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개인적으론 저자의 대표작인 《상실의 시대》를 읽고 난 뒤 읽게 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중 주목해서 봐야 하는 인물은 주인공인 하지메를 비롯해 시마모토, 이즈미, 유키코 이렇게 4명 정도로 추려볼 수 있다.

하지메는 12살이 되던 해에 시마모토라는 여학생과 사귀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첫사랑이기도 했다. 시마모토는 전학생이었는데, 그녀는 하지메의 집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으며 이로인해 등하교를 같이 하면서 자연스럽게 친해지게 되었다. 둘 다 외동이라는 공통점이 있었고 책을 읽거나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하는 등 취미도 엇비슷했기에 그들은 서로의 집에 드나들 정도로 굉장히 가까워졌다. 하지만 이 둘은 대학에 진학할 무렵 물리적 거리가 멀어짐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된다.

한편 이즈미라는 인물은 하지메가 고등학교 때 새롭게 알게 된 친구인데, 하지메는 이즈미와 사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표현에 의하면 놀라운 흡인력을 가진) 3살 연상인 이즈미의 사촌 언니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즈미에게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주고만다. 결국 나중에는 하지메 본인도 이때의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지만 이즈미가 받은 마음의 상처는 굉장한 트라우마로 남고 만다. 시간이 한참 지나서 하지메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사촌 언니가 죽고나자 하지메에게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을 통보하여 그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게 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한다. 이렇듯 소설이 끝날때까지 이즈미는 이때 받은 마음의 상처를 회복하지 못한다. 불행한 인생이 어떤 것인지를 대변하는 인물이 바로 이즈미라는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마지막으로 유키코는 하지메가 서른이 되던 해에 결혼한 여자인데, 그녀의 아버지는 중견 건설회사 사장으로 적어도 금전적으로는 부족함이 없는 집안이었다. 하지메는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금전적인 지원을 받아 째즈바를 운영하게 된다. 하지메는 그간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하여 2호점을 낼 정도로 사업적으로도 성공을 이루었고 월간지에 인터뷰가 수록되기도 한다.

뭐 이정도면 솔직히 무슨 재벌급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즐겁게 살 법도 한데, 소설 속 하지메에게 참기 힘든 유혹이 찾아온다. 그건 바로 첫사랑이었던 시마모토였다. 시마모토는 월간지에 실린 하지메의 인터뷰를 보고 그를 찾아왔던 것이다.

처음 그녀가 찾아왔을 때 하지메는 그녀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지만 그녀를 알아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그녀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금 발동하고 만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하지메의 혼돈과 방황의 시발점이었다. 하지메는 아내인 유키코에게 거짓말까지 해가며 첫사랑이었던 시마모토를 만나게 되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현모양처인 유키코 대신 본능적으로 더 끌리는 시마모토와 부적절한 관계까지 맺게 된다.

이후 유키코는 하지메가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났음을 본능적으로 직감하고 그와 진지한 대화를 이어나간다. 이 부분에서 예상과 달리 유키코는 감정적으로 화를 내기보다는 다소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하지메에게 물어보는데 독자인 나는 이러한 유키코의 태도가 굉장히 인상적으로 느껴졌다. 얼마든지 감정적으로 분노할 수 있음에도 굉장히 성숙한 모습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상대방의 의사를 묻는 모습에선 진짜 해탈의 경지에 이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중간중간 생략하거나 빼먹은 부분들이 조금씩 있긴 하겠지만, 대략적인 스토리의 흐름은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이 소설에서 핵심이라고 언급한 인물들 중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캐릭터를 하나 꼽자면 아마 대다수의 독자들이 시마모토라고 답할 것이다. 위에서 따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소설 속에서 그녀는 하지메와 재회하고 난 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밝히지 않는다. 하지메는 그녀가 현재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 궁금해하기도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자세한 언급을 피한다.

