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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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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노엄 촘스키, 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시대의 지성’ 촘스키와 푸코가 만나 대담을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관심이 갔던 책. 서로 자국(미국과 프랑스)에서 지식인으로 명성을 쌓아가며 이름을 들었겠지만 이렇게 대면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게다가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면서 사회문제에 앞장섰고 푸코는 철학자이면서 역사와 언어에 관심이 많고 또 사회문제에도 뛰어들었으니 넓게 보면 유사한 관심사도 많았을 듯하다. 물론 미시적인 부분에서는 아주 많이 달랐겠지만.

이들은 1971년 11월 네덜란드 TV 프로그램에서 네덜란드의 사상가 폰스 엘더르스가 사회를 보는 가운데 대담을 진행했다. 대담의 내용은 인간의 본성과 정치(사회)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그리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는 않고, 이후 쓴 저작물들을 일부 싣고 있다. 강연 또는 후술한 내용 역시 정치나 권력에 대한 내용들이지만 이 대담을 위해 쓴 것들은 아니고, 대담 내용과 유사한 부분(물론 촘스키가 대담 내용과 관련해 푸코를 언급한 내용도 있지만)을 함께 묶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 책 자체로 완성도 높은 담론을 펼친다기보다는 관련 내용들을 엮어놓은 자료집 성향이 강하다. 게다가 이 책에서는 ‘인간의 본성’보다 ‘정치(사회)와 권력’에 대한 논의들이 더 많이 진행되고 있다. 그런 내용들이라면 촘스키나 푸코 모두 많은 저작과 논문, 강연집을 낸 터라 굳이 ‘인간의 본성’이라는 틀에 맞춰 묶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기도 하다.

더욱이 두 사상가에게서 얻은 ‘인간의 본성’은 (물론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짧은 시간과 제약 등으로 심도깊게 논의되지 못했다. 관념론적인 주제여서 일반 독자/ 시청자들이 받아들이기에도 벅찬 주제였다. 당시의 대담을 ‘정치(사회)와 권력’에 집중해 우리 시대를 톺아보는 계기로 만들었다면 이해도 쉽고 좀 더 시대적인 대담이 되었을 듯하다. 또한 후술된 내용은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쉽게 이해하기 힘들다. 강연은, 분명 논문이나 저작에 비해 쉽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부분이 있지만 개념에 대해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렵더라도 원 저작(또는 이를 해설하는 책)을 읽고 강연집을 접하는 게 더 좋다는 쪽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표피적인 이야기를 듣는데 끝날 수도 있다.

한 가지 더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컬럼비아 대학 교수 존 라이츠먼이 서문에서 각각의 사회자와 대담자들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실제 챕터에서는 폰스 엘더르스, 미추 로나, 강연 장소 등에 대한 소개가 없었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촘스키와 푸코의 대답만이 아니다. 질문자들이 어떤 사상과 생각을 가지고 질문을 던졌는가는, 대답을 이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더불어 가능하다면 각 챕터에서 이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가이드 페이지가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점이다. 포괄적인 해설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담과 강연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되었을 듯하다. 가령, 폰스 엘더르스는 두 철학자를 비교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산의 양쪽에서 터널을 뚫어 오는 사람이라고 가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도구를 가지고 같은 산에서 터널 작업을 하면서도 상대방이 반대쪽에서 작업하고 있음을 모릅니다.”(24쪽)라고 했지만 나 역시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그들이 터널 작업을 끝까지 해나간다면 중간에서 만날 수 있는 지점은 무엇인가?

그럼에도 이 책의 행간에서 얻을 수 있는 몇몇 가지가 있었다. 촘스키의 견해들이 권력-언론을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과 푸코가 펼친 정치에 대한 생각이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담백했다는 것. 그리고 (어떤 이유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촘스키는 다분히 미국적인 사람이고 푸코는 다분히 프랑스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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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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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을 자유는 최소한의 자유이지만 동시에 최고급의 자유이기도 하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내게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 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돼야 한다. 책을 읽을 자유는 그 모든 조건을 필요로 하기에 ‘어려운 자유’일 수도 있다. - 로쟈 <책을 읽을 자유> 9쪽  
   

