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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를 쓰다 ㅣ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시리즈 2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원당희 옮김 / 세창출판사(세창미디어) / 2013년 2월
평점 :
평론을 곁들인 전기인 평전은 객관성과 주관성의 균형을 지향하지만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서술에 조금 더 방점이 찍힌다. 적합한 근거 자료와 함께 한 인물을 돌아보고 총평하고 기억하는 의미있는 기록물이다. 평전은 진지한 저작이고 그러므로 묵직할 것이고, 주인공의 위상에 걸맞게 분량은 늘어나리라 기대한다. 하지만 고정관념은 깨어지는 법, ‘슈테판 츠바이크 평전 시리즈’는 독특하다. 『도스토옙스키를 쓰다(원당희 옮김, 세창출판사, 2013, 240쪽 분량)』는 문고본 내지 핸드북이라 해도 좋을 만한 분량으로 거장의 세계를 조명한다. 유럽의 대표 지성 슈테판 츠바이크는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인물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로 『광기와 우연의 역사』, 『발자크』등 시대사와 전기를 펴냈고, 중 단편 소설들을 남겼다. 『도스토옙스키를 쓰다』는 전달자 역할에 충실한 저자가 쓴 객관적이고 학술적인 기록보다는 열렬한 어조, 고조된 톤을 시종일관 유지하는 추종자의 헌사에 가깝다.
책은 열 개의 키워드로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를 포착한다. 작품을 읽어온 독자는 탐독하던 순간을 떠올리며 환기하는 기회로 삼게 되고, 저자의 시선과 관점을 통해 당시 놓쳤거나 미진했던 부분을 재정리할 수도 있다. 저자는 독자의 공감을 돕기 위해 손 내밀거나 결코 전령을 보내지 않는, “내면에서 체험하지 않는다면 전혀 이해될 수 없는”(p.10) 작가에게 우리는 얼마나 다가갈 수 있을지 가늠한다. 유일한 방법은 “체험”인데 이는 얼굴, 운명, 그의 작품 외에는 없다고 차례로 살핀다. 육십 년이라는 일생 중 많이 알려지지 않은 유년을 지나 첫 작품의 영광과 시베리아 유형, 출간 전부터 먼저 볼모잡히는 집필과정, 심적, 육체적 고통을 겪으며 시간과 돈의 독촉 가운데 축조해내는 서사와 인물, 추구하는 지향, 작품을 넘어 성취하고자 했던 궁극의 가치까지 쉴 틈 없이 조망한다. 츠바이크가 해석하는 도스토옙스키는 행간도 여백도 허락하지 않는 핵심의 요약이기에 아쉬울 만큼 간략하고 온통 밑줄, 온통 별 표시로 차게 된다.
특히 흥미로웠던 지점들을 꼽아보는 일은 이 책의 활용을 높일 것이다. 문학사적인 자리매김이나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견주어 보는 일은 그를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례로 느닷없는 시련에 대응하는 도스토옙스키와 오스카 와일드의 태도가 어떻게 달랐는가. 시베리아와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위기요소가 “마법적 가치전도의 힘을 통해 예술에서의 결실로”(p.59)나타났던 도스토옙스키는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끝났”(p.58)던 것과 달리 그제야 진정한 시작이다. 괴테는 조화로운 인간을 이상으로 삼았고 톨스토이는 교훈적이고 교과서와 같았던 삶을 지향했으나 도스토옙스키는 “규범이 아니라 삶의 충일을 추구”(p.76)했다.
작중 인물들을 볼 때 그는 확연히 구분된다. 발자크의 주인공들이 인간이라기보다는 열정을 표현하는 정밀기계, 연관개념으로서의 고유한 특징(p.87)을 대변한다면 독일 소설의 주인공들은 이상과 화해하고 질서를 목표로 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주인공들은 그렇치 않다. 알다시피 매우 유별나다. “모두가 만족스런 인간, 부자와 권력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의 인물 가운데 누가 이런 걸 원하는가? 단 한 사람도 없다.”(p.98) 휴식이라고는 모르는 질주하는 인간들이 작품 안에서 종횡무진한다. 고통에 몸 던지는 영혼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프랑스 작가들의 사실주의, 정밀 자연주의와 도스토옙스키의 마법적 사실주의의 차이도 짚는다. “언제나 그는 냉혹한 손으로 황홀의 잔에 현세성이라는 분노의 술을 따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에게 현실적이고 참된 것이란 반낭만적, 반감상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p.137) 저자는 시적 문장으로 삶과 소설의 경계를 지우던 마법사와 같은 작가를 묘사한다.
책은 도스토옙스키의 삶과 그 모양을 나누어 가진 작품 속 등장인물을 불러내어 풍성한 사례로 제시하는데 그로써 저자의 논리를 증명한다. 건축과 연결 지었을 때, 시간을 중심으로 분석했을 때 도스토옙스키는 흥미로울 뿐 아니라 감탄을 자아낸다. 또한 작가로서의 도스토옙스키에서 멈추지 않고 슬라브주의자, 러시아인 도스토옙스키의 목표까지 나아간다. 그럼에도 그가 쓴 마지막 문장, 알료샤 곁의 아이들이 외치는 “삶이여 만세”는 가장 도스토옙스키적 온점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도스토옙스키 평전은 시작부터 끝까지 단번에 몰아붙이는 속도감이 느껴진다. 추앙하는 열기가 읽는 독자마저 들뜨게 한다. 열렬했던 등장인물들이 아우성치며 들락날락하는 착각 속에서 그들이 결코 쉬지 않겠구나, 허구와 실존의 경계는 사라진다. 우리들의 헌사도 잠잠해지는 일 없겠구나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속이 후련한 해설로 몰입케 하고, 때론 시적인 비유와 대구로 도스토옙스키를 아름답게 새긴다. 도스토옙스키 애독자에게는 기념 삼을 만한 책이다.
책 속에서>
내게 카라마조프의 비극은 오레스테스의 복수, 호머의 서사시, 괴테 작품의 숭고한 윤곽보다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세계문학의 대다수 작품들조차 도스토옙스키에 비하면 어딘가 단순 평범하며, 인식능력에 있어서도 떨어지고, 미래지향성이 부족하다. 그럼에도 세계문학의 작품들은 우리들 마음에 부드럽게 와닿고 친근하며, 무엇보다 감정의 구원을 제시한다. 이에 반해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인식만을 날카롭게 전달한다.(p.1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