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기 시작한 부분에서는 일본 바둑계에서 활동했던 한국 출신의 프로기사인 조치훈 9단에 관한 일화가 하나 나온다. 조치훈 9단이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기 전, 기존 챔피언이었던 후지사와 슈코 9단은 7판 4선 승제인 결승 대국에 앞서 조치훈 9단을 도발한다. ‘딱 4판만 가르쳐주겠다‘고. 이 말은 자기가 한 판도 지지 않고 4판 다 이기겠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자 조치훈 9단이 내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자존심이 다소 상할 법도 한데 이 말을 들은 조치훈 9단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물러서지 않았다. 도전자의 입장에서 기존 챔피언의 자존심을 어느정도는 세워주는 듯 하면서도 자신이 새로운 챔피언이 되겠다는 마음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딱 3판만 배우겠다‘고 맞받아친 것이다.
본문에 따르면 그 결승 대국에서 조치훈 9단은 최종 스코어 4 : 3으로 챔피언에 올랐다고 하는데, 이 일화를 보면서 이런게 진짜 멋있는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멋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바둑 실력은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고, 여기에 더해 상대방과의 멘탈싸움에서도 결코 지지 않겠다는 정신력이 필히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위 사례에서 조치훈 9단의 뼈있는 말 한마디가 이러한 정신력을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이 사례를 통해 바둑이라는 것이 멘탈스포츠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 대 인간이 두는 것이다보니 멘탈이 흔들리면 최선의 수를 두지 못할 수 있고 그런 것에 따라 승패가 얼마든지 뒤바뀔 수 있다는 점에서 멘탈의 중요성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책 전반에 핵심 소재로 등장하는 ‘알파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요 근래에 등장함에 따라 추상적인 성격의 멘탈이나 직관보다는 객관적인 성격의 데이터에 기반한 의사결정이 각광받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위의 사례처럼 인간 대 인간으로 대결하거나 경쟁하는 구도에서만큼은 멘탈의 중요성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인공지능이라는 것도 점점 사람들에게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결국에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싸움이 될텐데 이 지점에서 승부를 가르는 건 결국 인간의 멘탈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없이 AI를 활용한 사람과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AI를 활용한 사람이 경쟁한다면 최종적으로 그 경쟁에서 승리할 확률이 높은 사람은 후자가 좀 더 높지 않을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즘 대학 입시에서 철학과의 인기가 점점 올라가고 있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닌 듯하다.

"딱 네 판만 가르쳐 주겠다" _후지사와 슈코 9단 - P273
"딱 세 판만 배우겠습니다" _조치훈 9단 - P273
"목숨을 걸고 둔다" _조치훈 9단의 자서전 제목 - P274
"기권하느니 차라리 바둑판 앞에서 죽겠다" _조치훈 9단 -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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