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영화 언어
이상용 지음 / 난다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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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의 영화 언어(난다, 2021, 312쪽 분량)』는 영화 평론가 이상용의 봉준호 감독 영화 비평집이다. 책의 제목은 골든 글로브 시상식 수상 인터뷰 중 “우리는 단 하나의 언어를 쓴다. 그 언어는 영화다.”(p.8)라는 감독의 말에서 취했다. 영화라는 언어로 한국은 물론 세계와 공명하는 동시대 감독의 작품을 극장에서 직접 확인하는 일은 우선시 되어야 하겠지만, 채로 거르고 각을 맞춰 정련한 또 다른 언어로 살펴보는 일은 기대했던 것보다 근사할 수 있다. 책을 읽으며 영화광은 아닌데 자칫 영화 비평집광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우려가 생겼다. 이상용은 1997년 『씨네21』 2회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영화 비평을 시작했다. 첫 번째 영화 평론집 『영화가 허락한 모든 것』(2008), 특별 프로그램인 부산 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를 묶은 『안나 카리나』(2010) 등을 썼다.

『봉준호의 영화 언어』는 1993년 <백색인>부터 2019년 <기생충>까지 7개 장편과 5개의 단편영화 전작을 담고 있다. 챕터1 “짧은 연대기”는 상업성과 예술성을 모두 아우르는 현재의 봉준호 감독이 되기까지의 주요 작품과 삶을 스케치한다. 칸 영화제 감독주간에 상영되었던 <괴물>의 프랑스 잡지 인터뷰 제목이 “삑사리의 예술”(p.28)이었으며, 잡지 필진은 “삑사리”가 의미하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봉준호 영화의 핵심으로 본다. 챕터2 “부치지 않은 편지”는 <기생충>의 마지막에 모스부호로 편지를 쓰는 아버지 기택과 답장으로 “근본적인 계획”(p.39)을 전하는 아들 기우를 소환한다. 과연 기우의 편지는 누가 수신인인가를 물으며 애드거 앨런 포의 단편 <도둑맞은 편지>, 이를 둘러싼 유명한 분석인 라캉의 <“도둑맞은 편지”에 관한 세미나>, 슬라보예 지젝의 분석 중 대타자 개념까지 전개한다. “대타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이다.”(p.45)라며 봉준호 영화는 자주 관객에게 시선을 던져왔음을 밝힌다. 일종의 권력인 대타자가 된 관객은 봉준호의 편지를 잘 읽어내야 하는데 이 책이 그 작업의 일부가 된다.


챕터3 “추격하는 세계”는 봉준호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추격전에 초점을 맞춘다. 목표가 분명한 게 추격전인데 그의 영화는 예정된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고 관객은 이를 오히려 반긴다는게 주목을 끈다. “추격의 대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현실이거나 현실이 담긴 심연”(p.62)이기에 관객은 다시 대타자로서 편지의 수신인이 된다. 또한 쫓는 자의 위기에 대해 니체의 저작을 인용하는데, 괴물을 추격하다 스스로 괴물로 변할 수 있음은 분명 경계할 지점이다. 챕터4는 괴물을 직접 조명한다. 한국 영화에서 괴물 캐릭터의 변천사에 이어 봉준호 영화에서 보이는 현실적인 괴물이 지닌 평범함을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과 연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괴물은 목격담 속에, 소문 속에, 미디어 속에서 일그러진 채 현실을 지배한다. 그 효과 자체가 괴물이다.”(p.94)라며 무지와 오인, 맹목성에서 벗어나 어둠을 응시할 것을 제안한다.

