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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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엘리/서제인 옮김)』는 화이팅 작가상(2011)을 수상 후 대학에서 가르쳤고 ‘뉴욕 타임스’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테디 웨인의 소설로 2020년 조이스 캐럴 오츠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출판사인용) ‘외로운 젊은이들의 어두운 감정에 깊이 개입한 웨인의 최신작은 문화적인 양극단에 위치한 두 명의 소설가 지망생 사이에 생겨난 우정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따라간다.’(키커스리뷰인용)는 평처럼 소설은 햇살같은 시작과 씁쓸함이 퍼지는 전개, ‘이럴 수는 없다’ 싶은 절정을 지나 ‘내 앞에 다시 서는 나’에게 닿는다.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의 문예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내’가 그를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연이어 떨어지는 신랄한 합평들에 잔뜩 위축되던 순간 이를 멈추게 했던 바리톤의 목소리로써다. 실비아 교수가 요구하는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유일한 길, ‘실험하고, 실수하고, 잔인할 정도로 정직한 피드백을 향해 자신을 열’고, 정진하기 위해 ‘다시 실패하세요, 더 잘 실패하세요.’(p.17)라는 주문이 자신에게서 구현될 때의 낭패감을 일시정지 시켜준 빌리는 그 날의 첫 만남으로 나에게 각인된다.

나는 이혼한 아버지가 제공한 ‘종합 격려 세트’를 받아들였다. 수업료와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은 물론 아버지의 중재로 대고모의 임대료규제법 적용 아파트에서 관리 협회에 발각되지 않게 주의한다는 몇 가지 약속을 수용함으로 안정적인 거처를 갖게 된다. 그에 반해 빌리의 거주지는 알람을 맞춰 놓고 향하는 일터의 지하 창고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경제적으로 파산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단지 뉴욕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항상 발버둥을 쳐야 하겠지만, 나는 항상 괜찮을 것이었다. 순전히 우리 아버지는 전문직이고 그의 아버지는 게으름뱅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는 풍부한 자원이 있었고, 이곳은 내가 그 자원을 공유할 구체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장소였다.’(p.67)

나와 빌리는 1997년, 문학이라는 동일한 이상을 향하는 동지이자 서로에게 응원을 보태는 조력자로써의 역할을 기대하며 한 공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다정한 마음과 선의는 첫 심정을 잃지 않고 성장의 동인이 되고 영혼의 쉼터가 되며 결국 마지막 축포를 함께 터트릴 수 있을까. 나와 빌리. 관계 맺기를 ‘연기’이자 ‘모방’에 의지했던,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절대 어딘가에 제대로 속하지는 않은 채 여러 집단의 경계에 머무르기만 하면서 불청객으로 지내온’(p.33) 나에 반해 ‘사교적인 자리에서 절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지닌 카리스마라는 중력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궤도를 그리며 그들 주위를 돌았으니까.’(p.248)에 해당하는 사람 빌리가 발을 굴러 도움닫기 했을 때 동시에 별을 쥘 수 있을까.

함께 지내는 기간은 둘 사이의 간극을 서서히 보여준다. 빌리를 향하는 어떤 선망은 불쾌를 내포한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기댈 것 없는 빌리의 배경은 그의 재능과 의지, 진심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기록을 위해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은 둘의 차이를 글이 아닌 이미지로 직관하게 한다. ‘여기 진정한 작가가 있다. 빌리의 사진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는 그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런 집중이 그가 자기 마음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글을 쓸 때의 그는 진실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주기 때문이기도 했다.’(p.148) 소설을 쓰는 기술, 작법에 능통하고 수업 시간에 최고로 분석적인 피드백을 주는 그에게 결여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형식에 있어서만 전문가이고 예술가의 영혼은 없다’(p.222)는 사실은 이미 드러나있고 나 역시 반박할 수 없으니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진정성 결여’는 나를 대변하는 낙인으로 짙어지고 ‘진정성의 화신’(p.305) 빌리에게 빛나는 최고의 미덕이 눈엣가시처럼 나를 찌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빌리는 답한다. “이야기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그걸 표현하기 위한 재능이 있고 단련하는 방법을 아는, 그리고 공감능력이 있어서 다른 관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라고. 그런데 화자는 이에 한 가지를 덧붙힌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 의지할 수 있는 재정적 완충제가 있는 사람들이지. 즉, 나 같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거야.“(p.165) 이 대화는 꿈과 비전에 대한 통찰과 인식, 간절함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결‘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설은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절정을 지나, 그럼에도 처음처럼 ”어이, 친구.“(p.290) 라는 호칭을 거두지 않은 채 돌아서는 빌리를 그린다. 한 순간 그 대상을 망가뜨리고자 할 때 먼저 망가지는 것 역시 상대가 아니라 의도를 가진 자신임은 자명하다.

