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요근래에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의 에세이 중 하나인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었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오늘 읽기 시작하는 이 책은 위에서 언급한 에세이에 별도로 소개되었던 작품은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만 작가의 책을 찾아보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다. 책의 두께도 대체로 얇은 편이라 부담없이 읽어볼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시작해보게 되었다.

오늘 처음 밑줄친 문장은 이 책의 첫 문장이기도 한데, 비록 짧은 문장이긴 하지만 이래저래 독자인 나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왜 잠을 못잤을까?‘ 부터 해서 ‘도대체 화자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같은 질문들이 순간적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근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독자인 내가 현실에서 잠을 잘 잘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후에 과연 어떤 내용들이 등장하기에 이런 문장이 맨 처음에 나온건지 마음 속 한 구석에서 호기심이 슬금슬금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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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읽다보니 왠지 어디선가 본 듯한 ‘그림자‘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몇 년 전에 읽었던 동 저자의 책인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봤던 소재였다. 이걸 보면서 역시 한 사람의 정신세계 혹은 무의식의 세계에 있는 것은 글이든 말이든 혹은 다른 어떤 형태로든 간에 여러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그림자‘라는 것에 대해 저자가 나름대로 심도있게 어떤 의미부여를 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도 받았다.

잠을 못 잔지 십칠 일째다. - P9

얇은 벽으로 나누어진 바로 옆방에서 내 의식은 생생하게 깨어 나를 지그시 지켜본다. 내 육체는 흐느적흐느적 옅은 어둠속을 헤매며 계속 나 자신의 의식의 시선과 숨결을 바로 옆에서 감지한다. 나는 자려고 하는 육체이고 동시에 깨어나려고 하는 의식이었다. - P10

의식이 어느새인지 모르게 내 몸에서 떠나간다. - P10

나는 그대로 그곳에 엎드려 자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된다. 각성覺醒이 언제나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그 차가운 그림자를 계속 감지한다. 나 자신의 그림자다. - P11

나 자신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존재한다는 상황 그 자체가 불확실한 환각처럼 느껴졌다. 강한 바람이 불어친다면 내 육체는 세계 저 끝까지 날려가버릴 것 같았다. 세계의 저 끝에 있는, 들은 적도 없는 땅으로. 그리고 내 육체는 그곳에서 내 의식과 영원히 각각 분리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뭔가를 단단히 붙잡고 싶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붙잡을 수 있을 만한 것은 하나도 눈에 띄지 않았다. - P11

밤이 되면 맹렬한 각성이 찾아왔다. 그 각성 앞에서 나는 완전히 무력했다. 나는 강한 힘으로 각성의 핵에 바짝 고정되었다. 그 힘은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침이 올 때까지 가만히 각성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밤의 어둠 속에서 나는 내내 눈을 뜨고 있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가능하지 않았다. 시계가 시간을 새기는 소리를 들으면서 어둠이 조금씩 깊어가고, 그리고 다시 옅어지는 모습을 그저 빤히 바라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 P12

어느 날, 그것은 끝났다. 아무런 징조도 없이, 아무런 계기도 없이, 진짜로 갑작스럽게 종료되었다. - P12

어떤 이유로 그 불면증 같은 것이 찾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로 돌연 사라져버렸는지,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바람에 휘날려 멀리서 찾아오는 두툼한 검은 구름 같은 것이었다. 그 구름 속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불길한 것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것이 어디서 다가와 어디로 사라지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아무튼 그것은 다가와 한참동안 내 머리 위를 뒤덮고, 그리고 사라졌던 것이다. - P14

무엇이 됐건 누가 됐건 한 달에 한두 번쯤은 상태가 안 좋을 때도 있고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때도 있는 것이다. - P19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세월과 함께 생활의 질은 조금씩 변해간다. - P21

나이를 먹는것이 그다지 달가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나이를 먹어서 편해지는 일도 몇 가지는 있다. 그것은 생각하는 방식의 문제인 것이다. - P22

아름다운 건 어떻든 아름다워, 그것뿐이야. - P25

익숙해져버리면 그건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간단한 일이다. 머리와 육체의 커넥션을 잘라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것뿐이다. 내 몸이 거의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동안에 내 의식은 또 다른 공간을 떠돌았다. - P61