챕터5, “보는 것의 변증법”에서는 봉준호의 인물을 가르는 기준인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에 대해 이야기한다. <괴물>에서 강두는 잠이 많고 우둔한 캐릭터에서 보는 자로, 이에 더해 “끊임없이 보는 자”로, 다시 “깨어 있는 자”(p.121)로, 종국에는 “눈을 치켜뜬 파수꾼”(p.122)으로 바뀐다. <훔쳐보는 것>편에 등장하는 철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아브젝시옹” 개념은 눈에 띈다. 불쾌함과 매혹이 뒤엉킨, 더러운 동시에 자신(인간)으로부터 나온 것들이며 이를 통해 인간은 성장한다는 논리는 또 하나의 관점을 형성한다. 저자는 <설국열차>의 단백질 블록부터 다양한 아브젝시옹의 예를 손꼽는데 단연 <기생충>에서 정점을 이룬다. 챕터6 “헤테로토피아에서”는 유토피아와 대립되는 새로운 용어 헤테로토피아를 소개한다. 미셸 푸코의 <말과 사물>에 처음 등장하여 보르헤스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언어이건 공간이건 “기존의 질서를 해체하고 와해”(p.153)시키는 헤테로토피아는 독자를 각성시킨다. 봉준호 영화에서 변주될 때 특히 지하실이라는 장소가 헤테로토피아에 해당한다. 챕터7에서는 이야기의 기능과 효과를 영화를 통해 살피고, 봉준호표 가족멜로드라마를 환기시킨다. 챕터 8 “사물들, 기호들” 중에서 “골뱅이와 황금 돼지”에 나오는 “유사”와 “상사”의 비교, “상사”의 적극적 표현 방식 중 하나인 “패러디”(p.219)가 특히 흥미롭다.

이 책을 읽기 위해서 봉준호 영화 전작을 보았어야 되는 게 아닐까를 염려했는데 다행히도 언급되는 장편은 다 관람을 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 못했더라도 읽기는 가능하겠다. 그럴 경우 아마도 영화 비평서보다는 인문학으로 읽히겠지만 친절하게도 챕터10에 작품 리스트를 실었다. 영화 내용을 설명하는데 요약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라는 요약의 진수를 배우는 건 덤이다. 『봉준호의 영화 언어』는 스크린 위에 흐르고 지나가는 영상을 활자로 붙잡아 전해주는 감사한 책이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 나오면서부터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하는 영화라는 예술 종합선물세트를 그 시간을 아꼈던 관객이 놓치고 잃어버리지 않도록 매듭지어준다.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이 하나의 주제로 헤쳐 모일 때마다 비밀을 이해한 듯 뿌듯함이 차오른다. 영화의 그 장면, 배우의 그때 표정, 아슬아슬했던 긴장과 엉망진창인 사태, 삑사리로 인한 급작스런 웃음이 교차하며 과거의 시간이 지금 이 순간으로 한꺼번에 넘어온다. 또 다른 영화들 특히 히치콕 작품과의 비교도 다시금 감상하고 싶게 만든다. 무엇보다, 풍성한 인용이 읽어야 할 책의 목록을 늘리는 부담보다는 너무나 궁금하다는 설렘으로 기운다. 봉준호의 영화는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순간에 집중한다는, 그의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최소”에 있다는, 도착하려는 목적지가 정복하다 또는 굳게 서다가 아니라 “흔들린다.”(p.263)라는 발견이 기쁘다. 우리 영화사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고 사회의 현주소, 삶의 진면목을 응시하는 일은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 <무제>가 책의 표지에서 강렬하다. 압도하는 블랙 밑에서 붉은 생명이 눌리지 않기를 바란다. 푹신한 솜뭉치 그 뽀얀 완충제가 넉넉해야 가능할 것이다. 2023년 마지막 책이고 마지막 서평이다. 몇 해 전 김민영 선생님의 추천으로 계속 읽고 싶던 책을 비로소 읽었다. 이어서 도서관 동아리의 토론도서로 추천하였기에 논제를 만들어볼 차례다. 이 탁월한 비평서를 권한다. 일회독으로는 아쉽고, 여러 번 읽는다면 더 많은 것을 내어줄 책이다.



책 속에서>

-봉준호 영화의 시각적 변증법은 대립하는 두 세계를 하나의 프레임 안에 둠으로써 일어나는 착시 효과인 동시에 각성을 일으키는 비전이 된다. 그 시각적 형상은 입체파의 그림처럼 완전히 왜곡되어 있지는 않을지라도, 현실을 비틀어 그 틈새로 들여다보게 하는 인식의 공간을 만들어낸다.(p.147)

