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를 쓰다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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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을 곁들인 전기인 평전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균형을 지향하지만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서술에 조금 더 방점이 찍힌다. 적합한 근거 자료와 함께 한 인물을 돌아보고 총평하고 기억하는 의미있는 기록물이다. 평전은 진지한 저작이고 그러므로 묵직할 것이고, 주인공의 위상에 걸맞게 분량은 늘어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깨어지는 법,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는 독특하다. 도스토옙스키를 쓰다(원당희 옮김, 세창출판사, 2013, 240쪽 분량)는 문고본 내지 핸드북이라 해도 좋을 만한 분량으로 거장의 세계를 조명한다. 유럽의 대표 지성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로 광기와 우연의 역사, 발자크등 시대사와 전기를 펴냈고, 중 단편 소설들을 남겼다. 도스토옙스키를 쓰다는 전달자 역할에 충실한 저자가 쓴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기록보다는 열렬한 어조, 고조된 톤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추종자의 헌사에 가깝다.

 

책은 열 개의 키워드로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를 포착한다. 작품을 읽어온 독자는 탐독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환기하는 기회로 삼게 되고, 저자의 시선과 관점을 통해 당시 놓쳤거나 미진했던 부분을 재정리할 수도 있다. 저자는 독자의 공감을 돕기 위해 손 내밀거나 결코 전령을 보내지 않는, “내면에서 체험하지 않는다면 전혀 이해될 수 없는”(p.10) 작가에게 우리는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가늠한다. 유일한 방법은 체험인데 이는 얼굴, 운명, 그의 작품 외에는 없다고 차례로 살핀다. 육십 년이라는 일생 중 많이 알려지지 않은 유년을 지나 첫 작품의 영광과 시베리아 유형, 출간 전부터 먼저 볼모잡히는 집필과정,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시간과 돈의 독촉 가운데 축조해내는 서사와 인물, 추구하는 지향, 작품을 넘어 성취하고자 했던 궁극의 가치까지 쉴 틈 없이 조망한다. 츠바이크가 해석하는 도스토옙스키는 행간도 여백도 허락하지 않는 핵심의 요약이기에 아쉬울 만큼 간략하고 온통 밑줄, 온통 별 표시로 차게 된다.

 

특히 흥미로웠던 지점들을 꼽아보는 일은 이 책의 활용을 높일 것이다. 문학사적인 자리매김이나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견주어 보는 일은 그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례로 느닷없는 시련에 대응하는 도스토옙스키와 오스카 와일드의 태도가 어떻게 달랐는가. 시베리아와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위기요소가 마법적 가치전도의 힘을 통해 예술에서의 결실로”(p.59)나타났던 도스토옙스키는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끝났”(p.58)던 것과 달리 그제야 진정한 시작이다. 괴테는 조화로운 인간을 이상으로 삼았고 톨스토이는 교훈적이고 교과서와 같았던 삶을 지향했으나 도스토옙스키는 규범이 아니라 삶의 충일을 추구”(p.76)했다.

 

작중 인물들을 볼 때 그는 확연히 구분된다. 발자크의 주인공들이 인간이라기보다는 열정을 표현하는 정밀기계, 연관개념으로서의 고유한 특징(p.87)을 대변한다면 독일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상과 화해하고 질서를 목표로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은 그렇치 않다. 알다시피 매우 유별나다. “모두가 만족스런 인간, 부자와 권력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의 인물 가운데 누가 이런 걸 원하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p.98) 휴식이라고는 모르는 질주하는 인간들이 작품 안에서 종횡무진한다. 고통에 몸 던지는 영혼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프랑스 작가들의 사실주의, 정밀 자연주의와 도스토옙스키의 마법적 사실주의의 차이도 짚는다. “언제나 그는 냉혹한 손으로 황홀의 잔에 현세성이라는 분노의 술을 따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에게 현실적이고 참된 것이란 반낭만적, 반감상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p.137) 저자는 시적 문장으로 삶과 소설의 경계를 지우던 마법사와 같은 작가를 묘사한다.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그 모양을 나누어 가진 작품 속 등장인물을 불러내어 풍성한 사례로 제시하는데 그로써 저자의 논리를 증명한다. 건축과 연결 지었을 때, 시간을 중심으로 분석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작가로서의 도스토옙스키에서 멈추지 않고 슬라브주의자, 러시아인 도스토옙스키의 목표까지 나아간다. 그럼에도 그가 쓴 마지막 문장, 알료샤 곁의 아이들이 외치는 삶이여 만세는 가장 도스토옙스키적 온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도스토옙스키 평전은 시작부터 끝까지 단번에 몰아붙이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추앙하는 열기가 읽는 독자마저 들뜨게 한다. 열렬했던 등장인물들이 아우성치며 들락날락하는 착각 속에서 그들이 결코 쉬지 않겠구나, 허구와 실존의 경계는 사라진다. 우리들의 헌사도 잠잠해지는 일 없겠구나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속이 후련한 해설로 몰입케 하고, 때론 시적인 비유와 대구로 도스토옙스키를 아름답게 새긴다. 도스토옙스키 애독자에게는 기념 삼을 만한 책이다.

