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부끄럽다‘라는 말은, 우리 마음 중에서도 가장 맨살에 닿아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나의 막이 드리워져 있어야 할 어딘가가 건드려졌거나, 그 막이 확 걷혀졌을 때의 기분을 묘사하는 말이니까.
나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개인으로의 매력을 유지하는 남녀의 공통점으로 ‘부끄러움을 잃지 않는 점‘을 꼽는 편이다.
또 잘못이 밝혀져도 뻔뻔스럽게 구는 사람을 손가락질할 때도 ‘부끄러움이 없는 자‘라고 하지 않던가.
부끄러움은, 그 말이 쓰일 때가 주로 당황스러운 상황이라 차분히 마주하고 살핀 적이 없을 뿐, 우리가 지켜야 할 아주 소중한 마음에 붙어 있는 말
호감 앞에 조심스러운 마음, 굳은살 박이지 않은 양심이 긁히는 마음. 각 마음은 질감과 온도는 다르지만 모두 보들보들한 맨살이 남아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다음에 만나는 ‘부끄러움‘은, 느닷없이 품었다 내팽개치지말고 잠깐이라도 바라보다 보내줘야겠다.
‘반짝이다‘, ‘빛나다‘라는 말이 시각적인 기억을 주로 환기시키는 반면, ‘찬란하다‘는 표현은 내겐 유리조각들이 부딪혀 챙그렁대는 소리가 나는, 공감각적인 그것에 가깝다.
뜨겁게 빛나는 태양보다는, 그 빛이 내리쬐어 물결에 빛나는 모습이 ‘찬란하다‘와 어울리는 것 같다.
아이폰 유저에게 국한된 비유겠지만, ‘반짝이다‘가 일반 사진이라면 ‘찬란하다‘는 1초 정도의 움직임까지 담아내는 라이브포토로 포착될 수 있는 느낌이다.
나는 가끔 세상의 모든 형용사들이 가진 기가 막힌 표현력에 감탄하게 되는데, 이는 주로 발음에서 온다.
‘반짝‘하고 말할 때 ㄴ받침을 부드럽게 도움닫기 삼아 ‘짝‘ 하고 내뱉는 발음은 무언가에 빛이 닿아서 튕겨 나오는 모습 그자체인 것 같고, 찬란하다는 말의 실제 발음인 ‘찰-란‘은 ‘찰‘의 받침 ㄹ과 ‘란‘의 자음 ㄹ이 파도 능선처럼 이어지는 기분이 들어 앞서 비유했던 것처럼 햇살이 닿은 물결의 느낌인 것이다. 게다가 ‘차‘ 하면서 시작되는 첫 음절은 퍼져나가는 빛이 혀에서 구현되는 착각이 들지 않는가.
‘찬란하다‘는 표현은 내게 다른 유의어들에 비해 사람들로부터 각기 다른 기억들을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제각각인 모양의 아련한 행복들을 집합시키는 말. 이 정도면 작사가로서 편애할 만하지 않을까?
미디어에서 넘치기 시작하는 말들은 대개 지금을 살아가는 이들의 ‘갈증의 지표‘다
‘지친다‘는 말의 앞에는 각자만의 외롭고 긴 시간이 널려 있다. 너무 쉽고 이른 지침이 아니라면, 지침을 느낄 때가 바로 스스로를 인정하고 당근을 줘도 될 때라는 말이다.
말에는 힘이 있는데 이 ‘지친다‘는 말은 그 힘이 유독 세다. ‘지친다‘고 말을 뱉는 순간, 멘탈을 잡고 있던 모든 코어 근육에 힘이 풀리는 느낌이 드니 말이다. 보통 저 말을 뱉으며 주저앉거나 눈물을 터뜨리는 것도 그 때문일 테다.
‘어감‘이라는 것은 고유한 것이기보다는 그단어를 사용하면서 얻어진 기억들이 쌓여 만들어진다.
최초에 어떤 감정을 단어로 정의하는 과정에서는 분명 창의적 개입이 있지 않았을까
나는 이슬이 맺혀 뚝뚝 떨어지는 소리가 말로 둔갑해서 ‘슬프다‘가 되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이 말이 가진 발음 특성이 감정을 기가 막히게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물기 없이는 말맛이 덜한 ‘슬픔‘의 발음은 이 감정이 눈물에서 비롯된다는 태생과도 닮았다.
‘서럽다‘는 말은 슬프다는 말이 담는 아픈 마음을 조금 더 구체화한다.
서러움은 슬픔이 조금 더 헐벗은, 맨몸의 말 같아서 더 아리다.
누군가의 슬픔 앞에서 그 이유를 헤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서러움은 일단 따뜻한 집에 들여 밥 한 술 떠먹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나는 좀 더 주체할 수 없는 아픔을 표현하고 싶을 때는 슬픔 대신 서러움을 쓴다. 설명 없이 감정을 전달하기에 더 적확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서러움이 아이의 감정 결을 가졌다면 서글픔은 좀 더 성숙한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서글픈 누군가는 슬픈 누군가, 서러운 누군가와 달리 본인 스스로는 정작 슬프지 않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다.
서글픔에는, 왠지 모르게 그 풍경에서 느껴지는 애틋한 아픔이 담겨 있다. 즉 나의 감정이 개입된 말인것이다.
