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쇠로 만든 방을 내어주고 불을 때 죽이려 했으나 사명당은 빙이라는 글자 하나를 붙여 놓곤 추워 죽겠다며 도리어 호통을 쳤다는일화 등 그 내용을 누구보다 구구절절이 보존한 것이 바로 좌도밀교였으니 그들에게 사명당이라는 이름은 두려움과 경계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선사, 그 예언에 따르면 사명당은 400년 세월이 흘러 조선이 망국의 기운을 풀어내고 운이 크게 트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망국의 기운을 풀어낸다면 그 풀려난 부정한 기운은 어디로 가겠으며 운이 크게 트인다면 그 운은 어디서 가져오겠습니까?"
"망국의 은원이 한국과 얽힌 나라가 일본 외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400년 후라고 함은 바로 지금을 가리킵니다. 지금 일본을 보십시오. 세계에 뻗치던 힘이 이 작은 섬에 자꾸만 묶이려 하지 않습니까?"
"어찌 그리 삿된 소리에 얽매여 세상의 이치를 해치려 들어. 한국의 기가 흥하면 흥하는 것이지 일본의 기가 그 때문에 쇠한다니, 너희는 어째서 그렇게 모든 일을 싸워 빼앗고 속여 훔치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이냐!"
"네 놈보다 몇 수 높은 다이이치가 온갖 수를 펼쳐 놓은 것을 내 이미 안다. 조선을 망치겠다고 그리 많은 저주를 다 뿌려댔으면 지금 한국은 완전히 찌그러졌어야지. 네놈은 왜 한국의 기가 다시 뻗을까 걱정하느냐? 그따위 저주 백날 읊어봐야 결국 순리의 흐름에 미치지 못함을 사실은 네 놈도 아는 까닭이 아니더냐!"
"순리가 흐르면 화해를 하고 어깨동무를 하여 함께 누리고, 흐름이 막히면 도와 역경을 함께 넘고, 그리 기를 다스려야 만민이 함께 복을 누림을 어째서 모르느냐."
열을 빼앗아 가지면 셋만 얻고 일곱은 사라지되, 열을 반으로 다섯씩 나누면 그것이 스물이 되고 서른이 됨을 어째서 모른단 말이냐.
"그 간단한 것을 왜 몰라! 네가 풍작을 거두면 이웃이 함께 배부르고 이웃이 풍작을 거두면 네가 함께 배가 불러야지, 서로 물길을 끊고 불을 질러서 무엇이 남는단 말이야!"
"한국에는 이제 풍수니 기운이니 떠들면 미친놈이나 사기꾼으로 여겨."
"자비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배급해주는 게 아닙니다. 자신을 바쳐 남을 이루어주는 것이지요. 자신을 아래에, 사부대중을 위에 둘 수 있으면 진정한 고승입니다. 네가 부처라는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지요. 자신을 바쳐 누군가를 위하겠다는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산 이름이 특이합니다. 왜덕이란 왜인의 덕을 보았다는 뜻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왜인들에게 덕을 베풀었다는 뜻이지요."
"다이이치는 좌도밀교의 인물이고 본디 일본 좌도밀교는 음지에 숨어 성性을 숭배하며 시체와 정을 통하는 수단으로 대수대명을 추구하는 무리였습니다. 유골에 영을 입혀 그 생기를 가져와 삶을 연장한다는 것이지요."
"허나 신통력이 하늘에 닿았다는 다이이치가 나타난 이후 이들은 세상으로 나왔고, 대수대명의 추구에 저주를 섞는 극단적인 집단으로 변해버렸습니다. 경계하던 종교인들과 술법사들이 있었으나 모두가 다이이치의 이름 아래 굴복해 버렸어요."
"혼이 빠진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것이 그들의 방식이니까요."
"세상을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대하면 너무나 간단한 거야."
"진지하게 생각하고 말해. 나는 쉽게 아무 말이나 던지고 번복해도 다 받아주는 사람 아니야."
"소신공양? 그게뭐야?" "스스로 자신의 몸을 불사르는 거야. 부처에게 공양한다는 의미로, 그렇게 해서 뜻을 이루려고 하신 거지."
"어쨌든 이렇게, 영원토록 기억 속에 남았잖아." 왠지 모르게 여운이 남는 말이었다.
"사실 나도 반신반의했는데 이제는 확실해. 사표를 내던질 때, 그 자식한테 파혼을 선언할때 너무 시원하더라. 그렇게 살고 싶던 게 아니었어. 내가 얼마나 성공했고 남보다 얼마나 낫고, 그런걸 즐기는 나는 나 스스로 건 최면이었어."
"네가 그랬지? 세상에는 다른 길이 있다고 한번 그길을 걸어보고 싶어. 지금 난 그 어느 때보다 즐거워."
"앞으로의 모든 날이 기대돼. 여행도 갈 거야. 여행 가서 우리나라 산들도 돌아보고 바다도돌아보며 내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싶어. 내게 세상이 무엇인지, 또 역사는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
"수학은 세상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한 가지 방법이지요. 예술도, 언어도 그렇듯이."
