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의 비결 - 좋은 문장 단단한 글을 쓰는 열 가지 비법
정희모 지음 / 들녘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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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모의 『문장의 비결(들녘, 2023, 324쪽)』은 잘 쓰고 싶지만 나름의 노력에도 여전히 동일한 갈증에 시달리는 독자라면 반가울 책이다. “이 책이 나의 문장을 구원하리라”며 하나씩 수집한 글쓰기 책이 상당히 쌓였음에도 명저의 명언에 졸필은 오랫동안 아랑곳 않는다, 그렇다고 누가 글쓰기를 포기하겠나. 서문에서 저자는 대상 독자를 언급한다. “특히 좋은 문장을 쓰고 싶지만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필자, 또 문장을 쓰고도 잘못 쓰지는 않았는지 두려워하는 필자”(p.5)라면 더 이상 망설일 게 없다. 두려움과 불안감 사이, 의심과 좌절 사이에서 세쪽이 한 문장인 만연체와 의식의 흐름 기법을 선망하는 필자는 가장 적합한 교정서를 발견한 셈이다. 현재 연세대 국문과 교수인 저자는 글쓰기에 관한 학술적, 대중적 저술 작업을 해왔으며 모교인 대학의 국문학과에 글쓰기 강의를 개설했다. 2005년 공저한 『글쓰기의 전략』은 선구적인 글쓰기 책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유사한 책들이 뒤따르게 된다. 주요 저서로 『글쓰기 교육과 협력학습』 『글쓰기 교육의 이론적 탐색』 『창의적 생각의 발견, 글쓰기』등이 있다.

『문장의 비결』은 총 열 개장에서 좋은 문장, 단단한 글을 쓰는 방법을 짚어나간다. 저자는 좋은 글이란 “형식과 내용 면에서 균형감이 있고, 표현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글”이라고 말한다.(p.21) 균형감이 전체 구조의 안정감이라면 디테일은 문장, 문장 연결, 비유와 상징 등 세부사항 전체를 의미한다. 간결한 문장이 더 정확하다는 말은 첫 장부터 거듭 등장한다. 짧은 문장의 중요성은 2장의 화두다. 스티븐 킹의 부사 퇴치 주장은 더 이상 강조할 수 없을 정도다. 글을 압축하는 과정은 정민 교수의 예화로 이해를 돕는다. 수정할수록 여운은 남고 생각은 깊어짐을 확인할 수 있다. 3장은 생각의 논리와 글의 논리는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사유의식’ 그대로 글을 쓰지 말 것, 생각나는 대로 쓰지 말 것, 문장 흐름을 하나씩 따지면서 차근차근 쓸 것(p.92). 새겨야 할 부분이다. 이어 한국어 기본 문형을 살피고 다양한 복합절 사례를 통해 어떻게 정리하고 수정할 수 있을지 설명한다. 6장 명사형, 동사형 문장에서는 서술어를 잘 살려 쓰는게 좋은 문장을 쓰는 첩경이라고 전한다. 명사형 문장을 서술형으로 바꾸는 연습은 해볼수록 자연스러워질 것이다.

서술어 중심, 동사형 문장의 중요성은 많은 글쓰기 저서들이 강조했지만 익숙함에 빠진 글은 자동 발사되듯 앞서 나간다. 명사절 남발과 잦은 수동태 출몰, 치렁치렁 꾸미며 묘사에 묘사, 설명에 설명을 덧붙이는 글도 고치지 못했다. 『문장의 비결』은 문장 안에서 절과 절이, 낱말과 낱말이 서로 발을 걸어 쓰러뜨리는 형국에 지쳐갈 즈음, 고집스러울 만큼 한결같은 문장들을 다 불태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할 때 읽었다. 책은 길게 설명하지 않지만 중요한 부분을 반드시 강조한다. “비결”인 이유다. 글을 쓸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법칙이며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닌 필수다. 예시 문장에서 장단점을 발견하고 수정하는 과정은 좋은 문장이 저절로 써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각 장 마무리에 핵심 체크와 실전 체크를 실어 배운 내용을 확인하고 체화하도록 돕는다.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와 설명, 어법적 해설까지 어렵지 않다는 장점도 빠뜨릴 수 없다. 이제 원칙을 기준 삼아 쓰고 있는 초고를 다듬어 보려 한다. 확신을 가지고 좋은 문장을 쓰고 싶은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해주고 싶은 말,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다. 단 번에 나아질 수 없을지라도 나아가는 일을 멈추지는 않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이처럼 좋은 글은 좋은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내가 지금 문장을 읽고 있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게 해준다. 문장을 읽으면서 이미지가 떠오르고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흘러갈 때 우리는 글 속에 담긴 참된 의미를 느끼게 된다. 오랜 숙련을 거친 작가들은 문장을 문장으로 쓰지 않고 이야기로, 삶으로, 생활로 쓴다. 좋은 문장은 이게 문장이란 것을 잊어버릴 때 써진다.(p.142)


