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비세계문학세트>를 읽고 리뷰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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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도회가 끝난 뒤 - 러시아 ㅣ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외 지음, 박종소.박현섭 엮어 옮김 / 창비 / 2010년 1월
평점 :
겨울이 시작된 후 오직 한 벌의 외투만 입고 다니는 아이를 알고 있다. 눈이 많이 오던 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도, 고집스러워 보일 정도로 그 코트만 입고 다녔다. 물론, 그 아이에게는 유일한 겨울 외투였을 것이다. 겨울이 한풀 꺾이면서 다른 아이들은 그 아이를 피하기 시작했다. 두 달이 넘게 입고 다녔던 그 아이의 칙칙한 코트에서는 겨울을 함께 지내온 시간만큼의 냄새가 배어나왔다. 고골의 외투를 읽는 내내 나는 이 아이의 코트 냄새가 떠올랐다. 외투를 찾으려고 절박하게 항의 하는 아까끼의 고군분투가 내내 마음이 아팠다. 이 아이를 몰랐을 몇 년 전 이 작품을 읽었을 때는 몰랐던 안쓰러움이었다.
러시아를 꿈꾼다. 몇 년 전 러시아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온 교수님의 수업을 듣고 나는 십년 뒤 뿌슈낀 광장에서 점심을 먹고 있을 나를 상상한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 호수를 보고, 모스크바에 발을 딛는 순간 나도 누군가처럼 그 땅에 키스를 하고 싶다. 러시아는 나에게 함부로 덤비지 못한 거대한 괴물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대륙에서 이어져 온 거친 삶, 잔인한 역사, 혹독한 추위까지 어느 순간 나에게는 러시아의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현재 러시아의 문학 작품들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흔히 알려 진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 고골이나 체호프 등 19세기 문학작품들이 우리에게 알려진 러시아 문학이다. 이 책에 실린 단편들도 마찬가지다. 책에 실린 13편의 단편을 읽다보면 안타까움을 넘어 처절한 러시아의 역사의 단편들과 마주하게 된다. 지하에서 죄수처럼 빵만 만들며 일만하는 사람들, 추위에 떨다 이웃의 장작 다섯 개를 훔치고 결국 서로 독약을 먹겠다고 애절하게 대화하는 부부,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부자지간의 이야기, 이 한 권의 책 속에 그 역사를 몸으로 겪어온 작가들만의 문체로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친구의 결혼식에 참석하느라 지방에 내려갔다 올라오는 기차 속에서 이 책을 읽는다. 외출을 잘 하지 않는 나에게 힘겨운 하루였고 많은 사람들과 마주해야 했던 날이었다. ‘암소’라는 작품을 읽으며 5개월 된 아들을 안고 결혼식장에 나타난 친구를 떠올린다. 화려한 결혼식장에 참석한 옛 친구들을 마주하자 ‘시간’이라는 단편이 떠오른다. 혼자 기차에 앉아 저물어가는 창밖을 보며 ‘일사병’을 읽어 내려간다. 이 단편들은 알게 모르게 삶의 구석구석에 스며들어온다. 러시아의 너무 먼 이야기 같았는데 읽을수록 백년이 더 지난 지금도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 현실이 숨겨져 있다.
러시아의 혁명과 망명과 억압, 그리고 그 속에 피어있기에 더 눈부신 화려함. 마지막으로 그 모든 것들의 바닥에 있는 혹독한 추위, 러시아의 소설들은 그래서 특별하다. 혼란스런 역사와 고통스러운 삶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러시아의 추위가 그들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아프고 슬픈 이야기를 하지만 그 추위 속을 지나온 탓인지 모든 문체들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다. 이러한 추위가 없었다면 고골의 ‘외투’가 탄생했을까, ‘동굴’이라는 소설이 그렇게 절실하게 다가왔을까, 그들은 매일매일 그 추위 속에서 살아남아야했기에 진한 보드카를 마시듯이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깊숙하게 파고들지 않았을까. 많은 것에서 의미를 찾아야 했을 것이고 추위 속에서도 버텨나가게 해 줄 아름다움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처음 러시아 문학을 접한 것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었다. 십대의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책이었고 나는 그저 완독하는데만 급급했다. 조금 자라서 러시아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 때 다시 집어 든 그 책은 달랐다. 나는 놀라울 정도로 책 속으로 빠져들었고 그 두꺼운 책을 통해 러시아의 차가운 공기를 맛 본 기분이었다. 러시아의 단편들은 종종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고골의 ‘코’나 푸쉬킨의 ‘스페이드의 여왕’은 백퍼센트 이해하기 전에 작가의 상상력에 웃음을 터뜨렸고 그들의 작품 세계, 더 나아가 러시아라는 나라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여기 이 책 속에는 도대체 이해할 수 없거나 당황시키게 하는 작품들은 없다. 그보다는 삶 전체를 하나씩 돌아보게 하는 단편들이 엮여 있다. 더구나 작품마다 해설이 담겨 있어 더 깊이 작품에 대해 이해할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작품마다 연관시켜 더 읽어볼만한 책들을 소개시켜 주고 있어 앞으로 다른 러시아 소설들을 읽어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아주 사소한 에피소드들, 간혹 책 페이지 위에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들, 그것들이 한참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게 한다. 오늘의 나의 하루와 어제와 내일을 더듬어보게 한다. 이런 소설은 곁에 두고 잊을 때쯤 한 번씩 한 번씩 읽게 되면 읽을 때마다 다른 깊이가 내 속에서 생겨나게 한다. 아주 가볍게 잊었던 것들, 예전의 나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 나에게는 없을 거라고 장담했던 일들, 그 책 속에 실린 단편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게 되면 내가 가졌던 삶에 대한 확신들이 흔들리고 무너지기도 하면서 점점 더 성숙하게 깊이 있게 다듬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