-“흔들린다.” 그것이 봉준호의 영화가 도착하려는 최종 목적지다.(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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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 - 오리지널 완역 일러스트 에디션
모리스 르블랑 지음, 벵상 말리에 그림, 권은미 옮김 / 주니어김영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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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팽과의 첫 만남은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을 탐독하던 유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인공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지만 탁월함을 더욱 빛내는 건 여유와 유머였다. 아르센 뤼팽이 아니라 괴도 루팡으로 각인되었던 인물을 긴 시간을 건너와 다시 만나니 반갑다. 모리스 르블랑의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권은미 옮김, 주니어김영사, 2023, 1907, 292쪽 분량)』은 아홉 편의 에피소드로 이중적 이미지를 간직한 최강 캐릭터 뤼팽을 선보인다. 플로베르를 흠모하며 작가를 꿈꾸었던 모리스 르블랑이 첫 단편 <아르센 뤼팽, 체포되다>를 발표한 게 1905년이었고 이는 곧바로 성공으로 이어진다. 2년 후 출간한 단편 모음집이 바로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이다. <기암성>을 비롯해 생기를 잃지 않는 대표 작품들은 여전히 새로운 번역 소식이 들릴 때마다 독자를 설레게 한다.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은 세련된 도주의 명수로 기억하고 있는 뤼팽의 체포를 제일 먼저 배치한다. 호화 여객선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배경으로 외부의 도움이 여의치 않은 상태에서 괴도와의 동행이 알려지자 의심과 불안은 커져만 간다. 뤼팽으로 추정했던 로젠이 그렇지 않다는 증거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지금 아르센 뤼팽, 그는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었다.”(p.20) 불확실성이 주는 두려움, 익명의 공포를 구사하는 문장은 독자를 같은 공간으로 초대한다. 뤼팽은 넬리 양의 눈앞에서 100년을 살아도 잊지 못할 것이라는 무참한 순간을 맞는다. 결국 그는 감옥에 갇힌다.

이름도 스산한 사탄 남작은 아무도 들이지 않는 자기만의 성에서 진기한 보물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두려움은 커져간다. “구두쇠처럼 악착같이, 또 연인처럼 질투에 사로잡혀”(p31) 사랑하는 보물이건만 귀하의 보물을 훔쳐가겠다는 뤼팽의 편지가 도착한다. 교도소에 수감된 채 엄중한 감시를 받고 있는 뤼팽의 절도 예고라니. 지키려는 자와 빼앗겠다는 자의 심리는 한 순간에 주객이 전도된다. 불안에 떠는 자는 누구일까.

게다가 “나는 내 재판에 참석하지 않을 겁니다.”라는 공지까지. 그는 덧붙인다. “아르센 뤼팽은 자기가 있고 싶은 만큼만 감옥에 있지, 1분도 더 있지 않습니다.”(p.60)라고. 뤼팽의 당당함은 터무니없는 수준이라 오히려 재론의 여지를 차단한다. 신비롭기까지 한 그의 언행은 등장 인물들을 놀래키고 독자에게 와 닿으며,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그의 선언이 지켜지기를 응원하게 된다. 마지막 이야기 <헐록 숌즈, 한발 늦다>에서는 넬리 양이 재등장하고 홈즈에서 이름을 정정한 숌즈의 출연까지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작가가 인간의 마음을 세심하게 관찰하여 내밀한 심리를 기록할 때마다 보편적 정서에 함께 물들고 적확한 지적에 공감하고 만다. 시대를 앞서가고 있는 듯한 통찰을 만날 때는 놀라게 되며 감정과 심리, 풍자와 회한이 풍부하게 전달된다. 자연과 배경을 꼼꼼하게 묘사할 때는 분위기까지 생생하다. 매력적인 인물, 극적인 사건, 다채로운 배경은 책을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키고 벵상 말리에의 삽화까지 더해지자 유년의 추억은 소중해지고, 만일 첫 만남이라면 다음을 상상하는 기대로 마음은 부풀 것이다.

책 속에서>

우리의 적수는 그런 낡은 수법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는 최신의 수법, 아니 차라리 미래의 수법을 사용할 인물이지요.(p.49)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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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전집 개정판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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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김화영 옮김, 책세상, 1957, 2023, 316쪽 분량)은 알베르 카뮈의 유일한 소설집으로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들이 부조리에 맞서 나간 궤적을 여섯 개 단편에 담아낸다. 역자 김화영은 작가가 그려 보이려는 것이 양자택일의 세계가 아니라 안인 동시에 겉이요, 적지인 동시에 왕국인 삶과 세계의 복합성이요, 영원한 모순의 현실”(p.252)이라고 밝힌다. 작가는 이같은 괴리와 모순을 서정적인 배경묘사, 아름다운 수사, 두터운 상징과 은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여운으로 직조해낸다. 단편마다 가장 적합한 문체와 시점으로 변화를 주며 서로 다른 톤은 작품에서 작품으로 새롭게 몰입시킨다.

