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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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에 계절이 무슨 상관이겠느냐만 본격적으로 날이 추워지고 겨울이 시작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고질병이 있다. “도스토옙스키 읽을까?”라고 자문하는 습관에 다시 읽으리 도스토옙스키증이라고 이름 붙였다. 수년 전에 도스토옙스키 5대 소설 읽기에서 몇 작품은 3회독이었지만, 재독도 있었고 <미성년><백치>는 초회독이었다. 물론 거듭해서 다시 읽고 싶은 마음이며, 지금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처음 페이지를 넘기던 과거의 나를 열렬히 부러워한다. 동시에 여전히 읽히기를 기다리는 책은 있으니 조주관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에서 언급한 작품들 중 <죽음의 집의 기록>이 그렇다.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라, 수정처럼 단단하고 반짝이는 마법을 그 겨울에 불러일으킬 것을 확신한다. 마성의 문장은 시작되었다.

 

표도르 도스또예프스끼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덕형 옮김, 열린책들, 2010, 1862, 528쪽 분량)은 러시아 최초로 감옥과 유형 생활을 묘사하는 작품으로 작가의 자전적 체험과 관찰에 문학적 생기를 더했다. 작가는 생의 끝으로 내몰려 열악하고 제한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관계, 구성원들의 역동을 살핀다. 드러난 면과 숨은 이면을 통찰하고 사유를 덧입히고 밀도 있게 집대성한다. 도스토옙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부대에서 근무하다 1844년 문학에 생을 바치기로 하고 퇴역한다. 1849423일 페트라솁스키 금요모임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데 사형집행 직전 황제의 사면으로 죽음을 면하고 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한다. 이 사건은 그의 몇 몇 작품에서 언급되는데 <백치>에서 꽤 구체적으로 작심 피력한다. 강제노역과 시베리아 병사 복무, 거주기간을 채우고 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기까지는 거의 10년이 걸린다.

 

1부의 서론에서 작가는 책 속의 책이라는 액자형식으로 저작의 구조를 특정한다. 서론의 1인칭 화자는 본문의 1인칭 서술자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본격적으로 세부묘사를 시작한다. 서론의 화자이자 전달자는 도스토옙스키 자신을 대변하는 시베리아 이주민 알렉산드르 뻬뜨로비치 고랸치꼬프를 만나고 그의 특이점에 주목한다. 다시 그를 찾았을 때는 이미 세상을 떠난 이후였고, 남아 있는 것은 10년 동안의 유형 생활을 적어 놓은 두툼한 공책 뿐이다. 곧 작가의 유형 경험은 남겨진 노트인 <죽음의 집의 기록>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된다.

 

감방의 바깥 울타리부터 울타리 안쪽으로 줌 인해 들어가면 세상과 분리된 공간이 서술자의 펜 끝에서 형체를 드러낸다. 시선은 유형수들을 향하고 그들의 공통점과 차이, 태생적 자질과 환경에 적응하며 덧입은 기질 등을 비춘다. “유형살이를 해야 할 10년 동안 결코 한 번도, 결코 1분도 나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가공스럽고 고통스러운 사실을 조금도 상상할 수가 없었”(p.24)다는 고백은 작가 자신이 형에게 보낸 편지의 호소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이 돈은 주조된 자유”(p.36)라는 명언의 출처였다. 비단 시베리아 감옥에서뿐 아니라 21세기 첨단 사회에 꼭 들어맞는다. 극한의 폐쇄사회에서 화자는 돈, 욕설, 신분의 차이와 은연중의 대립, 술과 얽힌 이야기를 사례를 통해 설명한다.

 

동일한 범죄에 대한 형벌의 불공평성”(p.87)에 관한 의문, 두 가지 종류의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형벌이 주어져야 하는지를 여러 예를 들며 묻는다. 도스토옙스키 소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파고들기와 철학적 고찰의 일면이다. 작가가 그려내는 인물은 너무도 생생해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부분을 자꾸 소환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이기에 교집합이라고는 없는 캐릭터임에도 어떤 면모는 꽤나 보편성을 띤다. 이를 알아차릴 때 우리는 놀라곤 한다. 또한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한 채 무참하게 억눌린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3첫인상까지, 분량으로는 114페이지까지가 감옥에 들어온 첫 날의 단상이다. <백치>198페이지까지도 주인공 미쉬낀 공작이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돌아온 첫 날이었다. 무엇도 놓치는 법 없는 정교한 펜, 도스토옙스키 읽는 즐거움은 견줄 데가 없다.

 

서술자 고랸치꼬프는 공동의 작업에서 사람들로부터 노골적으로 배척당하는 일이 곤혹스웠는데 예견되는 충돌 앞에서 입장을 정하고는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앞에 다가올 수많은 동일한 나날들이 슬픔으로 와 닿을 때 감옥의 개 샤리끄는 유일한 친구가 되어준다. 샤리끄를 비롯한 동물들과의 교류는 후반에 감옥의 동물들이라는 장에 개별 삽화처럼 들어간다. 제일 먼저 서술자를 찾아온 죄수였던 뻬뜨로프를 그리는 장에서도 빼어난 캐릭터 묘사를 볼 수 있다. 특히 그의 시선을 설명하는데 이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관조를 떠올릴 수 있다. 작가는 관조한 것을 내부로 축적하는 자를 많은 러시아 민중, 그리고 스메르쟈코프라고 지적했었다. 작가는 의식 저 아래, 감추어진 방까지 내려가 돋보기를 갖다 댄 듯 차근차근 분석해서 활자화한다. 프로이트 이전에 내면세계를 탐구했던 작가의 면모를 생각하게 만드는데, 영화의 한 장면을 숨죽이고 보는 듯한 긴장감, 역시 도스토옙스키다.