테디 웨인의『아파트먼트』는 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품고, 때로 겨루었던 치열한 젊음을 보여준다. 아프고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진실 게임,「분리된 평화」(존 놀스)를 비롯한 민감한 성장의 책들도 떠오르게 한다. 동경과 질투, 선망과 적대감이라는 감정을 들여다 볼 때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재능의 유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틈새에는 어쩌면 무한한 계단이 있다. 작가는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결코 ‘나와 빌리’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반론으로 확장된다. 성취는 노력에 기인하나, 노력은 어느 정도일 때 방점을 찍을 수 있나, 결과적으로 헛된 노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까 중간 성찰의 부족인가. 그보다 먼저 피스타치오의 껍질은 어떻게 깰 수 있을까. 화자의 첫 합평작 「교열팀장」속 인물이 그에게는 가장 잘 맞는 옷이었을 수도 있다.

『아파트먼트』의 여러 장점 중에서도 한 번에 끝까지 읽히는 가독성은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은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는 대화, 민감하게 변주되는 심리, 당혹스런 마음 저변의 민낯을 거듭 포착함으로 독자를 이입시킨다.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면서도 속도감 있는 전개는 폭발지점에서 일순 숨죽이게 한다. 근사하게 직조한 문장들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장문(長文)으로, 또는 인장 같은 말들-‘친구’, ‘내가 낼게.’-로 시선을 붙든다. 의연하게 비상한 빌리는 예측 가능했다 해도 그렇다면 ‘나’의 2년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피스타치오의 껍질은 그대로 견고한지 궁금해질 때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은 아직 남아있는 가능성을 확인시킨다. 성장 소설은 이렇게 끝났는가? 별을 향한 도움닫기를 성공해내지는 못했을지언정 성장은 계속되리라.

보행자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삶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 수 있었지만, 바로 그런 담백함이 섬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통성을, 위엄이나 열정과 끈기 따위의 과시도 소설과 영화 속에서 이 공간에 있다고 재현되는 과장된 모습들도 쏙 뺀 뉴욕을 만들어냈다.(p.41)


그러나 『노 맨스 랜드』를 읽고 난 그날 밤은 예외적이게도 맨해튼이 더 이상 내게 문학적 소재의 가장 심오한 원천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빌리가 그려낸 이름 없는 중서부의 도시, 그 생기 없고 황량한 풍경과 다 허물어져가는 집들, 앞면이 널빤지로 막힌 가게들이 있는 그곳이야말로 그 모든 겉모습이 반대를 가리킴에도, 진짜 삶이 박동하고 진동하는 곳이었다. 그곳이 진정으로 미국의 심장부, 하틀랜드였다. 뉴욕은 현란하지만 그냥 쓰고 버려도 되는 말단 도시였다.(p.42)



(공백, 인용 제외 174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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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안토니오 타부키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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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문학동네/김운찬 옮김/1994)』은 페소아의 열렬한 애독자이자 연구자로 적극적으로 세상에 그를 알렸던 안토니오 타부키의 전기적 픽션이다. 이탈리아 작가 타부키는 소르본 대학 문학 강의에서 페소아를 처음 알게 된 후 우연히 파리 헌책방에서 프랑스어판 페소아 시집 『담배 가게』를 읽게 된다. 이후 그는 페소아의 도시 리스본에 살다시피 하며 작품들을 번역, 소개하고 가장 명망 있는 페소아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한다.(출판사 인용) 영화화된 작품들과 문학상 수상 등 활발하게 활동했던 타부키에게 페소아는 창작은 물론 생애 전반의 중심축으로 영향을 끼치는데 ‘페소아의 삶의 궤적 속에서 자신의 문학적 텃밭을 가꾼 것을 일생 동안 글에서건 삶에서건 부인하지 않았다.’(출판사 인용)고 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은 ‘어떤 정신착란’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차례는 작품의 성격을 시각적으로 분명히 한다. 1935년 11월 28일, 1935년 11월 29일, 1935년 11월 30일이 목차의 전부로 11월 30일 그는 임종한다. 페소아 생애 마지막 3일을 작가는 최고의 예를 다해 그려내고, 이는 물리적 시간을 초월한 온전한 인사, 남은자는 물론 떠나는 자에게도 충분하리라 짐작할 만한 아쉬움 없는 애도가 된다. 병상에 누워있는 페소아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기 위해 사람들이 방문한다. 쇠약해진 페소아를 오래 붙잡고 있을 수는 없지만 방문자들은 꼭 해야 할 말을 하고, 들어야 할 말을 기대한다. 공동의 추억을 회상하고, 좋아하던 음식을 권하고, 작품을 논한다. 어쩌면 침묵의 공간일지라도 함께 있다는 인식으로 족했을 것이다. 방문자들에 대해서는 말미에서 ‘이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로 정리해준다. 실존인물이건 창조된 캐릭터이건 페소아 일생에서 중요한 인물들이다.

