햄릿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4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이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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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햄릿(이경식 옮김/문학동네)2016』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먼저 쓰인 작품으로 저작연대는 '1600~1601년'(p.235)으로 추정한다. 원제는 ‘덴마크 왕자 햄릿의 비극적 이야기(The Tragicall Hiftorie of HAMLET, Prince of Denmarke)'로 제목에 ’비극‘이라 명시하고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William Shakespeare,1564~1616)는 엘리자베스 1세가 통치하던 16세기 중반 영국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0년대 말쯤에 런던으로 진출해서 극작가 겸 단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1590년에서 1613년에 이르기까지 세계 최고의 극작가로서, 10편의 비극(로마극 포함), 17편의 희극, 10편의 역사극, 시집 및 『소네트집』을 남겼다. 생전에도 인기 작가였던 셰익스피어는 사후에도 수많은 찬사를 받는다.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토머스 칼라일), “단테와 셰익스피어가 근대를 나누어 가졌다. 그 둘 사이에 세 번째란 없다”(T.S. 엘리엇), “문학적 위력이라는 면에서 셰익스피어는 성경에 맞먹는 유일한 인물”(헤럴드 블룸), “어느 한 시대의 사람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사람”(벤 존슨) 등의 말로 그를 기린다.

『햄릿』은 궁성의 망대 파수병들에게 선왕의 혼령이 나타나면서 시작된다. 작고한 햄릿 왕의 동생 클로디어스가 덴마크 왕국의 새 왕이 되었고 형수였던 거투루드를 “기쁨과 애통이 동일한 무게를 지니는 가운데”(p.21) 왕비로 맞았음을 공표한다. 왕비는 아들에게 “착한 햄릿아”라 부르며 말을 잇는다. 새 왕께 정다운 눈길을 보내볼 것을, 죽음은 자연스럽고 필연적인 일임에도 “어째서 너는 그처럼 유별나게 보이느냐?”라고 묻는다. 햄릿은 “저는 ‘보인다’를 알지 못합니다.”(p.24)라며 자기 속에 있는 것과 보이는 것이 어떻게, 얼마나 다른 별개의 문제인지 짚는다. 결국 보이는 것, 연기, 꾸며낼 수 있는 것, 겉치레, 장식, 겉옷과 자신의 속에 있는, 이 모두를 “초월하는 것”(p.25)이 대결하는 구도가 성립된다. 즉 후자에 진실, 진심, 가려진 실체, 바로잡아야 할 죄악과 부패-이는 국가 덴마크로 확대했을 때와 왕의 가문으로서, 개별적인 한 가정으로 점차 축소해도 동일하게 적용되는-가 속한다. 햄릿의 호소할 곳 없는 갈등은 “아비가 당한 흉측한, 가장 반인륜적인 살인을 복수하여라.”(p.47)라는 선왕 혼령의 명령 앞에서 나아갈 방향에 명분을 갖추고 동기를 부여받는다.