<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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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 - 의심을 생산하는 시대에 살아남기 위한 철학적 대화 실험
리 매킨타이어 지음, 노윤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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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법(노윤기 옮김, 위즈덤하우스, 2022, 456쪽)』은 철학자 리 메킨타이어의 신념이 이끄는 열정 가득한 저서다. 자못 긴 제목은 초지능, 초연결, 초융합으로 상징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고개를 갸웃할 주제다. 대화형 인공지능이 현란한 기술을 선보이며 일상이 혁명 같은 날들을 겪고 있는 21세기에 느긋해보이는 제목부터 조치가 필요해 보인다. 왜 제목부터 불편할까? 무시 못 할 걸림돌들이 자꾸 발끝에 채이기 때문이다. 지구가 평평하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어요, 라고 지인이 말을 건넨다면 속으로 답할 것이다. “아니 왜? 설마.” 그 후 대화의 주제를 바꿀 것이다. 그러니 그와 즐거운 대화라, 어렵고, 생산적인 대화라, 역시 어렵다. 어려운 일에 전심으로 기꺼이 몰두하는 것, 내가 가진 물질과 시간을 투자하고 에너지를 끝없이 쏟는다면 어떨까. 상상만으로도 지치는 그 어려운 걸 저자는 해낸다. 책은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과 즐겁고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는’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동참하자고 설득하는 초대에 더 가깝다.

제사로 인용한 레온 페스팅거와 마크 트웨인의 글이 앞으로 직면할 어려움을 상징적으로 대변한다. “그가 속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그를 속이는 일이 더 쉽다.”(마크 트웨인)는 명징한 한 문장을 저자는 각오처럼 걸고 시작한다. 리 매킨타이어는 철학과 과학사 센터 연구원과 윤리학 강사를 지냈던 철학 박사로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다. 하버드대학교와 보스턴 연방준비은행 등에서 자문 및 연구부서 부편집장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뉴욕타임즈> 등에 기고하는 한 편 저서로는 『포스트트루스』. 『과학적 태도: 과학 부정론과 사기와 유사 과학으로부터 과학을 수호하기』 등이 있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현재 우리가 사는 세상이 사실과 현실마저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탈진실‘의 시대이며 ’현실 부정‘은 ’과학 부정‘이라는 근원으로 연결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15년간 연구실에서 과학부정론을 연구했던 저자는 2018년 “평평한 지구 국제 학회”에 참가한다. 최악 가운데서도 최악이자 과학 부정론의 가장 기본적인 사례에 도전함으로 대화의 물꼬를 틀고 유의미한 변화를 일으킬 첫걸음을 내딛는다.

2장 “과학 부정론이란 무엇인가?”에서는 과학 부정론의 다섯 가지 구성요소인 체리피킹, 음모론, 가짜 전문가에 의존, 비논리적 논증, 과학이 완벽해야 한다는 주장을 차례로 설명한다. 이는 “결과적으로 그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과학에 맞서 싸우는’ 전투 계획이 된다. 과학을 부정하는 일은 오류가 아니라 거짓이다. 허위 정보가 의도적으로 생성되기 때문이다.”(p.107) 다섯 가지 수사는 의도적인 전략이다. 또한 그들의 신념, 즉, “그들이 믿는 것은 그들 자신의 반영”(p.126)이며 그들이 경험한 결핍은 정보가 아닌 “신뢰의 결핍”이라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3장에서는 실증적 문헌, 연구 논문들을 검토하고 적용해 본다. 특히 슈미트와 베슈의 실험으로부터 “잘못된 정보에 대해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은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악의 일”(p.147)이라는 결론을 도출한다.