 

 

책 속에서> 


내게 카라마조프의 비극은 오레스테스의 복수, 호머의 서사시, 괴테 작품의 숭고한 윤곽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세계문학의 대다수 작품들조차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어딘가 단순 평범하며, 인식능력에 있어서도 떨어지고, 미래지향성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세계문학의 작품들은 우리들 마음에 부드럽게 와닿고 친근하며, 무엇보다 감정의 구원을 제시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인식만을 날카롭게 전달한다.(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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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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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째 진행중인 시립 도서관의 성인 독서토론에 도스토옙스키 관련서를 반드시 포함하는게 나와의 약속이자 즐거움이 되었다. 단편과 인문서를 함께 읽었는데 이번에 욕심을 내었던 책이 백치. 참여자 한 분이 정년퇴직 후 도스토옙스키 읽기 목표를 세우셨는데 <백치>가 목록에 있어 놀라웠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왜 백치를 선정했느냐고 물으셨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을 제외할 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이 백치이며(제외하는 이유는 모호하지만), 그 둘과 비교했을 때 덜 회자되는 책이기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미쉬낀 공작이라는 훗날 알료샤를 예비하는 불멸의 캐릭터, 도스토옙스키표 극적 전개와 매력적인 장광설, 충돌하고 대치하는 인물 간 구도, 전면에 내세우는 치열한 주제 등이 빽빽하다. 독자에게 각인되는 한스 홀바인 2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도 빼놓을 수 없다. 일상적인 도서관 토론 프로그램에서 고전 벽돌책을 읽는다는 게 우려되어 날짜를 계산하고 표를 만들어 40일 함께 읽기를 병행했다. 40일이라는 숫자가, 날 수가 40일 작정기도를 먼저 상기시키는데 그렇게 책을 선정하고 논제를 만들어나갔다.

 

첫 완독이었을 때 백치의 서평 제목은 <가장 약한 자의 벗, 고통을 지고 가는 어린 양 미쉬낀 공작>이었다. 202011월이었고 4년여 만에 재독이다. 백치를 재독하면서 서평을 재 작성해야 하나 엄두는 나지 않았고 아쉬운 대로 논제에 집중했다. 편애하는 작품이다 보니 질문개수가 늘어나면서 중지가 어려워졌는데 석영중 교수의 백치강의는 더 중요한 논점을 가리는 정확한 기준점이자 가늠자가 되어주었다. 석영중 교수의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 그림(열린책들, 2023, 416쪽 분량)은 세 가지 키워드로 작가와 작품 세계를 분석한다. 칼과 그림은 무난히 꼽겠으나 철도는 근대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변화와 발전, 욕망의 빛과 그림자를이해할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백치를 어렵게 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로서의 이미지에 주목했다고 밝힌다. “이미지, 이콘, 형상, 도상, 표상 모두를 포괄하는 러시아어 <오브라즈>는 사실상 백치뿐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소설을 독특하게 <도스토옙스키적>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 인자이다.”(p.8)라고 설명한다. 백치의 창작 목표인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의 구체화가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대하여 저자는 철도, , 그림의 이미지를 따로 떼어서, 둘씩 연결해서 또는 공통의 속성이 응축되거나 확장하는 일련의 과정 전체를 탐색함으로 증명해낸다.

