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모든 색 인생그림책 14
리사 아이사토 지음, 김지은 옮김 / 길벗어린이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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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는 일정한 속도로 넘어가지 않는다. 어떤 장면에서는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위로 머릿속 필름이 한 장씩 내려꽂히고 쌓인다. 그런 페이지는 낱장임에도 꽤 두꺼워져 버릴지 모른다. 『삶의 모든 색』은 잊었던, 가려졌던, 감췄던, 무시했던, 아꼈던, 사랑했던, 웃음과 눈물로 덧칠했던 그때 그 순간을 소환한다. 영사기가 먼지를 내며 회전할 때 낡은 스크린 위로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직도 이토록 반짝이다니. 경이로운 수레바퀴가 작동한다. 생의 수레바퀴다.

리사 아이사토의 『삶의 모든 색(김지은 옮김, 길벗어린이, 2021, 2019)』은 모두의 생에 바치는 찬가이다. 작가는 고운 장면만 추리기 위해서 임의로 배제하지 않았으며 서두르는 서투름과도 멀다. 95컷 그림을 담은 총 200쪽 분량의 책은 압축과 상징, 여백과 여운으로 인생 파노라마를 펼쳐낸다. 무엇 하나 놓치는 법이 없는 작가의 통찰은 놀랍다. 리사 아이사토는 노르웨이에서 최고의 그림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며 독특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준다. 일러스트 작업을 한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로 수상을 했으며 <삶의 모든 색>은 2019 노르웨이 북셀러 상 수상작이다.

『삶의 모든 색』은 아이의 삶, 소년의 삶, 자기의 삶, 부모의 삶, 어른의 삶, 기나긴 삶으로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자기의 삶”을 분리하고 “부모의 삶” 이후에 “어른의 삶”이 위치하는 점, 마지막을 “기나긴 삶”으로 명명하는 시선이 독특하게 다가온다. 책은 앞에서 뒤로 순차적으로 읽어나가도 되겠지만, 현재 자신의 상황, 또는 우려되거나 미심쩍은, 어쩌면 복기하고 싶은 시기부터 펼쳐도 좋다. <아이의 삶>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는지”가 환상적으로 다가온다. 펼친 책에서 금색 불빛이 퍼져 나오고 어두운 주변을 밝힌다. 아이의 머리칼 한 올까지도 영감으로 물들어 춤추고 표정은 신대륙 발견에 맞먹는다. 이 장면은 작가가 일러스트를 담당한 <책을 살리고 싶은 소녀>의 표지로 사용되었다. 그 때를 돌아본다. 나의 그 때는 셜록 홈즈와 괴도 뤼팡에 빠져 커서 탐정이 되어야 하나, 괴도가 되어야 하나 고민 끝에 추리소설 작가가 되자고 야심찬 맹세를 하던 시기다.


<소년의 삶>에서 “어른들은 우리를 걱정하기 시작했어요.”라고 한다. 아이가 아닌 어른의 입장에서 볼 때, 빨간색 주의 표시를 아이들에게 덕지덕지 붙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문제는 붙이면서도 다 소용없는 거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 떠나지 않는다는 사실. 언제까지 이불 밖은 위험하다고 외치겠는가. “어느 날, 한 어른이 물었어요. ‘너도 커피 한잔하겠니?‘“ 이때부터다. 내 피의 8할이 커피가 된 것은. 공식 어른이 되어 앞에 두었던 커피 한 잔은 기념할 만했다. <자기의 삶>에 이르면 동반자 찾기가 생의 과업으로 대두된다. 동반의 개념은 평생 투신할 가치나 소망으로 대체할 수도 있겠다.

간결한 문장은 그림을 설명하고 보완하면서 상승효과를 일으킨다. 그림은 보이는 것 이면에 상징과 은유를 배치하여 독자에게 말을 건다. 동시에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 장면을 포착함으로 공감하고 이입하도록 이끈다. <부모의 삶> 장면들이 그렇다. 특히 “낮에도”의 엉망인 육아현장은 서랍장에서 시작해서 거실 전체 내벽을 두르는 빨간 매직 낙서에서 두드러진다. 그럼에도 작가는 “지금처럼 사랑으로 가득했던 적은 없”다는 낙관을 잊지 않는다. 곧 아이들이 떠나가면서 부부는 “사는게 이렇게 조용할 수가 없”다고 여기는 <어른의 삶>을 맞는다. 서로를 새로운 눈으로 대하는 시기이고 돌봄의 대상은 아이에게서 부모에게로 이행한다. <기나긴 삶> 또한 인간의 마지막 시기를 가감 없이 담는다. 감사하고 외롭고 두렵고 안타까운 순간들은 형편과 처지, 지역과 공간을 넘어 인류 보편의 감정으로 독자에게 닿고 어느 면에서는 안심시킨다.

가장 마음에 드는 장면은 <아이의 삶>의 크리스마스 장면과 책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내 형제들에게 크리스마스라는 단어는 은총과 구원에 더해 부모님의 사랑이 찐 별처럼 박혀 있다.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라는 마지막 문장을 보니 엄마가 늘 하시는 말씀인 “있어야 할 일이 있었던 것”이 떠오른다. 그 모든 순간에 감사하겠다는 이야기는 염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품 넓은 수용이자 기꺼운 포옹이고 적극적 의지다. 좀먹고 바랜 앨범 안 낡은 사진 한 장까지도 잃어버리지 않는다. 지나온 길은 박재된 시간이 아니라 박동하는 심장으로 뛴다.


『삶의 모든 색』은 평범하고 특별했던 시간을 불러내는 훌륭한 마중물이다. 다비드 칼리의 『나는 기다립니다』가 삶의 한 줄 요약이라면 『삶의 모든 색』은 꽤 친절하다. 인물의 생생한 표정이 제일 먼저 시선이 끌지만 배경과 세부, 계절의 변화와 소품, 물감의 번짐과 흘러내리고 사라지는 표현기법 등은 읽고 다시 읽게 되는 문장만큼 밀도 높다. 제법 큰 판형, 하드 커버, 묵직한 중량감이 전해지는 책의 만듦새는 독자에게 동반자가 되리라는 의미로도 읽힌다. 우리는 울림 강한 페이지를 펼칠 때 한동안은 어느 방향으로도 벗어나가지 못하고 글과 그림 안으로 침잠하게 되고, 한 번 두 번 이와 같은 경험을 축적하게 될 때 이 책은 벗으로 독자의 곁을 지킬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 시절에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삶의 모든 순간, 당신이 사랑받았다고 느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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