“세상은 관절이 어긋나 있다. 오, 이 저주받은 운명이여, 이것을 바로잡도록 내가 태어나다니!“(p.55) 햄릿은 이를 위해 광인 행세를 시작한다. 그는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대신 혼령이 내린 명을 재점검하는 도구로 극중극인 ”곤자고 살인“을 공연한다. 동시에 그런 스스로를 자조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햄릿은 복수의 적기를 놓치고 어머니와 대면 중 의도치 않게 폴로니어스를 살해하고 이는 딸 오필리어와 아들 레어티즈까지 참혹한 결말로 이끈다. 『햄릿』은 왕부터 무덤일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의 삶을 포착한다. 권력자는 의도하고 계획하나 민중의 사랑은 선택한 대상에 자유롭게 머문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가장 유명한 인물이자 문학사의 선두에 있는 캐릭터 햄릿은 물론이고 혼령, 거트루드 왕비, 클로디어스 왕과 폴로니어스, 오필리어, 레어티즈, 호레이쇼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사건을 주동하기도 이에 반(反)하기도 한다. 안타깝게 희생당하거나 비겁하게 침묵하기도 하며 각자의 가치나 실제적 이익을 선택하는 인간 군상을 대변한다. 관계맺음의 역동을 읽어 나갈 때 이를 간파하고 냉소하거나 때론 일격을 가하는 문장들은 시간이라는 녹을 깨뜨리고 날카롭게 빛난다. 아름답고 고통스럽고 깊고 명랑해서 인간 감정의 보고를 완성한다.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p.100)라는 독백이 여전히 긴 파장으로 공명하듯이 오래된 고민은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햄릿』은 읽을 때마다 새로운 얼굴을 내어주는 작품이다. 간결하게 밀도를 높인 대사는 독자가 겪어내고 있는 시간의 결에 따라 이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목소리를 들려준다. 여백에서 행간에서 일대 일, 또는 일대 다(多)의 은유와 상징이 숙고하게 만든다. 노래 같은 비유도 신화에서 인용하는 문장들도 마찬가지며 유명한 대사와 구절이 많아 ‘격언의 연속’(p.227)같다는 말에 동의한다. 햄릿의 입을 빌은 셰익스피어의 연극론은 독자를 위한 다채로운 선물 중 하나다. 역자는 이 작품의 주제를 “햄릿의 복수 지연”(p.306)이라고 전한다. 숨겨진 진실에 닿는 일은 내면의 자신을 정확히 보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햄릿은 타협하지 않고 들여다보려고 애쓴다. 관찰의 도구인 돋보기와 미세한 저울추, 들끓는 침묵을 마련하지만 이와는 달리 제어하지 못하고 한 순간 저지른 행동은 폴로니어스 살해를 초래한다. 정작 좌우명을 기록한 수첩은 펼치지 않은 채 유예시킴으로 수레바퀴는 이탈하고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는 의도했을까 떠밀렸을까.

모두의 비극을 멈출 수도 있었을 텐데, 비극의 범위를 최소화할 수도, 아니 정밀하게 겨눌 수도 있었을까. 그러나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조건, 보편적 삶이라는 무대로 극을 가져간다면 차이를 가리기 어려워진다. 사느냐 죽느냐 할 때 죽음 이후까지 범위를 확대한다면 더욱 가늠하기 힘들다. 지금 이 순간을 바르게 통과하기 위해 고투하는 한 인간을 본다. 그는 기준이 되는 단위가 여럿이고 어지러워서 부릅 뜬 눈으로 실수하지 않으려, 수치 환산에 정확을 기하려 헤아리는 일에 전념한다. 그런 순간의 나열은 대포 쏘는 소리가 터져 나오는 마지막 지문까지 이어지고, 이후 내려오는 막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끝난다. 햄릿이 인간의 초상인 이유 중 하나다. 르네상스적 인간 햄릿은 여전히 넘사벽의 아우라를 지니지만 말이다. 세 번째 읽는 햄릿이고 더 읽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삼회독 이유는 100면에 달하는 역자 이경식의 해설을 정독하는데도 있었다. 공부하면서 읽으면 금상첨화겠지만 자기만의 시선으로 마냥 읽어내도 좋을 작품이다. 더 이해하고 싶다는 간절함을 북돋는 고전 『햄릿』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살 것이냐 아니면 죽을 것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어느 것이 더 숭고한 정신인가,

변덕스러운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을 허용하는 것일까,

아니면 파도처럼 몰려오는 많은 고난에 대항하여

물리치는 것일까. 죽는 것은 잠자는 것,

그뿐이다. 그리고 잠에 의해서 우리가

심적 고통과 육신이 받는 허다한 충격들을

끝장낼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최적의 결론으로서

우리가 열렬히 바랄 바가 된다. 죽는 것은 잠자는 것.

잠자는 것, 어쩌면 꿈꾸는 것-그렇다, 여기에 난점이 있다.

왜냐하면 그 죽음의 잠 속에서 어떤 꿈이 찾아올까가-

우리가 인생 굴레의 속박을 벗어던졌을 때-

우리를 멈추게 한다, 바로 이 난점 때문에

장기간의 불행을 만들어가는 것이다.(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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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 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
이동연 지음 / 창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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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연의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창해)2023, 272쪽』는 부제(그림으로 본 고흐의 일생)가 설명하듯 고흐의 삶을 그림으로 이야기한다. 고흐에게 그림은 일기였고 자작시였으며, 혼자 부르는 노래, 그러나 청중을 간절히 기다리는 노래였다. 제목인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그가 숨을 거둔 후 주머니에서 발견한,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 속 문장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림밖에 없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p.269)에서 가져왔다. 저자는 KBS 해피FM <그곳에 사랑이 있었네>에 다년간 출연하며 ‘예술가와 뮤즈’를 다루었고, 그때 고흐를 방송한 인연으로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를 출간했다.(출판사 인용) 책은 들판에서 뛰어 놀다 우연히 형의 비석을 발견했던 7세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고흐 삶의 궤적을 전한다.