“페소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명(異名)’, 즉 가상 인물이다. 페소아에게 창작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또다른 ‘나’를 분리해내고 그들에게 삶과 영혼을 부여하여 완전한 하나의 독립체를 형성하는 일‘이었다.“(불안의책,p.594해설, 문학동네) 70개가 넘는 페소아의 이명 중 주요 인물을 재 등장시키는 일은 충분히 의미있어 보인다. 다음은 지난 1월 필자가 쓴 페르난두 페소아의『불안의 책』서평 마지막 부분이다. -이제 페소아를 조금이나마 더 기억하기 위해 타부키의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을 읽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수많은 이명 속에서 익명이었던 페소아 자체 같이 슬프고도 사실적이다. ​“내일이면 나 역시, 그렇다, 느끼고 생각하는 영혼이며 내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우주인 나 역시 이 거리를 더 이상 지나지 않을 테고,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 어떻게 됐지?’라고 어렴풋이 떠올리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했던 모든 일, 내가 느끼고 살아왔던 모든 것은 어느 도시에나 있는 일상의 거리에서 사라진 한 명의 행인일 뿐, 아무것도 아니리라.(587p)”- 읽겠다는 약속을 열 달이 지나서야 지켰는데『불안의 책』의 마지막 문장은 “페소아 자신과 가장 흡사한 인격체라는 이유로 ’반 이명‘이라 불렸“(불안의책,p.599해설)던, 이명 저자 베르나르두 소아르스의 목소리다. 즉, 페소아 자신이다.『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에서 그의 임종 순간은 소아르스가 떠나고 병실에 들어온 철학자, 또 다른 이명인 안토니우 모라가 지킨다. 무엇보다 그 자리에는 타부키가 있겠다.

‘어떤 정신착란’이라는 부제가 혼란한 허구의 가능성을 시사하고 3일째 밤, “내가 그대의 꿈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용서하시오.”(p.53)라고 했듯이 꿈과 현실의 경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도 불분명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문학적 초혼제이자, 타부키식의 오마주”는 가장 페소아가 흡족해했을 방식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페소아가 1928년 알바루 드 캄푸스의 이름으로 쓴 시, 타부키 평생을 이끈 단초가 되었던「담배 가게」전문을 감상할 수 있다는 건 매우 특별한 선물이다. 그가 “20세기의 가장 멋진 시”라고 칭했던「담배 가게」중 한 연이라도 옮기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런데 담배 가게 주인이 나타나 문가에 선다.

나는 불안정하게 반만 붙들린 영혼을 뒤섞어

불편하게 반만 목을 돌린 채로 그를 바라본다.

그는 죽을 것이고, 나도 죽을 것이다.

그는 간판을 떠날 것이고, 나는 시를 떠날 것이다.

결국 간판이 있던 거리도,

그리하여 시가 적혀 있던 혀도 죽을 것이다.

그러고는 이 만물을 돌리던 지구의 수레바퀴도 멎을 것이다.

다른 우주의 다른 행성들에서는 사람 같은 무언가가

계속해서 간판 같은 것들 아래에 살면서 시 같은 것들을

만들어나갈 것이다.

언제나 다른 것과 마주한 어떤 것,

언제나 다른 것만큼이나 무용한 어떤 것,

언제나 현실만큼이나 어리석은 불가능한 무엇,

언제나 겉에 잠자고 있는 신비만큼이나 진짜인 내적 신비,

언제나 이것 아니면 언제나 저것, 또는 이도 저도 아닌 것.

