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먼트
테디 웨인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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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먼트(엘리/서제인 옮김)』는 화이팅 작가상(2011)을 수상 후 대학에서 가르쳤고 ‘뉴욕 타임스’등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는 테디 웨인의 소설로 2020년 조이스 캐럴 오츠 문학상 후보에 올랐다.(출판사인용) ‘외로운 젊은이들의 어두운 감정에 깊이 개입한 웨인의 최신작은 문화적인 양극단에 위치한 두 명의 소설가 지망생 사이에 생겨난 우정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따라간다.’(키커스리뷰인용)는 평처럼 소설은 햇살같은 시작과 씁쓸함이 퍼지는 전개, ‘이럴 수는 없다’ 싶은 절정을 지나 ‘내 앞에 다시 서는 나’에게 닿는다.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의 문예창작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 ‘내’가 그를 처음 인지하게 된 것은 연이어 떨어지는 신랄한 합평들에 잔뜩 위축되던 순간 이를 멈추게 했던 바리톤의 목소리로써다. 실비아 교수가 요구하는 예술가로서 성장하는 유일한 길, ‘실험하고, 실수하고, 잔인할 정도로 정직한 피드백을 향해 자신을 열’고, 정진하기 위해 ‘다시 실패하세요, 더 잘 실패하세요.’(p.17)라는 주문이 자신에게서 구현될 때의 낭패감을 일시정지 시켜준 빌리는 그 날의 첫 만남으로 나에게 각인된다.

나는 이혼한 아버지가 제공한 ‘종합 격려 세트’를 받아들였다. 수업료와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은 물론 아버지의 중재로 대고모의 임대료규제법 적용 아파트에서 관리 협회에 발각되지 않게 주의한다는 몇 가지 약속을 수용함으로 안정적인 거처를 갖게 된다. 그에 반해 빌리의 거주지는 알람을 맞춰 놓고 향하는 일터의 지하 창고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그는 경제적으로 파산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단지 뉴욕에서만이 아니라 어디서든-항상 발버둥을 쳐야 하겠지만, 나는 항상 괜찮을 것이었다. 순전히 우리 아버지는 전문직이고 그의 아버지는 게으름뱅이라는 이유만으로 내게는 풍부한 자원이 있었고, 이곳은 내가 그 자원을 공유할 구체적인 방법이 될 수 있는 장소였다.’(p.67)

나와 빌리는 1997년, 문학이라는 동일한 이상을 향하는 동지이자 서로에게 응원을 보태는 조력자로써의 역할을 기대하며 한 공간에서의 삶을 시작한다. 다정한 마음과 선의는 첫 심정을 잃지 않고 성장의 동인이 되고 영혼의 쉼터가 되며 결국 마지막 축포를 함께 터트릴 수 있을까. 나와 빌리. 관계 맺기를 ‘연기’이자 ‘모방’에 의지했던,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절대 어딘가에 제대로 속하지는 않은 채 여러 집단의 경계에 머무르기만 하면서 불청객으로 지내온’(p.33) 나에 반해 ‘사교적인 자리에서 절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그들이 지닌 카리스마라는 중력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궤도를 그리며 그들 주위를 돌았으니까.’(p.248)에 해당하는 사람 빌리가 발을 굴러 도움닫기 했을 때 동시에 별을 쥘 수 있을까.

