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의 글쓰기
니콜 굴로타 지음, 김후 옮김 / 안타레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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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저자가 그렇겠지만 니콜 굴로타의 있는 그대로의 글쓰기(안타레스)”는 내가 가진모든 것을 내어 주리라는 결의가 그대로 전해친다. 원제 Wild Words의 생경하면서도 찬란해보이는 이미지가 마음을 두드린다. “있는 그대로의 글쓰기이 시를 먹어라: 시에서 영감을 얻은 레시피로 차린 문학의 향연에 이은 작가의 두 번째 책이다. 전작 역시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조금 더 깊이있게 자신이 하고 싶은,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담아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글쓰기는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시간을 계절에 빗대어 정리, 분석함으로 순환하는 사이클을 자연스럽게 체감하도록 해준다. 자신의 경험을 예민하고 풍성히 녹여내고, 때마다 동력을 제공하거나 지지받을 수 있었던 시와 문장, 사람들 이야기를 곁들임으로 독자 역시 잠시 감상하고 때론 기대어 생각하도록 한다. 동시에 나에게 이런 문장은 무엇인가, 나를 지탱하거나 움직이게 하는 의미있는 타자를 기억하게 해준다.

 

 

시작의 계절부터 완성의 계절까지 총 열 개의 장, 열 개의 계절을 통과하는데 마지막 계절에 책이 완성되고 축배를 든다. 어느덧 독자도 기쁨으로 일렁이는 심정이 되니 열 개의 계절을 나의 계절 겪듯이 차근히 걸어나간 셈이다. 예민하게 깨어 자신의 열정과 두려움, 시행착오와 돌파구, 조금씩 더 지혜로울 수 있는 선택과 결코 쉽지 않지만 모든 것이 부드럽게, 결국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되었음을 확인하기까지의 여정은 눈에 보이듯이 생생해서 활자를 읽는 것을 넘어 그녀의 드라마를 실시간으로 감상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다시금 현실을 직시하게끔 깨우칠 때도 있다. 당신은 누군가의 부탁이나 요구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중략) 당신의 이야기를 당신이 원해서쓰는 것이다. 당신의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가 마침내 읽는 이에게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 바람이다. 하지만 그 바람은 훗날 약속이 될 수 있다. (41p)”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다. 불평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극복해야 할 걸림돌은 동시에 훗날 내가 쓸 글감이기도 하다(53p)는 말은 용기를 준다. 당신이 쓸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에 삭제할 에피소드란 없다.(53p)”, 당신의 이야기를 내면에 간직한 채 참고 있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88p)” 경험에서 우러난 말을 건넨다.

 

 

쓰고자 애써 온, 글쓰기에 온전히 사로잡혀 지내온 작가의 열정과 노력이 모든 순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각 장마다 의식과 루틴코너에서 실용적인 팁을 한껏 전수해주는데 다이어리에 옮겨 적어두고 체크해야 할 것 같다. ‘단조롭고 예측가능한 루틴의 힘에 충분히 공감한다. 두려움 나열하기, 하루에 한 줄 쓰기, 본질주의자의 생각 정리법, 영감의 원천을 찾는 3단계, 소셜 미디어 정화 작업 등 각 계절을 통과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방법을 알려준다. 특히 올해의 키워드 정하기12월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조금씩 생각해 둘 것이다. 에필로그는 또 다른 시작을 꿈꾸게 만든다. 살아있는 한 계속될 꿈이다. 제목도 표지의 색감과 이미지까지 더해 마냥 부드럽게 할 수 있어요, 잘 될 거에요!’를 남발하는 책이지 않을까 의심하며 읽기 시작했음에도 그래서 더 솔직하고 치열한 작가의 진심에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경험을 하며 실제적인 힘이 되어 주었다. 기억해야 할 문장, 그림이 그려지는 문장들을 다시 읽어본다.