(담배 가게/부분 발췌 p.78)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타부키의 마음이 곧바로 이해되지 않는가!(이만큼이라도 암송해보자는 의지가!) 사후 47년만인 1982년 처음 출판된 『불안의 책』을 생각할 때 페소아는 아깝고 신비롭다. 그는 본체가 맞는가라는 비논리적 물음도 뒤따른다. 작품도 놀랍지만 작가의 여정 역시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페소아를 『페르난두 페소아의 마지막 사흘』덕분에 온전히 배웅한 것 같다. 작지만 묵직한 책, 타부키 덕분에 다시 페소아를 기억할 수 있었고, 이제 또 다른 타부키의 흔적을 따라가 보려 한다.

책 속에서>

-빛의 색조에 대해 쓰기란 어렵지만 나는 해냈어요. 낱말들로 그림을 그렸지요. 홉킨스처럼 말이오?페소아가 물었다.

네, 베르나르두 소아르스가 답했다. 그렇지만 아이디어는 존 키츠의 일기를 읽으면서 떠올린 겁니다. 그리고 러스킨의 ‘말로 그리기Word-painting’이론이란 게 있어요. 그가 터너의 옹호자가 된 건 우연이 아니지요. 간단히 말해 나는 낱말들을 화폭에 그림을 그리는 붓처럼 사용했고, 내 팔레트는 리스본의 새벽과 석양이었어요.(p.43)

-하지만 부탁하건대, 지금 떠나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로서 우리 사이에 잠시 더 머물러주십시오.(중략)사랑하는 안토니우 모라, 페르세포네가 자기 왕국에서 나를 원해요. 이제 떠날 시간이에요.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이 이미지들의 극장을 떠날 시간입니다. 내가 영혼의 안경을 통해 무엇을 보았는지 당신이 알까요.(p.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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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자국 소설의 첫 만남 10
김애란 지음, 정수지 그림 / 창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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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칼자국(창비)』은 자전적 단편 소설로 자신이 성장했던 공간 ‘맛나당’을 중심으로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준다. 원작은 2007년 발표된 단편집『침이 고인다(문학과 지성사)』이며 새롭게 이름을 올린 곳은 ‘소설의 첫 만남’(창비) 시리즈 중 ‘공감력’ 편이다. 김애란은 2002년 단편 소설「노크하지 않는 집」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후 여러 문학상을 받으며 단편집과 장편, 산문집까지 활발한 행보를 보임으로 ‘"(이 작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가능할까?" 라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표현을’ 증명하고 있다. 단독으로 새옷을 입은 『칼자국』은 정수지의 그림을 만나 책이라는 물성을 넘어 반짝이는 선물처럼 독자에 닿는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p.7) 소설의 첫 문장은 어머니와 칼, 무심함이라는 이질적인 낱말을 연결시킨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단어들은 화학작용을 일으켜 뜨거운 음식이 시원하듯 독자의 속을 얼얼케한다.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어린시절의 기억을 돌아보는 과정은 그 자체로 애도의 시간이 된다. “어머니는 20여 년간 국수를 팔았다. 가게 이름은 ’맛나당‘이었다.”(p.12) 처녀때 인기가 좋았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선택하고 ’어떤 위엄이랄까 단단함에 반해‘(p.27) 구입한 칼은 ’그류‘로 일관하는 남편을 대신해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키우고 쓰러지는 순간까지 멈출 줄 모르는 유일한 삶의 수단이 된다. 씩씩하고 태연해 보인하다고 곤란이, 사무침이 없을 수 없다. 베인 손가락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고 남편이 동네 여자와 커플링을 하고 다닐 때도 어머니는 손안에 반지의 반짝임이 아닌 식칼의 번뜩임만을 쥔 채 ’칼박자‘를 놓치지 않는다. 그럼으로 감정의 굴곡은 시선을 흐트러트리지 못한다. 담담지만 뜨겁게 자식의 마음에 진심을 채우고 우주를 통과하고 세대를 넘는다. 이어져 끝내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이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이라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그려지는 객관적 묘사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생일이면 양지를 찢어 미역국을 끓이고, 구정에는 가래떡을 뽑고, 소풍날은 김밥을, 겨울에는 동치미를 만들어 주었다. 그사이 내 심장과 내 간, 창자와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p.54) 맛깔나는 음식의 향연은 소박하면서도 정겹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오감을 자극하는데 아름다운 삽화는 그 효과를 배가시킨다. 독자는 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떠올린다, 내 어머니의 손맛을. 끝내 침이 고인다. 또한 경쾌해서 리듬감이 느껴지는 문체 역시 너무 빨리 읽어버렸다는 아쉬움을 남길 정도로 가독성을 높인다. 입에 붙는 문장은 소리 내어 읽고 간직하고 싶어진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에 팩트의 힘까지 간직한 소설은 끈끈한 일화들로 고단했을 어머니의 시간을 기록한다. 칼을 빗댄 비유는 위트 있으면서도 풍성하다. ‘어머니가 칼같이 지키는 원칙 중 하나는 음식 나가는 순서였다.“(p.23), ”칼 잘쓰는 어머니가 지금까지도 못 자르는 게 있으니 그것은 단 하나 부부의 연이다.“(p.37), ”칼은 도마 위를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어머니의 손은 빨랐고 칼 박자는 경쾌했다.“(p.42) 도마를 두드리던 어머니의 칼질은 시간이 흘러 칼날이 얇아지며 빛날수록 철학과 자부를 간직한 춤으로 승화된다. 작품의 주인공, 작가의 어머니는 모든 어머니의 자화상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한다.