함께 지내는 기간은 둘 사이의 간극을 서서히 보여준다. 빌리를 향하는 어떤 선망은 불쾌를 내포한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기댈 것 없는 빌리의 배경은 그의 재능과 의지, 진심을 오히려 부각시킨다. 기록을 위해 찍었던 폴라로이드 사진은 둘의 차이를 글이 아닌 이미지로 직관하게 한다. ‘여기 진정한 작가가 있다. 빌리의 사진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건 하나의 목표에 매진하는 그의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고, 그런 집중이 그가 자기 마음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글을 쓸 때의 그는 진실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라는 걸 드러내주기 때문이기도 했다.’(p.148) 소설을 쓰는 기술, 작법에 능통하고 수업 시간에 최고로 분석적인 피드백을 주는 그에게 결여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형식에 있어서만 전문가이고 예술가의 영혼은 없다’(p.222)는 사실은 이미 드러나있고 나 역시 반박할 수 없으니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진정성 결여’는 나를 대변하는 낙인으로 짙어지고 ‘진정성의 화신’(p.305) 빌리에게 빛나는 최고의 미덕이 눈엣가시처럼 나를 찌르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빌리는 답한다. “이야기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고, 그걸 표현하기 위한 재능이 있고 단련하는 방법을 아는, 그리고 공감능력이 있어서 다른 관점들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 같은데.”라고. 그런데 화자는 이에 한 가지를 덧붙힌다. ‘성공하지 못할 경우에 의지할 수 있는 재정적 완충제가 있는 사람들이지. 즉, 나 같은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는 거야.“(p.165) 이 대화는 꿈과 비전에 대한 통찰과 인식, 간절함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와 ’결‘의 차이를 보여준다. 소설은 이게 말이 되나 싶은 절정을 지나, 그럼에도 처음처럼 ”어이, 친구.“(p.290) 라는 호칭을 거두지 않은 채 돌아서는 빌리를 그린다. 한 순간 그 대상을 망가뜨리고자 할 때 먼저 망가지는 것 역시 상대가 아니라 의도를 가진 자신임은 자명하다.

테디 웨인의『아파트먼트』는 꿈을 향해 가는 여정에서 품고, 때로 겨루었던 치열한 젊음을 보여준다. 아프고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진실 게임,「분리된 평화」(존 놀스)를 비롯한 민감한 성장의 책들도 떠오르게 한다. 동경과 질투, 선망과 적대감이라는 감정을 들여다 볼 때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재능의 유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의 틈새에는 어쩌면 무한한 계단이 있다. 작가는 곳곳에서 다른 형태로 질문을 던지는데 이는 결코 ‘나와 빌리’에게 한정되지 않고 일반론으로 확장된다. 성취는 노력에 기인하나, 노력은 어느 정도일 때 방점을 찍을 수 있나, 결과적으로 헛된 노력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일까 중간 성찰의 부족인가. 그보다 먼저 피스타치오의 껍질은 어떻게 깰 수 있을까. 화자의 첫 합평작 「교열팀장」속 인물이 그에게는 가장 잘 맞는 옷이었을 수도 있다.

『아파트먼트』의 여러 장점 중에서도 한 번에 끝까지 읽히는 가독성은 빼놓을 수 없다. 소설은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는 대화, 민감하게 변주되는 심리, 당혹스런 마음 저변의 민낯을 거듭 포착함으로 독자를 이입시킨다. 독자의 예상을 빗나가면서도 속도감 있는 전개는 폭발지점에서 일순 숨죽이게 한다. 근사하게 직조한 문장들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장문(長文)으로, 또는 인장 같은 말들-‘친구’, ‘내가 낼게.’-로 시선을 붙든다. 의연하게 비상한 빌리는 예측 가능했다 해도 그렇다면 ‘나’의 2년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피스타치오의 껍질은 그대로 견고한지 궁금해질 때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은 아직 남아있는 가능성을 확인시킨다. 성장 소설은 이렇게 끝났는가? 별을 향한 도움닫기를 성공해내지는 못했을지언정 성장은 계속되리라.

보행자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삶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일이란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제나 알 수 있었지만, 바로 그런 담백함이 섬의 나머지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정통성을, 위엄이나 열정과 끈기 따위의 과시도 소설과 영화 속에서 이 공간에 있다고 재현되는 과장된 모습들도 쏙 뺀 뉴욕을 만들어냈다.(p.41)


그러나 『노 맨스 랜드』를 읽고 난 그날 밤은 예외적이게도 맨해튼이 더 이상 내게 문학적 소재의 가장 심오한 원천처럼 다가오지 않았다. 빌리가 그려낸 이름 없는 중서부의 도시, 그 생기 없고 황량한 풍경과 다 허물어져가는 집들, 앞면이 널빤지로 막힌 가게들이 있는 그곳이야말로 그 모든 겉모습이 반대를 가리킴에도, 진짜 삶이 박동하고 진동하는 곳이었다. 그곳이 진정으로 미국의 심장부, 하틀랜드였다. 뉴욕은 현란하지만 그냥 쓰고 버려도 되는 말단 도시였다.(p.42)



(공백, 인용 제외 1740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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