 

알제리 몽드비에서 태어난 알베르 카뮈는 태어난 지 얼마 후 1차 세계대전에서 아버지가 전사하고 청각장애가 있던 어머니, 할머니와 생활했다. 이후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 만난 J.그르니에는 평생의 스승이 된다. 카뮈는 1942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며, 같은 해에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발표하여 철학적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1957년에 카뮈는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3년 후 자동차 사고르 숨졌다. 이방인외에도 표리, 결혼, 정의의 사람들, 행복한 죽음, 최초의 인간등을 집필했다.

 

<간부>에서 자닌은 남편 마르셀의 권유로 아랍 상인들에게 직접 옷감을 파는 여정에 동행한다. 종려나무나 부드러운 모레를 꿈꿨지만 사막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로지 돌, 어디나 할 것 없이 지천으로 널린 돌뿐”(p.18)인 사막에서 그녀는 종려수들, 종려나무들, 종려의 바다, 종려나무 숲이 간절하다. 남편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볼 때, 혼자 있는 것, 늙는 것, 죽는 것이 싫어 고집스런 표정을(p.38) 짓는 마르셀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각성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소통이라고는 없이 어떤 해방도 알지 못한 채, 어쩌면 살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그녀는 한밤중 길을 나선다. 사람과 밤이 한데 섞이는, 아무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부름에 자닌은 응답한다. 밤과 별, 온 마음으로 왕국에 편입되는 경이로움은 그녀의 삶과 대척점에 있다.

 

<배교자 혹은 혼미해진 정신>은 질서를 원했던 자가 겪은 부조리한 혼돈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보여준다. 가정에서는 억압받았지만 지도신부로부터 미래와 태양, 신앙이 동일선상에 있음을 배우게 된 는 어떤 모범이 되고자 한다. 가장 위험한 야만의 한가운데야말로 둘도 없는 선교지다.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금의 도시”(p.55)로 걸어 들어간 그는 질서의 극단인 폭력과 광란의 뒤범벅에 에워싸여 신의 자리에 우상을, 물이 필요한 자리에 소금을, 전파가 필요한 곳에 잘린 혀를, 선 대신 악을, 구원 대신 버려짐을, 집 대신 광야를 취하게 된다. 극한 환경은 인간을 흡수해 극한의 부속물로 전락시킨다.

 

스무 살 이바르에게 바다는 싫증나는 법 없는 즐거움이었지만 이 행복은 청춘과 더불어 지나가 버렸다.”(p.83) 나이와 육신의 고됨을 실감하게 되니 바다도 일정한 시간에 바라보는 바다다. 술통 공장의 동료들과 파업에 가담한 이유는 입을 꽉 다물고 제대로 한번 따져 보지도 못한 채”(p.85) 피로만 쌓이고 임금은 부족한 현실에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사장 라살씨는 평소 자기 직공을 아꼈지만 이번 요구는 수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분노와 침묵은 불편하게 쌓여간다. “그들은 뾰루퉁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입을 막아놓고는 싫거든 아주 그만들 두라는 것이다. 화는 나는데 힘이 없고 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고함도 지르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그들고 인간이다, 그뿐이다. 그래서 금방 웃음을 짓고 아양을 부리고 할 기분이 아닌 것이다.”(p.97) 노동이라는 인간 조건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 역시 근면에서 답을 찾지 못한다.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은 있지만 손은 늦게 뻗어나가고, 자책과 연민은 외면하게 된다. 그는 생각한다. 좀 더 젊었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다고.

 

<손님>은 외딴 학교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는 다뤼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안면 있는 헌병 발뒤시로부터 그가 데려온 아랍인 죄수를 공동구역까지 이송해달라는 요청이자 명령을 받는다. 다뤼는 어쩌면 단순한 과제를 당연하지 않게 다룬다. 둘 사이에 맺어진 기이한 유대는 동쪽과 남쪽이라는 선택을 가장한 자유를 허용하지만 둘만의 유대를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선의는 예측 가능한 범위를 이탈하기 때문이다. “이 고장은 본래 이렇듯 살기 어려운 곳인데 그곳에 사는 인간들끼리의 문제 또한 간단치는 않았다. 그러나 다뤼는 여기서 태어났다. 어디건 이곳을 벗어나면 그는 적지의 신세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p.108) 그의 특별함은 고향을 적지로 바꾼다. 역시 간단치 않은 문제다.

