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드름 흉터가 완전히 다 사라진다고 말씀은 못 드리지만, 좀 완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잘 익은 바나나 한 개에 꿀 티스푼으로 두 숟가락을 넣어서 완전히 으깨세요. 이걸 원하는 부분에 팩처럼 바르고 30분 동안 둡니다. 30분이 지나면 미온수로 씻어내고요. 이걸 이틀에 한 번씩 꾸준히 해보세요. 분명히 좋아질 겁니다." "정말 그럴까요?" "저 믿고 한 번 해보세요. 화장품은 자극적인 거 쓰지 마시고, 화학성분 없는 걸로 쓰시고요."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자의 입술 아래와 턱 부근에 뾰루지 자국을 볼 수 있었다. 다른 곳이 안 좋아서 생기는 현상이었다. 그게 아니어도 얼굴을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피부가 아니라, 다른 곳을 관리하셔야 되는 상황입니다." "다른 곳이요? 어디요?" "음....... 이게 조금 민감한 부분이라서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메모지에 글을 썼다. [부인과 질환인데, 말씀드려도 됩니까?]
여자는 내가 내민 메모지를 보고는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고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아요." "그럼 말씀드릴게요. 자궁쪽이 안 좋으신 거 같습니다."
"뾰루지가 고민이라고 하셨잖아요?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한데, 그렇게 여성분 턱 쪽에 특별한 이유 없이 뾰루지가 올라오면 자궁이 안 좋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생리통이 좀 심하시다거나 그에 관련된 특이사항이 조금 있으실 거예요."
"건강을 잃은 다음에 되찾는 게 아니라, 있을 때 지키는 겁니다. 모든 병은 방치하면 커져요. 자연치유되는 병도 있지만, 관리가 필요하죠."
"그럼 어떻게 해야 돼요?" "여러 가지 방법들이 있는데, 전부 구하기 쉬운 것들이 아니에요. 작정하고 찾아야 되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나마 하나 추천드릴 게 개나리열매정도가 있겠네요. 말린 개나리열매를 10g 정도씩 세 잔 정도 나오게 차로 달이세요. 그걸 아침, 점심, 저녁 드시면 많이 좋아질 겁니다."
"지금 얼굴만 봐도 간이 안좋으신 게 보일 정도입니다. 술이랑 담배 당장 끊으셔야 합니다."
"제가 적어드릴게요. 꼭 챙겨드세요. 부추, 미나리, 다슬기, 브로콜리, 사과, 당근, 마늘, 버섯 같은 거 많이 드시고요. 헛개차 꼭 드세요. 헛개나무로 숙취해소제도 많이 나오고 그러죠? 괜히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꼭 드세요. 그리고 부추랑 미나리 같은 경우 정력에도 좋으니까 몸으로 확 느껴지실 겁니다."
"방해가 된다거나 하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다. 제가 이렇게 건강즙을 판매하는 이유도, 먹고살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정말 모든 사람들이 건강하시길 바라서 하는 거거든요. 건강을 팔고, 건강을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전부 사장님 진단대로랍니다! 저희 제작진이랑 손님들 전부요!" 내가 처방하는 민간요법이 현대의학적으로도 검증이 된 순간이었다.
"기적이라는 게 어쩌면 모든 게 기적인 것 같아요. 지금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적인거잖습니까? 정말 말도 안 되는 확률을 뚫고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오고, 지금 이런 상황까지 다다른 거잖아요."
"제가 하는 것보다 대단한 건 애초에 건강을 잃지 않고 지키는 겁니다. 모든 분들이 기적적으로 존재하며, 항상 기적을 만들어가며 살아가고 계시다는 걸 잊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정말로 소중한 거거든요. 건강이 최고입니다."
나도 잠시 먼저 떠난 가족들을 떠올렸다. 예전에는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 할 때도 있었다. 한 번 그 기분에 빠져들면 그날은 하루종일 축 쳐졌다. 그게 싫었다. 안 그래도 서러움 많은 인생에 서글픔을 더하는 게 싫었다. 요즘은 모두를 떠올려도 전보다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여전히 슬프고 가슴이 미어지지만, 그래도 좀 나았다.