 

1부는 고통으로 가득했던 저자의 작품 집필 상황과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는 소설이라는 난도 높은 과제에 직면한 예술가로서의 흔적을 따라간다.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홀바인의 그림 뿐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시도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인이기도 한 르낭의 <예수의 생애>를 만나면서도 어려운 시도는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세계문학판 전형으로 간주되는 <돈키호테>와 작가에게 가시와도 같았던 간질이라는 질병이 작품 안에서 논의되는 지점도 소환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형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가 건축, 특히 고딕 성당(p.71)이라는 설명은 새로웠다. 건축가의 눈으로 소설의 구조를 설계하는 거장의 순간들, 원고에 그려졌다는 수백 가지의 고딕 성당들이 단 한 개도 다른 것과 중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2철도에서는 소설의 첫 장면의 상징적 의미를 환기한다. “철도를 통해 주인공이 도착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광폭적인 연결이 가져다준 새로운 부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와 새로운 신분으로 들어찬 공간, 오만과 탐욕의 정신이 팽배한 공간, 바알 신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그 공간에서 펼쳐질 비극의 시작은 철도였던 것이다.”(p.102)라고. 이 장에서는 돈, 상인의 세계, 소유의 방법론, 자본가와 물신 숭배자라는 자산가의 두 부류와 차이, 고백 성사가 아닌 고백 게임으로 가치 전도된 사회의 위협을 드러낸다. “대체의 원칙에 속하는 일련의 요소들도 숙고하게 한다.

 

3에서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칼과 칼에 의한 죽음을 요약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 앞에서 영원히 살듯이 처신하는 이들과 이폴리트로 대표되는 부당하게 배제되어 분노하는 인물, 타의에 의해 갈취당하는 생명, 그런 폭력을 막고자 하는 이, 피하지 못하는 이, 기꺼이 희생당하는 이 등 죽음과 영원의 문제를 응시한다. 이는 4그림으로 연결되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그림, 추정되는 그림, 상상 속 그림의 복기, 사진, 기록으로서의 사진과 결말 해석까지 계속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무한과 유한>에서 다루는 시간 테마다. “철학에서 형이상학, 신학, 수학,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깊은 사유와 관련한 모든 학문은 사실상 시간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시간의 문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그것이 존재함을 누구나 아는 시간은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고 지상에서의 삶을 구획 지으며 가장 복잡한 메타사유를 촉발한다.”(p.186) 처형 직전의 사면이라는 작가의 체험은 백치에서 재현되고 남은 인생 5분이라는 선고와 번복, 확정과 해제가 유한한 생명과 무한이라는 정체모를 극한을 대비시키고 흔들어 놓는다. 주요 해석 코드인 대체의 원칙”(p.141)으로 의미를 대입해보는 작업은 작가의 의도에 더욱 다가서도록 돕는다.

 

러시아 문학 중에서도 특히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하고 전파해온 저자 석영중의 심도 있는 분석 덕분에 독해에 아쉬운점을 남겼던 독자도 퍼즐을 맞추고 미로를 통과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최대치의 자료를 선별, 제시하는 저자의 안내를 받아 시간의 벽을 거슬러, 가보지 못한 공간에 이르는 여행이 소중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p.313), "미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대표 명제를 공작이 언제 언급했을지 뒤적였었는데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던 점도 소득이다. <무덤속의 그리스도>가 단지 그림이 아니듯 소설 역시 종이 위 활자가 아니다. 퇴색하지 않는 전형으로써 모든 시대의 현대인에게 던지는 소리 없는 경고 앞에서 부끄럽고 불안하다.

 

조주관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도 홀바인의 그림과 백치를 다룬다. 한은영의 에세이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는 작은 분량이지만 백치를 언급해서 아꼈다. 안인희가 엮은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의 백치 페이지를 다시 찾아봤고, 이번에 구입한 발저 작품집 산책자를 무심히 넘겨보던 중 백치를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이현우의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19세기<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와 톨스토이의 이라는 지향을 주목케 한다. 언제부터인가 미술사 도서에도 홀바인이 실려 있으면 책이 각별해졌다. 이경아의 1000개의 그림, 1000개의 공감처럼.

