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거품 펭귄클래식 52
보리스 비앙 지음, 이재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콜랭이 멀어져 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알리즈는 마음속으로 있는 힘을 다해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클로에를 극진히 사랑하는 콜랭은 그녀를 위해서 꽃을 사고 그녀의 가슴을 파고드는 공포와 싸우기 위해서 일자리를 찾으러 가는 것이다. 콜랭의 넓은 어깨는 약간 처진 게 몹시 피곤해 보였으며, 그의 금발 머리는 예전처럼 단정하게 빗질이 되어 있지 않았다. 시크는 매우 친절하게 파르트르의 책에 대해서 말하고 파르트르에 대해 설명할 줄 알았다. 그는 실제로 파르트르 없이는 살 수가 없기 때문에 다른 걸 추구한다거나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파르트르는 자신이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것을 말했다. 파르트르가 그 백과사전을 출판하도록 내버려 둬서는 안 될 노릇이었다. 그것은 곧 시크의 죽음을 뜻하는 것이다. 그는 도둑질을 하고 서점 주인을 죽일 것이다. 알리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 책을 먼저 보았으면 어땠을까. 어쩌면 나는 아주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아이를 낳고 극장이 먹는 것 인가요 할 때쯤 극장에 갈 기회가 되어서 선택한 영화가 미셸 공드리의 ‘무드 인디고’였다. 미셸 공드리라니, 이런 영화를 놓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영화 스틸컷들이 아주 알록달록하여 그동안 굳어 있던 내 머리를 말랑말랑 하게 해줄 것 같았다. 그의 영화 ‘수면의 과학’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무조건 ‘무드 인디고’를 보러 갔다.

 

사실은 조금 당황했다. ‘수면의 과학’이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신나는 영화였다면 이 영화는 처음부터 상상력 덩어리였다. 집안의 풍경과 요리하는 모습들, 칵테일 피아노와 다리가 한 없이 늘어지는 비글무아 춤이라니! 난 한동안 너무 ‘엄마’라는 냉혹한 현실에 익숙해져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원작 소설은 왠지 평범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멍청하게 추측했다. 영화의 스토리는 단순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고 여자는 아프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는 내용. 원작이 50년도 더 전에 나온 거라니 그냥 평범한 고전을 미셸 공드리가 이렇게 화려하게 변신시켜 놓은 것은 아닐까 착각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서점에 들러 원작 소설을 바로 구입했다. 책 표지에는 ‘세월의 거품’이라는 소설의 제목보다는 ‘무드 인디고’라는 제목이 더 크게 인쇄되어 있었다. 미국에서는 애초에 번역된 책의 제목이 ‘Mood Indigo'라는 말도 들었다.

 

내 예상을 비웃듯 소설은 영화보다 더 화려한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비생물체도 생명이 있는 듯 살아 움직였다. 콜랭의 집도 콜랭처럼 초반에는 밝고 활기찼다가 클로에의 죽음이 가까워지며 점점 어둡고 작아지고 결국엔 천장과 바닥이 붙어 버린다. 그들은 항상 생쥐와 대화를 하고 클로에의 약을 구하러 약국에 가면 토끼인지 기계인지 모를 것이 약을 만들어 낸다. 클로에의 몸속에는 수련이 자라게 되고 그 꽃을 죽이기 위해 다른 많은 꽃들이 필요하고 비싼 꽃들을 사기 위해 콜랭은 열심히 돈을 벌지만 결국에 클로에는 죽음을 맞게 되고 그녀의 죽음은 화려했던 결혼식과는 대비되게 아주 초라하다. 남겨진 콜랭은? 그녀를 위해 전 재산을 내놓고 자신의 건강까지 다 해친 그는, 아마도 물속의 수련을 노려보다 그것을 죽이러 물속으로 풍덩 들어가 버릴지도 모르겠다.

사랑을 제대로 활짝 피우고 나누기도 전에 비극이 너무 빨리 왔기에 그는 처절하게 모든 열정을 바쳐서 클로에를 살리려고 노력했던 게 아닐까 생각도 든다.

 

콜랭과 클로에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지만 그들 못지않게 신경 쓰이는 커플이 알리즈와 시크이다. 시크는 콜랭의 친구로 파르트르라는 철학자의 광팬이다. 그는 그의 모든 저서 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수집하다가 돈을 다 써버리고 사랑하는 알리즈는 뒷전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알리즈는 시크를 사랑하는 마음에 파르트르를 살해하고 서점들을 불태운다. 그러한 행동들을 앞둔 알리즈의 마음이 문장으로 무겁게 전해졌다.

 

마냥 화려할 것만 같았던 이야기의 초반은 너무 빨리 내리막길에 들어선다. 행복함과 두근거림은 잠시이고 그들은 계속해서 끝을 알 수없는 바닥으로 내려간다. 아주 단순한 스토리지만 그것을 만들어가는 에피소드들은 하나하나 평범하지가 않다. 소설에서는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하며 종교와 경찰, 공장, 전쟁들을 절묘하게 끌어들여 그들의 행복은 더 과장된 쇼처럼 만들고 그들의 불행은 더욱 최악으로 치닫게 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소설을 읽고 나니 이 소설은 미셸 공드리 밖에는 영화화할 수 없었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영화보다 소설의 상상력이 더 무한하지만 미셸 공드리조차 이 소설의 상상력을 그대로 표현하기에도 벅찼을 것 같다.

 

사실 영화를 보고 나서, 책을 읽고 나서 내 머리는 말랑말랑해지기 보다는 꽃들이 가득 찬 방에 가만히 누워있는 클로에가 된 심정이었다. 꽃향기가 너무 진했고 내 몸을 편히 움직일 수도 없었고 무엇보다 목이 말랐다.

창문을 활짝 열고 크게 숨을 쉬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예림 2015-05-12 2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