 

<자라나는 돌>은 건설 기사 다라스트는 홍수가 잦아 질척이는 이구아프에 제방 건설을 위해 방문한다. 도움이 절실했기에 시장부터 판사, 지방 유지들까지 다라스트를 환대하는데 그들 서로간의 관계, 가난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 염원을 담고 의미를 부여해 신적 상징물로 둔갑시킨 돌, 신에게 자원했던 약속과 약속 자체를 우상삼는 행위, 도취와 집단 광기, 고리 끊기와 새로운 첫 걸음, 마지막으로 진정한 연대와 환대까지 진전시킨다.

 

다섯 번째 작품이 압권이다. 요나서 말씀을 제사로 삼은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꽤 가미된 예술론이자 인생론이다. 화가 질베르 요나에게 그가 믿었던 자기의 별은 길잡이였을까 마취제였을까. 그가 사는 독특한 아파트 공간은 적지인가 왕국인가. 그는 환영으로 에워 싸여 있는가, 결박된 채 포위당했는가. 이 단편은 절대 낙관론자의 빛나는 일상을 시종일관 밝고 경쾌하고 가벼운 문체로 풀어나간다. 불굴의 긍정주의자가 어떤 일에서도 밝은 면만을 취하는 데는 겸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배려와 호의가 익숙해지자 권리로 요구하고, 그 요구는 복잡하고 첨예해지기에 이에 호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비판적 예술가의 무중력 삶은 자기실종을 초래하고 작가는 성공병”(p.163)이라는 조어로 세태를 비판한다. 소설은 어느 특별한 예술가의 인생을 집약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초상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작가는 과장된 유머와 풍자로 이야기를 이끌다가 웃음기 싹 빼고 모든 가면을 부수게 만든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 없이 시간을 빼앗겨버린 자의 슬픔이 사무치는 작품이다. 일종의 우화읽기는 점점 밀도를 높이면서 눈물 나는 순간에 이르는데 주인공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카뮈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게 될 섬세한 작품이다.

 

공감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아 선명하게 해석할 수 없는 간극은 타자를 격리시킨다. 적지는 도처에 있고 타자는 동지로 수용되기 어렵다. 적지 안에서 부분적 왕국을 건설할 것인지, 적지로 편입되어 타인의 왕국이 곧 나의 왕국이라 선언할 것인지,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은 여러 갈래다. 자의로 결정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타의로 강제될 수도 있다. 지금의 선택을 잠시 뒤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낯선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가 실존에 닿기 위해 갖추어야 할 충만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의외로 작은 움직임, 미소, 또는 자신 안에서 편 나눠 다투는 다양한 취향, 목소리와 화해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막다름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온전한 자유인이 되는 일을 카뮈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목표로 삼았다. 방법과 절차가 다소 거칠었던 뫼르소(이방인)부터 관조와 절제의 표본처럼 여겨지는 리유(페스트)를 비롯해 단편집 <적지와 왕국>의 인물들도 자신 안에 떠오르는 질문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들의 분투는 결국 독자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분투가 너그러워지기를, 너무 치열한 대신 사소하게나마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기를, 흩어져 사라지는 시간을 향해 어리석었다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분리와 경계를 넘어 늦지 않게 통찰할 수 있는 밝은 눈이 필요할 때다. 문고판으로 읽었던 <적지와 왕국>을 아름다운 장정의 완역, 게다가 김화영 번역으로 읽다니 감사할 뿐이다.

 



책 속에서>


아득한 옛날부터 광막한 이 나라의 뼛속까지 헐벗긴 메마른 땅 위에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그 누구의 종 노릇도 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이 기이한 왕국의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주인들로서 지칠 줄 모르고 길을 걸었다.(p.34)

 

알고 있네. 하지만 많은 예술가가 그렇다네. 과연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단 말이야. 가장 위대한 예술가까지도. 그래, 그들은 중거를 찾고 판단을 하고 비난을 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자신이 생기거든. 그것이 존재의 시작이야.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야!”(p.164)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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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모든 색 인생그림책 14
리사 아이사토 지음, 김지은 옮김 / 길벗어린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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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는 일정한 속도로 넘어가지 않는다. 어떤 장면에서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위로 머릿속 필름이 한 장씩 내려꽂히고 쌓인다. 그런 페이지는 낱장임에도 꽤 두꺼워져 버릴지 모른다. 『삶의 모든 색』은 잊었던, 가려졌던, 감췄던, 무시했던, 아꼈던, 사랑했던, 웃음과 눈물로 덧칠했던 그때 그 순간을 소환한다. 영사기가 먼지를 내며 회전할 때 낡은 스크린 위로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직도 이토록 반짝이다니. 경이로운 수레바퀴가 작동한다. 생의 수레바퀴다.

