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미국인
그레이엄 그린 지음, 안정효 옮김 / 민음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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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그레이엄 그린은 1904년 영국 허트퍼드셔의 버크햄스테드 기숙학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이 이곳에서 사감으로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섯 자녀 중 넷째로, 남동생 휴는 BBC의 사장이 되었고, 위의 형인 레이몬드는 저명한 의사이자 산악가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부친인 찰스 헨리 그린과 모친인 메리언 레이먼드 그린은 사촌 지간으로, 그린 킹 양조장 소유주 및 은행가, 정치가를 아우르는 유서 깊은 가문의 일원이기도 했습니다. 어린 시절 그린은 캠브리지셔에 있는 삼촌 그레이엄 그린 경의 스턴 하우스에서 보내게 되는데, 바로 이곳에서 그는 독서에 대한 흥미와 본격적으로 책을 읽는 법을 터득하게 됩니다. 1910년 부친인 찰스 그린이 버크헴스테드 기숙 학교의 교장이 되자, 그레이엄 그린 역시, 이곳의 학생으로 수학하게 되는데요. 그의 기숙 학교 생활은 최악에 가까워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역사를 공부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의 발리올 칼리지에 입학하게 되는데요. 학부생 시절 그의 첫 시집이 출간되었지만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합니다. 이 시기의 그린은 주기적으로 우울증을 겪었고 대체로 혼자 지내는 고독한 생활을 보내게 됩니다. 그는 공부를 마치고 잠시 저널리즘에 관심을 갖다가 1929년 첫번째 소설인 '내면의 남자 The Man Within'를 출간합니다. 이 작품이 비교적 호평을 받으면서 그는 작가로서의 자신감을 얻게 되는데요. 이후 그를 대표하는 문학적 성격인,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내면의 갈들이 상충하는 주제들과 그것을 바탕으로 그려내는 시대적 자화상, 특히 냉전과 이데올로기 갈등에 대한 문제"를 써 나가는 데 탁월한 성과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작품 활동을 기반으로 그린은 1961년 노벨 문학상 최종 후보 3인중 한명이었으며,1967년에도 동일한 기준에 올랐고, 1974년과 1980년에도 후보에 고려되었으나 끝내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그는 1991년에 세상을 떠났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20세기 가운데 주요한 소설가들 중 한 명으로 꼽혔고, 25편이 넘는 소설을 포함해, 도합 67년간의 집필은 현대 세계의 인간들이 보여온 도덕적이고 정치적인 문제들을 특유의 해학과 냉소를 바탕으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가운데, '권력과 영광'은 1941년에 영국,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작가에게 매년 수여되는 문학상인, 호손든 상을 수상했고, 다른 작품인 '사건의 핵심'은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그리는 1968년에는 셰익스피어 상을, 1981년에는 예루살렘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The Quiet American"으로 지난 1955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의 바탕이 된 본은 2004년에 출판된 제이드 스미스 판본입니다. 이에 국내 번역은 2023년 4월에 이뤄졌고, 번역은 안정효 선생이 맡았습니다.

극 중에 몇 번이나 '한국 전쟁'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 이후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더 엄밀히 말하자면, 베트남 독립 전쟁의 시발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극 전체를 관통하는 역사적 배경으로 읽혔습니다. 극의 주요 화자이자 주인공인 토머스 파울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 대한 야욕, 즉 철지난 제국주의의 허상을 부여잡은 프랑스의 식민지, 베트남에 파견된 종군 기자입니다. 그는 영국 런던 출신으로 지난 대전에서 간신히 국체를 지킨 프랑스 공화국의 현실을 이 베트남에서 여실히 목도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는데요. 그는 당시 유럽 지식인들에게 큰 화두였던, '사회참여적 지식인 담론'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자신의 마음 내부에는 현실에 대한 회의주의적 시각과 그리고 삶과 스스로의 모습을 무척이나 냉소하는 본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것은 보수적인 영국 사회에서 '결혼의 실패'라는 문제와 그 귀책의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었는데요. 소위 '자유 연애'라는 말이 이 작품에서 여러 사람의 입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그럼에도 그 자유 연애 이면에는 도덕적 비난이 함께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본국과는 멀리 떨어진 베트남에 파견을 나온 상황에서도 그는 '후엉'이라는 미모의 베트남 여성과 동거중이기도 했습니다. 식민지 시기를 살던 베트남 여성들은 무엇보다 누군가의 보호가 필요했는데, 그녀를 만난 초기에 파울러는 이것을 고민합니다. 과연 그녀가 원해서 자신의 곁에 있는지를 말이죠. 이 때의 베트남은 프랑스 군대와 베트남 토호 군벌, 그리고 반군 등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라는 것이 거의 전무했기에, 수많은 민간인들은 스스로의 안위를 어디에서든 보장받을 수 없던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후엉과 같은 베트남 여성은 이 혼란스런 시기에 무엇보다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안전할 수 있는 '보장'이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요. 여기에 경제적 보장이 불확실하고 또한 정치적 불안기였기에 프랑스 식민 정부와 그 군대의 존재는 베트남인들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들 주변을 맴도는 유럽인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이죠.


