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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3년 3월
평점 :
3년째 진행중인 시립 도서관의 성인 독서토론에 도스토옙스키 관련서를 반드시 포함하는게 나와의 약속이자 즐거움이 되었다. 단편과 인문서를 함께 읽었는데 이번에 욕심을 내었던 책이 『백치』다. 참여자 한 분이 정년퇴직 후 도스토옙스키 읽기 목표를 세우셨는데 <백치>가 목록에 있어 놀라웠다고 하시면서 그런데 왜 백치를 선정했느냐고 물으셨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죄와 벌을 제외할 때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마음이 가는 작품이 『백치』이며(제외하는 이유는 모호하지만), 그 둘과 비교했을 때 덜 회자되는 책이기에 알리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미쉬낀 공작이라는 훗날 알료샤를 예비하는 불멸의 캐릭터, 도스토옙스키표 극적 전개와 매력적인 장광설, 충돌하고 대치하는 인물 간 구도, 전면에 내세우는 치열한 주제 등이 빽빽하다. 독자에게 각인되는 한스 홀바인 2세의 <무덤 속의 그리스도>도 빼놓을 수 없다. 일상적인 도서관 토론 프로그램에서 고전 벽돌책을 읽는다는 게 우려되어 날짜를 계산하고 표를 만들어 40일 함께 읽기를 병행했다. 40일이라는 숫자가, 날 수가 40일 작정기도를 먼저 상기시키는데 그렇게 책을 선정하고 논제를 만들어나갔다.
첫 완독이었을 때 『백치』의 서평 제목은 <가장 약한 자의 벗, 고통을 지고 가는 어린 양 미쉬낀 공작>이었다. 2020년 11월이었고 4년여 만에 재독이다. 『백치』를 재독하면서 서평을 재 작성해야 하나 엄두는 나지 않았고 아쉬운 대로 논제에 집중했다. 편애하는 작품이다 보니 질문개수가 늘어나면서 중지가 어려워졌는데 “석영중 교수의 『백치』 강의”는 더 중요한 논점을 가리는 정확한 기준점이자 가늠자가 되어주었다. 석영중 교수의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열린책들, 2023, 416쪽 분량)』은 세 가지 키워드로 작가와 작품 세계를 분석한다. 칼과 그림은 무난히 꼽겠으나 ‘철도’는 근대 도시 뻬쩨르부르그의 변화와 발전, 욕망의 빛과 그림자를이해할 때 비로소 선명해진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백치』를 어렵게 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로서의 이미지에 주목했다고 밝힌다. “이미지, 이콘, 형상, 도상, 표상 모두를 포괄하는 러시아어 <오브라즈>는 사실상 『백치』 뿐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모든 소설을 독특하게 <도스토옙스키적>으로 만들어 주는 핵심 인자이다.”(p.8)라고 설명한다. 『백치』의 창작 목표인 그리스도를 닮은 인물의 구체화가 어떻게 실현되는지에 대하여 저자는 철도, 칼, 그림의 이미지를 따로 떼어서, 둘씩 연결해서 또는 공통의 속성이 응축되거나 확장하는 일련의 과정 전체를 탐색함으로 증명해낸다.
1부는 고통으로 가득했던 저자의 작품 집필 상황과 그리스도를 모델로 하는 소설이라는 난도 높은 과제에 직면한 예술가로서의 흔적을 따라간다.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홀바인의 그림 뿐 아니라 도스토옙스키의 시도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요인이기도 한 르낭의 <예수의 생애>를 만나면서도 어려운 시도는 계속된다. 그리스도의 세계문학판 전형으로 간주되는 <돈키호테>와 작가에게 가시와도 같았던 간질이라는 질병이 작품 안에서 논의되는 지점도 소환한다. 도스토옙스키 소설 형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 중 하나가 건축, 특히 고딕 성당(p.71)이라는 설명은 새로웠다. 건축가의 눈으로 소설의 구조를 설계하는 거장의 순간들, 원고에 그려졌다는 수백 가지의 고딕 성당들이 단 한 개도 다른 것과 중첩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2부 “철도”에서는 소설의 첫 장면의 상징적 의미를 환기한다. “철도를 통해 주인공이 도착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광폭적인 연결이 가져다준 새로운 부와 새로운 엔터테인먼트와 새로운 신분으로 들어찬 공간, 오만과 탐욕의 정신이 팽배한 공간, 바알 신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그 공간에서 펼쳐질 비극의 시작은 철도였던 것이다.”(p.102)라고. 이 장에서는 돈, 상인의 세계, 소유의 방법론, 자본가와 물신 숭배자라는 자산가의 두 부류와 차이, 고백 성사가 아닌 고백 게임으로 가치 전도된 사회의 위협을 드러낸다. “대체의 원칙”에 속하는 일련의 요소들도 숙고하게 한다.