독자인 나는 이러한 시마모토의 모습을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는 이런 모습이 없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솔직해지려하기보다는 무언가를 조금씩 감춘 채로 서로 관계를 맺고 이어가고 헤어지고를 반복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마다 각자의 '페르소나persona(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것은 철저히 감추되 자랑할만하거나 드러내고 싶은 것은 철저히 드러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것이 무조건 잘못되었다라고 섣불리 단정짓기는 곤란하다. 어쩌면 이러한 페르소나도 각자의 생존 방식의 일부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 끝날때까지 시마모토의 자세한 근황에 대해 알 수 없었던 점은 살짝 아쉽긴 하지만, 막상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그렇게 아쉬워 할 만한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설령 자신과 친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근황에 대해 우리가 속속들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또 딱히 그럴 필요도 없다. 각자 자기 살기도 바쁜 세상이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소설의 스토리를 전반적으로 이끌고 있는 하지메의 모습을 보면서는 개인적으로 첫사랑은 그냥 추억으로 남기고 거기서 끝내야지 그 선을 넘어서 다시 나타난 과거의 연인에 대해 끊임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계속 파고들다보면 현재의 행복을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끊임없는 파멸의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하지메가 미혼인 상태였다면 얘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겠지만 모든 걸 차치하고서라도 일단 한 번 헤어졌던 연인이라면 그 헤어진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반드시 있었을 것이기에 웬만해선 한 번 헤어졌던 인연을 굳이 다시 붙잡으려 하지 않는 게 나 자신은 물론이고 상대방에게도 좋지 않을까 싶다.


이즈미와 유키코라는 캐릭터에 대해선 위에서 살짝 언급한 내용들이 있긴 하지만 정리차원에서 다시 한 번 언급해 보겠다.

이즈미의 경우 물론 그녀가 받은 상처나 트라우마가 결코 가벼운 것이었다고 말할 순 없겠지만, 자신이 받은 상처에 지나치게 얽매인 나머지 거기에만 매몰되는 것은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그 주변 사람들까지도 불행의 블랙홀에 빠뜨리고 마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이러한 것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부정적인 과거와는 가급적 빨리 절연하고 현재 내게 주어진 삶에 충실하는 방법밖에는 다른 해결책이 없다고 보여진다. 아쉽게도 소설 속 이즈미는 이렇게 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이 책을 읽은 독자들만큼은 이즈미와 반대의 길을 걸어갔으면 한다.

이즈미와는 반대로 유키코는 자신의 배우자인 하지메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는 상황 속에서도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결코 쉽지 않은 모습인데, 그녀의 성숙한 태도가 궁극적으로 자신의 가족을 지켜내는 데 정말로 큰 역할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물론 유키코도 앞서 언급한 이즈미와 비슷한 정도로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실제로 소설 속에서 자신이 큰 상처를 입었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유키코는 이즈미처럼 그 상처에 매몰되기보다는 그 상처를 뛰어넘는 용서를 통해 자신도 살고, 하지메도 살고 궁극적으로 두 딸이 있는 자신의 가족까지 살린다. 개인적으로는 용서의 힘이 이만큼 강력하다는 것을 이 소설을 통해 새롭게 느끼게 되었다. 용서라는 건 결국 남이 아닌 나 자신을 살리는 선택인 것이다. 글을 쓰다가 문득 생각났는데, 성경에도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지 않나. 이것도 궁극적으로는 나 자신을 사랑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으로써 제안된 방법이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보게 되었다.


리뷰를 쓰다보니 등장 인물들을 중심으로 쓰게 되었는데, 이외에도 소설 속 곳곳에 등장하는 째즈음악 혹은 클래식 음악 등도 일부 만나볼 수 있다. 특별히 이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는 본문에 등장했던 음악 혹은 해당 뮤지션들에 대한 소개가 나와있으니 한 번 쭉 읽어보면서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음악들을 유튜브 등에 검색하여 들으면서 본문을 읽어나가기도 했었는데 특정한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등장인물들의 감정 상태를 음악이 대신 표현해주는 것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마지막으로 여담이지만 소설의 제목에 나온 '국경의 남쪽'은 냇 킹 콜의 노래 제목이기도 하다. 그리고 '태양의 서쪽'이라는 말은 '히스테리아 시베리아나'라는 병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하는데 이와 관련된 스토리가 본문에 나오니 관심있으신 분들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시길 바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