딸이 쓰는 어머니의 이야기는 쉽게 감정으로 매몰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서가 눈물이나 한탄처럼 신체적으로 발산될 때 안도하고 타협하는 속도는 더 빨라진다. 무엇을 타협하나? 기억하고 기념하는 일을 ‘제대로’와 ‘미진하게’ 사이에서.『칼자국』은 누구에게나 이중으로 읽히는 책이다. 칼박자를 맞추며 행진하는 이야기의 여백에 나와 내 어머니의 시간 또한 알알이 박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품은 독자의 수만큼 무한 복제되고 ‘둥글게 자전하며 각자의 우주’로 여행을 시작한다. 결국 내 어머니를 향하는 헌사이자 시가 된다.

책 속에서>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 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p.8)

-“어머니는 좋은 어미다. 어머니는 좋은 여자다. 어머니는 좋은 칼이다. 어머니는 좋은 말(言)이다.”(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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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담 보바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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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플로베르의『마담 보바리(문학동네/김남주 옮김)』는 친구이자 시인인 ‘루이 부이예에게’라는 짧은 헌사를 남기는데 그에 앞서 마리앙투안쥘 세나르에게 표하는 감사를 따로 덧붙힌다. 출간에 앞서 문학잡지에 연재 당시 종교 모독과 풍기문란을 야기할 가능성으로 결국 기소되었지만 세나르의 변론으로 무죄판결을 받았기에 1857년 『마담 보바리』의 초판에 세나르에 대한 글이 담긴다. 영어권 작가 125명에게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문학작품 10권을 물은 결과 1위 안나 카레니나에 이어 2위에 올랐으며 1857년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함께 '현대(modern)'를 연 소설로(영어권작가들이 뽑은 최고의 문학작품) 역자 해설의 시작 역시 찬탄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이라는 문학 장르가 자리잡은 이후 가장 많이 읽히고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소설, 단 하나의 단어도 다른 단어로 대체할 수 없다는 일물일어설을 낳은 절대 작품.’(p.501) 여기서 끝이 아니고 계속 이어진다. 운명의 소설, 실패의 소설, 기다림의 소설, 환멸의 소설이라는 별칭(방미경, 2003)을 가졌으며 출간 이후 ‘무려 백육십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줄곧 현역으로 읽히고 있는 이 소설’(p.502)의 힘은 말 그대로 ’힘을 다해‘ 이해해야 할 것 같다.

『마담 보바리』는 총 3부로 소설의 도입부라 할 수 있는 1부는 샤를 보바리가 전학해 온 학창시절과 가정의 분위기, 공의가 되고 아내가 죽은 후 환자의 딸이었던 에마를 만나 결혼하고 사 년간 머물며 자리가 잡히기 시작한 토트를 에마의 성화로 떠나게 되기까지다. 샤를에게는 내키지 않았던 이사의 직접적 원인은 보비에사르에 있는 당데르빌리에 후작 집에 초대받았던 데 있다. 사랑에 관한 책들에 빠져 보냈던 열 다섯 살, 책 속 인물과 그들의 삶을 지금 자신의 현실과 비교했을 때의 괴리에 “맙소사! 내가 도대체 왜 결혼을 했을까?”(p.70)라며 ‘만일’을 곱씹고 보태던 시기에 이루어진 초대는 그녀에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되고 그날의 인상은 촘촘히 각인된다.

