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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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오라시오 키로가/문학동네)”, 직설적이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풍기는 제목이다. 오라시오 키로가는 바스콘셀로스, 마르케스, 보르헤스 등 쉽게 떠오르는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과는 달리 낯선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모파상, , 체호프의 작품과 함께 근대 단편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받는다(321p)니 그가 들려줄 이야기에 한껏 기대하게 된다. 1917년 출간되어 한 세기를 지나온 키로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는 열 다섯 편의 단편과 부록으로 세 작품을 더해 총 열 여덟 편을 현대의 독자에게 선물한다. 단편의 제목들 역시 범상치 않고 과연 이렇게 모골이 송연한 타이틀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까? 책을 읽는 내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중남미 깊은 원시의 땅을 문장으로, 또 분위기로 밟아보는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외알 다이아몬드고독한 남자라는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는 엘 솔리타리오에는 병약하고 말수 적고 우유부단한 보석세공사인 남편 카심과 고객을 위한 보석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며 끝없는 불만으로 남편을 지치게 하는 아내 마리아가 나온다. 아내의 무리한 요청은 계속되다 하지 말아야 할 말결코 넘지 말아야 할 선(50p)"이라는 한계점을 훌쩍 넘어버린다. 스스로가 만든 드라마에 빠지듯이 가속 패달을 밟으며 둘 사이는 아슬아슬 관계가 지속된다. 그러다 맞는 급격한 결말이 더 놀아운 것은 우유부단한을 비롯한 남편을 묘사하던 여러 수식어와는 꽤나 대치되는 행동 때문이다. 때론 일방적이기도 한 부부간의 대화는 작품 속 시간과 공간을 넘어 성큼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배려나 이해의 여지 없는 관계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지, 얼마나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는지를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실체로 세공해낸다.

 

기이함은 목 잘린 닭에서 정점을 맞는다. 마시니페라스 부부에게는 아이가 넷 있었는데 모두 백치였다.(73p)“로 시작하는 가족의 비극인데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설마하는 불안한 예감을 품은채 외면하며 읽어나가게 된다. 하지만 자기 몸으로 낳은 짐승 같은 자식 넷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지자, 부부는 그 모든 운명을 남의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태도는 열등한 존재의 고유한 특성이다.(77p)“ 인간이라는 열등한 존재의 행태가 어떤 결과를 불러 일으키는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려내는 파국. 피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람에도 불구하고 결국 맞닥뜨리고 마는 결말에 이르면 이런 글을 쓰게 한 작가의 삶이 자못 궁금해진다. 희망이 사라질 때 남의 탓으로 돌리고 다른 이름, 다른 호칭을 사용함으로 적대감을 공고히 하고, 상처주는 의도적 행위로 잔인한 쾌감을 느끼게 되기까지의 일련의 선을 넘는과정, 감정의 변이는 낯설지 않다. 키로가의 작품이 충격을 던지는 이유는 포장하거나 숨겨둔 내면의 적나라한 민낯을 가차없이 드러내는데 있을 것이다.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죽음은 여러 모양으로 그려진다. 열대 밀림 속 미지의 공간에서 독사에 물리고는 작품이 끝나도록 강을 표류하기도, 노동 중 말라리아에 걸려 죽어가면서 치료는커녕 고용주에 쫒기기도, 모험심과 호기심 때문에 홀로 공격을 받기도, 고통을 중독으로 마비시키려다 종말을 맞기도 한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공포와 두려움도 있지만 무력감과 체념의 색채가 짙어 더 슬픔을 자아낸다. 거기에 어떻게 해볼 도리 없는 햇빛, 뜨거운 날씨, 끝없는 폭우 등과 여러 번 등장했던 파라나강의 물살은 인간의 의지를 무너뜨린다. 자신들의 삶에서 예루살렘이자 골고다와 다름없는 밀림의 수도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150p)“ 인간의 욕심대로 재단하고 취하고 싶다는 이기심, 그런 접근은 반복해서 차단당한다. 무심해서 더 잔혹한 열대의 공간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주인공인 셈이다. 앞으로 닥쳐올 끔찍한 증상의 전조(159p)”, 상황은 오히려 급속하게 악화될 기미(179p)”등의 언급은 그때마다 긴장감을 더한다. 그나마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보여주는 사랑은 아름다워 감사한 마음이 들 정도다.

 

해설을 통해 비로소 작가에게 한 발 다가설 수 있었다. 살아가는 내내 죽음과 너무도 가까왔던 그의 일생이 오히려 어떤 작품보다 더 소설같다. 죽음에 스스로를 내주기까지 글쓰기, 기록하기는 작가의 유일한 호흡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단 한 줄에 삶의 강렬한 인상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그의 문학적 모토였다.(333p)" 드러나 있음에도 숨은 의미, 감추어진 목소리를 찾아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읽을 때마다 다른 색을 보여주는 문장은 후끈한 열기와 물소리를 들려주다가도 돌연 감정이 부대끼고 미묘한 심리에 날서는 현실의 관계로 눈을 돌리게 만든다. 조금 더 지혜롭기를 바라며 작가의 통찰을 얼만큼이나 내 것으로 하느냐가 관건이다. 100년이 지나 키로가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남겼다. 친근함과는 여전히 멀지만 상당히 매력적인게 사실이다. 원시에 가까운 혹독한 배경이 인간 관계의 조건, 인간 생존의 조건을 더 선명히 부각시킨다는 점에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책 속에서>

 

-100미터 높이의 절벽으로 둘러싸여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파라나강은 거대한 구렁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검은 현무암으로 이루어진 강변 위쪽으로는 시커먼 숲이었다. 전후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음산한 장벽뿐인데다, 그 한가운데에는 쉴새없이 질퍽한 거품을 일으키는 흙탕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인간으로서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위압적인 느낌을 주는 풍경 속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만이 무겁게 흘렀다. 그러나 해질 무렵 고즈넉한 아름다움이 깃들자, 그곳만의 장엄한 모습이 되살아났다. (1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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