"그러나 예술이나 언어와 달리 수학은 긴 시간 공부를 해야만 그 중요성을 깨달을 수 있어요. 너무나 생소하고 많은 개념을 먼저 깨우쳐야 합니다."
"달리 말해 그 과정이 즐겁지 않은 학생은 평생 단 한 번 쓰지도 않을 것들을 억지로 공부하며 낮은 평가를 받고 인생의 낙오자가 되어야 해요."
"그럼에도 그 모두를 억지로 수학에 밀어 넣는 것이 폭력이라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수학을 안 가르칠 수는 없어요. 수학을 해야 반도체도 만들고 배터리도 만들고 하니까. 실질적으로 외국과의 경쟁에 가장 중요한 과목이 바로 수학이에요."
"중고생들은 당장 힘든 건 안 하려 들어요. 만약 선택적으로 수학을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금세 대부분의 학생이 수학을 포기하게 되겠지요? 결국 국가는 경쟁력을 잃어요. 적성에 맞고 적성에 맞지 않고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장관은 분명 정책을 위해 희생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학생들의 희생에 대해 교육부는 어떤 보상을 했습니까?"
"우수한 학생이 아니라 탈락한 학생을 바라보길 바라요. 그것이 당신이 해야 할 일이야."
"여러 날 밥을 먹지 않고 시간을 모른 채로 차분히 지내다 보면 과거의 삶이 떠오를 겁니다. 특히 가슴이 아프고 후회되는 일들. 주변인, 나아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왜 조금 더 잘해주지 못했던가 하나씩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빌게됩니다. 그러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맑아지면 그때 비로소 자기 자신에 더 가까워지게 되지요.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알게 돼요."
"식물을 키워본 적이 있습니까?" "아니, 없어요." "제때 가지를 잘쳐내면 남은 가지는 싱싱하게 잘 자라요. 뿌리가 가져올 양분은 정해져있는데 먹어야 할 이파리는 많기 때문이지."
식물 뿐 아니라 세상 모든 일에 당연한 이치 였다.
"또 다른 방법은 큰 화분에 흙을 더 담아 분갈이를 해주는 겁니다. 그러면 가지를 쳐내지 않아도 더 풍성하게 자랄 수 있으니까."
"바로 그렇습니다. 지금의 휴전선 비슷하게 그어놓은 고려말 국경은 오류 중의 오류입니다."
"모릅니다. 학문이란 논문과 학술토론을 위해 오류를 수정하고 발전해 나가는 것인데, 주류사학계는 전혀 토론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을 빼앗아간 자는 어쩌면 우리 자신의 무관심일지 모릅니다. 철령, 철령은 그 진실을 가리키는 키워드입니다."
"끓어 넘치는 귀신의 한으로 두 나라 사이를 막으라. 그리하여 본국의 기를 보전하라."
그는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진짜, 세상에는 진짜 귀신의 힘을 다스리는 자들이 있었다.
또다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마치 사람이 분노와 고통에 떠는 것만 같았다.
"짐승 놈아, 내가 너희 나라에 무서운 저주를 심고 있거늘 너는 무엇을 할 수 있냐는 말이다."
"아무것도 못 하지. 한국놈들은 항상 말뿐이야. 저 뒤에 숨어서 말로만 떠들 뿐이다. 억울하다고, 잘못됐다고. 안전한 곳에서 말로만 열심히 떠들다 곧 잊어버리는 놈들이다"
"그런 놈들이, 그런 놈들의 나라가 흥해? 기를 뻗치고 크게 흥한다고? 돈 몇 푼쥐여 주고 잘한다잘한다 쓰다듬어주면 좋아라 누구한테는 알아서 기는 놈들의 나라가? 그따위 나라가 대일본의 기를 거두어간다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풍언을 노려보던 이케마츠는 더 볼 가치도 없다는 듯 눈길을 거두며 독백했다.
"공평하지 않아. 세상에 그런 불공평한 일이 있을 수는 없다. 꿩은 하늘을 날고 돼지는 똥밭에 구르는 것이 올바른 이치다."
흙투성이가 된 몸을 반만 일으킨 노풍언은 이케마츠의 눈을 피해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손에 들려있던 봉투에서 떨어진 고구마 빵, 그리고 일본 손님들과 나눠 먹겠다고 준비한 막걸리 두 병이 데꾸루루 비탈길을 따라 구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사람이 여기있을 줄 어찌 아셨소?" "세월이 흘러 건물이 오르고 사람이 번잡할지언정 상서로운 때와 지기가 변하지는 않지요. 있어야 할 곳에 있었더니 거기 대사가 계셨을 뿐입니다."
"본래 본심을 감춰두고 백 마디 선문답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지혜를 겨루고 어렴풋이 상대를 짐작하여 새로운 화두를 건넨뒤 이별하는 것이 법사란 자들의 법도요. 그러나 당신은 그리 대할 사람이 아니지."
"배려 감사합니다." "그 일, 당신이 맞소?" "맞습니다." 선선히 나온 대답에 기미히토는 짧은 한숨을 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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