보바리 부부의 새로운 거주지는 용빌라베다. ‘노르망디, 피카드리, 일드프랑스 세 지역이 맞닿아 있는 이곳은 풍경에 별 특징이 없듯 사람들의 말투에서도 두드러진 억양을 찾아볼 수 없는, 이른바 잡탕 지역이다.’(p.106)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곳은 오메 씨의 약국으로 약제사 오메는 마지막까지 샤를과는 정 반대의 인생곡선을 그린다. 에마에게 공증인 사무소의 서기 레옹 뒤퓌는 남편 샤를과 달리 대화가 통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다. 레옹과 함께 있던 에마는 우연히 눈길이 닿은 남편이 ‘짜증’스럽다. ‘그녀의 눈에 프록코트로 감싼 그 등이 진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성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듯 보였다.’(p.148) 법률 공부를 위해 레옹은 파리로 떠나고 ‘보비에사르성에서 돌아온 후 얼마간 머릿속에서 카드리유가 맴돌았던 것처럼 그녀는 침울한 애수, 어딘가 마비된 듯한 절망에 휩싸였다. 레옹의 모습이 실제보다 더 크고 더 멋있고 더 감미롭고 더 모호하게 눈앞에 떠올랐다.’(p.178) 에마는 상념에 빠져든다.

약제사 오메의 예상대로 올해의 농업박람회는 용빌에서 개최되었다. 로돌프 불랑제의 눈에 ‘그 여자가 예뻐 보였’(p.187)고 그는 그녀를 유혹할 계획과 ‘나중에 떼어낼’ 생각을 동시에 챙기지만 그의 구애에 에마는 소녀 시절 꿈꾸었던 책 속 여주인공들의 삶이 자신에게 비로소 실현되었다고 여긴다. ‘이제 그녀 자신이 명실상부하게 그런 상상의 일부가 되었고, 그토록 부러워했던 사랑에 빠진 여자 역할과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게 됨으로써 젊은 시절의 오랜 몽상을 실현한 셈이었다.’(p.232) 에마는 샤를의 외반족 수술 실패 이후 남편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중략) 그라는 인간 전체, 요컨대 그의 존재 자체가 그녀에게 짜증을 불러일으켰다.’’그러자 샤를이 곧 죽을 사람, 그녀의 눈앞에서 임종의 고통을 당하는 사람인 양 그렇게 그녀의 삶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영영 없어져버린, 존재한다고 볼 수 없는 허상으로 여겨졌다.‘(p.264) 에마는 자신에게 허락된 가정이라는 테두리에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에마의 집착이 커질수록 로돌프는 발을 뺀다. 분노와 상실로 인한 신경증의 발작 이후 샤를의 정성으로 겨우 회복된 에마는 레옹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새로운 정열에 자신을 맡긴다. 이미 상인 뢰뢰는 그녀의 틈과 약점을 간파하고 있다. ‘아! 걸려들었군.’(p.270) 뢰뢰의 사악한 덫은 에마를 죽음으로 몰고 일 년 후 샤를에게, 그리고 어린 베르트만 남을 때까지 일가 내의 죽음은 계속된다.

『마담 보바리』는 ‘눈앞의 현실이 아니라 꿈꾸는 환상을 살고자 하고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다르게 생각하는 보바리슴’(p.504)이라는 용어를 만들어냈다. 실화를 바탕으로 했으며 생생하게 펼쳐지는 사건과 인물들에게 때론 감정을 이입하게, 때론 묻게 됨에도 줄거리 자체는 단순하게 요약이 가능하다. 과연 작가는 인물들의 서사에 집중했을까 생각할 때 존 업다이크의 “『마담 보바리』는 한 시대를 나타내는 기차역이다. 고풍스러운데다 꽃까지 만발해 있지만 강철로 만들어져 단단하기 그지없다.”는 평은 해답을 간직한다. 꽃과 강철이라는 극단의 상징처럼 작가는 세차게 몰아치는 감정에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내맡겼던 아름다움을 가차없는 비극으로 완결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잠시 넋을 잃게 한다. 그리고 에마같은, 샤를같은 나아가 오메나 로돌프, 뢰뢰같은 자들의 존재를 헤아려보게 된다. 의외로 그들은 특별하지 않기에, 다분히 보편적이기에 더 씁쓸하다.