3부 “칼”에서는 다양한 에피소드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칼과 칼에 의한 죽음을 요약한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 앞에서 영원히 살듯이 처신하는 이들과 이폴리트로 대표되는 부당하게 배제되어 분노하는 인물, 타의에 의해 갈취당하는 생명, 그런 폭력을 막고자 하는 이, 피하지 못하는 이, 기꺼이 희생당하는 이 등 죽음과 영원의 문제를 응시한다. 이는 4부 “그림”으로 연결되어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실제 그림, 추정되는 그림, 상상 속 그림의 복기, 사진, 기록으로서의 사진과 결말 해석까지 계속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무한과 유한>에서 다루는 시간 테마다. “철학에서 형이상학, 신학, 수학, 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깊은 사유와 관련한 모든 학문은 사실상 시간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시간의 문제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음에도 그것이 존재함을 누구나 아는 시간은 인간의 실존을 규정하고 지상에서의 삶을 구획 지으며 가장 복잡한 메타사유를 촉발한다.”(p.186) 처형 직전의 사면이라는 작가의 체험은 『백치』에서 재현되고 남은 인생 5분이라는 선고와 번복, 확정과 해제가 유한한 생명과 무한이라는 정체모를 극한을 대비시키고 흔들어 놓는다. 주요 해석 코드인 “대체의 원칙”(p.141)으로 의미를 대입해보는 작업은 작가의 의도에 더욱 다가서도록 돕는다.
러시아 문학 중에서도 특히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하고 전파해온 저자 석영중의 심도 있는 분석 덕분에 독해에 아쉬운점을 남겼던 독자도 퍼즐을 맞추고 미로를 통과하는 기쁨을 경험했다. 최대치의 자료를 선별, 제시하는 저자의 안내를 받아 시간의 벽을 거슬러, 가보지 못한 공간에 이르는 여행이 소중하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p.313), "미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대표 명제를 공작이 언제 언급했을지 뒤적였었는데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던 점도 소득이다. <무덤속의 그리스도>가 단지 그림이 아니듯 소설 역시 종이 위 활자가 아니다. 퇴색하지 않는 전형으로써 모든 시대의 현대인에게 던지는 소리 없는 경고 앞에서 부끄럽고 불안하다.
조주관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도 홀바인의 그림과 백치를 다룬다. 한은영의 에세이 『당신은 빙하 같지만 그래서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는 작은 분량이지만 백치를 언급해서 아꼈다. 안인희가 엮은 『우리가 사랑한 헤세 헤세가 사랑한 책들』의 백치 페이지를 다시 찾아봤고, 이번에 구입한 발저 작품집 『산책자』를 무심히 넘겨보던 중 백치를 발견하고 놀라워했다. 이현우의 『로쟈의 러시아문학 강의 19세기』는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중심으로 하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미”와 톨스토이의 “선”이라는 지향을 주목케 한다. 언제부터인가 미술사 도서에도 홀바인이 실려 있으면 책이 각별해졌다. 이경아의 『1000개의 그림, 1000개의 공감』처럼.
『백치』의 후속 독서는 푸시킨, 세르반테스, 레비나스 등 여러 갈래로 이어지겠지만 최우선은 요한계시록(요한의 묵시록) 읽기다. 22장으로 구성된 요한계시록은 설교말씀으로 자주 접하지는 못한다. 몇 번을 읽었으나 읽었다고 마음에 새겨지지 않는 말씀을 우선 일청했다. 읽고 듣고 낭독하고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으며 잠언을 매일 읽듯이 계시록을 추가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또한 예술가가 제시한 작품에서 관자, 관람자, 감상자, 독자는 무엇을 보고 읽을 수 있을까에 이른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놓치지 않으며 지금을 통과해야 하겠다. 『백치』 40일 함께 읽기가 30일차를 향하고 있다. 상, 하권 2차시에 걸친 토론으로 이 작품이 조금이라도 잘 닿기를 바란다. 다른 판본으로 3회독 할 날을 고대한다.
책 속에서>
철도와 칼과 그림은 각각 부(물질)와 죽음과 예술의 주제를 표현하는 동시에 경제와 철학과 미학의 범주를 생성할 수도 있고, 물질과 시간과 재현의 주제를 활성화할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 도스토옙스키의 트레이드마크인 <돈, 살인, 치정>의 주제를 포괄하게 된다. 그 각각의 이미지들이 생성하는 파생 이미지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대한 망을 직조해 나가는 과정은 거의 경이 그 자체라 할 수 있다.(p.69)
그 놀라운 장면은 철도에서 시작하여 칼에서 그림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모든 주요 이미지들, 돈에서 시간과 죽음과 부활로 이어지는 소설의 모든 테마들, 서예와 사진과 초상화와 풍경화에서 그리스도 상상화와 모스타르트의 눈물 흘리는 그리스도와 홀바인의 죽은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소설의 모든 그림들이 하나로 압축된 최종적이고 종합적인 그림이다. 그림은 시각 예술가이자 구조 공학자로서의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을 폭포수처럼 쏟아 내는 모든 예술 중의 예술, 모든 그림 중의 그림이다.(p.3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