 

백치의 후속 독서는 푸시킨, 세르반테스, 레비나스 등 여러 갈래로 이어지겠지만 최우선은 요한계시록(요한의 묵시록) 읽기다. 22장으로 구성된 요한계시록은 설교말씀으로 자주 접하지는 못한다. 몇 번을 읽었으나 읽었다고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말씀을 우선 일청했다. 읽고 듣고 낭독하고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잠언을 매일 읽듯이 계시록을 추가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또한 예술가가 제시한 작품에서 관자, 관람자, 감상자, 독자는 무엇을 보고 읽을 수 있을까에 이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놓치지 않으며 지금을 통과해야 하겠다. 백치40일 함께 읽기가 30일차를 향하고 있다. , 하권 2차시에 걸친 토론으로 이 작품이 조금이라도 잘 닿기를 바란다. 다른 판본으로 3회독 할 날을 고대한다.

 

 


책 속에서>

 

철도와 칼과 그림은 각각 부(물질)와 죽음과 예술의 주제를 표현하는 동시에 경제와 철학과 미학의 범주를 생성할 수도 있고, 물질과 시간과 재현의 주제를 활성화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트레이드마크인 <, 살인, 치정>의 주제를 포괄하게 된다. 그 각각의 이미지들이 생성하는 파생 이미지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망을 직조해 나가는 과정은 거의 경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p.69)

 

 

그 놀라운 장면은 철도에서 시작하여 칼에서 그림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모든 주요 이미지들, 돈에서 시간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소설의 모든 테마들, 서예와 사진과 초상화와 풍경화에서 그리스도 상상화와 모스타르트의 눈물 흘리는 그리스도와 홀바인의 죽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모든 그림들이 하나로 압축된 최종적이고 종합적인 그림이다. 그림은 시각 예술가이자 구조 공학자로서의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는 모든 예술 중의 예술, 모든 그림 중의 그림이다.(p.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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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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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상상하건 가뿐히 초월해 버릴 수 있는 작가가 구병모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목이 있을 법한 모든 것이라니 무대는 마련되었고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는구나, 숨을 죽이게 한다. 있고도 남을 만한 일, 있지만 없는 척, 모른 척 하는 일, 이게 말이 돼 싶은 일 등은 탁월한 언어 조련사인 작가의 펜 끝에서 막힘 없이(다른말로 마침표 없이) 연속하여 풀려 나오거나, 때로는 짧게 끊기며 무한 행간을 장착한 모양새로 자유자재 넘나든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저도 모르게 추임새와 같은 감탄사를 여기 저기에 덧대느라 분주하다. 말 그대로 장르가 구병모니까.

 

<니니코라치우푼타>는 딸이 쓰는 엄마의 이야기다. 노인성 질환으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엄마는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딸은 엄마의 소망대로 칠십 년 전에 만났던 외계 행성 생명체 니니코라치우푼타와의 재회를 위해 애쓰지만 미션은 실패한다. 이후, 엄마의 수첩에서 발견한 흔적을 조합해 가려졌던 베일이 조금씩 걷혔을 때 엄마를 돌봤던 딸은 온전한 의식이 해체되면서까지 붙잡고 있던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정체, 자신을 돌보고 아꼈던 순전한 모성에 닿는다. 자못 긴 마지막 문장으로 뭉클하게 부연한다. 붕괴한 의식이 마지막까지 붙잡은 힌트는 비로소 목적지에 닿는다.

 

<노커>는 엄마 민주가 쓰는 딸 다정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느닷없이 다정의 어깨를 치고 간 후드 인간, 괴한, 노커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은 기이하다. 말이나 글을 사용한 일체의 표현이 불가능해져 원인을 추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녀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어서 소통이 불가하지만 민주와 남편 사이에서는 대화는 이루어지나 를 위한 ”, 한 길로만 흐르는 무의미한 대화일 뿐이다. 일주일 후 피해자가 서른 두 명으로 늘어나면서 문제는 공론화된다. 소통의 채널이 다양해지고 대응법도 추가되나 결국은 총체적 비상사태, 비정상사회로 치닫고 불통이 곧 지옥임을 확인시킨다. 필력이 다했다 싶을 만큼 상징과 은유가 빽빽한, 구병모다움이 폭발하는 작품이다. 엄마는 딸 다정의 곁에 남고, 다가오는 다정을 기꺼이 맞는다.


