전에 터미널에서 더 기다려 산을 가로지르는 버스를 탔다면. - P1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