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일 전 리뷰를 썼던《최재천의 공부》라는 책의 p.158에 잠깐 등장하기도 했었던 단어인 ‘숙론‘ 을 책으로 좀 더 자세히 만나본다.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찾으려는 것이다. - P5

배움 learning은 경험에 따라 행동이 변화하는 걸 일컫는데, - P6

유전자 수준에서 이미 각인되어 타고난 행동이다. 우리는 이를 본능instinct이라 부른다. - P6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 세계에도 배움은 넘쳐난다. 그러나 가르침 teaching은 거의 없거나 매우 드물다. 이제 곧 둥지를 떠나야 할 새끼들에게 나는 법을 가르치는 듯 보이는 어미 새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딱히 가르치는 것 같지 않다. 둥지에서 저만치 먼저 날아가 나뭇가지에 앉아 새끼가 날아 나올 때까지 기다릴 뿐, 꽁지깃을 어떻게 세우고 가슴근육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일일이 설명하고instructing 지도하지coaching 않는다. - P8

침팬지 엄마는 짜증을 내지도, 설명하느라 열을 올리지도, 그리고 시범을 보이며 지도하느라 애쓰지도 않는다. 그저 아이가 무수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스스로 체득할 때까지 무한한 인내심을 품고 묵묵히 기다려줄 뿐이다. - P9

나는 대한민국 교육이 안고 있는 온갖 문제점은 물론,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갈등도 상당부분 토론 부재에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가면 갈수록 창의성이 줄어드는 우리 교육의 모순을 타개할 수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안으로 토론 학습을 제안한다. - P11

자연스럽게 의견이 갈리고 쟁점 또한 풍부한 정치는 토론을 학습할 수 있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한 주제다. - P12

무엇보다 토론 수업을 진행할 교사들을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 교실을 자칫 정치판 싸움터처럼 만들지 않도록 하는 책임은 일단 교사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 P12

우리 사회에서 토론 문화가 사라진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역시 일제강점기의 교육이 제공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학문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오로지 식민화를 위한 획일적인 교육에 집중하는 가운데 토론 학습은 애당초 들어설 자리가 없었다. - P13

일본은 우리말을 말살하고 식민정책을 시행하려고 철저하게 주입식이고 수동적인 교육을 실시했다. 30여 년에 걸친 일제의 교육은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에 정부 주도의 교육제도, 도구주의 교육관, 학력 중시 등 여러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일제의 교육이 우리 교실에서 토론 문화를 말살한 폐단을 지적하고 싶다. - P14

서양에서 discussion은 남의 얘기를 들으며 내 생각을 다듬는 행위다. 이걸 요즘 우리는 ‘토론‘이라고 번역해 사용하는데, 지금 우리가 하는 토론은 서양의 discussion 과는 많이 다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토론에 임하는 자세를 보면 심히 결연하다. - P15

한때 <백지연의 끝장토론>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제목부터 자기모순이다. 토론은 끝장을 보려 도모하는 행위가 아니다. - P15

기어코 상대를 제압하겠다는 경기로 충만해 토론에 임하면 남의 혜안이 비집고 들어올 여지가 없다. ‘시인과 촌장‘의 노래를 조성모가 다시 불러 널리 알려진 <가시나무>의 노랫말처럼 마음속에 나 자신이 너무 많아 타인의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지금 우리가 주로 하는 행위는 discussion이 아니라 debate에 가깝다. - P16

Debate는 주로 ‘논쟁‘이라고 번역하지만 우리는 지금 논쟁 수준에도 못 미치는 ‘언쟁‘, 즉 치졸한 말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 P16

차라리 debate를 ‘토론‘으로 규정하고 이제부터는 ‘토의 discussion‘를 하자는 제안도 있다. 토의가 토론보다 어감상 덜 논쟁적이라는 느낌이 들지 모르지만, ‘의‘와 ‘논‘의 자원字源을 들여다보면 좀 뜻밖이다. - P16

의議자는 ‘말씀 언言‘과 ‘옳을 의義‘가 합쳐진 것인데, 義는 양의 머리를 창에 꽂은 제사 장식을 형상화한 글자로 올바름을 신에게 아뢴다는 뜻이다. 반면 논論자의
‘둥글 륜侖‘은 죽간을 둥글게 말아놓은 모습을 그린 것으로 의견을 두루 주고받는 과정을 뜻한다. ‘의‘가 다분히 하향 top-down 식인데 반해 ‘논‘은 상향 bottom-up식이라 훨씬 민주적이다. - P16

사실 문제는 ‘토‘에 있다. ‘칠 토討‘자는 ‘공격하다‘와 ‘두들겨 패다‘에서 ‘비난하다‘와 ‘정별하다‘라는 의미까지 품고 있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그동안 제대로 토론해온 셈이다. - P16

김언종 교수에 따르면 토討자에는 ‘견책하다‘ 혹은 ‘정벌하다‘라는 의미도 있지만 원래는 ‘대화로 합의에 이르다‘라는 뜻을 지닌다고 한다. 그러나 세숙은 함께 둘러앉아 토론한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나름 세심하게 검토했을 뿐이다. - P17

