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지와 왕국 알베르 카뮈 소설 전집 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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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지와 왕국(김화영 옮김, 책세상, 1957, 2023, 316쪽 분량)은 알베르 카뮈의 유일한 소설집으로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들이 부조리에 맞서 나간 궤적을 여섯 개 단편에 담아낸다. 역자 김화영은 작가가 그려 보이려는 것이 양자택일의 세계가 아니라 안인 동시에 겉이요, 적지인 동시에 왕국인 삶과 세계의 복합성이요, 영원한 모순의 현실”(p.252)이라고 밝힌다. 작가는 이같은 괴리와 모순을 서정적인 배경묘사, 아름다운 수사, 두터운 상징과 은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여운으로 직조해낸다. 단편마다 가장 적합한 문체와 시점으로 변화를 주며 서로 다른 톤은 작품에서 작품으로 새롭게 몰입시킨다.

 

알제리 몽드비에서 태어난 알베르 카뮈는 태어난 지 얼마 후 1차 세계대전에서 아버지가 전사하고 청각장애가 있던 어머니, 할머니와 생활했다. 이후 고학으로 다니던 알제대학교 철학과에서 만난 J.그르니에는 평생의 스승이 된다. 카뮈는 1942년에 이방인을 발표하면서 이름을 알렸으며, 같은 해에 에세이 시지프 신화를 발표하여 철학적 작가로 인정을 받았다. 1957년에 카뮈는 마흔네 살의 젊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나 3년 후 자동차 사고르 숨졌다. 이방인외에도 표리, 결혼, 정의의 사람들, 행복한 죽음, 최초의 인간등을 집필했다.

 

<간부>에서 자닌은 남편 마르셀의 권유로 아랍 상인들에게 직접 옷감을 파는 여정에 동행한다. 종려나무나 부드러운 모레를 꿈꿨지만 사막은 전혀 다른 모습이다. “오로지 돌, 어디나 할 것 없이 지천으로 널린 돌뿐”(p.18)인 사막에서 그녀는 종려수들, 종려나무들, 종려의 바다, 종려나무 숲이 간절하다. 남편과 자신의 관계를 되짚어볼 때, 혼자 있는 것, 늙는 것, 죽는 것이 싫어 고집스런 표정을(p.38) 짓는 마르셀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는 각성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소통이라고는 없이 어떤 해방도 알지 못한 채, 어쩌면 살아보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것 같다고 느끼는 그녀는 한밤중 길을 나선다. 사람과 밤이 한데 섞이는, 아무도 늙지도 죽지도 않는 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부름에 자닌은 응답한다. 밤과 별, 온 마음으로 왕국에 편입되는 경이로움은 그녀의 삶과 대척점에 있다.

 

<배교자 혹은 혼미해진 정신>은 질서를 원했던 자가 겪은 부조리한 혼돈을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보여준다. 가정에서는 억압받았지만 지도신부로부터 미래와 태양, 신앙이 동일선상에 있음을 배우게 된 는 어떤 모범이 되고자 한다. 가장 위험한 야만의 한가운데야말로 둘도 없는 선교지다. 거듭되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소금의 도시”(p.55)로 걸어 들어간 그는 질서의 극단인 폭력과 광란의 뒤범벅에 에워싸여 신의 자리에 우상을, 물이 필요한 자리에 소금을, 전파가 필요한 곳에 잘린 혀를, 선 대신 악을, 구원 대신 버려짐을, 집 대신 광야를 취하게 된다. 극한 환경은 인간을 흡수해 극한의 부속물로 전락시킨다.

 

스무 살 이바르에게 바다는 싫증나는 법 없는 즐거움이었지만 이 행복은 청춘과 더불어 지나가 버렸다.”(p.83) 나이와 육신의 고됨을 실감하게 되니 바다도 일정한 시간에 바라보는 바다다. 술통 공장의 동료들과 파업에 가담한 이유는 입을 꽉 다물고 제대로 한번 따져 보지도 못한 채”(p.85) 피로만 쌓이고 임금은 부족한 현실에 화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사장 라살씨는 평소 자기 직공을 아꼈지만 이번 요구는 수용하지 않았고 그들의 분노와 침묵은 불편하게 쌓여간다. “그들은 뾰루퉁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들의 입을 막아놓고는 싫거든 아주 그만들 두라는 것이다. 화는 나는데 힘이 없고 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고함도 지르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그들고 인간이다, 그뿐이다. 그래서 금방 웃음을 짓고 아양을 부리고 할 기분이 아닌 것이다.”(p.97) 노동이라는 인간 조건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한 현대인 역시 근면에서 답을 찾지 못한다. 타인을 염려하는 마음은 있지만 손은 늦게 뻗어나가고, 자책과 연민은 외면하게 된다. 그는 생각한다. 좀 더 젊었다면 다른 선택을 하겠다고.