스스로가 자랑스러운 적이 없었다. 언제나 부끄러움으로 가득한 삶이었다. 이제야 비로소 가슴과 어깨를 펴고 똑바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었다. 아직 멀었지만,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당장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면 비용 소모가 만만치 않을거야. 그리고 사이트 유지보수도 사람 써야 되고. 직접 관리하는 건 분명히 한계가 있거든. 아예 손을 떼고 있으라는게 아니라, 네가 직접 해야 되는 일들이 많으니까."
잠시도 쉬지 못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말하는 것도 계속하면 힘들다는 걸 깨달았다. 정말 입이 아플 지경이었다.
사랑과 술은 잘하면 명약이고 잘못하면 독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명약으로서 활용하면 되겠지.
예전에 혼자 들이붓던 술은 취하기 위해서였다. 가혹한 현실의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이란 지우개로 뇌 주름을 문지르는 것이었다. 지금은 즐거움을 위해 적당히 즐길 수 있었다. 이렇게 웃으며 술을 마신 게 게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고 할수록 내 삶이 모든 면에서 좋아졌다.
말 그대로 삶이 나아졌음을 뜻하기도 했지만, 내가 스스로의 삶을 좋아할 수 있게 됐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모든 인생이 아름답지는 않다. 하지만 모든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다.
예약을 할 정도로 절실하지는 않다는 뜻이다. 대다수가 그저 재미삼아서, 공짜니까 건강상담을 받으러 오겠다는 마음이 컸던 거겠지.
영원히 타는 불꽃은 없다. 그렇듯 인터넷에 잠시 지펴진 불꽃도 꺼지는 듯했다. 그래, 영원한 건 없다. 적어도 이 세상에는 없다.
[나 말고도 저 양반 덕에 몸좋아진 사람 많아요. 이 동네에 복이 온 거지, 복이 왔어. 전부 가짜들이 진짜인척하는 세상인데, 저 사람은 진짜배기야.]
지난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애들한테 친절하게 한 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이야. 카르마라는 것을 믿게 된다.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분명히 있다. 언제든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방송에 나갔으니 범죄의 표적이 되기에도 충분했다. 과거에 산골소녀 가족이 방송에 나왔다가 범죄의 표적이 되는 비극적인 사건도 있었으니까. 이외에도 비슷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었다. 세상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나쁜 놈들이 널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표적을 잘못 골랐다. 그냥 당하고 있을 내가 아니니까.
마음은 조급했지만 행동을 최대한 침착하게 했다.
지나와서는 시간을 허비했다고 생각했던 일들이 다시 되돌아보니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그래, 괴로운 일도 많았지만 즐거운 일도 있었다. 그렇게 여러 일들을 경험해서 지금의 내가 있다.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들이 내가 살아왔다는 증거 그 자체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다.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누군가 잘 됐을때 진심으로 축하해 주기란 쉽지 않다. 속이 좁아서 그런 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거라 생각된다.
할아버지는 많은 사람들을 도우라고 능력을 줬다. 하물며 가족을 챙기는 거야 당연하지 않은가. 이런 능력이 아니었어도 내가 잘 된다면 작은아빠와 고모는 반드시 챙겨야 하는 사람들이었고, 의무감이 아니라 내가 원해서였다.
"잘 되니까 잘 되는 대로 고민이네." "그치? 원래 다 그래."
"확실하게 준비해서 장사하는 게 훨씬 낫다. 그리고 너 컨디션관리도 해야지. 그렇게 밤새서 일하고 했을 때 상품에 이상 안 생길 거 같아? 분명히 문제생긴단 말이야."
"직원?" "그래, 과일 손질하는 거랑 설거지 도와줄 사람 하나만 구해도 훨씬 낫지. 그리고 방송보니까 오후에 슬러시만 담당하는 알바도 따로 쓰고. 사업할 때 인건비가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거 아끼겠다고 혼자 붙들고 있으면 이도저도 안 돼. 특히 장사 잘 될 때는."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렸다. "확실히...... 그래야 될 거 같긴 하네요."
"결정은 네가 하는 거니까 알아서 잘해봐. 잘할 거라고 믿는다. 이제 시작한 사업 벌써 여기까지 끌고 올라왔잖냐."
도저히 할아버지에게 능력을 전수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여러 가치 증명을 해내면 믿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이런 능력의 기본은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해야 되는거니까.