연구실 밖으로 나온 저자의 도전은 계속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낮고 평평한 나라 몰디브에서 기후변화 위협의 현주소를 확인한다. “그들은 어떤 과학도 가르칠 수 없는 것들을 이미 체득한 것 같았다. 그것은 신념이 아니라 관심의 문제였다.”(p.206)며 슬픈 한계를 직시한다. 석탄 광부들과 환경문제를 이야기하고, GMO(유전자변형생물체)를 불신하는 동료들과 문답을 이어간다. 때론 민감하고 의견이 나뉘는 주제이지만 대화로 서로를 설득하지 않는다. 대화를 가능하게 한 유일한 요소는 신뢰와 상호존중임을 확인한다. 정치적 입장과 과학부정론의 연결 고리도 계속 등장한다. 과학 부정론의 최신 사례인 코로나 19 팬데믹 에서는 음모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한 후 대응 방법을 정리한다.

저자는 가능한 경우의 수를 살펴 과학 부정론을 바로잡고자 동분서주한다. 그의 설득은 집요하고 간절하고 확신에 차 있다. 과학 부정론자들을 외면하고 어리석은 자들로 치부하는 일은 솔깃한 유혹임을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특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 다시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p.343)고 자신의 메시지를 다시 한 번 언급한다. 방법은 거의 유일하다. 신뢰와 관계 구축, 공감과 존중의 자세로 대화하기다. 살려내야 할 지구, 살아남아야 할 모두. 어느 한 편이 아닌 모두의 생존을 끝없이 주장하는 목소리가 배어 있는 책이다. 다만 재차 반복되는 부분을 조금 더 요약 전달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분명 저자의 간절함이 브레이크 따위는 치워버렸다고 이해된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으리라. 생생하고 치열한 저자의 여정에 동참하며 변화를 위한 나비의 날갯짓을 확인하고 싶은 독자들께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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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의 상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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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10, 162쪽), 1596』은 우정과 사랑, 복수와 자비를 노래하는 희비극으로 속도감 있는 전개와 극적 반전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첫 작품 『헨리 6세』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후 희극과 비극, 사극 등 여러 분야의 작품과 소네트를 집필했다. “그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는 찬사를 받았던 셰익스피어는 당대에 이미 최고의 작가로 자리한다. 그 시대의 모든 작품 목록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6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거의 다 살아남았다.(셰익스피어,황광수,아르테) 그의 작품들은 쉬지 않고 영화와 연극으로 공연되며 새로운 해석과 시선을 보여주는 마르지 않는 보고(寶庫)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 명망을 얻기 시작하던 시기에 쓰인 극작품 가운데 하나로 배경은 르네상스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 베니스다.

바사니오는 아름다운 포셔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유명한 구혼자들과 경쟁해야 할 처지다. 사치하고 방탕했던 과거 행실은 청산해야 할 빚만 남겼고, 재력만 있다면 구혼에 성공할 텐데, 목전의 고민을 절친한 벗이자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털어놓는다. 안토니오는 “내 지갑과 내 몸과 극한 수단까지도”(p.17) 필요하면 다 주겠다, “극단적인 무리를 해서라도”(p.19) 벨몬테의 포셔에게 갈 채비를 해주겠다며 함께 샤일록을 찾는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은 평소 안토니오가 자신에게 가했던 폭언과 모욕적 행위를 열거한 후 그럼에도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단, 되갚는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유쾌한 장난 삼아” 안토니오의 “고운 살 정량 일 파운드”(p.32)를 취하겠다는 조건을 단다. 평소 눈엣가시였던 안토니오에게 사적 복수의 기회를 갖게 되니 그로써는 내심 흡족하다.

포셔는 남편 선택을 위해 아버지의 유언대로 금, 은, 납, 세 가지 궤로 제비뽑기를 행한다. 구혼자들은 각각에 의미를 부여하며 신중히 고르나 결과에 실망하고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포셔는 “잘못하고, 평가하는 두 일은 별개이며 그 본질은 서로 어긋난답니다.”(p.64)라는 말처럼 매번 유연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뿐 아니라 드러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통찰한다. 바사니오는 겉과 속의 다름, 꾸밈이 내포하는 거짓된 진실을 깨닫고 이로써 결혼의 증표인 반지를 받는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배들은 사고를 당하고 빚을 갚지 못하게 된 그는 감옥에 갇힌다. 재판이 시작되고 증서대로 안토니오의 살덩이 일 파운드를 원한다는 샤일록과 법학 박사로 변장한 포셔의 법정 장면은 희곡의 절정을 이룬다.