알라딘 신간평가단(8기) 인문/사회 분야에서 가장 먼저 받은 책은 로쟈의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이다. 누군가는 읽고 누군가는 쓴다. 세상엔 로쟈처럼 잘 읽는 이도 있고(그는 잘 쓰기도 한다!), 오웰처럼 잘 쓰는 이도 있다(그는 잘 읽기도 한다!). 이 책에 수록된 ‘어느 서평자의 고백’을 보면 조지 오웰은 1940년 한 해에만 백 권 이상의 서평을 썼다고 한다. 단어수를 따져가며 반복되는 작업과 책에 대한 반응을 날조해야 하는 서평자로서의 회의가 드러나는 글이지만, ‘정치 대 문학 :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 같은 에세이에서는 서평자로서의 재능도을 유감없이 발휘된다. (물론 <걸리버 여행기>는 그가 여섯 번 이상 읽을 만큼 애착을 가진 책이다) 오웰에게, 그리고 로쟈에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행위는 따로 떨어뜨릴 수 없을 만큼 밀접하다. 

하지만, 읽는 행위도 매우 중요하지만 쓰는 행위는 그에 앞선다. 읽기가 존재를 가능하게 한다면 쓰기는 존재를 탄생하게 한다. 물론 잘 읽는 것은 존재를 재탄생시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는 이미 서평을 통해 좋은 책으로 소문이 났기 때문에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의미에 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내 스스로(또는 더 많은 우리들이) 쓰는 주체로 살아가기 때문이다. 

<1984>와 <동물농장>, 조지 오웰을 대표하는 소설이자 문학사의 중요한 작품들이다. 이 두 책은 풍자적이기도 하지만 내러티브가 잘 살아있어 소설가로서의 조지 오웰을 말하는데 손색이 없다. 하지만 두 소설에만 머문다면, 조지 오웰의 다른 면은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다른 한면은 바로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조지 오웰이다. 그는 버바에서 제국경찰 간부로 근무하고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며, 또 빈곤과 가난을 경험하며 온 몸으로 시대에 뛰어들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 이후 수천년 간 인류가 매달려온 그 해석적인 의미로서 정치적 인간이었던 셈이다. ‘나는 왜 쓰는가’라는 에세이에서 이 같은 모습이 잘 드러난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나는 왜 쓰는가’ 79~300쪽  
   


사실 글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자기동기적인 이유다. 그 역시 “내가 글을 쓰는 동기가 오로지 공공의식의 발현이라는 인상을 심어준 듯하다”며 그것이 마지막 인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모든 작가는 허영심이 많고 이기적이고 게으르며, 글 쓰는 동기의 맨 밑바닥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동기가 무엇이 되었든, 스스로 쓰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이 없다면 그 글은 힘을 잃는다. 조지 오웰의 글에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달하고 싶은 강한 욕구가 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그 힘은 글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조지 오웰이 지금까지 읽히고 존경받을 수 있는 건, 글을 잘 쓰는 것(기교)과 글을 잘 표현하는 것(사상)이 층위를 이루며 켜켜이 포개져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왜 쓰는가>에 수록된 29편의 에세이는 조지 오웰의 사상을 살펴볼 수 있는 한편 ‘언어를 다루는 재주를 타고나는 사람’으로서의 조지 오웰을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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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2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의 글 쓰는 이유를 명확하면서도 쿨하게 밝히는 조지 오웰의 글이
참 좋은거 같습니다. 오히려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더 나은것도 같고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하루 2010-11-23 16: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 리뷰에 쓰려다가 만 이야기 중에 번역이 있었습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번역한 이한중씨가 에세이를 선별하고 번역을 하셨는데요, (제가 원문까지 대조해볼 능력은 안 되지만) 역자의 글솜씨도 상당했던 것 같습니다.
 
<책을 읽을 자유>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을 읽을 자유 - 로쟈의 책읽기 2000-2010
이현우(로쟈) 지음 / 현암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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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이현우)가 <책을 읽을 자유>에도 언급했듯 톨스토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으로 불행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로쟈의 서평을 읽다보니 “발간된 책은 같지만, 읽히는 것은 제각각 다르다”는 변용이 가능하다. 그가 10년간 읽고 엮어낸 책들 중에는 읽은 책도 있고 읽지 못한 책도 있지만, 이 책이 그 책이었나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리뷰해봐야 했기 때문이다.  