"계속 공부해야 돼. 여기 찾아오는 사람들은 너 믿고 오는거잖아. 네 말만 믿고 그대로 해볼 거고. 그냥 심심해서 오는 사람, 방송 나왔다니까 오는 사람, 그냥 기분이 별로여서 오는 사람, 기분이 좋아서 오는 사람, 호기심에 오는 사람 등 다양할 거야. 하지만 진짜로 간절해서 오는 사람들도 많을 거라고."
"재미있으면 그게 공부냐? 원래 공부는 재미없는 거야. 그리고 너 이게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항상 조심하고." "뭐를 조심해요?" "너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분명히 그런 사람들도 생길 거야. 병원에서 못 고치는 병 달고 있는 사람들. 이것저것 대체의학 찾아보면서, 간절함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사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시한부로 사형선고 받은 사람들한테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겠냐? 그래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라고."
나는 우선 할 수 있는 것을 했다. 현재 다루고 있는 모든 과채류의 주문량을 늘리고 일을 했다.
능력을 전수받고 최대치의 속도를 내는 줄 알았는데, 머릿속에 담긴 이론을 몸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머리도 이론을 따라가지 못했다. 뭐든지 해봐야 알 수 있었고, 늘게 마련이었다. 간단한 예로 글씨를 잘 쓸 수 있는 것만 해도 직접 써보기 전까지는 몰랐다. 명검도 갈고 닦지 않으면 녹이 스는 법.
나는 모든 일에 더 열정적으로 임했다. 당장은 늘어나는 손님들을 대비해야 되기에 시간이 없었지만, 시간이 나는대로 생전 안 하던 공부도 하면서 노력할 준비가 돼 있었다.
나는 다시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어색해서 나오는 미소가 아니라, 눈치껏 알아 들으라는 의도된 어색함이었다.
"기계가 돌아갈 때도 수시로 살펴봐야 돼요. 예나 지금이나 다 정성인 건 똑같습니다."
여름휴가마저 반납하고 일을 하는 모습이 담기는 건 긍정적으로 비칠 게 분명했다. 정직하게 일하며 고객들을 1순위로 생각한다는 거니까. 아이튜브 촬영에 협조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촬영 시작 전에 김성환과 가예림에게 확답을 받아둔 부분이었다. 혹시 모르니 간단한 동의서도 작성해둔 상태였다. 철저한 위생을 강조하면서 좋은 기계를 들였다는 내용이니 가게 이미지에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는 내가게보다도 박종만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담아내는 장면이었다. 사업 시작부터 지금까지 그에게는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도 나름대로 열심히 하는 모습에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촬영도 내 요구대로, 계획대로 잘 이뤄졌고. 내 휴대폰과 CCTV에도 모든 장면들이 담긴 데다가 동의서까지 작성하여 보험도 확실히 들어놔서 걱정이 없었다. 처음에는 무작정 찾아와서 촬영을 요구하는 것부터 시작해 일에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도리어 일을 늘려서 조금 짜증도 났는데.
"하하하, 괜찮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인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도 빅엿을 준비해뒀으니까. 정확히는 김성환이 처음부터 커다란 엿을 단 채로 온 거지만.
"헤르페스라면......." 가예림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더니 미묘하게 앞으로 다가와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헤르페스는 바이러스성 질환인데요. 1형과 2형으로 나뉩니다. 지금 성환 씨처럼 입술 주위에 포진이 생기는 게 1형입니다. 전 세계 사람들 중절반 이상이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흔합니다. 평생 자기가 헤르페스 보균자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고요."
"지금 증상이 전형적이에요. 피곤하거나 면역력이 좀떨어질 때, 그렇게 입술이나 옆에 포진이 생겨요. 만약에 그게 터져서 진물이 흐를 정도일 때는 전염력이 훨씬 강해지니까 조심하셔야 합니다." "앗, 그럼 성환이가 여기에 바이러스 퍼뜨리고 다닌 거예요? 아까 설거지도 했고, 포도즙도 먹다가 뿜었고.." 가예림이 살짝 놀라며 말했다. 반응으로 봐서는 헤르페스에 대해서 잘 모르는 듯했다.
"직접적으로 체액이 점막을 통해 흡수가 되거나 먹는 게 아니라면 문제없습니다."
"무엇보다 헤르페스가 전염력이 있긴 하지만, 무슨 좀비 바이러스 같은 건 아닙니다.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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