화가의 길을 선택한 후 10년 동안 “유화 900여 작품과 드로잉 1100여 작품을 완성했으며, 기적같이 딱 한 작품만 팔렸”던,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역사상 최고가를 형성(p.30)하게 된 고흐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을까. 책은 총 7장으로 장별 5~11개 소제목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각 소제목은 10면 이내 분량이며 고흐가 통과하는 시간이 어떤 작품으로 형상화되는지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그림이 삶이고 삶이 그림이었던 순간들은 외제니 로이어부터 마르그리트 가셰까지 기쁨이자 상흔이었던 사랑의 행적을 기록한다. 아를에 화가 공동체를 마련하겠다는 꿈은 아를의 노란 집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했으나 이 계획에 호의적이었던 고갱과는 공감보다 갈등하는 일이 더 잦다. “자연스런 풍경”과 “작가의 이미지 속에 잘 정돈된 그림”처럼 고흐와 고갱은 추구하는 스타일이나 화풍 뿐 아니라 성격이나 가치관도 달랐고 이는 고흐에게 특히 아픔으로 남는다. 고흐가 겪어야 했던 경제적 어려움과 동생 테오와 가족들에게 품고 있던 미안함, 어머니와의 관계도 글과 그림으로 정리하고 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구두 한 켤레>를 둘러싼 하이데거와 미술 사학자 마이어 샤피로, 그리고 쟈크 데리다의 논쟁이다. 고흐가 파리에 있던 1년간 그렸던 구두 그림이 5점이나 되고 이후 아를에서 1점, 생레미 요양원에서 그렸던 가죽 나막신까지 고흐가 의미를 부여했던 대상은 시공간을 넘어선다. 그리고 처음이자 유일한 감상자들에게 닿는다. 자신만의 이야기를 새로 시작하는 매개체가 된다. 해바라기, 사이프러스, 올리브나무 등 연작 시리즈들은 고흐가 겪는 감정의 고저를 가감 없이 반영하는 듯 보인다. 고흐가 극적으로 활용했던 임파스토 기법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들으면 회화가 조소처럼 보이는 현장, 입체감에서 오는 깊은 감동이 전율을 안겨준다는 <별이 빛나는 밤> 앞에 서고 싶어진다.

이제 ‘반 고흐 미술관’까지 가지 않더라도 미디어 아트를 비롯한 다양한 전시로 그를 만날 수 있다. 고흐 관련서도 동생 테오와 나눈 서한집부터 전기소설, 인문 기행서까지 선택의 폭이 넓다. 『그림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는 고흐의 일생을 작품으로 요약하면서도 분량이 부담 없다. 또한 피상적이라거나 부족한 느낌 없이 한 예술가의 내면에 깊이 닿는 충만함을 선사한다. 다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림 사이즈가 너무 작았던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서문과 후기 생략에도 본문에 저자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녹아 있으며 현명하고 충실한 안내자 역할을 한다. 본격적으로 고흐를 만나보려는 독자나 전시 관람을 앞두고 있다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한다.

책 속에서>

고흐가 그리려는 대상은 영웅, 위인, 화려함, 미인이 아니었다. 황량한 대자연과 그곳에서 살기 위해 움직여야만 하는 바로 그 존재들이었다. 고흐는 어떤 것이든 미화하는 것을 싫어했고, 삶의 실체적 진실로만 화폭을 채워 나갔다. 그는 1885년 겨울 파리로 떠나기까지 이곳에서 2년 동안 450여 작품을 완성했다.(p.51)

하지만 고흐는 유행 방식을 추종하면서까지 그림을 팔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사물을 분석하지 않고 사물에서 솟구치는 느낌을 그대로 그려나갔던 것이다.(p.62)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릴 무렵 클로드 모네는 수련을, 폴 세잔은 사과를 그리고 있었다. 모네가 수련을 자신의 상징처럼 여기고 30년간 그렸다면, 세잔은 사과로 파리를 놀라게 하겠다며 40년간 사과를 그렸다. 고흐도 10년의 짧은 화가 생활 동안 꾸준히 해바라기를 그렸다. 그에게 해바라기는 태양의 항구성과 삶의 무상을 상징했다.(p.121)