책의 재탄생
<로쟈의 인문학 서재 : 곁다리 인문학자 로쟈의 저공비행> 이후 두 번째 책이다. 사실 그 책이 발간될 때만 해도 ‘영향력 있는 인터넷 서평꾼’ 정도로 소개되었지만 몇몇 기사와 글을 볼 때 그는 오히려 데뷔가 늦은 편이었다. 데뷔가 기존 형태와 다르다고 해서 그 가치가 낮춰질 필요는 없었다. 예상했던 대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표현처럼 ‘무려 600쪽밖에’ 안 되는 서평집을 출간한 것이다. 2000년부터 2010년까지 그가 쓴 서평을 모은 <책을 읽을 자유>는 전공인 러시아 문학은 물론 경제, 예술, 철학, 과학 등 전방위적 학문 지식을 매우 조밀하게 엮어 책 한권한권에 생명을 부여한다. 지식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문장 곳곳에서 배어나는 상식은 ‘질투’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서평집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읽히는 것이 제각각’인 이유도 있겠지만 핵심이 사라진 서평을 발견할 때도 있고 취향에 맞지 않는 책들이 소개될 때도 많다. 서평집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읽는 사람의 시각을 읽는다는 의미다. 타인의 시각으로 책을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로쟈의 서평은 서평집이라는 이유로 투덜댈 수 없다. 일단 ‘군침 흘릴 만큼’ 알짜배기 같은 책들이 분야를 막론하고 소개되어 있다. 또 이 책에 수록된 서평들이 매체에 기고한 글이 많은데 이미 읽혀지기 위해 쓰인 글들은(글을 쓰는 이들에게는 힘들겠지만) 서평에서 놓칠 수 있는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게 한다.

지식의 그물코
사실 어떤 분야를 공부하고 그 세계로 진입한다는 것은, 그들만의 정보를 아는 것과도 같다. 로쟈의 방대하지만 선별된 정보는 감사할 정도다. 앞서 언급했던 신형철이 로쟈에게 ‘빚을 졌다’는 말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책을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놓고 장바구니에 담아놓은 책이 한두 권이 아니다. 신형철의 평을 조금 더 옮겨보면, “이번 책에서 로쟈는 문학 철학 역사학 사회학을 넘나들면서, 배치하기 짝짓기 지도 그리기 교정하기 등등의 테크닉을 발휘하여 저 ‘다양한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이 책을 통해 책 읽는 방식에 대해 배울 수 있었기에 공감할 수 있는 문장이다. 가령 책 읽기에 강약이 있을까? 로쟈의 글을 읽어보면 그렇다. 대충 넘겨 읽는 책들이 있는 한편 원문까지 대조해가며 읽는 책이 있다. 지식을 엮는 방법이 있을까? 역시 그렇다.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행간에는 다양한 지식으로 그물코를 짜는 방식이 녹아있다.<로쟈의 인문학 서재>와 함께 로쟈 에세이-로쟈 서평으로 지식을 엮어내면 더욱 의미 있는 책 읽기가 될 듯하다.

질투는 나의 힘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들고 읽기에 묵직한 600쪽 분량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또 쉴 새 없이 눈과 머리를 회전하며 받아들여야했던 인문학 중심의 정보도 무거울 때가 있었다(학문은 의외로 몸을 써야 하는 것이다!). 10년, 아니 중학교 시절 읽은 <수레바퀴 밑에서>부터 시작한다면 30년 가까이 되는 무게이니 오죽할까 싶다. 그런데 지난 10년간의 서평이지만 최근작이 많아 그의 부지런함이 단번에 눈에 들어온다. 600쪽의 분량도, 인문학적 지식도, 질투에 활활 타오르며 읽어냈다. 로쟈가 ‘책을 읽을 자유’를 말했다면 나는 ‘질투를 할 자유’를 이야기하고 싶다. 기형도 시인이 말했던(하지만 의미는 조금 다를 수 있는), ‘질투는 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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