극을 이끄는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한, 올든 파일은 명목상 미국 영사관에서 베트남 지원과 상무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관료입니다. 그렇지만 그의 정체는 CIA 요원입니다. 그는 저명한 서구 지식인들 가운데 동아시아에 깊은 이해와 통찰을 갖고 있던, 극 중에서 허구적 인물인 '요크 하딩'의 추종자이기도 했는데요. 파일은 여기에서 드러나고 있는 프랑스의 패착이 바로 이 지역과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인식하고, 이런 정치적 혼란이 결국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그 시대 여타 지식인들의 공통된 시각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파일은 특유의 이상주의적이면서 사람들에 대한 사려 깊은 면모, 매사를 신중하게 말하는 언행을 보이는 등, 그레이엄 그린이 이 미국인이라는 캐릭터에 들인 노력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일전에 일독한 매큐언의 '이노센트'에서 보였던 영국인 특유의 미국인들에 대한 서사는 그린의 이 작품에서도 분명히 접할 수 있었는데요. 당신들 유럽인들과 우리 미국인들은 다르다는 차별화된 인식과 자신들이 전세계를 위해 분명 일을 할 수 있다는 일련의 자신감 등이었습니다. 그렇게 파일이 프랑스와 같은 구대륙 국가들이 보이는 철지난 인식과 보수주의적 관념을 비판하듯, 마찬가지로 여기에 등장하는 프랑스인들과 앞선 파울러 역시, '아메리카', '아메리칸'이라는 극명한 단어로 이들에 대한 이질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파일을 가리키는 '조용한'이라는 수식어는 이례적으로 이 작품에서 5번 이상이나 등장하는데요. 이는 미국인들이 스스로 조심하고 때론 겸허한 태도를 보이지만 결국에는 어떤 꿍꿍이를 숨기고 있다는 확신이 느껴지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한발 물러선 채로 객관적인 듯 아니면 중립적인 듯 말하지만 뒤로는 무언가를 획책하고 있다는 식의 서사들 말입니다. 이는 "말을 잘 꾸며내는 미국인들을 쉬이 믿지 말라"는 금언이 생각날 정도라고 해야 할까요.