표제작인 <있을만한 모든 것>은 로맨스 콘텐츠 집필 제안에 응한 C가 꿈과 현실, 가상과 경험을 넘나들며 익명인 대상과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주목한다. 책 속의 책에서 그려내는 경우의 수는 남자는 방문을 열고 뛰쳐나간다”(p.101)는 문장으로 시작해 네 번 변화를 주면서 있을만하면서도 식상하지 않은 지점을 모색한다. 어릴 때 심부름을 갔다가 매점에서 보았던 광경은 시간이 지나서도 그림자 속 사람, “그림자 사람”(p.106)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는데, 키오스크 앞에서 분을 내는 노인에게서 다시 소환한다. 존재와 비존재, 비존재의 기준(p.113), 비대면 상황의 출현, 말과 얼굴을 가졌는가 다채롭게 조명하는 작품으로 무엇보다 반복되는 구조가 흥미를 높인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인터뷰 의뢰를 받고 만난 여성 스타트업 대표는 국민학교이던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었다. 자태로나 미모로나 왕비 같았던 그녀와는 무엇도 공유하기 어려울 듯 했으나 , 그래요? .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죠?” “맞아요. 딱히 뭔가 큰 사달이 나는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이건 아니다 싶은 그거요.”(p.159)라는 대화에서 두 사람은 정확하게 그거를 인지한다. 가사노동은 노동이 아니었던 때, 여성 노동과 인권의 불모지대를 기록으로 남긴다. 사사기 말씀을 제사로 삼는 <이동과 정동>이 마지막에 실린다. 이동과 통과의 자유가 사라진 시대,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사람들의 원념”(p.202)이 그득하나 각자도생이 삶의 원칙인 피폐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얼의 변화는 희망적이고 마지막 작품에 실린 희망은 작가의 당부로 들린다. “당신도 움직이기를.”(p.242)

 

모든 작품이 작가의 인장 같지만 가장 좋았던 작품은 <Q의 진혼>이다. 자유롭고 실험적인 소설로 압축미가 뛰어나면서도 현란하다. 화려한 전개를 보이나 말 이전의 1이 소망과 의지를 피력하며 치열하게 시도하고 요청하고 바랄 때에 미세하게 차오르는 감동은 눈을 뗄 수 없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연상케 하고 거의 시처럼 읽히는 초현실적 이미지는 낯선 낱말들을 무한히 만나는 것 같은 즐거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구병모 작가의 이야기는 후루룩 페이지를 넘길 수도 없고 꼭꼭 곱씹는다고 씹어지지도 않는다. 소화는 다른 문제로 치더라도 말이다. 아이러니와 위트는 무거움이 마냥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막는다. 은유와 상징은 여러 겹의 옷으로 독자만의 의미를 발견할 것을 응원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문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갖게 하고, 등장하는 단어들은 하나씩 어루만져보고 싶어진다. 과도하게 현학적인가 싶지만 언어, , 소통, 연대 등 그가 건네는 생각거리와 고민은 지금 꼭 필요한 주제들로 독자를 초청한다. 이런! 쓰고 보니 이 서평은 나 구병모 작가를 좋아하오라는 연서의 성격을 띠고 말았다. 마성의 문장, 빼어난 통찰, 구병모라는 장르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는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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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 Andersen, Memory of sentences (양장) - 선과 악, 현실과 동화를 넘나드는 인간 본성 Memory of Sentences Series 2
박예진 엮음,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원작 / 센텐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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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의 유년을 펼쳐놓을 수 있다면, 그래서 교집합의 범위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 안에는 분명 안데르센이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건 안데르센에서 비롯한 파편은 처음 떨어진 그 자리에 핀처럼 박혀 녹슬지 않은 채 그때의 감정을 오래도록 일깨운다. 안데르센의 흔적은 스치고 흘려보내는 상황들, 또는 성장하는 과정에서 멀어져가는 모퉁이마다 깃들기에 재회는 부지불식간에 일어나고 그리움과 반가움은 늘 혼재한다. 어슐러 K. 르 귄은 안데르센의 힘, 섬세함, 창조적 천재성은 바로 자신의 영혼이 지닌 어두운 면을 받아들이고 활용함으로써 나온 것이라며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리얼리스트 중 한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괴로움에 눈 감지 않고 현실을 직시한 예술가는 이야기 하나 하나를 완벽하게 빚어낸다. 이 책은 그가 집필한 160여 편의 동화 중에서 잔혹함이 부각되는 작품을 간추려 소개한다.