 

 

 

책 속에서)

글쓰기에 하루 단 5분만 할애하더라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바로 그 순간 당신이 추구하려 는 목표에 부합할 것이며, 당신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 전 반드시 말해야 할 이야기에 도 크게 이바지할 것이다. 무엇보다 당신 스스로가 더욱 홀가분해질 것이다.(109p)

당신이 써내려갈 페이지 위에 당신의 내면을 드러내야 한다. 불만의 계절은 온갖 힘겨운 도전들로 가득차 있지만 그럴수록 글쓰기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러면 언젠가 그 글이 당신을 사막 밖으로 인도할 것이다. (121p)

나는 몇 주 전 애리조나 사막으로 운전해 달리고 싶다는 충동을 강하게 느꼈다. 타는 듯한 열기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는 식물들을 바라보고 싶었다. 도대체 어떻게 버틸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가끔 이런 충동에 빠져들 때가 있는데, 나는 그것을 완화하는 유일한 방법이 멀리까지 운전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면 비록 잠시나마 가슴이 후련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길가에 차를 세워둔 채 곧장 바다를 향해 걸어가곤 했다. (16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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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해 봐! I LOVE 그림책
라울 콜론 지음, 신형건 옮김 / 보물창고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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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 클론의 상상해 봐(보물창고)”는 지면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훌쩍 뛰어넘도록 격려하고 이끄는 글 없는 그림책입니다. 볼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건네고 때론 수수께끼를 내거나 숨은 그림찾기에 초대하기도 하는 글 없는 그림책은 스토리가 있는 예술작품입니다. “상상해 봐!“는 아프리카의 동물들이 등장하는 전작 그림이 온다!“와는 또 다른 세계로 독자를 안내합니다. 커다란 판형이 우선 친절하게 느껴집니다. 독자가 넓은 공간에서 마음껏 탐색하며 즐길 수 있도록 배려해 주니 책을 펼치기 전에 설레이기 시작합니다.

 

표지에 등장하는 친구는 거대한 다리의 입구에 서있는 것 같아요. 제목이 구름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좀 더 압도적인 느낌이 드네요. 면지는 단순합니다. 베이지색 바탕에 색분필 한 통이 그림과 관련이 있으려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속표지에는 원제목 Imagine!도 같이 표기가 되어있네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덧씌운 표지를 빼 보고 싶어집니다. 이 순간을 저는 좋아합니다. 비밀 선물을 개봉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거든요. 역시! 근사하군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앞표지는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다리를 건너갑니다. 노오란 햇빛 찬란한 아침인 것 같아요. 뒷표지를 펼쳐 보니 그 소년이 반대로 돌아오고 있어요. 푸른 빛이 감도는 저물어가는 시간인 듯 해요. 소년이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정말 궁금해집니다.

 

스케이트 보드를 타고 도착한 곳은 Museum of Modern Art(MoMA), 뉴욕 현대 미술관입니다. 몇 점의 그림 앞에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소년은 그림 속 인물이 틀을 벗어나 자신에게 다가오면서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유명한 세 점의 그림에서 차례로 빠져나온 무용수와 악사, 사자까지 이들은 모두 일행이 되어 명소 관광을 시작합니다. 놀이기구를 타고, 자유의 여신상 크라운 관망대에도 오르고, 핫도그도 나눠 먹고, 센트럴 파크 잔디에 앉아 노래하며 연주도 합니다. 이제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와 각자의 그림 속으로 제자리를 잡습니다. 오래전 좋아했던 영화가 생각나기도 하네요. 집으로 향하던 소년은 오늘 일어난 일을 건물 외벽에 멋지게 그린 후 돌아옵니다. 잠이든 소년 방 창문에도 잊지못할 장면이 그려져 있네요. 아마 꿈 속에서 다시 친구들을 만날 것 같습니다.

 

한 권의 그림책으로 뉴욕 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듭니다. 소년이 얼마나 충만한 하루를 보냈을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내일의 소년은 아마 달라져 있을 것이고, 그 하루 하루가 모여 특별한 어른으로 성장해 가리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작가의 말에서 중요하게 등장하는 미술관의 세 작품을 설명해 줍니다. 작가는 좀 더 어렸을 때 작품의 원화를 감상하는 경이로운 경험을 할 수 있기를 촉구합니다. 그런 살아있는 경험은 많은 것을 달라지게 하는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우리를 위해 고안된 기계 장치나 화면에서 과감히 벗어나, 가장 가까운 미술관을 찾아가게 되길 바랄 뿐입니다.(작가의 말)”라는 말에 진심이 가득 묻어나옵니다. 소년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한 편의 영화같은 그림책이 감동을 넘어 삶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선택하도록 권합니다. 라울 콜론, 앞으로 늘 궁금하고 기다려지는 작가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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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진 - 즐거운 과학 나는 알아요! 28
핌 판 헤스트 지음, 마고 센덴 그림, 김현희 옮김, 좌용주 감수 / 사파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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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 판 헤스트가 글을 쓰고 마고 센덴이 그린 지진은 사파리 출판사의 나는 알아요!’시리즈 지식그림책입니다. 알고 싶은 모든 것, 궁금한 모든 것을 주제별로 찾아볼 수 있어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지식의 그물망을 체계적으로 넓혀준답니다. 교실에서 배운 내용을 조금 더 깊게, 폭을 넓히며 알아갈 수 있기에 어쩌면 자기주도 학습의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채우는 일이 될 것입니다.