 

이처럼 영화 같은 장면은 가장 낮고 열악한 수용소에도 찾아온 성탄절 풍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설렘은 곧 다른 분위기로 대체되고 죄수들 중 바를라모프와 불낀은 희극적이면서 다분히 도스토옙스키적 충돌을 일으킨다. 시베리아 유형수들이 가게 되는 목욕탕 장면은 지옥도가 따로 없는 압권이다. 대단히 사실적인 묘사가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다가오고 이런 일이 가능한가 싶어진다. 24장 아꿀까의 남편 이야기이자 아꿀까 이야기는 한 편의 이야기라는 부제처럼 단독 에피소드로도 읽힌다. 이해 불가한 사건 앞에서 이런 삶은 어떻게 해야 하나 망연자실하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이와 같은 예를 들어 알료샤에게 신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유다 라는 논리를 편다. 아꿀까의 고난은 죄없는 어린아이가 이유 없이 학대받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항의>가 무엇을 뜻하는가, 항의하는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배제되는 서술자는 비로소 자신의 위치가 결코 동료일 수 없고, 별개의 길을 가는 타자일 뿐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하게 된다. 수감 내내 숙고해온 문제다. 마지막 장인 <출옥>에 이르러 그는 10년의 유형 죄수생활을 마치고 죽음의 집을 나가기 전 옥사의 벽을 보면서 누구의 죄란 말인가”(p.455)라고 묻는다. 이는 힘없는 민중이 당했을 억울한 폭압의 가능성을 시사한다. 드디어 족쇄가 끊어진다.

 

작가는 죄수를 바라보던 시선을 인간으로 확대하고 러시아 민중을 향하는 노래를 인류에게로 치환한다. 일상적으로 조우할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의식의 심연을 건드려 접근 가능한 언어로 독자에게 전달한다. 도스토옙스키 문장의 매력은 방만함과 치밀함처럼 대립하는 요소를 동시에 구현해내는데 있다. 의식의 흐름은 머뭇거림이라고는 없이 거침없이 뻗어나가는데 디테일, 세부 역시 촘촘하다. 거의 집착적 세부사항 묘사는 소설에서 더 분명히 만날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만의 만연체와 장광설, 게다가 나는 지금 이야기의 주제에서 벗어나 있다.”(p.67), “그러나 나는 또다시 본론에서 벗어나고 말았다.”(p.469)는 식의 개입은 분지로 새어나갔다가 회귀하는 물길처럼 몇 번이고 계속된다. 또한 도스토옙스키가 주는 웃음은 매우 특별하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할지 도무지 모르겠는 난처함에 독자를 빠뜨린다. 그가 펼쳐놓은 인물 각각에게 이입하고, 다시 이입함으로 단시간에 그들의 삶을 살아버리게 만든다. 문학의 위대한 한계초월자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도스토옙스키를 꼽는 슈테판 츠바이크에게 동의하게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를 읽고 서평을 쓰고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의 십분의 일도 못했을 뿐더러 왜 이 말을 안하고 위의 말을 했을까 다시 시작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일상을 살아야 할 범인으로서 계속 붙드는 일이 탁월함을 보장하지 못하는 바에 매듭을 지어야 한다. 다음이 언제일지 모르나 그때는 제대로 써보자고 위안 삼는다. 마지막으로 도스토옙스키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죽음의 집의 기록보다는 소설을 추천한다. 데뷔작부터 출간 순서대로 읽는다면 작가의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 조금 더 생생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 두 소설로 걸어 들어가 작가의 진면목에 슬쩍 다리를 적시고 나오면 그의 세계에 기꺼이 온몸을 던지고 싶어질 것이다.

 

 

 책 속에서>


우리의 소령 같은 사람은 어느 곳에서나 사람들을 억누르려 하고 무엇인가를 빼앗으려 하며, 누군가의 권리를 박탈하려 드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서, 어디서고 규칙만을 따지는 사람인 것이다.(p.236)

이러한 법규의 무능한 집행자는 법률의 정신과 의미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문자 그대로 법률을 집행한다는 것이 오히려 일을 무질서로 끌어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결과는 결코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도 이해할 능력도 없다. <법에 그렇게 씌어 있는데, 더 이상 어쩌란 말이냐?> 이렇게 말하는 그들은 법률 이외에 건전한 사고, 냉정한 판단이 자신들에게도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에 적지 않게 놀라게 된다. 특히 냉정한 판단은 그들 대부분에게 아무런 쓸모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선동적인 사치물이자 장애물이며, 참을 수 없는 것으로 비쳐지는 것 같다.(p.237)

 

실제로 내게는 감옥 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서 거의 1년이란 기간이 필요했으며, 1년은 내 삶에서 가장 힘든 한 해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1년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내가 느끼기에, 나는 이 1년의 매시간을 순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 같다.(p.387)

 

그리고 이 벽 속에 얼마나 많은 젊음이 헛되이 매장되었으며, 여기서 얼마나 위대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버렸는가! 이제는 모든 것을 말해야만 한다. 실로 이 사람들은 비범한 인물들이었다.어쩌면 이곳에 세상에서 가장 힘 있고 가장 유능한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강력한 힘들이 덧없이 파멸해 갔다. 그것도 변칙적이고 불법적이며 되돌릴 수 없이 파멸해 갔다. 하지만 누구의 죄란 말인가? 정말로 누구의 죄인가?(p.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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