저는 농부들보다 못하지만, 저에게는 캔버스가 밭이에요. 일하는 분들도 쉴 때 책이나 그림이 필요하죠. 그런 그림을 그리겠습니다./이 작품을 끝으로 고흐는 더 이상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p.209)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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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 - '공무도하가'에서 '사랑의 발명'까지
신형철 지음 / 난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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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역사(난다, 2022)』는 “신형철 시화(詩話)”임을 먼저 밝힌다. “시평(詩評)”이 아니다. 신형철은 2005년 계간 <문학동네>에 글을 발표하면서 비평 활동을 시작한 문학평론가로 《몰락의 에티카》 《느낌의 공동체》 《정확한 사랑의 실험》 등을 출간했다. “우리 문학을 향한 ‘정확한 사랑’이자 시대를 읽는 탁월한 문장”이라는 말이 그를 설명한다. 본문에 앞서 “내가 시를 겪으며”라는 머리말은 네 면이다. 이 네 면은 끝나지 않을 페이지처럼 서두를 채운다. 조심하지 않으면 네 번이고 사십 번이고 반복하게 될 서두다.

“‘시’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은 예술이다.”부터 “그런데 나는 인생의 육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게 곧 시라고 믿고 있다. 걸어가면서 쌓여가는 건 인생이기도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인생도 행과 연으로 이루어지니까.”(p.7)까지, 암기, 암송, 뭐라도 좋다. 외워야 하는 문장이다. 이런 만남은 앞으로 계속될 것이다. 4년 만의 신작 『인생의 역사』 머리말은 아들에게 바치는 헌사로 맺는다. 이게 시가 아니면 뭐람! 저자는 시를 읽는 일에 이론보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어떤 일을 겪으면서, 알던 시도 다시 겪는다.”(p.8)는 말로 독자를 초대한다. 경직돼있던 어깨가 어느새 편안히 내려간다.

책은 총 5부에 걸쳐 스물다섯 편의 시를 담고 있다. 부록에서도 다섯 꼭지를 더해 아쉬움을 달랜다. 1부 “고통의 각”은 ‘가장 오래된 인생과 그 고통’을 “공무도하가”로 연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만다는 인생의 아픈 장면을 잠시 보여준다. 죄 없는 인간이 받는 고통의 절망은 욥기로 살핀다. 카라마조프가의 이반과 알료샤가 치열하게 논하던 밤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슬픔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읽어야 할 시인”(p.49) 에밀리 디킨슨 편에서는 “그리고 ‘지옥’이 창조되기 위해서도 단테가 상상한 총 아홉 개의 구역 따위는 필요 없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뜨기만 하면 지금 여기가 지옥이므로.”(p.50)라는 데서 우두커니 멈춘다. 정확한 표현에 절로 나오는 게 심호흡인지 한숨인지, 선명함으로 거듭 공감을 부른다.

2부 “사랑의 면”에서 한 편을 선택해야 한다면 단연 “두이노의 비가”다. 내 스물 언저리에 경이와 절망을 함께 건넸던 릴케의 정점, “두이노의 비가”를 저자는 어떻게 보여줄까. "언어에 대한 환멸이 심해질 때마다 약을 구하듯 되돌아가는 책들“(p.86)로 자리매김한다. 인간의 사랑이 배울 수 있는 최상의 자세를 이해시킨다. 무엇보다 ”내가 소리쳐 부른들, 천사의 서열에서 어느 누가 그 소리를 들어주랴?“(p.88)(서가에서 꺼낸 이미 절판된 두이노의 비가는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열에서 누가 들어주랴.“로 번역되었다/한기찬 역), 잊히지 않았던 시작만으로도 충만해진다.