 

정사각형의 큼직한 판형이 마음껏 책 구석구석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기분을 내게 해줍니다. 표지를 좌우로 넓게 펴 연결해보면 도로가 끊어지고 땅이 깊이 갈라진 것, 기울어지고 부서진 집, 심하게 요동치는 지진파 곡선과 빨간 원 안에 서 있는 아이들까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점점 궁금해지네요.

 

지구의 속은 어떻게 되어있을지 우선 내부를 살펴봅니다. 잘 익은 아보카도와 견주어 보니 조금 더 이해가 됩니다. 뉴스에서 들을 수 있는 판 경계 이야기도 나옵니다. 세계지도에 판 경계를 그려주니 쉽게 눈에 띄네요. 지진의 원인과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히말라야산맥이 생긴 이유를 알려줍니다. 진원과 진앙, 처음에 표지에서 보았던 동그라미가 지진이 발생한 진원 위의 땅이었나 봅니다.

 

선생님은 지진 대피 요령을 알려주고 친구들은 함께 연습해봅니다. 양쪽으로 펼쳐지는 날개면에 이르면 역사상 최악의 강진에 대해 살펴보는데 유명한 불의 고리를 지도상에서 보여줍니다. 날개를 펼치면 피해복구를 위한 구조 및 구호 단체 활약도 볼 수 있습니다. 내진 설계를 살펴보고 재해에 맞서는 인간의 노력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지진학자들의 업적을 보며 나의 꿈도 키워볼 수 있습니다. 새로운 지식 정보는 꿈의 크기를 키워줍니다.

 

본문을 열심히 읽으며 배웠다면 이제 직접 참여해 볼 시간입니다. 가장 기다려지고 두근두근 기대되는 순서이기도 합니다. 알려 준 준비물로 따라 만들어 본다면 냄비 안은 지구 내부처럼 특별한 움직임을 보여주는데 안내대로 죽 위에 판 경계를 그려보았다면 아마 절대 잊어버리지 못하게 될 거에요. 퀴즈도 풀면서 내용을 되새기면 복습까지 한 번에 완성됩니다.

 

나는 알아요!’시리즈 중에서 별과 행성을 좋아해서 특히 친구들과 함께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는데 계속해서 꼭 필요한 주제가 나오고 있어 반가운 마음입니다. 한 권씩 모으고 싶은 시리즈랍니다. 선명한 색감과 생동감 넘치는 등장인물들의 표정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사운드 펜 음원을 다운받아 생생한 효과음과 목소리로 만나본다면 또 다른 멋진 경험이 될 것입니다. 자꾸 다시 펼쳐보고 싶은 책, 또 읽고 싶은 지진이었습니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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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의 고독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조구호 옮김 / 민음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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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이 꿈처럼 시작되고 끝났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이토록 심오한 이야기를 이처럼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다니 놀라워하며 10, 20년 전이 아니라 지금 읽어서 더 좋았다는 생각을 했다. “백년의 고독(민음사/조구호 옮김)”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23년 동안 생각하고 18개월에 걸쳐 집필해 19676월 출간했으며, 각종 문학상을 거쳐 1982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322p). 마르케스가 시도하고 완성한 마술적 사실주의를 역자는 사실과 허구가 초현실주의적 수법으로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는 형태’(324p)’라고 설명한다. 마술적 사실주의 형상화에 천일야화가 영향을 끼쳤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국적인 이야기 속으로 흠뻑 빠져들게 만든다.

