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득함은 간절한 심정을 부추기고 막막함은 한 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잃어버릴 수 없는 마음은 그 자체가 눈이 되어 잃어버린 도시를 향한 움직임에 부지런하다. 비록 호흡을 잃은 채 도달할지라도 중단할 수 없는 여정이 있다. 백 년 전을 담아낸 책 속에서 여정은 분명하고 21세기 현재에서도 진행중이며 타협과 설득, 합리적이고 매끄러운 어떤 이론으로도 방향을 틀 수도, 그 길을 대체할 수도 없다. 위화의 『원청』(문현선 옮김, 푸른숲, 2022, 588쪽, 文城, 2021)은 부제인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가는 주인공의 행적을 중심으로 한 전기소설이다. 기이한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전적 의미의 전기소설은 작가 위화의 오랜 꿈이었고 8년 만에 발표한 『원청』에서 결실을 맺는다. 위화는 중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모옌, 옌레커와 함께 중국 3대 현대작가다. 그는 1983년 첫 단편 발표 이후 1993년 두 번째 장편 <인생>으로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허삼관 매혈기>, <형제>, <제 7일> 등 5편의 장편과 산문집을 냈으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강명은 추천사에서 이토록 쉽고도 심오한, 웃기면서 동시에 슬픈 작품을 쓴 위화를 마법사에 비유한다. “위화적인 순간”에 함께 하자는 초청에, 8년 만에 펼쳐지는 차갑고도 먹먹한 행로에 오를 시간이다.
소설 『원청』은 <원청>과 <또 하나의 이야기>로 구성된다. 전자는 주인공 린샹푸의 관점에서, 후자인 <또 하나의 이야기>는 린샹푸를 끝없는 길로 이끈 샤오메이의 관점에서 서술된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던 린샹푸는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열아홉에 어머니를 잃고 집사인 톈다와 그의 동생들과 지낸다. 아름다운 류펑메이와의 혼사도 놓쳤던 스물넷에 린샹푸는 젊은 오누이 샤오메이와 아창을 만난다. 양쯔강을 건넌 뒤에도 한참을 더 가야 나오는 강남 물의 고장 원청에서 왔다는 그들은 글자가 날아가듯 빠르게 말한다. 샤오메이는 아창이 데리러 올때까지 집에 머물던 중 린샹푸의 아내가 되지만 어느 날 사라져버린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딸을 낳고 아이가 한 달이 되자 또다시 종적을 감춘다. “당신이 또 말도 없이 떠나면 내가 찾으러 갈 거예요. 아이를 안고 세상 끝까지 가서라도 당신을 찾을 거예요.”(p.81)라는 말대로 고향을 떠난다. 하지만 원청이 어디인지 누구도 알려주지 못해 아창의 이야기를 회상하며 시진으로 향한다. 원청과 가장 가까운 시진에서 언제까지고 샤오메이를 기다리겠다고 마음먹는다.
린샹푸는 모든 게 인연이고 운명이라고 결론지으면서도(p.67) 자신이 맺은 관계에 정성을 다한다. 5년 동안 친구였던 당나귀도 예외는 아니었다. 시진에 거하며 함께하게 된 천융량과 그의 가족, 구이민까지 그는 받은 호의에 우정으로 답한다. 그러면서도 시진에서 보내는 10년간 샤오메이 찾기, 또는 샤오메이 기다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믿지 못할 자연의 광란과 토비들의 잔악한 행동은 개인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일을 허락하지 않는다. 13년이 지나자 린샹푸는 원청도 샤오메이와 아창이라는 이름도 가짜일거라고 여기며 고향을 생각한다. 그는 토비에게 납치된 시진의 회장 구이민 구조에 자원한다. 소설 후반 3분의 1분량은 샤오메이의 변이 나온다. 그녀는 왜 그랬을까? “샤오메이는 넓은 완무당에서 길러진 활발한 천성을 시진 선가에 들어온 뒤 푸른색 꽃무늬 새 옷에 응축해 가슴 깊이 묻었다.”(p.414) 그 후 샤오메이가 가슴 깊이 묻어야 할 것은 꽃무늬 옷 뿐이 아닌 린샹푸, 그리고 100여 집의 젖을 먹고 자란 딸 린바이자로 귀결된다. 린샹푸가 시진 천융량의 집에서 나오던 눈 내리던 밤, 원청은 이미 사라지고 있었을까.
소설의 배경은 1900년대 초반 신해혁명기다. 군인세력이 난립했던 군벌시대에 지방에서 출몰하던 도적떼, 토착 비적인 토비가 민중을 참혹하게 옥죄던 시기다. 역사라는 거대 수레바퀴에 속수무책으로 치이고 쓸려가는 평범한 인간은 비참한 현실 앞에 두려워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무자비한 바큇살 앞에서 굳어버리는 대신 두려움에 맞선다. 살아남아 소중한 사람들을 지켜내고자 결단하고 기꺼이 적진으로 향하나 때론 믿을 수 없이 허망하고 느닷없는 종말에 이르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원청』은 꺼져가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불러주는 의례이기도 하다. 소설은 작가의 의도일지 아닐지 궁금해하며 등장인물들의 남은 삶을 추측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린샹푸와 샤오메이의 딸 린바이자의 행적은 끊긴 채 이어지지 못했다.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미완의 느낌을 원했노라고 전한다.
『원청』을 향하는 린샹푸의 여정은 내내 『성』을 향하는 토지측량사 K의 시간을 상기시켰다. 도달해야만 하는 이상향이 거창하거나 원대하지 않더라도 한 사람의 평생을 담보하는 일은 곧잘 발견된다. 그 상징은 눈 앞의 『성』이 그랬듯 모습을 바꾸거나 속이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평생 매진한 가치가 알고 보니 내가 추구하던 대상에서 빗나가 있을 수도 있다. 이 틀어짐을 마지막 날들을 목전에 둔 때에야 알아차릴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상받거나 하소연할 수 없는 게 동일한 인간 조건일테다. 린샹푸는 자신들은 알 수 없을 한 순간 마침내 아내 곁에 머문다. 마지막 페이지에 완독일과 시간을 쓰며 한 문장을 적었다.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인가!”라고. 지금 덧붙이고 싶은 문장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 라는 한 시인의 글이다. 독자는 가련하고 연약하기에 더 강하고 아름답다는 ‘그럼에도’의 역설, 역설의 미학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