이런 연유로 나는 기왕에 너무 많이 오염된 용어인 ‘토론‘ 대신 ‘숙의熟議‘ 또는 ‘숙론熟論‘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여럿이 특정 문제에 대해 함께 깊이 생각하고 충분히 의논하는 과정을 뜻하는 말로 개인적으로 숙론이 더 마음에 든다. - P17

굳이 이에 상응하는 영어 표현을 찾으라면 나는 ‘discourse‘를 제안하고 싶다. 영어권에서 discourse는 dialogue (담화)나 discussion(토론)의 좀 있어 보이는 표현으로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토론serious discussion을 의미한다. - P17

Consilience는 한마디로 ‘지식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 P18

이 세상 모든 것은 다른 것과 조화를 이루며 통합되어 있으며 문맥을 고려하지 않은채 그들을 분리하면 그들만의 고유한 존재의 이유가 손상될 수밖에 없다 - P18

숙론은 상대를 제압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나와 상대의 생각이 다른지 숙고해보고 자기 생각을 다듬으려고 하는 행위다. 서로 충분히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이해하고 인식 수준을 공유 혹은 향상하려 노력하는 작업이다. - P19

숙론은 ‘누가 옳은가 Who is right?‘가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 What is right?‘를 찾는 과정이다. - P19

우리나라의 기적적인 성공을 가능하게 한 교육은 이제 원동력을 잃었다. 내가 읽고 듣고 만난 4차산업혁명 전문가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동의한다. 지금 우리 교육으로는 결코 4차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고. 그렇다면 우리 교육은 바뀌어야한다. 근본적이고 혁명적으로. 진화학자가 할 얘기인지 모르지만, 우리 교육은 점진적 진화 evolution를 기대할 게 아니라 과감한 혁명 revolution을 도모해야 한다. - P20

우리 교육이 다음 단계로 도약하려면 무엇보다 학교 현장에 숙론 수업이 도입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학생들이 학교에서 함께 둘러앉아 무엇이 옳은가를 찾아가는 훈련을 받고 사회에 진출하면 대한민국은 드디어 성숙한 민주국가가 되리라 확신한다. - P21

일상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서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대한민국 국민이 유독 토론만큼은 못해도 너무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유는 지극히 간단하다. 배우지 못해서 그렇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부터 모든 학습을 토론으로 하는 서양과 달리 우리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제대로된 토론 수업을 받아본 사람이 거의 없다. 배워본 적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학교에서 가르치면 능히 잘할 수 있다. - P22

정규교육에 토론이 반영되기 시작하면 머지않아 사회 곳곳에서 토론의 꽃이 활짝 피어날 것이다. 토론의 꽃이 만개할 날을 대비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토론을 이끌 진행자를 양성해야 한다. - P22

탁월한 사회자 moderator 혹은 진행중재자 facilitator가 훌륭한 토론자를 길러낸다. - P23

갈등이 수면 아래 가라앉기보다 세상에 드러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가 그만큼 선진화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이런 갈등들을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이고 따뜻한 사회를 만들어갈지가 우리 앞에 주어진 숙제다. - P28

"유전자의 50퍼센트를 공유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도 이해가 엇갈리는데 하물며 혈연으로 맺어지지 않은 배우자간의 갈등은 얼마나 더 격렬할까?" - P31

갈등의 관점에서 행동을 관찰하면 훨씬 더 명확한 분석이 가능하다. - P31

좌파와 우파 혹은 좌익과 우익이라는 말은 프랑스혁명 이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1789년 혁명이 끝나고 소집된 국민의회에서 의장석을 기준으로 왼쪽에 공화파가 앉고 오른쪽에 왕당파가 앉은 데서 유래했다고한다. 1792년 공화파가 주도한 국민공회에서도 왼편으로는 개혁적 자코뱅파 의원들, 오른편에는 보다 보수적 지롱드파 의원들, 그리고 중간에는 중도 성향의 마레당 의원들이 자리하며 개혁에 소극적이고 다분히 수구적 세력을 우익 또는 우파, 상대적으로 변화를 갈구하는 진보적 세력을 좌익 또는 좌파로 나누는 관행이 자리 잡았다. - P35

우리 모두는 누구나 보수와 진보의 긴 연속선 continuum 위 어딘가에 놓인다. 그것도 모든 이슈에 있어서 정확하게 늘 동일한 지점에 있지 않고 이슈마다 연속선상 위치가 달라진다. 흑색과 백색만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음영의 회색이 무궁무진하게 존재한다. - P37

지역 갈등은 영남과 호남 간 대립이 특별히 부각된 것일 뿐 지역 간 감정의 골은 우리나라 전국 여기저기에 파여 있다. 때론 문화적으로 제법 유래가 깊은 감정의 골도 있지만 대부분은 경제적 이득 때문에 불편하게 갈라서는 경우가 많다. - P42

인도 사회에는 대대로 내려오는 카스트제도가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어 사람들은 제가끔 자기 처지를 운명처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 P43