 

안데르센, 잔혹동화 속 문장의 기억(안데르센 원작, 센텐스, 2024, 272면 분량)은 고전문학 번역가 박예진이 꼽는 욕망, 사랑, 마법, 철학이라는 네 개 주제의 안데르센 동화 모음집이다. 각각 네 편의 동화 중에는 <인어 공주>와 같이 유명한 대표작도 있고, <마쉬왕의 딸>처럼 익숙하지 않은 작품도 실렸기에 안데르센을 다양하게 만나볼 기회를 선사한다. 책은 동화를 읽다가 역자가 발췌한 영문 문장과 해석에 주목하고 다시 동화가 진행되는 방식이 반복되며 말미에 필요한 정보와 해설을 덧붙여 독자가 한 번 더 사유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해석까지 곁들인 친절한 기획은 생각의 물꼬를 안내하는 반면 주도적 읽기에 미치지 못하는 아쉬움도 남긴다. 자연히 완역 원전으로 재독하겠다는 다짐이 다음 독서 계획으로 잡힐 것이다.

 

동화의 선구자 안데르센의 작품들은 이야기의 힘을 잘 보여준다. 영화, 연극, 발레, 애니메이션 등으로 새로운 옷을 갈아입고 독자를 찾아 왔지만 원형은 가장 빛이 난다. <어머니 이야기>에서 죽음에게 빼앗긴 아이를 찾아가는 모성의 여정은 고통과 사랑의 정점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조선경 작가가 그림 작업을 한 그림책을 다시 꺼내본다. <빨간 구두>에서 욕망과 억압, 모순을 읽을 때 구병모 작가의 <빨간 구두당>은 한 발 더 나아간 전복적 이미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가장 아끼는 이야기는 <성냥팔이 소녀>. 다시 그날 밤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바꾸게 해달라고 소원을 빌었던 아이는 지금도 소녀 앞에 있다. 나에게 최고의 안데르센은 어떤 작품이었는지, 왜 그랬는지, 지금 달라진 점은 무엇인지, 이 동화의 기승전결 중 백미는 어디였을지, 내가 선택하는 명문장은 역자와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가장 행복한 작품, 가장 가슴 아픈 작품, 이 동화는 작가에게 어떤 매듭이었을지, 어린이에게 성장이란, 성인에게 카타르시스란 어떤 의미인지, 메타포와 현실, 글과 삶은 어느 각도로 대치하고 있을지 또는 평행 이동일 뿐 합동에 근접할지 질문은 계속된다. <문장의 기억>시리즈의 두 번째 책, 안데르센에서 역자의 진심을 읽으며 다음 작가를 기대한다. 완역 또는 전작읽기를 향한 마중물이자 기록하고 기억할 활용서로 추천한다.

 

 

책 속에서>

-작품 속, 소녀가 성냥을 켤 때면 따뜻하고 맛있는 요리와 아름다운 크리스마스트리가 나타납니다. 이것을 소녀가 죽어가며 보게 된 환각 증세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할머니를 보기 위해 성냥을 모두 꺼내 불을 붙였을 때는, 당연히 엄청난 양의 백린 연기가 뿜어져 나왔을 것입니다. 소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단순히 가난과 추위가 아니라 사회와 어른들의 욕심일지도 모릅니다. 따뜻한 성냥불 이면에 숨겨진 내막은 상당히 충격적입니다. 어린 시절에는 미처 읽지 못했던 동화의 배경을 성인이 되어 이해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시선으로 이야기를 읽고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이 동화가 어떻게 느껴지나요? 내막을 알고 나니 어릴 적과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p.234)

 

