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어 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7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최종철 옮김 / 민음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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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어 왕(King Lear,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05, 228쪽), 1605』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한편이자 <폭풍의 언덕>, <모비 딕>과 함께 영문학 3대 비극에도 포함된다. 셰익스피어 비극물 중에서도 ‘비극의 비극’이라 불리는 이유를 고통의 체험을 그리는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은 차단하는데서 확인할 수 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천재적인 언어 능력과 사회를 꿰뚫는 통찰을 보여준, 당대는 물론 모든 시대의 작가다. 버나드 쇼는 그를 “저항할 수 없는” “언어 음악”으로 인정한다.(p.355, 나는 왜 쓰는가, 조지 오웰) 또한 “만 사람의 마음을 지녔다”라고 일컬어질 만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시함으로 셰익스피어 덕분에 인간의 다면성에 조금 더 수월하게 접근할 수 있는 셈이다. 작품은 투명하게 드러내는 거울로 등장인물들의 속내를 비추다 어느 순간 독자를 향해 방향을 바꾼다.

리어 왕이 “숨은 뜻”을 밝히며 이야기는 시작된다. 걱정을 훌훌 털고 가벼운 마음으로 여생을 보내기 원했던 노왕의 계획은 애초에 어긋나버린다. 리어는 사전에 발생 가능한 분쟁을 예방하고자 영토와 권력을 미리 나눈다. 이때 조건이자 기준으로 세 딸이 각자의 사랑을 스스로 증명할 것을 요구한다. 오직 말로써! 고너릴과 리간의 주장에 이어 리어의 “즐거움”인 코딜리아의 차례가 오나 그녀는 “없습니다, 전하.”(p.17)라고 답한 후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전 전하를 도리에 따라서 사랑하고 있을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p.18)라고 덧붙인다. 리어 왕은 이해하지도 수용하지도 못할 딸의 태도와 답변에 당황한다. 번복할 기회를 주고 진심을 재차 확인하고 그럼에도 돌이키지 않자 분노와 저주, 절연 선언으로 대면은 끝을 맺는다.

희곡의 두 번째 줄기는 글로스터 백작과 두 아들 에드먼드, 에드거의 서사다. 글로스터는 형 에드거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 꾸며낸 에드먼드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성급히 분노하고 에드거와 의절하고 그를 내침으로 소통의 가능성을 차단한다. 진실을 보지 못했던 글로스터는 콘월에게 두 눈을 잃게 된다. 선과 악을 바로 보지 못한 대가는 그토록 그리웠던 에드거 곁에 함께였음에도 이를 알 수 없었고, 깨달았을 때의 기쁨은 이미 죽음을 담보했기에 다시 한 번 죄의 삵과 구원 없는 인간의 무력함을 본다.

상처받은 리어 왕은 스스로를 추스르며 권력을 승계한 두 딸에게로 향하나 그들이 공언했던 사랑은 빈말, 포장, 거짓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탐욕과 악만이 거침없이 흐른다. 이를 알아차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눈앞의 사실, 벌어지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싶다. 고통에 차서 묻는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무엇을 잘못했을까, 그들은 또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보다 더한 아픔은 자신이 기대한 답을 거부했던 코딜리아에게 얼마나 잔인했던가 하는 회한이다. 편안한 두 번째 인생을 꿈꿨던 리어 왕은 폭풍우 치는 황야에 맨몸으로 내던져지기까지 정신과 육신의 고통을 겪고 탈진과 혼란에 이르면서 비로소 무소유 일색인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p.99)의 형편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여전히 결말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가장 감당키 어려운 일격까지 리어 왕을 기다리니 극의 최종 판결은 자비 없는 교훈, 비극의 쓸쓸한 울림만이 공허하다. 그럼에도 『리어 왕』은 독자를 놓지 않는다. 모든 것을 불구하고, 그럼에도 살았고 포기하지 않았고 고통에 맞섰고 한계에 이른 후 패했으니 오히려 고결한 승리의 모양을 띤다. 애통하는 자에게 허락된 복, 모든 언어가 소멸한 이후, 있고 없음의 차원을 넘어서는 절대 안식에 닿은 건 아닐까. 언어뿐 아니라 시간마저 초월한 지경까지 한계를 밀어붙이고 싶은 이유는 리어 왕의 예가 드물지 않을뿐더러 도처에 출몰하기 때문이다.

말의 실패, 소통의 부재, 돌이키지 못한 후회, 잠과 꿈과 지옥의 경계를 선명하게 가르지 못하는 시간들은 때때로 인간을 공격한다. 리어 왕의 노래 같은 문장, 시 같은 대사, 방백과 독백, 직언하고 비트는 말들, 지문과 표정이 인간의 아픈 시간을 견딜 만하게 해줄 것이다. 문학의 효용에 기댈 때 리어 왕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처음 만나는 듯한 삼회독에서 다시 한 번 느낀다. A. C. 브래들리는 “만일 우리가 한 작품만 빼고 그의 모든 희곡을 잃게 될 운명이라면” 하며 우리의 운명을 가정한다. 그리고 셰익스피어를 아끼는 사람들 대다수가 『리어 왕』을 간직하고자 할 것이라 예상하는데 이에 동의한다. 『리어 왕』은 권력의 정점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패기 있는 젊음에서 백발과 주름만 남을 노년까지, 도모하고 오해하고 그 벌을 감당한 쓸쓸한 인생 모든 순간과, 단 한 번만 살아볼 수 있는 삶의 일회성, 그 찰나의 안타까움을 아우른다. 소모되는 인물이라고는 없이 모두의 목소리로 경고하고 달래는 『리어 왕』을 무대에서 만나볼 수 있기를 꿈의 목록에 올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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