놀라운 발견, “허공 한줌”은 단독자인 독자들에게 묻는다. 당신의 움켜쥠과 놓아줌은 어떠한지. “성숙한 거리두기”를 하고 있는지, 할 의지가 있는지를 말이다. “기러기”에서처럼 어떤 측면에 주목하며 어떻게 읽어낼 것인지 선택할 수도 있다는 시 읽기의 방법론적 힌트도 얻을 수 있다. 어떤 시 편에서는 눈물을 참아야 한다. 김시습이, 윤동주가, 최승자가 말이다. 레이먼드 카버를 향한 하루키의 오랜 애도에는 숙연해진다. 독자는 성찰하는 저자의 눈을 따라가다 그 시선의 끝에 나를 놓아볼 수 있는 특별한 선물을 받게 될 테다.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결국 ‘혁혁한 업적’을 바라고 있는 것이었다. 고마워라. 김수영이 김수영이어서 괴로웠던 것은 김수영뿐이고, 우리에게는 그가 있어 온통 다행인 일들뿐이다.”(p.230), 여운이 진동한다. 특히 이런 감동은 매 장을 맺을 때마다 어김없이 돌아온다. 마지막 문장들을 따로 모아 소지하고 다녀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시선이 지극히 민감하고 세심하다, 엄격하다. 그래서 위안이고 동시에 힘이 된다. 벅차올라 심장 누르며 읽었던 게 얼마 만인가. 신형철은 처음인데요, 자책하던 나를 너그럽게 둔다. 읽어낼 “나날들”(p.232)이 남아있음에 감사하자며. 늘 감정을 부각하지 않는 건조하고 논리적인 글을 쓰고 싶다. 서평은 이런 목적에 얼추 걸맞다. 그런데 흔치 않은 일이 때론 발생한다. 어떤 책을 읽을 때 밑도 끝도 없이 고백하고 싶어지는 난감한 상황이 말이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됩니다 하는 내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다. 그럼에도 한사코 목소리를 내고 마니 “인생의 역사”, 너무 사랑합니다. 모두 읽고 암송합시다! 저와 함께 외워주세요! 라고 말이다. 말리기엔 이미 늦었다. 기록해버린 진심.

책 속에서>

한 시인의 삶이 객관적으로 보기에 불행한 편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타인이 주관적으로 확언하는 말을 하는 것은 부주의한 일이다. 당사자가 ‘나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해서 타인이 아무 때나 ‘그는 불행하다’라고 말할 자격을 얻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p.67)

왜 릴케인가. ˝릴케의 시에는 답이 없다. 인간의 언어로 제기된 가장 아름답고 심오한 질문이 있을 뿐이다.˝ 어디엔가 이렇게 쓴 적이 있는데 이 말도 정확하지는 않다. 답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답이 있기는 하되 그것이 질문만큼 중요하지는 않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적어도 시에서는 그렇다.(중략) 그러나 누구도 시인들만큼 잘 묻기는 어렵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로부터 질문하는 법을, 그 자세와 열도와 끈기를 배운다. 그것이 시를 읽는 한 가지 이유다. 인생은 질문하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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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 - 단숨에 술술 읽는
드니 랭동.가브리엘 라부아 지음, 손윤지 옮김 / BH(balance harmony)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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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니 랭동과 가브리엘 라부아의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손윤지 옮김,BH(balance harmony),2022)』는 그리스 신화 덕후들을 또 한 번 유혹할 만한 책이다. <소설로 읽는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소설로 읽는 그리스 로마신화>등 역사와 철학 관련 저작을 출간했던 드니 랭동이 이번에는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로 독자를 만난다. “단숨에 술술 읽는”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형식은 산뜻한 그래픽 노블이며 이 작업에 룰루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랑스의 만평가이자 카투니스트 가브리엘 라부아가 힘을 보탠다. 그는 드니 랭동의 저서 『신들은 신난다』를 각색해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신들의 특징을 정리해 주는데 잘 안다고 여겼던 게 착각이었을까, 또 한 번의 지루한 반복일지 모른다는 우려는 이내 떨치고 호기심만 장착하게 된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요점만 정확히 담아낸다. 속도감 있는 전개가 페이지 터너 역할을 하며 시선을 붙잡는다. 티탄족과 기간테스족의 충돌부터 크로노스, 제우스를 비롯한 유명한 신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제우스, 권력을 가지다”부터 “아테네의 창설”까지 총 9장으로 구성된다. 각 장은 몇 개의 소제목을 포함하고 소제목별로 1~4면을 할애해 상황과 분위기, 사건과 인과관계를 정리한다. 최초의 인간 여자 판도라가 가진 단 하나의 결함인 호기심은 결국 금지된 상자를 열게 만든다. 작가는 프로메테우스가 숨겨둔 유일한 해독제 “희망”을 이렇게 설명한다. “그것은 인간이 살면서 겪을 모든 고통스러운 일에 대한 해독제로, 모든 질병에 대한 보편적인 치료제이자 온갖 괴로움을 덜어줄 수 있는 위안”(p.42)이라고. 지혜의 여신 아테나 편에서는 “숨기지 않겠다. 아테나는 필자가 제일 좋아하는 여신이며, 그녀는 제우스가 가장 사랑하던 딸이기도 했다.”(p.108)고 애정을 드러낸다.