 

<손님>은 외딴 학교에서 교사로 지내고 있는 다뤼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안면 있는 헌병 발뒤시로부터 그가 데려온 아랍인 죄수를 공동구역까지 이송해달라는 요청이자 명령을 받는다. 다뤼는 어쩌면 단순한 과제를 당연하지 않게 다룬다. 둘 사이에 맺어진 기이한 유대는 동쪽과 남쪽이라는 선택을 가장한 자유를 허용하지만 둘만의 유대를 세상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선의는 예측 가능한 범위를 이탈하기 때문이다. “이 고장은 본래 이렇듯 살기 어려운 곳인데 그곳에 사는 인간들끼리의 문제 또한 간단치는 않았다. 그러나 다뤼는 여기서 태어났다. 어디건 이곳을 벗어나면 그는 적지의 신세가 된 듯한 느낌에 사로잡혔다.”(p.108) 그의 특별함은 고향을 적지로 바꾼다. 역시 간단치 않은 문제다.

 

<자라나는 돌>은 건설 기사 다라스트는 홍수가 잦아 질척이는 이구아프에 제방 건설을 위해 방문한다. 도움이 절실했기에 시장부터 판사, 지방 유지들까지 다라스트를 환대하는데 그들 서로간의 관계, 가난 앞에서 무력한 사람들, 염원을 담고 의미를 부여해 신적 상징물로 둔갑시킨 돌, 신에게 자원했던 약속과 약속 자체를 우상삼는 행위, 도취와 집단 광기, 고리 끊기와 새로운 첫 걸음, 마지막으로 진정한 연대와 환대까지 진전시킨다.

 

다섯 번째 작품이 압권이다. 요나서 말씀을 제사로 삼은 <요나 혹은 작업 중인 예술가>는 작가의 자전적인 요소가 꽤 가미된 예술론이자 인생론이다. 화가 질베르 요나에게 그가 믿었던 자기의 별은 길잡이였을까 마취제였을까. 그가 사는 독특한 아파트 공간은 적지인가 왕국인가. 그는 환영으로 에워 싸여 있는가, 결박된 채 포위당했는가. 이 단편은 절대 낙관론자의 빛나는 일상을 시종일관 밝고 경쾌하고 가벼운 문체로 풀어나간다. 불굴의 긍정주의자가 어떤 일에서도 밝은 면만을 취하는 데는 겸손도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람들은 배려와 호의가 익숙해지자 권리로 요구하고, 그 요구는 복잡하고 첨예해지기에 이에 호응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비판적 예술가의 무중력 삶은 자기실종을 초래하고 작가는 성공병”(p.163)이라는 조어로 세태를 비판한다. 소설은 어느 특별한 예술가의 인생을 집약하지만 삶을 살아가는 모두의 초상으로 보아도 무관하다. 작가는 과장된 유머와 풍자로 이야기를 이끌다가 웃음기 싹 빼고 모든 가면을 부수게 만든다. 한 번도 자신의 삶을 살아본 적 없이 시간을 빼앗겨버린 자의 슬픔이 사무치는 작품이다. 일종의 우화읽기는 점점 밀도를 높이면서 눈물 나는 순간에 이르는데 주인공에게서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카뮈의 새로운 모습을 만나게 될 섬세한 작품이다.

 

공감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아 선명하게 해석할 수 없는 간극은 타자를 격리시킨다. 적지는 도처에 있고 타자는 동지로 수용되기 어렵다. 적지 안에서 부분적 왕국을 건설할 것인지, 적지로 편입되어 타인의 왕국이 곧 나의 왕국이라 선언할 것인지, 영원한 이방인으로 남을 것인지 선택은 여러 갈래다. 자의로 결정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만 타의로 강제될 수도 있다. 지금의 선택을 잠시 뒤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낯선 세상에 던져진 단독자가 실존에 닿기 위해 갖추어야 할 충만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 의외로 작은 움직임, 미소, 또는 자신 안에서 편 나눠 다투는 다양한 취향, 목소리와 화해하는 일에서 시작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와 부조리의 막다름에서 성공적으로 탈출하여 온전한 자유인이 되는 일을 카뮈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목표로 삼았다. 방법과 절차가 다소 거칠었던 뫼르소(이방인)부터 관조와 절제의 표본처럼 여겨지는 리유(페스트)를 비롯해 단편집 <적지와 왕국>의 인물들도 자신 안에 떠오르는 질문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는다. 그들의 분투는 결국 독자에게 자리를 내어준다. 분투가 너그러워지기를, 너무 치열한 대신 사소하게나마 감사할 조건을 찾아내기를, 흩어져 사라지는 시간을 향해 어리석었다고 후회하지 않기를 바라게 된다. 분리와 경계를 넘어 늦지 않게 통찰할 수 있는 밝은 눈이 필요할 때다. 문고판으로 읽었던 <적지와 왕국>을 아름다운 장정의 완역, 게다가 김화영 번역으로 읽다니 감사할 뿐이다.

 



책 속에서>


아득한 옛날부터 광막한 이 나라의 뼛속까지 헐벗긴 메마른 땅 위에서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나 그 누구의 종 노릇도 하지 않는 어떤 사람들은, 이 기이한 왕국의 가난하지만 자유로운 주인들로서 지칠 줄 모르고 길을 걸었다.(p.34)

 

알고 있네. 하지만 많은 예술가가 그렇다네. 과연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이 없단 말이야. 가장 위대한 예술가까지도. 그래, 그들은 중거를 찾고 판단을 하고 비난을 하는 거지. 그렇게 하면 자신이 생기거든. 그것이 존재의 시작이야.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야!”(p.164)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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