리사 아이사토의 『삶의 모든 색(김지은 옮김, 길벗어린이, 2021, 2019)』은 모두의 생에 바치는 찬가이다. 작가는 고운 장면만 추리기 위해서 임의로 배제하지 않았으며 서두르는 서투름과도 멀다. 95컷 그림을 담은 총 200쪽 분량의 책은 압축과 상징, 여백과 여운으로 인생 파노라마를 펼쳐낸다. 무엇 하나 놓치는 법이 없는 작가의 통찰은 놀랍다. 리사 아이사토는 노르웨이에서 최고의 그림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러스트 작업을 한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로 수상을 했으며 <삶의 모든 색>은 2019 노르웨이 북셀러 상 수상작이다.

『삶의 모든 색』은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기나긴 삶으로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자기의 삶”을 분리하고 “부모의 삶” 이후에 “어른의 삶”이 위치하는 점, 마지막을 “기나긴 삶”으로 명명하는 시선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책은 앞에서 뒤로 순차적으로 읽어나가도 되겠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 또는 우려되거나 미심쩍은, 어쩌면 복기하고 싶은 시기부터 펼쳐도 좋다. <아이의 삶>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는지”가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펼친 책에서 금색 불빛이 퍼져 나오고 어두운 주변을 밝힌다. 아이의 머리칼 한 올까지도 영감으로 물들어 춤추고 표정은 신대륙 발견에 맞먹는다. 이 장면은 작가가 일러스트를 담당한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의 표지로 사용되었다. 그 때를 돌아본다. 나의 그 때는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팡에 빠져 커서 탐정이 되어야 하나, 괴도가 되어야 하나 고민 끝에 추리소설 작가가 되자고 야심찬 맹세를 하던 시기다.


<소년의 삶>에서 “어른들은 우리를 걱정하기 시작했어요.”라고 한다. 아이가 아닌 어른의 입장에서 볼 때, 빨간색 주의 표시를 아이들에게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문제는 붙이면서도 다 소용없는 거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언제까지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외치겠는가. “어느 날, 한 어른이 물었어요. ‘너도 커피 한잔하겠니?‘“ 이때부터다. 내 피의 8할이 커피가 된 것은. 공식 어른이 되어 앞에 두었던 커피 한 잔은 기념할 만했다. <자기의 삶>에 이르면 동반자 찾기가 생의 과업으로 대두된다. 동반의 개념은 평생 투신할 가치나 소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간결한 문장은 그림을 설명하고 보완하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림은 보이는 것 이면에 상징과 은유를 배치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다. 동시에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 장면을 포착함으로 공감하고 이입하도록 이끈다. <부모의 삶> 장면들이 그렇다. 특히 “낮에도”의 엉망인 육아현장은 서랍장에서 시작해서 거실 전체 내벽을 두르는 빨간 매직 낙서에서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작가는 “지금처럼 사랑으로 가득했던 적은 없”다는 낙관을 잊지 않는다. 곧 아이들이 떠나가면서 부부는 “사는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여기는 <어른의 삶>을 맞는다.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대하는 시기이고 돌봄의 대상은 아이에게서 부모에게로 이행한다. <기나긴 삶> 또한 인간의 마지막 시기를 가감 없이 담는다. 감사하고 외롭고 두렵고 안타까운 순간들은 형편과 처지, 지역과 공간을 넘어 인류 보편의 감정으로 독자에게 닿고 어느 면에서는 안심시킨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아이의 삶>의 크리스마스 장면과 책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내 형제들에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은총과 구원에 더해 부모님의 사랑이 찐 별처럼 박혀 있다.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보니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인 “있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 모든 순간에 감사하겠다는 이야기는 염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품 넓은 수용이자 기꺼운 포옹이고 적극적 의지다. 좀먹고 바랜 앨범 안 낡은 사진 한 장까지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지나온 길은 박재된 시간이 아니라 박동하는 심장으로 뛴다.