잠이 오지 않은 뒤로 내가 생각한 것은, 현실이란 참 얼마나 손쉬운가, 라는 것이었다. 현실을 감당하는 일 따위, 너무도 간단하다. 그것은 그저 현실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집안일이고 그냥 성교이고 그냥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 기계의 작동과 마찬가지여서 한 차례 운용하는 절차를 익혀버리면 그다음은 끝없는 반복일 뿐이다. 이쪽 버튼을 누르고 저쪽 레버를 당긴다. 눈금을 조절하여 뚜껑을 덮고 타이머를 맞춘다. 그냥 그것의 반복이다. - P63

잠이란 휴식이다ㅡ. 그것뿐이다. 차의 엔진을 꺼버리는 것과 똑같다. 줄곧 휴식 없이 엔진을 작동하면 얼마 못가 망가져버린다. 엔진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열을 발생하고 그렇게 고인 열은 기계 자체를 피폐하게 한다. 그래서 방열을 위해 반드시 쉬게 해주어야 한다. 엔진을 끄고 쿨다운시킨다. 그것이 곧 수면이다. 인간의 경우, 그것은 육체의 휴식이면서 동시에 정신의 휴식이기도 하다. 몸을 눕히고 근육을 쉬면서 동시에 눈을 감고 사고를 중단한다. 그랬는데도 남아 있는 사고는 꿈이라는 형태로 자연 방전한다. - P67

인간은 사고에 있어서도 육체의 행동에 있어서도 일정한 개인적 경향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 P67

인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행동이나 사고의 패턴을 만들어나가는 존재이고, 한번 만들어진 그런 경향은 어지간한 일이 없는 한 바뀌지 않는다. 즉 인간은 그러한 경향의 감옥에 갇힌 채 살아가는 셈이다. 그리고 잠이야말로 그렇게 한쪽으로 쏠린 경향을 중화해주는 것이다. 인간은 잠 속에서 한쪽으로 쏠린 채 사용되던 근육을 자연스럽게 풀어주고, 한쪽으로 쏠린 채 사용되던 사고 회로를 진정시키고 또한 방전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인간은 쿨다운된다. - P69

잠은 인간이라는 시스템에 숙명적으로 프로그램화된 행위이며 누구도 그것을 패스할 수는 없다. 잠을 잃어버리면 인간은 존재 그 자체의 기반을 잃어버리게 된다. - P69

오로지 경향과 그에 대한 조정이 내 몸 속에서 한없이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 P70

아무것도 두려워할 일은 없다. 요컨대 나는 인생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 P72

인생은 그 확장된 몫을ㅡ나는 그것을 미리 가져다 써버린 것이다ㅡ나중에 되받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시간의 아귀를 맞추려고 들지도 모른다. - P73

처음 일주일 동안에 《안나 카레니나》를 연거푸 세 번을 읽었다. 다시 읽으면 읽을수록 그곳에는 새로운 발견이 있었다. 그 장대한 소설에는 다양한 수수께끼와 다양한 시사가 가득 차 있었다. 세공한 상자처럼 한 세계 속에 더 작은 세계가 있고 그 작은 세계 속에도 좀 더 작은 세계가 있다. 그리고 그런 세계들이 복합적으로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우주는 내내 거기에 있으면서 독자에게 발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 P74

예전의 나는 기껏해야 그중 한 조각밖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그것을 분명하게 꿰뚫어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톨스토이라는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독자가 무엇을 읽어내기를 원했는지, 그 메시지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소설로서 결정結晶을 이루었는지, 그리고 그 소설의 무엇이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마저도 능가해버렸는지. - P74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싶은 만큼 실컷 읽고 나자 나는 도스토옙스키를 꺼냈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은 19세기 러시아의 두툼한 소설이었다. 얼마든지 계속 읽을 수 있었다. 아무리 의식을 집중해도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떤 난해한 부분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었다. 바늘이 레코드의 홈을 더듬는 것처럼 내 손가락은 이야기의 세세한 부분을 생생하게 더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깊고 격렬하게 감동도 했다. 이것이 본래의 바람직한 내 모습, 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 P74

중요한 것은 집중력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집중력이 없는 인생 따위, 뻔히 눈을 뜨고서 아무것도 못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 P74

그것은 다른 어떤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 P85

자아, 이제부터 다시 뭔가 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P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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