"알면 사랑한다. 사랑하면 표현한다" - P48

환경 갈등은 본질적으로 세대 갈등이다. 누가 제일 먼저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환경은 미래 세대로부터 빌려 쓰는 것"은 이제 누구나 아는 말이 되었다. - P55

적어도 우리 세대가 누린 만큼 미래 세대도 누릴 수 있도록 자연을 잘 보존해 물려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지속 가능성 sustainability"의 기본개념이다. - P56

나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경제성과 생태성의 평형을 모색하는 행위‘라고 규정한다. 경제적 타당성 economic feasibility을 의미하는 ‘경제성‘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늘 쓰고 살지만 ‘생태성‘은 다소 생소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학에서 경제성의 개념이 나왔듯이 생태학도 ‘생태계의 온전한 정도ecological integrity‘, 즉 생태성을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다. - P57

경제학eco-nomics과 생태학eco-logy은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다. ‘Eco‘는 ‘집house‘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둘은 어쩌면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형제일지도 모른다. 그동안 경제학 형님은 부자로 살았고 생태학 아우는 그야말로 손가락을 빨았다. 그런데 요즘 형님이 아우를 찾는다. 경제학과 생태학이 만나기 시작했다. 개발과 보전은 더 이상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막대한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대형 국책 사업은 경제 예비타당성뿐 아니라 생태 예비타당성 조사도 받아야 한다. - P58

‘소통은 원래 안 되는 게 정상‘ - P64

우리는 너무나 쉽게 소통이란 조금만 노력하면 잘되리라 착각하며 산다. - P64

동물행동학자들은 오랫동안 동물 소통 animal communication을 상호 협력적 행동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1978년 존 크레브스John R. Krebs와 니컬러스 데이비스 Nicholas B. Davies는 《행동생태학: 진화적 접근Behavioral Ecology: An Evolutionary Approach》에서 소통을 기본적으로 송신자sender가 수신자receiver를 조종하려는 의도적 행위로 규정하며 전혀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 P65

소통은 협력이 아니라 밀당의 과정이다. 그렇다면 소통은 당연히 일방적 전달이나 지시가 아니라 지난한 숙론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 얻어지는 결과물이다. - P65

교육이란 본디 먼저 사회에 진출한 세대가 살아보니 이런저런 필요한 것들이 있다고 판단해서 사회 진입을 앞둔 다음 세대로 하여금 기성세대와 더불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우리 교육 현장은 공존을 위한 협력과 배려를 배우는 곳이 아니라 오로지 신분 상승을 꾀하는 경쟁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 P70

기와가 깨져 흩어지고 흙이 무너진다는 뜻의 사자성어로 와해토붕瓦解土崩이라는 말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은 순서가 뒤바뀐 느낌이다. 흙, 기본이 무너져 내리며 여기저기에서 기왓장들이 쪼개지고 있는 형국이다. - P71

일찍이 그 어느 나라도 경험해본 적 없는 사상 초유의 저출생으로 인해 교육 구조의 뼈대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도 기울어진 바닥을 바로잡지 않아 끊임없이 유출되는 토사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우리 교육의 현실은 와해토붕瓦解土崩이 아니라 토붕와해土崩瓦解 형국이다. - P71

집단 창의성 collective creativity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하나의 잣대로 모든 걸 재는 상황에서는 다양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잣대가 다양해야 창의성이 돋아난다. - P73

자연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보존하고 증진해야 하듯이 어떻게 하면 우리 교육계의 학습 다양성 learning diversity을 높일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 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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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4-09-03 14: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무엇이 옳은가, 는 소설을 읽을 때 제가 찾는 것 중 하나입니다. 선인과 악인의 구도로만 볼 수 없이 그 나름대로 각자 설득력을 가지는 행동을 취할 때 무엇이 옳은지를 따지는 것이 때론 어렵더군요.^^

즐라탄이즐라탄탄 2024-09-03 15:37   좋아요 3 | URL
예 소설을 읽다보면 정말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는데 그 각각의 인물들이 처해있는 상황이 다들 달라서 그런지 어떤 한면만 보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게 결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만약 내가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을 때 어떤 선택을 할지 생각해보면 해당 인물의 선택이 일반적인 기준에서는 잘못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적어도 그 상황에서만큼은 용납될 수도 있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또한 소설뿐만이 아니라 이 책에서 논하는 일반적인 토론의 경우에도 각각의 패널들이 주장하는 바들을 잘 들어보면 어느 한 쪽의 편만 들기에는 뭔가 조심스러울 때가 있는게 각자가 처한 입장이나 이해관계들이 다들 달라서 그런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정말 페크님 말씀처럼 무엇이 옳은지를 따져나가는 과정이 쉽지않음을 저도 댓글을 쓰면서 다시금 느끼게 되는것 같아요. 쉽지않은 과정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옳은 것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자체에서 어떤 의미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다만 이 책의 저자의 말처럼 토론이 과열되어 언쟁의 장으로 번지기 보다는 상호간의 존중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게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페크님 덕분에 ‘무엇이 옳은가‘라는 말을 저도 좀 더 곱씹어보면서 깊이있게 생각해보고 나름의 의견을 정리해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