 

부엔디아 가문 사람들의 6대에 걸친 이야기가 결코 끝나지 않을 것처럼 펼쳐진다. 원시와 이상이 결합된 마꼰도라는 공간적 배경은 가문의 선조격인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 의해 세워지고 질곡의 세월, 영원과 맞닿아 보이는 백 년을 견디어 내고 문을 닫듯이 마지막을 맞는다. 시간과 공간, 인물이 하나의 거대한 운명으로 완벽하게 녹아드는 중 각 인물의 서사는 개성적이면서도 동시에 보편적인 상징을 드러낸다. 옳은 선택을 하고 운명을 벗어나려는 시도와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가는 무기력과 체념이 동일한 무게로 맞서고 있다.

 

사랑보다 더 끈끈한 연대의식, 즉 공통의 양심의 가책으로 묶여 있었기 때문에(39p)’ 무서운 전례를 반복할 가능성에 두려워하면서도 가족을 이루고, 조상의 이름을 대를 이어 물려주는 부엔디아 가 사람들은 그들의 시간을 살아간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우르슐라 이구아란의 세 자녀 호세 아르까디오,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아마란따 그리고 양녀로 들인 레베까가 이루는 두 번째 세대가 가족사의 중심을 잡고 있다. 레베까에게서 인상깊었던 사건은 그녀가 가져온 전염성 불면증이다. 시간 부족을 해결한 수 있으니 오히려 반갑다는 불면증의 장점 부각은 곧 인간 조건의 황폐화라는 치명적인 본모습에 자리를 내준다. 불면 상태에 익숙해지고 추억에 대한 기억, 사물의 이름과 관념,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잊고 백치 상태에 이르는 병의 과정이 강력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 두렵기 그지없는 것이다.(76p) 그들이 잠을 자고 싶어 시도하는 피곤해지기 수법을 표현한 길고 긴 한 문장(79p)은 무척 설득력있다.

 

마술적 사실주의는 작가의 이야기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한 번 더 강조하는 효과를 낸다. ‘이런 일이!’ 줄을 쳐 표를 하면서 읽어 나가고, 그 빈도가 점점 높아지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읽기를 멈추고 감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놓게 한다. 그 정점에 호세 아르까디오의 미스테리한 죽음을 빼놓을 수 없다.(210p) 침실에서 들린 총소리 이후 한 줄기 피의 흐름을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서 되 짚어 피의 근원으로 따라 올라오던 어머니 우르슐라의 한 문장 행적이 있다. 이와 버금가는 장면은 의사가 표시해준 심장위치를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 스스로 총으로 쐈음에도 대령이 위험에서 벗어났음을 알리던 때다. 이건 내 걸작품이죠. 몸의 치명적인 곳을 조금도 훼손시키지 않고 총알이 지나갈 수 있는 유일한 부위였어요.(278p)“ 의사는 자랑스럽게 말한다.

 

어려서부터 미래를 내다보던 영민한 소년이었고 아내를 사랑해 시를 짓던 아르까디오는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 대령이라는 이름을 얻은 후부터 다른 사람이 된다. 죽기 위해 심장에 원을 그렸던 그는 무한한 권력의 고독 속에서 이제 땅바닥에 분필로 원을 그리고 아무도 들이지 않고자 한다. 고통을 감내하던 그는 황금물고기를 만들던 은신처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했고 후에 호세 아르까디오 세군도는 콜롬비아 역사상 최대 비극인 바나나 대학살을 모티브 삼은 사건의 트라우마로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근다.

 

아마란따는 문제적 인물이었을까? 도대체 그녀는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녀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하나같이 안타까움을 남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현실감각을 지니고 있던(308p)’ 우르슐라는 아마란따를 꿰뚫어 봄으로 독자에게까지 그녀를 이해시킨다. 시력을 잃어가는 우르슐라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비밀로 삼은 채 특별한 통찰력으로 가족을 바라본다. 시력을 잃었을 때 비로소 남편에 대해서, 자녀들에 대해서 명확히 보게 된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우르슐라는 아마란따에 대해 복수의 의지 때문도, 고통에서 비롯된 심술 때문도 아니고 늘 지니고 있던 비이성적 두려움이 그런 행동을 불렀음을 밝힌다.(276p) 아마란따는 죽는 순간까지 내적인 성장을 지속한다. 사랑과 증오가 아니라 고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때늦은 성찰에 안타까와하기도 하고, 메메의 태도에서 젊을 때의 자신을 발견하고, 나아가 스스로의 운명을 받아들인다.