안토니오의 헌신적 우정은 말로 확증하고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사니오는 벗의 우정을 힘입어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지혜로운 여성의 전형인 포셔는 모든 것을 겸비했다. 아름다운 만능 해결사라고 할까.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치는 탁월한 전략가다. 하지만 무엇보다 훗날 <오셀로>의 이아고로 발전해가는, 셰익스피어의 빼어난 캐릭터 샤일록이 있다. 돈밖에 모르고 증오를 키운 채 복수에 여념 없는 악마적 이미지는 “육천 다카트의 한 개 한 개 다카트가 여섯으로 갈라져서 다카트로 다 변해도 그 돈을 안 받고 계약대로 할 거요!”(p.101)라는 선언에서도 두드러진다. 동시에 반유대주의라는 강압에 희생당하는 타자이자 외부인이라는 (법정에서 포셔는 이름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재차 호명한다.) 이중의 얼굴을 지닌다.

재기 넘치는 사랑의 테마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인육계약, 그로인한 재판은 극을 이끄는 두 개의 동력이다. 어떤 형태로든 작품과 재회할 때 독자는 인물과 서사의 이면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말 운문 형식으로 옮겨진 『베니스의 상인』은 읽을수록 감정이 이입되고 무대가 그려진다. 다양한 비유와 신화 인용, 위트와 유머도 풍성하다. <햄릿>, <리어 왕>과 비교했을 때 ‘무’의 함의나 ‘자비’, ‘정의’를 숙고하게 한다. 인물들이 던지는 상징적인 명대사들은 발화하는 씨앗처럼 움직이고 독자를 초청하고 개입시킨다. 눈으로 읽고, 목소리로 낭독하고, 고요히 묵상하고, 기록하게끔 하는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만나 봐도 좋겠다.

책 속에서>

바사니오_(전략) 그래서 꾸밈이란 극도로 위험한 바다의

속기 쉬운 해변이고 검은 미녀 가려 주는

아름다운 베일일 뿐이며, 한마디로

최고 현자 잡으려는 교활한 시대의

겉치레 진실이다. 그러므로 화려한 금이여,

미다스의 굳은 음식, 난 네게 뜻이 없고

인간들 사이의 창백한 천한 일꾼

네게도 뜻이 없다. 하나 너, 초라한 납이여,

무엇을 약속하기보다는 협박하는

창백한 네 모습은 웅변보다 더 감동적이다.

난 이걸 선택한다. 기쁜 결과 있기를!(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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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타일
김금희 지음 / 창비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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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희의 『크리스마스 타일(창비,2022,312쪽)』은 넋놓고 크리스마스잖아 싶은 표지가 이 성탄에 읽지 못한다면 당신은 확실하게 손해 보는 것이라 말하는듯하다. 얼추 맞다. 제목을 보고 가능한 이야기들을 떠올리는 건 자연스럽다. 읽을수록 마음을 밝히고 있는 유년의 성탄도 소환한다. 그러나 소설은 기억 속 트리의 오색 불빛처럼 마냥 알록달록하지만은 않다. 여전히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 중인 인물들은 자신이 주인공인 단편 속에서 크리스마스 곁을 서성인다. 더 이상 어드벤트 캘린더를 떼어내는 설렘은 없다. 하지만 주목받지 않아도 성탄은 여전히 소소한 마법을 일으키고 있는 게 아닐까. 


『크리스마스 타일』은 김금희의 첫 번째 연작소설이다. 『크리스마스에는』으로 시작된 이야기에 한편씩 보탤 때마다 작가는 “마음속 가장 깊은 그늘과 가장 환한 빛을 동시에 통과하는 기분이었다”(p.307)고 전한다. 2009년 단편소설 「너의 도큐먼트」가 신춘 문예에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김금희는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등의 소설집,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복자에게』를 비롯해 중편과 산문집 등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여 왔다. 『크리스마스 타일』에 담긴 이야기 일곱 편은 트리를 장식한 색색의 전구처럼 다르지만 조화롭게 읽힌다.


