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The Merchant of Venice, 최종철 옮김, 민음사, 2010, 162쪽), 1596』은 우정과 사랑, 복수와 자비를 노래하는 희비극으로 속도감 있는 전개와 극적 반전을 보여준다. 셰익스피어는 첫 작품 『헨리 6세』를 발표하며 명성을 얻기 시작한 이후 희극과 비극, 사극 등 여러 분야의 작품과 소네트를 집필했다. “그는 한 시대가 아니라, 모든 시대를 위해 존재했다!”는 찬사를 받았던 셰익스피어는 당대에 이미 최고의 작가로 자리한다. 그 시대의 모든 작품 목록 가운데에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것은 6분의 1에 지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거의 다 살아남았다.(셰익스피어,황광수,아르테) 그의 작품들은 쉬지 않고 영화와 연극으로 공연되며 새로운 해석과 시선을 보여주는 마르지 않는 보고(寶庫)다. 『베니스의 상인』은 셰익스피어가 극작가로서 명망을 얻기 시작하던 시기에 쓰인 극작품 가운데 하나로 배경은 르네상스 유럽의 가장 부유한 도시 베니스다.
바사니오는 아름다운 포셔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유명한 구혼자들과 경쟁해야 할 처지다. 사치하고 방탕했던 과거 행실은 청산해야 할 빚만 남겼고, 재력만 있다면 구혼에 성공할 텐데, 목전의 고민을 절친한 벗이자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에게 털어놓는다. 안토니오는 “내 지갑과 내 몸과 극한 수단까지도”(p.17) 필요하면 다 주겠다, “극단적인 무리를 해서라도”(p.19) 벨몬테의 포셔에게 갈 채비를 해주겠다며 함께 샤일록을 찾는다. 유대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은 평소 안토니오가 자신에게 가했던 폭언과 모욕적 행위를 열거한 후 그럼에도 요청을 들어주겠다고 한다. 단, 되갚는 계약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유쾌한 장난 삼아” 안토니오의 “고운 살 정량 일 파운드”(p.32)를 취하겠다는 조건을 단다. 평소 눈엣가시였던 안토니오에게 사적 복수의 기회를 갖게 되니 그로써는 내심 흡족하다.
포셔는 남편 선택을 위해 아버지의 유언대로 금, 은, 납, 세 가지 궤로 제비뽑기를 행한다. 구혼자들은 각각에 의미를 부여하며 신중히 고르나 결과에 실망하고 분노를 표하기도 한다. 포셔는 “잘못하고, 평가하는 두 일은 별개이며 그 본질은 서로 어긋난답니다.”(p.64)라는 말처럼 매번 유연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뿐 아니라 드러나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내면을 통찰한다. 바사니오는 겉과 속의 다름, 꾸밈이 내포하는 거짓된 진실을 깨닫고 이로써 결혼의 증표인 반지를 받는다. 하지만 안토니오의 배들은 사고를 당하고 빚을 갚지 못하게 된 그는 감옥에 갇힌다. 재판이 시작되고 증서대로 안토니오의 살덩이 일 파운드를 원한다는 샤일록과 법학 박사로 변장한 포셔의 법정 장면은 희곡의 절정을 이룬다.
안토니오의 헌신적 우정은 말로 확증하고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바사니오는 벗의 우정을 힘입어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지혜로운 여성의 전형인 포셔는 모든 것을 겸비했다. 아름다운 만능 해결사라고 할까. 진지를 구축하고 방어선을 치는 탁월한 전략가다. 하지만 무엇보다 훗날 <오셀로>의 이아고로 발전해가는, 셰익스피어의 빼어난 캐릭터 샤일록이 있다. 돈밖에 모르고 증오를 키운 채 복수에 여념 없는 악마적 이미지는 “육천 다카트의 한 개 한 개 다카트가 여섯으로 갈라져서 다카트로 다 변해도 그 돈을 안 받고 계약대로 할 거요!”(p.101)라는 선언에서도 두드러진다. 동시에 반유대주의라는 강압에 희생당하는 타자이자 외부인이라는 (법정에서 포셔는 이름이 아니라 ‘유대인’이라고 재차 호명한다.) 이중의 얼굴을 지닌다.
재기 넘치는 사랑의 테마와 결코 유쾌하지 않은 인육계약, 그로인한 재판은 극을 이끄는 두 개의 동력이다. 어떤 형태로든 작품과 재회할 때 독자는 인물과 서사의 이면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말 운문 형식으로 옮겨진 『베니스의 상인』은 읽을수록 감정이 이입되고 무대가 그려진다. 다양한 비유와 신화 인용, 위트와 유머도 풍성하다. <햄릿>, <리어 왕>과 비교했을 때 ‘무’의 함의나 ‘자비’, ‘정의’를 숙고하게 한다. 인물들이 던지는 상징적인 명대사들은 발화하는 씨앗처럼 움직이고 독자를 초청하고 개입시킨다. 눈으로 읽고, 목소리로 낭독하고, 고요히 묵상하고, 기록하게끔 하는 『베니스의 상인』을 다시 만나 봐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