 

가슴 아픈 인물 중 호세 아르까디오가 삘라르 떼르네라에게서 낳은 아르까디오가 있다. ‘처음부터 잃어버린 아이였으며, ‘외롭고 겁에 질려있던 아이였고(179p), 비밀을 간직한 채 간절하게 애쓰던 아이로 제복과 폭력만이 그에게 위안으로 남았을 뿐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방치된 어린시절이 그에게는 내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고 일생의 불행이자 방아쇠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그의 깨달음이 아쉬울 뿐이다. 자신이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을 사실은 너무나도 사랑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아무런 감정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을 생각했고, 자기 삶을 냉정하게 결산해 보고 있었다.(191p)”

 

책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물 흐르는 듯 이어지는 문장 때문일 것이다. 인물에서 인물로 이야기 축이 자연스럽게 이동하는데,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시간을 자유자재로 오가며 서술함으로 한껏 빠져들게 된다. 시간변조와 묘사가 유려하기에 쉬어갈 틈 없이 몇 번이고 가계도를 펼치며 읽어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꽤나 긴 호흡의 문장들이 눈에 띄는데 남편 아우렐리아노 세군도를 향한 페르난다의 끝없는 진심, 그 속내를 보이는 부분에서는 2182쪽부터 186쪽까지 중단없는 한 문장으로 혀를 내두르게 한다. 인간 심리를 투명하게 들여다 보는 듯 하다. 마꼰도라는 격리된 유토피아에서 가족을 번성시키던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작품의 종반을 향할수록 한 사람씩 자기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마지막을 맞는다.

 

시간은 그렇게 원을 이루는 듯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는 여전히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을까 상상하게 되고,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는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과거가 됨으로써 잃어버린 시간을 되살리겠다는, 사라진 사람을 기억하겠다는 의지가 반복해서 이름을 물려주는 행동에 반영되었을 수도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실제로 사물의 이름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그녀의 해로운 습관이 새로운 혼란의 원인을 제공했다(2217p)”는 것처럼 페르난다의 명명법은 문제해결을 애초에 가로막는다. 시간 역시 장애와 사고를 겪으며, 그래서 시간이 파편화될 수 있고, 방 하나에 영원화된 파편 하나를 남길 수도 있다는 사실(2220p)”을 말하며 편협하고 단정적인 시선이 시간을 얼마나 왜곡하거나 한정시키는지 묻는다.

 

자신이 너무 늙고, 너무 쇠진되고, 인생의 가장 좋은 시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음을 느낀 그녀는 가장 나빴던 시절로 기억되는 것까지 그리워했는데, 그제서야 비로소 복도에 있는 오레가노의 진한 향기와, 해질 무렵 장미나무에서 피어오르는 수증기, 그리고 외지에서 온 사람들의 짐승 같은 성질까지도 얼마나 필요했던 것인가를 깨달았다.(2241p)” 아름다운 문장으로 깨달음을 노래한다. 가문의 백년이 두 번 반복할 수 없다고 분명히 하는 대미에 이르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을 살아가는, 길고도 찰나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향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너무도 마술적이고 극적임에도 날카로운 진실을 아프게 내어 보이며 신선한 충격을 안긴다. 밀란 쿤데라의 말을 다시 적어보고 싶다. 소설의 종말에 대해 말하는 것은 서구 작가들, 특히 프랑스인들의 기우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동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작가들에게는 어불성설이나 다름없다. 책꽂이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꽂아 놓고 어떻게 소설의 죽음을 말할 수 있겠는가?”(323p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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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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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오라시오 키로가/문학동네)”, 직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이다. 오라시오 키로가는 바스콘셀로스, 마르케스, 보르헤스 등 쉽게 떠오르는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과는 달리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모파상, , 체호프의 작품과 함께 근대 단편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321p)니 그가 들려줄 이야기에 한껏 기대하게 된다. 1917년 출간되어 한 세기를 지나온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열 다섯 편의 단편과 부록으로 세 작품을 더해 총 열 여덟 편을 현대의 독자에게 선물한다. 단편의 제목들 역시 범상치 않고 과연 이렇게 모골이 송연한 타이틀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책을 읽는 내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중남미 깊은 원시의 땅을 문장으로, 또 분위기로 밟아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외알 다이아몬드고독한 남자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엘 솔리타리오에는 병약하고 말수 적고 우유부단한 보석세공사인 남편 카심과 고객을 위한 보석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끝없는 불만으로 남편을 지치게 하는 아내 마리아가 나온다. 아내의 무리한 요청은 계속되다 하지 말아야 할 말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50p)"이라는 한계점을 훌쩍 넘어버린다. 스스로가 만든 드라마에 빠지듯이 가속 패달을 밟으며 둘 사이는 아슬아슬 관계가 지속된다. 그러다 맞는 급격한 결말이 더 놀아운 것은 우유부단한을 비롯한 남편을 묘사하던 여러 수식어와는 꽤나 대치되는 행동 때문이다. 때론 일방적이기도 한 부부간의 대화는 작품 속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성큼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배려나 이해의 여지 없는 관계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지, 얼마나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실체로 세공해낸다.