수술을 받고 난 은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를 맺겠다고 마음먹는다. “참여자 없는 연극이자 듣는 이 없는 아리아, 만남이 불발된 채 혼자서 나누는 열렬한 악수 같은”(p.13) 다른 차원의 고독이 어울리는 삶을 선택하기로 한다. 복직한 은하는 예능국 전보자 오태만의 크리스마스 일화를 듣는다. 거듭된 낙방이라는 절망을 안고 간 아바나에서 탈진했을 때 자기에게 다가왔던 마차 한 대, 구조는 곧 구원과 맞먹는 효험을 일으켜 아나운서 시험에 결국 합격했으니 성탄 선물과 다름없다. 은하는 쿠바에서 만난 떠돌이 개와의 짧은 장면을 떠올릴 때 자신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기적적 순간이었음을 회상한다. 안미진과 나이트 근무를 함께 끝낸 크리스마스 아침, 퇴근길의 한가을은 수치심일지도 열패감일지도 모를 “어떤 것들”(p.103)과 결별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새로이 시작할 수도. 


“옥주는 거기서 자신이 변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중략) 그런 변화는 셀 수 있는 게 아니니까.”(p.106) 여러 이별을 감당하며 중국으로 향했던 옥주에게 예후이는 크리스마스 이브의 과일, 사과에 대하여 알려준다. 새로운 친구들과 의기투합해 예후이의 고향에 동행했으나 흩어지듯 떠나가고, 흠집과 아쉬움만 남는다. 그럼에도 중랑천가를 걷는 사람들 일부로 섞여드는 옥주가 더 이상 걱정되지 않는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양감을 간직한 호수, 예후이와 보았던 호수를 마음 깊이 지니고 있을 것이기에. 때로 때때로 길어 올려 세포 틈틈이 윤기마저 넉넉히 채울 것이기에. 하바나 눈사람 클럽의 뒷이야기를 여전히 울퉁불퉁할지언정 양진희와 주찬성이 열어 재낄 미래는 결국 만났음으로 행복 꽃길 아니겠나 예측한다. 대학 동아리에서 알게된 지민과 현우는 우연히 일 때문에 재회한다. 시간은 흘렀지만 크리스마스 이브를 함께 맞았던 공간은 기억 속 그대로다. 두 번째 이별은 훨씬 온건하다. “복수도, 화해도, 용서도, 기적적인 능력에 대한 찬탄이나 입증,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던 부산행이지만 적어도 생일 축하는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니 홀리하긴 홀리했다고 여기면서.”(p.304)


소설은 찰떡처럼 쫀득하고 때론 설기처럼 푸실해 두 가지 다른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곤란과 희망이 교차하는 이야기는 독자 자신의 엇비슷한 추억을 꺼내보게도 만든다. 취재와 자료수집 과정도 상상하면서 읽게 된다. 인물의 환경과 역사를 천천히 조립하며 퍼즐을 완성시켜가는 연작소설의 매력이 새롭다. 크리스마스라는 특별한 시기가 공통 배경으로 등장하지만 잔뜩 힘을 준 채 전면에 나서기 보다는 그 앞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감당해가는 사람들에게 따스한 조명을 비춘다. 크리스마스야, 그래서 어쩌라고, 만만치 않다, 삶! 해가며 마구 냉한 기분으로 이성을 갈고 닦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크리스마스잖아요, 크리스마스라고요 참견하며 일깨워주고 싶어진다. 


이만큼 살아왔다는 나이듦이 성장과 동의어는 아니다. 하지만 전진하는 시간이 성숙과 퇴보를 반 보씩 겹쳐가며 거시적으로는 좋아지고 나아지는 일에 가깝다고 낙관한다. 계절과 눈을 그려보이는 묘사가 아름답다. 툭툭 내뱉는 듯 무심해 보이는 문장이 소설을 읽는 특별한 즐거움이다. 담백하게 기록된 감정을 읽고 있으면 독자에게도 말을 거는 듯하고 경쾌한 문체가 미련이나 아쉬움을 털고 걸음을 내딛게 만든다. 그렇다고 과도하게 매정하지 않다. 대상과 주체 모두에게 유일하고 소중했던 시간이었기에 이에 걸맞게 머물러 응시한다. 그렇게 떠나보내는 일은 조금 더 단단해진 나로 새로운 날을 여는 좋은 인사를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타일』이라기보다는 퀼트,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아꼈던 헌 옷의 조각을 꿰매 붙인 조각 이불이 어울린다. 닳아 해지긴 해도 깨지지는 않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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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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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King Lear,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05, 228쪽), 1605』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한편이자 <폭풍의 언덕>, <모비 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에도 포함된다. 셰익스피어 비극물 중에서도 ‘비극의 비극’이라 불리는 이유를 고통의 체험을 그리는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은 차단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천재적인 언어 능력과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준, 당대는 물론 모든 시대의 작가다. 버나드 쇼는 그를 “저항할 수 없는” “언어 음악”으로 인정한다.(p.355,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또한 “만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라고 일컬어질 만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시함으로 셰익스피어 덕분에 인간의 다면성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셈이다. 작품은 투명하게 드러내는 거울로 등장인물들의 속내를 비추다 어느 순간 독자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리어 왕이 “숨은 뜻”을 밝히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걱정을 훌훌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기 원했던 노왕의 계획은 애초에 어긋나버린다. 리어는 사전에 발생 가능한 분쟁을 예방하고자 영토와 권력을 미리 나눈다. 이때 조건이자 기준으로 세 딸이 각자의 사랑을 스스로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오직 말로써! 고너릴과 리간의 주장에 이어 리어의 “즐거움”인 코딜리아의 차례가 오나 그녀는 “없습니다, 전하.”(p.17)라고 답한 후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p.18)라고 덧붙인다. 리어 왕은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할 딸의 태도와 답변에 당황한다. 번복할 기회를 주고 진심을 재차 확인하고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자 분노와 저주, 절연 선언으로 대면은 끝을 맺는다.