논픽션의 대가 존 맥피 역시 플로베르의 글쓰기에 대해 언급한다.“나는 사전에서 모르는 단어보다 아는 단어를 찾는 데 월등히 많은 시간을-적어도 99대 1의 비율로-쏟는다.(중략) 나는 이를 ‘일물일어를 찾는 탐색’이라고 부른다.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날이면 날마다 자기 집 안뜰을 걸어다니며 가장 적확한 단어 하나를 찾아 머릿속을 뒤졌다는 이야기를 8학년 때 바살러뮤 선생님한테 들었기 때문이다. 누가 이 이야기를 잊을 수 있겠는가? 플로베르는 영웅과도 같았다.”(p.265/네 번째 원고/존 맥피/글항아리) 역자는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가는 철두철미한 글쓰기’(p.502)라고 말한다. 겉과 속을 모두 그려내는 문학에서의 그림(p.505), 진짜 교향곡으로 보일 것이라며 수정을 거듭했다는 장면들(p.515)까지 아마도 완독 횟수가 늘어갈수록 작품은 달리 보일 것이다. 하지만 농업 박람회의 시상식 장면에서 호명되는 수상자와 로돌프의 구애가 교차하는 서술기법은 생동감이 넘치고 입체적이며 독특했다. 재독을 하지 않더라도, 예민하지 못한 감각을 지닌 필자조차도 그 장면은 인상 깊으니 말이다. 이런 문장은 어떤가. ‘하지만 아무리 충만한 마음이라도 때로는 고작 공허한 비유로나 표현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이나 관념, 고통의 정도를 결코 적확하게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의 말이란 금간 냄비와도 같아서 별을 감동시키고자 하지만 곰을 춤추게 하는 가락을 내는 데 그치고 말기 때문이다.’(p.273) 대안은 이런 문장을 암기하는 것일까.

시점의 자유로운 이동 역시 내내 반복되면서 독자의 감상을 풍성하게 한다. 인물의 단정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대변하는 무언가를 통해 좀 더 잘 이해하게, 실제적으로 느끼도록 돕는다. ‘층층기법’에 대한 역자의 설명은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을 상기하게 했으며 작가의 치밀한 시도들이 다시 읽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만든다. 에마의 고단한 삶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에마와 샤를은 함께 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을까, 에마의 중독과도 같은 맹목적 선택과 행동은 비단 그녀만의 한계일까 생각하게 된다. “내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아무것에도 떠받쳐지지 않은 채 공중에 떠 있는 지구처럼 외부적으로 전혀 묶인 데 없이 문체의 내적인 힘으로 저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한 권의 책입니다. 가능하다면 주제랄 것이 거의 없는, 아니 적어도 주제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책 말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작품은 그 재료가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책입니다. 표현이 생각한 바에 가까워질수록, 언어가 사고와 하나가 되어 사라져버릴수록 작품은 더 아름다워집니다.”(p.516) 플로베르의 문학이『마담 보바리』전후로 완전히 달라졌다(김계선,2017)고 하듯 이를 분명하게 성취한 작품이었고 문학사 전체에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역자 해설의 ‘플로베르 론’을 읽고 난 독자는 아마도 당장 다시 읽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임은 알았지만 플로베르 탄생 200주년은 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0번으로『마담 보바리』를 만날 수 있어 다행이다.

책 속에서>

하지만 그녀는 마음속 깊이 어떤 사건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난당한 뱃사람처럼, 삶의 고독 위로 절망적인 눈길을 던지면서 저멀리 수평선의 안개 속에서 하얀 돛을 단 배가 다가오지 않는지 살폈다. 그 우연이 어떤 것일지, 어떤 바람이 그 배를 그녀 자신에게까지 밀어붙일지, 그 배가 그녀를 어느 기슭으로 데려갈지, 조각배일지 삼중 갑판이 딸린 선박일지, 뱃전까지 기쁨이 가득차 있을지 고뇌가 가득차 있을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잠에서 깨면 그녀는 바로 그날 그 일이 일어나기를 바랐고 들리는 모든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소스라쳐 자리에서 일어났다가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그리고 해가 질 무렵에는 언제나 더욱더 서글퍼져서는 어서 빨리 다음날이 왔으면 하고 바랐다.(p.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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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김지혜 지음 / 창비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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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2019)』는 차별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을 직접 찾아가는 현장활동가이자, 국내의 열악한 혐오·차별 문제의 이론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전념해온 연구자(출판사 소개 인용) 김지혜 교수의 첫 책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제목이기도 한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스스로 선량한 시민일 뿐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믿는’(p.11) 사람들 이라고 정리한다. 저자는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차별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 기묘한 현상’과 더불어 ‘차별을 당하는 사람은 있는데 차별을 한다는 사람은 잘 보이지 않’(p.7)고 ‘모욕을 한 사람은 없고 모욕을 당한 사람만 있’(p.9)는 불일치 또는 모순에 초점을 맞춘다. 문헌을 찾고 사례를 모으고 목소리를 듣고 질문한다. 그 질문이 독자에게 닿고 새로운 시각을 알아차리게 되는 과정이『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는 내내 반복된다.