책은 서구문화의 기원이면서 철학과 예술 등 분야를 넘나들며 영향을 끼쳐온 그리스 신화를 재 소개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는 학습용 시리즈물부터 테마별로 묶은 이윤기의 저서를 비롯해 근래까지도 지속적으로 출간되어 선택지가 상당하다. 그 폭이 넓어 오히려 적절한 결정을 지연시키는 수도 있겠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세련되고 때론 유머러스한 그림은 등장인물의 성격적 특징도 반영한다. 경쾌한 문체는 비극의 색조는 낮추나 어리석음이나 실패는 간과하지 않는 거울 역할을 한다. 무엇보다 일러스트와 텍스트가 서로를 보완하고 강조하는 그래픽 노블이 지닌 직관적 아름다움이 즐거운 독서 경험을 제공한다. 결국 행간과 여백에 숨은 서사를 한껏 캐내고 싶도록 동기부여 할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 신들의 이야기』는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신화의 매력을 일깨울 책이며 본격적인 완역 읽기에 앞선 가이드북으로도 안성맞춤이다. 어쩌면 다양한 버전의 그리스 로마 신화 수집 욕구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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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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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정지인 옮김,곰출판) 2021』는 과학자인 아버지에게 헌정된 룰루 밀러의 논픽션 데뷔작으로 빛을 발하는 것을 향한 인간의 고투를 담는다. 빛을 발하는 것은 별이나 식물일 수도, 물고기일 수도, 고향이나 안식처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여전히 특정하지 못하는 모호한 꿈일 수도 있다. 제목의 물고기는 어류인 물고기 자체다. 그래서 결국엔 더 큰 놀라움을 안긴다. 동시에 다양하게 변용 가능한 은유로도 해석할 수 있다. 빛을 찾아가는 과정 역시 만만치 않다. 타협할 수 없는 목표를 위해 “지속적으로 오만을 복용”(p.146)한 결과 인간은 어떻게 다른 무엇이 될 수 있는가를 치밀하게 고발하는 이 책은 위험은 늘, 너무도 가까이 있음을 경고한다. 룰루 밀러는 ‘방송계의 퓰리처상’으로 불리는 피버디상(Peabody Awards)을 수상한 과학 전문기자로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찬사 일색의 평가와 함께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린다. 여기에 밑줄에서 밑줄로 옮겨가기 어려운, 하나의 밑줄에 오래 묶어두는 책이라는 평을 더한다. 또한 삽화만 보는 시간을 따로 확보해도 좋을 것이다.

무질서도는 계속 증가한다는 열역학 제2법칙, 엔트로피 법칙이라고 알려진 이 명제는 이미 질문이 아니라 법칙이다. 혼돈은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시기의 문제고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p.16)이다. 저자는 과학자인 아버지의 이런 주장에 반하는 인물을 알게 된다. 분류학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재난에 가까운 혼란을 대하는 방식은 가히 놀랍다. 저자는 조던의 자서전을 통해 그를 추적하게 되는데 형의 죽음과 이 시기 식물의 수집, “승리의 선언이자 통찰의 선언”(p.31)인 라틴어 학명들, 이름들을 강박적으로 수집하며 무력함을 넘어서는 페이지들이 지나간다. 페니키스 섬에서 만나는 박물학자 루이 아가시로부터 “신성한 사다리” 개념(p.44)을 배운 조던은 평생 맞춰야 할 퍼즐이자 반짝이는 비늘로 된 실마리들인 물고기를 처음으로 만난다. 그는 혼돈과 맞서는 자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라는 일곱 살 아이의 질문에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p.54)라고 아버지는 대답한다. 설명하고 재차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녀에게 혼돈만이 지배자인 이 세상은 친절하지 않다. 아버지처럼 단단하기가 어렵고 가족들이 감당하는 아픔도 상처로만 새겨진다. 그때 인생의 선물과도 같은 만남으로 그녀는 안식처를 찾은 느낌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그를 잃고 그를 되찾고 싶다는 간절함만 남는다. 이 여정의 끝은 기대와는 다른 결말이지만 그녀는 이미 성장한 이후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빛과 그림자로부터 시선을 피하지 않은 결과, 끊임없이 고민하고 진실에 닿고자 움직인 결론이다. 아프지만 다행스럽기도, 충격적이지만 귀 기울이면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하나의 마침, 해방에 이른다.

