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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도 체험 그대로 쓰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선두에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역시 ‘내 책에 쓰인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p.161)라는 사뭇 비슷한 말을 했다. 중편 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조구호 옮김, 민음사, 2008, 1981, 161쪽 분량)는 실화를 재구성한 증언 문학으로 기사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좋은 소설의 두 가지 조건으로 꼽은 ‘사실을 시적으로 변형하는 것과 세계를 구성하는 암호들을 풀어내 알리는 것’(p.161)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의와도 일치하다. 비현실적 변형과 과장의 틈바구니에 뿌리박힌 진실을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독자 역시 외면하지 못한다.
실제 일어난 참담한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을 지탱하기에 기록하기 위하여 작가는 상당한 공을 들이고 오랜 시간 기다렸다. 비로소 쓸 수 있었을 때 작가는 직접 화자로 등장함으로 예를 갖춘다. 화자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27년 전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적한다. 배를 타야 접근 가능한 마을에 바야르도 산 로만이 신부감을 찾아 도착한건 결혼식 여섯 달 전이었다. 그는 앙헬라 비까리오를 우연히 본 순간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결혼식은 공식적인 행사이자 마을 잔치가 되어 성대하게 치러지는데, 그 밤에 신랑은 순결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내를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앙헬라 비까리오의 쌍둥이 오빠 빠블로 비까리오와 뻬드로 비까리오는 동생이 지목한 상대인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기 위해 곧바로 집을 나선다.
‘미남이고, 점잖고, 스물한 살 나이에 그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산띠아고 나사르는 어머니에게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이었고 ‘천성적으로 명랑하고 온화하며 솔직 담백’(p.14)한 성품이었다. 그는 쌍둥이 형제에게 살해당하고, 다시 한번 학살과도 같은 부검으로 훼손된다. “변호사가 그 살인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 행위였다고 주장하자 재판부는 양심적인 행위라고 받아들였고, 쌍둥이 형제는 최후 진술에서 똑같은 이유라면 천 번이라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p.64)고 화자는 기록한다. 명예가 걸린 문제라 양심에 따라 죽였다는 논리는 이전에 막을 수 있었던 기회들을 모두 상실한 채 실행된다. 예고되고 선포된 살인이었건만 ‘스물 두 명이나 되는 사람’(p.67)은 모호하고도 무심한 핑계를 대며 개입하지 않는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본인이 모를 수 가 없을 것이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오지랖은 민폐라고 발을 빼는 순간 방관자의 자리에서 관람을 시작한다. 혹시라도 불편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는 신조는 얼마나 익숙한가. 화자로 분한 작가는 사건을 복기하며 증언을 다각도로 비추고 수집한다. “이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은 결코 없었다.”(p.67) 그럼에도 일어나버린 사건을 작가는 추적한다, 계속해서 숫자를 기입한다. 잠든 시간과 잠들지 못한 시간을, 깨어난 시간과 움직인 시간, 머문 시간과 머뭇거린 시간을, 날을 세우던 칼의 길이와 폭, 하기로 한 조치를 4분을 지체하고 다시 3분을 빼앗기는 등 사소한 일의 누적이 불러온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쓴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p.123)기에 그날을 불러내며, 사람들은 용기가 없었다고 뒤늦은 자백을 하고 당시와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전혀 몰랐다고 분명히 밝혔던 일들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시인으로 바꾼다. 당사자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예측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다. 그들 역시 비참한 삶으로 어쩌면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짧은 분량으로 치밀하게 전개되는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등장인물 모두를 생생하게, 때론 연극적으로 부각한다. 2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날로부터 시계는 떨어져 나간 것이나 진배없다. 그들의 무의식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마지막 날에서 일초도 전진하지 않았음을 이미 안다.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산띠아고 나사르의 ‘냄새’는 방관자들의 삶이 죽음과 일반이라는 상징으로 읽힌다. 열 한달 동안 잠들지 못했던 뻬드로 삐까리오의 불면증은 『백년의 고독』에서 레베까로 인한 전염성 불면증을 연상케 한다. 어떻게 대처해도 결국은 삶을 황폐화시켰던 불면증이다. 곳곳에 작가의 인장격인 마술적 사실주의 색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압권은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참혹한 행진을 그려냄으로 웅변한다.
죽은 자의 장송행진곡은 산자들에게 호소하고, 그 호소는 시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에 사는 독자에게 닿는다. 또 다른 산띠아고 나사르는 없는지, 관망하던 자리에서 뒤늦게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는지, 합리화로 가릴 수 없는 고통 앞에 굳어가는 심정 또한 환기한다. 소설은 불행한 우연과 책임을 회피하는 침묵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질문도 남긴다. 산띠아고 나사르를 향한 앙헬라 비까리오의 일관된 입장이 그렇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다른 누구여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폐쇄된 공간에 붙박힌 가부장 사회에서 착취의 대상이며 도구, 고뇌의 상징이 되어버린 한 여성이 필요로 했던 희생양이었을 수 있지만 새롭게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그녀 역시 이 거대한 부조리극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겠다. 작가는 마술보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무대에 올려 누구의 책임인지 묻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치달아가는, 기록함으로 증언하고 질문하는 대가의 작품을 권한다.

책 속에서>
어느 날 새벽의 수탁 소리에 우리는 불현 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p.123)
무엇보다도 그는 문학에서도 허용되지 않던 수많은 우연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여 그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