저도 종종 이야기하는 게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오히려 눈물을 참는 게 아니라 흘려야 할 때 흘려주는 거다‘라고 이야기해요. 그게 어떻게 보면 자연스러운 스트레스 관리가 되기 때문인 거 같아요.
기침이 나고 콧물이 흐르는 것은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와 싸운 내 몸이 이를 게워 내는 현상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깨끗이 배출해내는 것이 매너가 아닌 필수적인 행동요건인 이유다.
언제부터 슬픔이 사람들로부터 되도록 감춰야 하는 감정이 된 건진 몰라도,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은 나의 ‘약한‘ 모습을 온 동네에 소문내는 행동이 되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자연스런 방어 기제 아니었나 싶다.
계속해서 눈물을 참는 것은, 격렬하게 운동을 하고 나오는 땀이 흐르지 못하게 온몸을 랩으로 감싸는 것과 같은 일이다.
독소가 밴 피부에 두드러기가 올라오듯, 눈물을 꾹꾹 참아내는 건 힘들다고 외치는 내 마음을 꽁꽁 묶어두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두드러기만 나면 다행이지만, 문제는 이러다 보면 나중엔 힘들 때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방법조차 모르는 어른이 된다는 거다.
행위는 정신을 지배하기에, 눈물을 참는게 습관이 되면 나 스스로 ‘나는 지금 힘든 게 아니다‘라고 속이는 것도 가능해진다. 마음은 그렇게 방치되고, 어느 날 그러다 완전히 고장나버렸을 때 ‘대체 왜 이런지 모르겠다‘ 면서 고통을 호소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런 경우는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했던 본인에게 그 이유가 있을 확률이 높다.
나를 들여다보고 챙긴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만 해야 하는 일이 아니다. 그렁그렁 맺히는 눈시울도 내 몸이 내가 들어줬으면 하고 중얼대는 혼잣말이고, 펑펑 쏟아져 나오는 오열은 내가 내게 살려달라고 외치는 울부짖음이다.
묻고 가는 것은 주로 아픔이고 품고 가는 것은 연정의 속성을 띈다.
나는 묻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려는 모습이, 품는 것은 무언가가 내 삶의 일부가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묻는 것은 생명력이 사그라들길 바랄 수 있고 품는 것은 무럭무럭 자라나길 원할 수 있다.
우리는 가슴에 잊어야 하지만 도저히 그리 되지 않는 것들을 묻고, 키우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는 것들을 품는다.
감정이 탄생하는 순간을 상상해보면 단어의 속성이 더 와 닿는 경우가 많다.
어떤 감정은 아래에서 위로 나무처럼 자라고, 또 어떤 감정은 위에서 아래로 비처럼 내린다.
‘분노‘와 ‘용기‘는 아래에서 위로 움직인다. 그러고 보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용기가 샘솟는다‘고들 말한다. 이 두 감정은 공통적으로 작은 것들이 켜켜이 쌓여 일순간 ‘펑‘ 하고 터진다는 공통점이 있다.
‘분노‘는 짜증이 난다거나 삐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우리가 분노했다고 표현하는 건, 더이상 참지 못해 어떤 행동을 하거나 하겠다는 결심을 할 때다.
삐짐이나 짜증이 후루룩 끓어오르는 물이라면 분노는 끓다가 넘치는 물이다. 그리고 단순히 하나의 사안으로 건드려지는 게 아닌, 히스토리가 있는 감정이다.
작은 짜증들이 쌓여, 혹은 나만의 역사로 만들어진 신념이 건드려질 때 우리는 분노라는 걸 한다. 물이 역류하는건 보이지 않는 곳에 물이 가득 차서인 것처럼, 나의 이성이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을 때 분노는 터져 나온다.
용기는 분노처럼 ‘오르는‘ 감정이지만, 분노가 주로 외부 자극에 뿌리를 둔다면 용기는 내 안에 쌓인 결심들이 모여 탄생한다.
분노로 뛰쳐나간 발걸음은 다시 돌아오는 것이 대체로 옳다면 용기로 도약된 행보는 새로운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재밌는 건, 어떤 용기는 분노에서 비롯된다는 거다. 결국 무엇이 쌓여 터지는 감정이냐에 따라 좋고 나쁜 게 결정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사랑과 행복은 비처럼 내려오는 감정들이다. 나의 의지로써가 아니라 누군가 갑자기 연 커튼 너머 햇살처럼 쏟아져 내린다. 계획을 세워 준비할 수 없다는 점도 닮았다.
아래에서 위로 오른다고 느끼는 감정들은 그게 터지든 열리는 내가 그 꼭지를 가진 것에 비해,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감정들은 어딘가에서 열린 꼭지 탓이지, 내 것이 아니라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이 감정들은 어떤 형태로 탄생을 했든, 결국에는 유기적으로 물고 물린다. 어떤 사랑은 ‘용기‘로 쟁취되고, 그로 인해 ‘행복‘을 느끼며, 지켜야할 사람 때문에 ‘분노‘하기도 하지 않던가.
소란스럽다는 말에는 그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힘이 있다. 시끄러움은 그 소동의 주체가 한 곳이라면, 소란스러움은 작은 무리에서 비롯된다. 또 소란스러우려면 그 주변에는 그와 대비되는 차분한 더 큰 무리가 있어야 표현이 성립된다.
나에게 외로움은 반드시 채워져야 하는 결핍이 아니다. 오히려 오롯이 내게 집중할 수 있는 소중한 감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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