 

기이함은 목 잘린 닭에서 정점을 맞는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73p)“로 시작하는 가족의 비극인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설마하는 불안한 예감을 품은채 외면하며 읽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낳은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부부는 그 모든 운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열등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다.(77p)“ 인간이라는 열등한 존재의 행태가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려내는 파국. 피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맞닥뜨리고 마는 결말에 이르면 이런 글을 쓰게 한 작가의 삶이 자못 궁금해진다. 희망이 사라질 때 남의 탓으로 돌리고 다른 이름, 다른 호칭을 사용함으로 적대감을 공고히 하고, 상처주는 의도적 행위로 잔인한 쾌감을 느끼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선을 넘는과정, 감정의 변이는 낯설지 않다. 키로가의 작품이 충격을 던지는 이유는 포장하거나 숨겨둔 내면의 적나라한 민낯을 가차없이 드러내는데 있을 것이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여러 모양으로 그려진다. 열대 밀림 속 미지의 공간에서 독사에 물리고는 작품이 끝나도록 강을 표류하기도, 노동 중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면서 치료는커녕 고용주에 쫒기기도, 모험심과 호기심 때문에 홀로 공격을 받기도, 고통을 중독으로 마비시키려다 종말을 맞기도 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공포와 두려움도 있지만 무력감과 체념의 색채가 짙어 더 슬픔을 자아낸다. 거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햇빛, 뜨거운 날씨, 끝없는 폭우 등과 여러 번 등장했던 파라나강의 물살은 인간의 의지를 무너뜨린다. 자신들의 삶에서 예루살렘이자 골고다와 다름없는 밀림의 수도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150p)“ 인간의 욕심대로 재단하고 취하고 싶다는 이기심, 그런 접근은 반복해서 차단당한다. 무심해서 더 잔혹한 열대의 공간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주인공인 셈이다.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증상의 전조(159p)”, 상황은 오히려 급속하게 악화될 기미(179p)”등의 언급은 그때마다 긴장감을 더한다. 그나마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아름다워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다.

 

해설을 통해 비로소 작가에게 한 발 다가설 수 있었다. 살아가는 내내 죽음과 너무도 가까왔던 그의 일생이 오히려 어떤 작품보다 더 소설같다. 죽음에 스스로를 내주기까지 글쓰기, 기록하기는 작가의 유일한 호흡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 한 줄에 삶의 강렬한 인상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적 모토였다.(333p)" 드러나 있음에도 숨은 의미, 감추어진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색을 보여주는 문장은 후끈한 열기와 물소리를 들려주다가도 돌연 감정이 부대끼고 미묘한 심리에 날서는 현실의 관계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조금 더 지혜롭기를 바라며 작가의 통찰을 얼만큼이나 내 것으로 하느냐가 관건이다. 100년이 지나 키로가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남겼다. 친근함과는 여전히 멀지만 상당히 매력적인게 사실이다. 원시에 가까운 혹독한 배경이 인간 관계의 조건, 인간 생존의 조건을 더 선명히 부각시킨다는 점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100미터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파라나강은 거대한 구렁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강변 위쪽으로는 시커먼 숲이었다. 전후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음산한 장벽뿐인데다, 그 한가운데에는 쉴새없이 질퍽한 거품을 일으키는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풍경 속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무겁게 흘렀다. 그러나 해질 무렵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깃들자, 그곳만의 장엄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1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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