저자는 자전적 이야기의 한 가운데에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혁신적 인물을 배치한다. 후회와 고통으로 자책하던 자신에게 실패에도 머뭇거리지 않는 돌진의 아이콘인 ‘조던으로부터 배우기’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스탠퍼드대학 총장을 역임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19세기에 활동한 생물학자(분류학자)로 개인적 아픔도 오로지 ‘일’로 이겨낸 “그릿”의 대표주자다. “어느 생물이 어느 생물을 낳았는지에 관한 실마리, 생명이 흘러가는 방향에 관한 실마리, 인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실험에 관한 실마리, 그리고 어쩌면 사람들을 개선하기 위한 비결에 관한 실마리를.”(p.105) 찾는데 온 힘을 쏟았으며 그 생물의 이름을 발음하는 행위는 “새로운 종의 탄생”(p.106) 의식이 된다. 자신이 발견한 포획물들을 전리품처럼 높이 쌓아 전시하는 그는 이미 경계를 넘는다. 또 하나의 바벨탑을 세우며 결국 “우생학”이라는 악의 지대까지 확대된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제목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다음 이야기를 곧바로 듣거나 하고 싶게 만든다. 계속 몰입하게 되는 흡인력이 책을 덮지 못하게 한다. 책 속 이야기의 연결과 전환이 매끄럽고 미지의 것을 향한 항해에 동승하는 두근거림을 선사한다. 문장은 명확해서 이해하기 용이하다. 동시에 비유와 묘사가 아름답고 때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질문하는 책이다. 인물에 이입하는 읽기가 어느 시점부터 틀어지고 선망이 실망으로, 오싹한 두려움으로, 왜 이렇게까지 되었나 하는 안타까움으로, 다른 선택과 경우의 수는 없었을까 하는 두리번거림으로 번져간다. 미처 알지 못했고 그래서 관심이 덜했던 학문의 일면, 슬픈 역사의 한 장을 엿볼 수 있었고 이는 수많은 인용과 주석에서도 짐작 가능한 저자의 열정에 빚진다. 진심은 역시 독자의 가슴도 뛰게 한다. 다만, 결말에 이르자 저자의 탐구 여정과 “혼돈을 이길 방법”이라는 개인적 추구가 하나의 지점으로 모이며 뜻밖의 각성을 불러일으킨다. 저자의 환희와 감격이 가히 폭발적이라 독자는 오히려 한 발 뒤로 빼며 박수라도 쳐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물론 잘못된 일들을 저작으로 인해 바로잡을 수 있었다는 건 다행이면서 커다란 성과다. 가능성과 희망, 겸허함과 공존에의 의지, 불확실성의 허용, 불확실성의 확실성을 사유하게끔 하는 책으로 다양한 방향에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인간의 지력으로 도저히 다 이해할 수 없는 생태의 복잡성에 대한 이러한 조심스러움과 겸손함, 공경하는 마음은 사실 대단히 오래된 것이다. 이는 때로 “민들레 원칙”이라고도 불리는 철학적 개념이다.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생학자들은 이런 단순한 상대성의 원칙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유전자 풀에서 “필수 불가결한” 다양성을 제거하려고 노력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지배자 인종을 구축할 최선의 기회를 망쳐버리고 있었던 셈이다.(p.189)

좋은 과학이 할 일은 우리가 자연에 “편리하게” 그어놓은 선들 너머를 보려고 노력하는 것, 당신이 응시하는 모든 생물에게는 당신이 결코 이해하지 못할 복잡성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p.227)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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