-인생은 아름다운 멜로디와 같다. 가사만 망가져 있다.(p.262)




(서평단_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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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셰프들 - 프랑스 미슐랭 스타 셰프들의 요리 이야기
크리스티앙 르구비.엠마뉴엘 들라콩테 지음, 파니 브리앙 그림, 박지민 옮김 / 동글디자인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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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서평단 활동을 막 시작하던 2014, 그러니까 벌써 10년 전이다. 우리 가족은 2년 예상으로 이곳에 왔고, 일생일대의 지방생활을 시작하며 회사로부터 텃밭도 신청해서 당첨되었다. 텃밭이라, 상추와 배추를 조금 심었음에도 우리가 농사를 짓는구나 마음만은 이미 농부였다. 그때 자연을 배우는 만화 텃밭 백과를 읽고 서평을 쓴 후, 눈에 띄는 곳에 책을 세워두고 오고 갈때마다 어루만졌다. 텃밭 대전을 치르던 우리에게 이 책은 금도끼이자 은도끼였고(서평에 이렇게 써있네), 돌아보면 애잔한 추억템이 되었다. 위대한 셰프들이 그런 계보를 이어 기분이 하강할 때면 몰래 꺼내먹는 다크 초콜릿 역할을 하리라 본다. 물론 지금 셰프의 길에 들어서려는 것도 아니고 요리와 미식에 관심도 약하지만 위대한 셰프들은 미식기행 간판을 건 인생 여행 요약본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셰프들(파니 브리앙 그림, 박지민 옮김, 동글디자인, 2024, 224면 분량)은 프랑스의 미슐렝 스타 셰프들의 요리와 그 안에 담긴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미식 탐방기다. 미식 평론가를 꿈꾸었던 할아버지는 손자 기욤에게 미식 평론가 인턴을 해볼 것을 권한다. 학교를 졸업한 후 시간에 쫓기고 불분명한 꿈에 초조한 평범한 청년이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며 변화해가는 현장은 정감 가득하고 때론 화사하다. “요리사는 그저 요리만 무척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각자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지. 사상이자 미학이라고 할 수 있지. 미식 평론가는 마치 번역가처럼 그걸 드러나게 하는 거야! 요리는 단순히 맛있거나 맛없는걸 만드는 게 아니란다!“(p.9)라는 할아버지의 조언을 지침 삼아 기욤의 탐방은 시작된다. 그는 5개 지역에서 8명의 위대한 셰프들을 만나 약 30가지의 요리를 맛보며 미식의 진가를 깨우치고 그때마다 조금씩 성장한다. 요리사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은 작가 또는 예술가의 의도를 읽어내기 원하는 모든 감상자의 행위와도 연결된다.

 

셰프들이 안내하는 요리의 현장은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구현하는 화학자의 실험실, 자연의 보고이며 마법의 공간이다. 화려한 고난도의 요리를 설명하면서도 내일 죽는다면 메뉴에는 없는 할머니의 레시피 요리를 먹겠다고 한다. 늘 아이디어를 채집하며 맛 조합의 팔레트를 넓혀가고 레시피를 찾아내는 성실함은 기본이다. “난 쓴맛을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아의 맛이라고 불러. 첫 한입을 베어 물면 다시 먹고 싶어지지만, 왜인지는 모르는 거야.”(p.136) 라는 설명, 미식은 자기다움, 명철함, 끈기가 필요한 인생 수업(p.168)이라고 말은 공감을 부른다.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다채롭고 힘있게 변하는 기욤의 평론도 주목하게 되고 음악과 미술, 발레까지 비유와 인용도 찾아보게 만든다. 숨어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또 하나의 매력이다. 독자는 화자인 기욤을 통해 오감을 일깨우게 된다. 텍스트 중심 또는 텍스트와 사진, 텍스트와 삽화 등 가능한 여러 구성 중에서 만화 형식을 취한 건 빼어난 선택이다.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구현되는 조리현장과 재료부터 세팅까지의 과정, 핵심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상상을 만족시킨다. 시간의 모든 결을 간직하기 원하고 함께 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예술의 여러 갈래 중에서 요리를 만났을 때, 삶은 선물이 된다. 이 여행 나도 가고 싶다.




(서평단_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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