희곡의 두 번째 줄기는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 에드먼드, 에드거의 서사다. 글로스터는 형 에드거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꾸며낸 에드먼드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성급히 분노하고 에드거와 의절하고 그를 내침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진실을 보지 못했던 글로스터는 콘월에게 두 눈을 잃게 된다. 선과 악을 바로 보지 못한 대가는 그토록 그리웠던 에드거 곁에 함께였음에도 이를 알 수 없었고, 깨달았을 때의 기쁨은 이미 죽음을 담보했기에 다시 한 번 죄의 삵과 구원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본다.

상처받은 리어 왕은 스스로를 추스르며 권력을 승계한 두 딸에게로 향하나 그들이 공언했던 사랑은 빈말, 포장, 거짓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탐욕과 악만이 거침없이 흐른다. 이를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눈앞의 사실,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다. 고통에 차서 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들은 또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보다 더한 아픔은 자신이 기대한 답을 거부했던 코딜리아에게 얼마나 잔인했던가 하는 회한이다. 편안한 두 번째 인생을 꿈꿨던 리어 왕은 폭풍우 치는 황야에 맨몸으로 내던져지기까지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겪고 탈진과 혼란에 이르면서 비로소 무소유 일색인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p.99)의 형편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여전히 결말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가장 감당키 어려운 일격까지 리어 왕을 기다리니 극의 최종 판결은 자비 없는 교훈, 비극의 쓸쓸한 울림만이 공허하다. 그럼에도 『리어 왕』은 독자를 놓지 않는다. 모든 것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살았고 포기하지 않았고 고통에 맞섰고 한계에 이른 후 패했으니 오히려 고결한 승리의 모양을 띤다. 애통하는 자에게 허락된 복, 모든 언어가 소멸한 이후, 있고 없음의 차원을 넘어서는 절대 안식에 닿은 건 아닐까. 언어뿐 아니라 시간마저 초월한 지경까지 한계를 밀어붙이고 싶은 이유는 리어 왕의 예가 드물지 않을뿐더러 도처에 출몰하기 때문이다.

말의 실패, 소통의 부재, 돌이키지 못한 후회, 잠과 꿈과 지옥의 경계를 선명하게 가르지 못하는 시간들은 때때로 인간을 공격한다. 리어 왕의 노래 같은 문장, 시 같은 대사, 방백과 독백, 직언하고 비트는 말들, 지문과 표정이 인간의 아픈 시간을 견딜 만하게 해줄 것이다. 문학의 효용에 기댈 때 리어 왕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처음 만나는 듯한 삼회독에서 다시 한 번 느낀다. A. C. 브래들리는 “만일 우리가 한 작품만 빼고 그의 모든 희곡을 잃게 될 운명이라면” 하며 우리의 운명을 가정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아끼는 사람들 대다수가 『리어 왕』을 간직하고자 할 것이라 예상하는데 이에 동의한다. 『리어 왕』은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패기 있는 젊음에서 백발과 주름만 남을 노년까지, 도모하고 오해하고 그 벌을 감당한 쓸쓸한 인생 모든 순간과, 단 한 번만 살아볼 수 있는 삶의 일회성, 그 찰나의 안타까움을 아우른다. 소모되는 인물이라고는 없이 모두의 목소리로 경고하고 달래는 『리어 왕』을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꿈의 목록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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