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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연대기 ㅣ 샘터 외국소설선 5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SF 작가 중에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로버트 하인라인 등과 견줄 수
있으며 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우주를 바라보고 그 누구의 시선과도
같은 곳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글로서 인간과 이야기하고 인간을
비판하고 인간을 노래하는 작가는 누구일까요?
바로 이 책 <화성연대기>의 작가 레이 브래드버리가 그 주인공입니다.
브래드버리는 SF 작가이면서 장르소설로서 SF를 뛰어 넘어버린, 아니 순수와
장르의 벽을 허물어버린 작가입니다.
그 어떤 SF 작가보다 아름답고 유려하고 서정적인 문체를 사용하여,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SF보다는 SF로 둘러싸인 우주와 인간의 모습을 마치 한 편의 시처럼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죠.
이 소설은 고전 중의 고전이라 해도 전혀 무리가 없는 작품입니다. 저는 이번에
처음 읽는거라 기대가 됐지만 그만큼 걱정도 되더군요. 영화도 마찬가지지만
고전이라 불리는 작품들을 지금 처음 보는거라면 아무래도 기대에 못 미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스피드면에서도 그렇고 흥미도가 떨어지는 경우가 상당히
많더라구요.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점에서는 안심해도 됩니다.
오늘 밤 공기에서는 시간의 냄새가 났다.
시간은 어떤 냄새일까?
먼지와 시계와 인간이 뒤섞인 냄새이다.
오늘 밤에는 왠지 시간을 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은 어떤 모습일까?
깜깜한 방안으로 소리없이 내리는 눈이나 낡은 극장에서 상영하는
무성영화나 새해를 알리는 풍선들처럼 허무하게 떨어지는 천억 개의
얼굴 모습이다.
괜찮지 않나요? 상당히 마음에 드는 문장 중에 골라봤습니다. 이런 식의 묘사가
많이 나오는 편인데 쉽게 이해하기 힘든 대사도 많지만 예상치 못한 유머러스함에
피식 거린 경우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이 책은 연작 단편집이면서 한 편의 긴 장편 소설이기도 합니다. 단편이지만
일반적인 단편집과는 조금 다른 게, 작품 속 시간 배경으로 1999년 1월부터
2026년 10월까지 인간이 처음 화성의 땅을 밟는 순간부터 화성인과의 교류,
공감, 이해, 마찰, 다툼 등... 갖가지 에피소드를 마치 일기장이나 기록장, 또는
연대기처럼 시간순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에피소드가 연관이
있거나 같은 인물이 쭉 나온다거나 비슷한 주제가 이어진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별 의미가 없어 보이는 단 두 페이지짜리 단편이 있는가 하면 긴 호흡으로
인간들만의 이야기를 다룬 단편도, 화성인들만 나와서 그들만의 문화를 보여주는
단편도 있습니다. 같이 나오는 에피소드도 당연히 많구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해왔었던 과학, 기술 중심적인 SF 소설과는 너무나 달라서 처음엔 적응하기가
좀 그렇더군요. 배경만 미래요 우주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화성에 온 지구인들은 화성인들의 고귀하고 유서 깊은 모든 것에 붙여진, 물과
공기와 언덕의 이름들을 거리낌없이 부수고 파괴한 뒤 그 잔해에 지구에서 가지고
온 새 이름들을 붙입니다. 아직 기름 찌꺼기가 채 지워지지도 않은 지구의 녹슨
기계와 금속의 낡은 이름들로 말입니다...
이 소설은 분명히 미래의 화성과 지구의 모습을 그린 소설인데 묘하게도 지구의
과거 모습이 더 많이 떠오르더군요. 사막의 부족같은 마을이나 자연을 중요시하는
화성인들의 모습이나... 서부 개척시대의 원주민들과 백인들을 보는 거 같고
더군다나 화성인들과 지구인들의 그 반목을 보고 있자니 마야와 아즈텍 문명을
밀어버린 스페인의 모습이나 아메리카 대륙을 점령하고 인디언들을 몰살시켜버린
그들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되어 기분까지 약간 씁쓸해지더군요...
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무려 50년도 더 지난 지금, 이런 느낌을 받았다는 게
약간 신기하기도 하네요. 많이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제대로 번역되어 나와준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 뿐입니다. 하여튼, 생각보다 더 환상적이고, 섬세하고,
매혹적이고, 냉소적이고, 익살스런 문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