『삶의 모든 색』은 평범하고 특별했던 시간을 불러내는 훌륭한 마중물이다.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가 삶의 한 줄 요약이라면 『삶의 모든 색』은 꽤 친절하다. 인물의 생생한 표정이 제일 먼저 시선이 끌지만 배경과 세부, 계절의 변화와 소품, 물감의 번짐과 흘러내리고 사라지는 표현기법 등은 읽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만큼 밀도 높다. 제법 큰 판형, 하드 커버, 묵직한 중량감이 전해지는 책의 만듦새는 독자에게 동반자가 되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우리는 울림 강한 페이지를 펼칠 때 한동안은 어느 방향으로도 벗어나가지 못하고 글과 그림 안으로 침잠하게 되고, 한 번 두 번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하게 될 때 이 책은 벗으로 독자의 곁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시절에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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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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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계절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본격적으로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질병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읽을까?”라고 자문하는 습관에 다시 읽으리 도스토옙스키증이라고 이름 붙였다. 수년 전에 도스토옙스키 5대 소설 읽기에서 몇 작품은 3회독이었지만, 재독도 있었고 <미성년><백치>는 초회독이었다. 물론 거듭해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며, 지금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처음 페이지를 넘기던 과거의 나를 열렬히 부러워한다. 동시에 여전히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은 있으니 조주관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죽음의 집의 기록>이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라, 수정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마법을 그 겨울에 불러일으킬 것을 확신한다. 마성의 문장은 시작되었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1862, 528쪽 분량)은 러시아 최초로 감옥과 유형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관찰에 문학적 생기를 더했다. 작가는 생의 끝으로 내몰려 열악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관계, 구성원들의 역동을 살핀다. 드러난 면과 숨은 이면을 통찰하고 사유를 덧입히고 밀도 있게 집대성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부대에서 근무하다 1844년 문학에 생을 바치기로 하고 퇴역한다. 1849423일 페트라솁스키 금요모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데 사형집행 직전 황제의 사면으로 죽음을 면하고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한다. 이 사건은 그의 몇 몇 작품에서 언급되는데 <백치>에서 꽤 구체적으로 작심 피력한다. 강제노역과 시베리아 병사 복무, 거주기간을 채우고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기까지는 거의 10년이 걸린다.

 

1부의 서론에서 작가는 책 속의 책이라는 액자형식으로 저작의 구조를 특정한다. 서론의 1인칭 화자는 본문의 1인칭 서술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본격적으로 세부묘사를 시작한다. 서론의 화자이자 전달자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을 대변하는 시베리아 이주민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를 만나고 그의 특이점에 주목한다. 다시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였고, 남아 있는 것은 10년 동안의 유형 생활을 적어 놓은 두툼한 공책 뿐이다. 곧 작가의 유형 경험은 남겨진 노트인 <죽음의 집의 기록>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감방의 바깥 울타리부터 울타리 안쪽으로 줌 인해 들어가면 세상과 분리된 공간이 서술자의 펜 끝에서 형체를 드러낸다. 시선은 유형수들을 향하고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 태생적 자질과 환경에 적응하며 덧입은 기질 등을 비춘다. “유형살이를 해야 할 10년 동안 결코 한 번도, 결코 1분도 나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가공스럽고 고통스러운 사실을 조금도 상상할 수가 없었”(p.24)다는 고백은 작가 자신이 형에게 보낸 편지의 호소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이 돈은 주조된 자유”(p.36)라는 명언의 출처였다. 비단 시베리아 감옥에서뿐 아니라 21세기 첨단 사회에 꼭 들어맞는다. 극한의 폐쇄사회에서 화자는 돈, 욕설, 신분의 차이와 은연중의 대립, 술과 얽힌 이야기를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동일한 범죄에 대한 형벌의 불공평성”(p.87)에 관한 의문,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벌이 주어져야 하는지를 여러 예를 들며 묻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파고들기와 철학적 고찰의 일면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은 너무도 생생해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부분을 자꾸 소환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교집합이라고는 없는 캐릭터임에도 어떤 면모는 꽤나 보편성을 띤다. 이를 알아차릴 때 우리는 놀라곤 한다. 또한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한 채 무참하게 억눌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3첫인상까지, 분량으로는 114페이지까지가 감옥에 들어온 첫 날의 단상이다. <백치>198페이지까지도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온 첫 날이었다. 무엇도 놓치는 법 없는 정교한 펜, 도스토옙스키 읽는 즐거움은 견줄 데가 없다.