책은 총 3부 10장으로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탄생,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 차별에 대응하는 우리들의 자세까지 차별의 기원, 과정, 기대와 전망의 형식을 취한다. 저자는 사회에 이슈를 던졌던 비극적 사건들을 비롯해 반목하고 갈등하게 했던 일들을 다양한 사례로 내어놓고 분석하고 정의 내리고 설명한다. ‘소수자 때문에 다수자가 차별받는다는 –다수자 차별론-은 어떻게 가능할까?’(p.22) 저자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인 토크니즘이 평등이 달성되었다는 착시를 일으킨다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기울어진 공정성을 추구한다.’(p.37)는 말에 반대하기는 어렵다. ‘평등을 이루려는 시도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역차별로 보이고 충돌은 여전한데 뚜렷한 해법은 요원한 현실을 지적한다. 호모 카테고리쿠스, 범주화하려는 인간의 경향과 스테레오타입 또는 고정관념을 의미하는 단순화된 정보의 집합체를 설명한다. 또한 단순화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인 일부 특징에 대한 과잉 일반화, 즉 편견(p.45)과 부정적 고정관념인 ‘낙인’까지 저자는 기존의 연구자료와 데이터를 소개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환기한다. 1부의 결말을 마음아픈 ‘인형 실험’과 세기의 판결을 통해 ‘그래서 의심이 필요하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평등도 저절로 오지 않는다.’(p.79)고 맺는다.

2부, ‘차별은 어떻게 지워지는가’의 첫 장은 ‘웃자고 한 말에 죽자고 덤비는 이유’로 시작한다. 금기의 빗장이 약자를 향해 풀렸을 때 잔혹한 놀이가 시작된다(p.89)는 점, 그 잔혹성은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엄청난 간극에서 온다는 사실(p.90), 비하성 표현의 문제가 단어 교체로 해결될 수 없는 이유, ‘둘 다 잘못’이라는 양비론이 해답을 가져올 수 없는 이유, 능력주의 관점의 오류와 한계 등 귀 기울일 때 독자는 스쳐지나갔던 순간들을 선명히 떠올리게 된다. 3부, ‘차별에 대응하는 자세’에서 저자는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p.184)고 지적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구호 역시 이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하는 형용모순(p.184)이라고 밝힌다. 나아가 내가 모르고 한 차별에 대해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는 방어보다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성찰의 계기로 삼자고 제안하고 있다.(p.189)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소속되기 위해 ‘완벽한’사람이 되려 노력하거나 그런 사람인 척 가장하는 대신, 모두가 있는 그대로 어울리는 사람으로 환영받는 세상을 상상하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p.209)고 밝힌다.『선량한 차별주의자』에 마음을 열고, 때로 추임새를 넣으며, 때론 안타까움을 느끼며 읽어낸 독자라면 저자의 제안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록으로 장 별로 구분된 각주와 참고문헌의 분량을 보면서 저자의 진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책에 담긴 사례와 예시, 이론과 문헌 등이 어떻게 독자에게 닿게 되었는지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물론 다 읽은 후 ‘그래서 결론은? 성찰의 계기가 되자는 것이 다인가?’ 아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학자의 문제 제기는 훌륭했고 이제 정치와 경제에서 구체적인 해결책들이 변화에 속도를 더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우리는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익숙한 틀과 관점을 지속하는 것 또한 거두어야 할테다. 다시 생각하고 취하고 변화해갈 그 끝에 더 나은 삶과 희망이 가능하리라는 믿음을 가지려 한다. 여전히 ‘차별’은 예민한 키워드이고 뜨거운 감자다. 김지혜의『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해하기 쉽고 친절한 안내서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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