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법한 모든 것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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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상상하건 가뿐히 초월해 버릴 수 있는 작가가 구병모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제목이 있을 법한 모든 것이라니 무대는 마련되었고 본격적으로 막이 오르는구나, 숨을 죽이게 한다. 있고도 남을 만한 일, 있지만 없는 척, 모른 척 하는 일, 이게 말이 돼 싶은 일 등은 탁월한 언어 조련사인 작가의 펜 끝에서 막힘 없이(다른말로 마침표 없이) 연속하여 풀려 나오거나, 때로는 짧게 끊기며 무한 행간을 장착한 모양새로 자유자재 넘나든다. 독자는 페이지를 넘기며 저도 모르게 추임새와 같은 감탄사를 여기 저기에 덧대느라 분주하다. 말 그대로 장르가 구병모니까.

 

<니니코라치우푼타>는 딸이 쓰는 엄마의 이야기다. 노인성 질환으로 요양원에 머물고 있는 엄마는 딸을 알아보지 못한다. 딸은 엄마의 소망대로 칠십 년 전에 만났던 외계 행성 생명체 니니코라치우푼타와의 재회를 위해 애쓰지만 미션은 실패한다. 이후, 엄마의 수첩에서 발견한 흔적을 조합해 가려졌던 베일이 조금씩 걷혔을 때 엄마를 돌봤던 딸은 온전한 의식이 해체되면서까지 붙잡고 있던 니니코라치우푼타의 정체, 자신을 돌보고 아꼈던 순전한 모성에 닿는다. 자못 긴 마지막 문장으로 뭉클하게 부연한다. 붕괴한 의식이 마지막까지 붙잡은 힌트는 비로소 목적지에 닿는다.

 

<노커>는 엄마 민주가 쓰는 딸 다정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느닷없이 다정의 어깨를 치고 간 후드 인간, 괴한, 노커로 인해 벌어지는 현상은 기이하다. 말이나 글을 사용한 일체의 표현이 불가능해져 원인을 추적할 수 없는 상황이다. 모녀는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어서 소통이 불가하지만 민주와 남편 사이에서는 대화는 이루어지나 를 위한 ”, 한 길로만 흐르는 무의미한 대화일 뿐이다. 일주일 후 피해자가 서른 두 명으로 늘어나면서 문제는 공론화된다. 소통의 채널이 다양해지고 대응법도 추가되나 결국은 총체적 비상사태, 비정상사회로 치닫고 불통이 곧 지옥임을 확인시킨다. 필력이 다했다 싶을 만큼 상징과 은유가 빽빽한, 구병모다움이 폭발하는 작품이다. 엄마는 딸 다정의 곁에 남고, 다가오는 다정을 기꺼이 맞는다.


표제작인 <있을만한 모든 것>은 로맨스 콘텐츠 집필 제안에 응한 C가 꿈과 현실, 가상과 경험을 넘나들며 익명인 대상과 맺을 수 있는 관계를 주목한다. 책 속의 책에서 그려내는 경우의 수는 남자는 방문을 열고 뛰쳐나간다”(p.101)는 문장으로 시작해 네 번 변화를 주면서 있을만하면서도 식상하지 않은 지점을 모색한다. 어릴 때 심부름을 갔다가 매점에서 보았던 광경은 시간이 지나서도 그림자 속 사람, “그림자 사람”(p.106)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일면을 반영하는데, 키오스크 앞에서 분을 내는 노인에게서 다시 소환한다. 존재와 비존재, 비존재의 기준(p.113), 비대면 상황의 출현, 말과 얼굴을 가졌는가 다채롭게 조명하는 작품으로 무엇보다 반복되는 구조가 흥미를 높인다.

 

<에너지를 절약하는 법>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인터뷰 의뢰를 받고 만난 여성 스타트업 대표는 국민학교이던 초등학교 시절 동급생이었다. 자태로나 미모로나 왕비 같았던 그녀와는 무엇도 공유하기 어려울 듯 했으나 , 그래요? . 그런 거 있잖아요. 그렇죠?” “맞아요. 딱히 뭔가 큰 사달이 나는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이건 아니다 싶은 그거요.”(p.159)라는 대화에서 두 사람은 정확하게 그거를 인지한다. 가사노동은 노동이 아니었던 때, 여성 노동과 인권의 불모지대를 기록으로 남긴다. 사사기 말씀을 제사로 삼는 <이동과 정동>이 마지막에 실린다. 이동과 통과의 자유가 사라진 시대, “여기만 아니면 어디든 좋다는 사람들의 원념”(p.202)이 그득하나 각자도생이 삶의 원칙인 피폐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얼의 변화는 희망적이고 마지막 작품에 실린 희망은 작가의 당부로 들린다. “당신도 움직이기를.”(p.242)

 

모든 작품이 작가의 인장 같지만 가장 좋았던 작품은 <Q의 진혼>이다. 자유롭고 실험적인 소설로 압축미가 뛰어나면서도 현란하다. 화려한 전개를 보이나 말 이전의 1이 소망과 의지를 피력하며 치열하게 시도하고 요청하고 바랄 때에 미세하게 차오르는 감동은 눈을 뗄 수 없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연상케 하고 거의 시처럼 읽히는 초현실적 이미지는 낯선 낱말들을 무한히 만나는 것 같은 즐거운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구병모 작가의 이야기는 후루룩 페이지를 넘길 수도 없고 꼭꼭 곱씹는다고 씹어지지도 않는다. 소화는 다른 문제로 치더라도 말이다. 아이러니와 위트는 무거움이 마냥 무겁게 가라앉는 것을 막는다. 은유와 상징은 여러 겹의 옷으로 독자만의 의미를 발견할 것을 응원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문은 결코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갖게 하고, 등장하는 단어들은 하나씩 어루만져보고 싶어진다. 과도하게 현학적인가 싶지만 언어, , 소통, 연대 등 그가 건네는 생각거리와 고민은 지금 꼭 필요한 주제들로 독자를 초청한다. 이런! 쓰고 보니 이 서평은 나 구병모 작가를 좋아하오라는 연서의 성격을 띠고 말았다. 마성의 문장, 빼어난 통찰, 구병모라는 장르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것은 엄마가 유년에 실제로 만난 외부의 방문객. 혹은 젊은 날 쌓아올린 수많은 지성과 교양의 성채에 금이 가서 허물어진 뒤, 베수비오 화산의 유적지와도 같은 인지 공간에 남아 있는 스키마를 동원하여 말년에 조악한 상상으로밖에 빚어낼 수 없었던, 세상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누구도 그 이름의 의미를 알지 못하며 어떤 국가의 글자로도 쓸 수 없으나 태초의 우주 어디에선가 내려와 지금 이 자리에 실존하는 말. 세상 어느 민족에게서도 발견되지 않은 기원전 신화의 끝자락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이름. 낱낱의 발음을 입속으로 찬찬히 굴리는 동안 그것은 일자一者이자 진리이자 세계정신을 가리키는 다른 이름이 되었다.(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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