 

서술자 고랸치꼬프는 공동의 작업에서 사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배척당하는 일이 곤혹스웠는데 예견되는 충돌 앞에서 입장을 정하고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앞에 다가올 수많은 동일한 나날들이 슬픔으로 와 닿을 때 감옥의 개 샤리끄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샤리끄를 비롯한 동물들과의 교류는 후반에 감옥의 동물들이라는 장에 개별 삽화처럼 들어간다. 제일 먼저 서술자를 찾아온 죄수였던 뻬뜨로프를 그리는 장에서도 빼어난 캐릭터 묘사를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시선을 설명하는데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관조를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관조한 것을 내부로 축적하는 자를 많은 러시아 민중, 그리고 스메르쟈코프라고 지적했었다. 작가는 의식 저 아래, 감추어진 방까지 내려가 돋보기를 갖다 댄 듯 차근차근 분석해서 활자화한다. 프로이트 이전에 내면세계를 탐구했던 작가의 면모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영화의 한 장면을 숨죽이고 보는 듯한 긴장감,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이처럼 영화 같은 장면은 가장 낮고 열악한 수용소에도 찾아온 성탄절 풍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설렘은 곧 다른 분위기로 대체되고 죄수들 중 바를라모프와 불낀은 희극적이면서 다분히 도스토옙스키적 충돌을 일으킨다. 시베리아 유형수들이 가게 되는 목욕탕 장면은 지옥도가 따로 없는 압권이다. 대단히 사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어진다. 24장 아꿀까의 남편 이야기이자 아꿀까 이야기는 한 편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단독 에피소드로도 읽힌다. 이해 불가한 사건 앞에서 이런 삶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이와 같은 예를 들어 알료샤에게 신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다 라는 논리를 편다. 아꿀까의 고난은 죄없는 어린아이가 이유 없이 학대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항의>가 무엇을 뜻하는가, 항의하는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배제되는 서술자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가 결코 동료일 수 없고, 별개의 길을 가는 타자일 뿐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된다. 수감 내내 숙고해온 문제다. 마지막 장인 <출옥>에 이르러 그는 10년의 유형 죄수생활을 마치고 죽음의 집을 나가기 전 옥사의 벽을 보면서 누구의 죄란 말인가”(p.455)라고 묻는다. 이는 힘없는 민중이 당했을 억울한 폭압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드디어 족쇄가 끊어진다.

 

작가는 죄수를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으로 확대하고 러시아 민중을 향하는 노래를 인류에게로 치환한다. 일상적으로 조우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의식의 심연을 건드려 접근 가능한 언어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도스토옙스키 문장의 매력은 방만함과 치밀함처럼 대립하는 요소를 동시에 구현해내는데 있다. 의식의 흐름은 머뭇거림이라고는 없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데 디테일, 세부 역시 촘촘하다. 거의 집착적 세부사항 묘사는 소설에서 더 분명히 만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만의 만연체와 장광설, 게다가 나는 지금 이야기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다.”(p.67), “그러나 나는 또다시 본론에서 벗어나고 말았다.”(p.469)는 식의 개입은 분지로 새어나갔다가 회귀하는 물길처럼 몇 번이고 계속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주는 웃음은 매우 특별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난처함에 독자를 빠뜨린다. 그가 펼쳐놓은 인물 각각에게 이입하고, 다시 이입함으로 단시간에 그들의 삶을 살아버리게 만든다. 문학의 위대한 한계초월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꼽는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서평을 쓰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의 십분의 일도 못했을 뿐더러 왜 이 말을 안하고 위의 말을 했을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야 할 범인으로서 계속 붙드는 일이 탁월함을 보장하지 못하는 바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다음이 언제일지 모르나 그때는 제대로 써보자고 위안 삼는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죽음의 집의 기록보다는 소설을 추천한다. 데뷔작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는다면 작가의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 두 소설로 걸어 들어가 작가의 진면목에 슬쩍 다리를 적시고 나오면 그의 세계에 기꺼이 온몸을 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책 속에서>


우리의 소령 같은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억누르려 하고 무엇인가를 빼앗으려 하며,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려 드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서, 어디서고 규칙만을 따지는 사람인 것이다.(p.236)

이러한 법규의 무능한 집행자는 법률의 정신과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법률을 집행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을 무질서로 끌어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결과는 결코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능력도 없다. <법에 그렇게 씌어 있는데, 더 이상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법률 이외에 건전한 사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 특히 냉정한 판단은 그들 대부분에게 아무런 쓸모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동적인 사치물이자 장애물이며,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 같다.(p.237)

 

실제로 내게는 감옥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거의 1년이란 기간이 필요했으며, 1년은 내 삶에서 가장 힘든 한 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1년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내가 느끼기에, 나는 이 1년의 매시간을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p.387)

 

그리고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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