이미 작고한 그린이 쉽게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이 작품에서 파일이 벌이는 그 '수작'을 보자마자, '통킹만 사건'이 바로 뇌리에서 떠올랐습니다. 역사적 배경으로 보자면 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결과는 프랑스가 최종적으로 베트남에서 발을 빼게 됩니다. 이는 베트남 내부의 권력 공진을 꺼낼 필요도 없이, 그 이전 시기의 베트남은 파울러의 말마따나, "봉건시대'와 다름 없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돈에 따라 베티밍(혹은 베트민)과 정부군에 오가는 '테'장군의 존재나 카톨릭과 여러 종교를 뒤섞어 만든 토착 종교의 소위 교황이라는 자 역시, 정치적 술수를 부리고 심지어 사적인 군대를 보유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미 파울러와 같은 종군 기자들은 베트남에서 거대한 내전이 벌어질 것임을 예측하고 있었고, 이러한 정치적 혼란 가운데서 '제3의 세력'을 만들고자 한 파일의 계획(아니면 미국의 작전)은 그저 민간인의 희생만 초래하게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미국이 파트너를 고르는 능력은 극히 평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이 이미 잘 알고 있고, 혼란의 원인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거의 확신하는, 이상주의자의 순진하고 나약한 '정의'는 결국 이 베트남에선 전혀 통하지가 않았습니다. 이런 파일의 인물상은 작가 자신이 명백하게 의도한 인물 조성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 시대의 역설은 바로 이런 인간들을 낳는다는 오래된 옛 이야기들을 저절로 떠올리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처칠의 제2의 대영제국 건설이 사실상 루스벨트에 의해 거부됨으로써, 영국은 종래의 식민지 운영이라는 모험을 하기가 더 곤란해 집니다. 프랑스 4공화국 역시 그런 상황에 놓여 있었는데요. 곧 이어지는 수에즈 침공 사건으로 말미암아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깨닫게 됩니다. 더불어 그레이엄 그린은 여기에 '민주주의'와 '자유'를 수차례 등장시키며 베트남인들에게 왜 저런 구호가 하등 쓸모가 없었는지, 바로 이어지는 서사와 프랑스 식민지 군과 베트남 반군과의 전투를 통해 여실히 폭로하고 있었는데요. 더욱이 그동안 미국이 이 민주주의라는 대의명제를 들어, 타국에 사실상 개입해 왔던 역사를 고려해 본다면, 민주주의를 명분으로 내세우는 (국내법 조차 어기는) 불법적 행위가 얼마나 인위적이고 명분이 없는 일인지 다시 한번 이 작품을 보며,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린이 폭로하는 동양에 대한 서양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가까운 편견과 그것을 내면화 해 느끼는 우월감은 결국 베트남인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삶과 역사, 종교, 문화를 통틀어) 전형적인 식민지주의적 폭력성을 표출하게 됩니다. 어느 민족과 국가를 미개하다고 인식하는 점은 그 저변에, 이 지역 전체를 관리하고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 자체가 그저 최선의 길이며, 이들의 삶에 자신들이 개입할 수 없다는 식민지 경영의 참모습과 같은 유럽인들의 이중성을 그린은 여실히 독자들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뒤에 나오는 역자의 후기에서 당시 베트남 여성들의 기구한 운명을 단편적으로 엿볼 수가 있었는데요. 저 역시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후엉과 하이 자매의 거의 매매혼과 다를바 없는 모습에 작가 자신의 몰이해에 가까운 극단적인 서사가 아닌가 싶었지만, "아무도 민간인들을 보호해주지 않는다"는 설명에 이르러 어느 정도 그 근거를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더욱이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직간접적으로 놓인, 어쩌면 성 노리개로 불러야 될 정도로 이들이 처한 상황이 실로 녹록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또한 북베트남인들과 남베트남인들이 기질이 다르다는 점도 이 작품을 통해 접할 수 있었는데요. 특히 저는 "베트남이 무너지면 태국과 인도네시아도 위태롭다"는 극중 서사에 얼마간 집중해 보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 냉전이 과연 무엇이었느냐에 대해서 말이죠. 아마도 그런 연유로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나서게 된 것이겠지만 "중국인들이 베트남 반군을 돕고 있다"는 묘사도 그렇거니와,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이데올로기적 갈등과 대립은 단순히 문맥상에만 이해될 평범한 일만은 아님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념적 대립 한 가운데 놓인 민족의 안위는 물론, 이들의 일상의 삶조차, 정말로 위태로운 지경에 놓일 수밖에 없구나'하는 생각을 글 말미에 다시금 고민하게 되는데요. 극 중에서 빵 한 조각을 미처 먹지 못하고 죽은 소년의 시체를 적은 문장을 더듬어보니, 전쟁의 원인은 결국 누군가의 탐욕으로 발생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민주주의는 그가 단골로 삼는 또 다른 주제였는데 - 아메리카 합중국이 세계를 위해 하는 일에 대하여 그가 일갈하는 확고한 관점들은 정말로 사람을 짜증 나게 했다.

그보다 살해되기 전에 적어도 쉰 명의 목숨을 앗아간 장본인이었던 그의 진짜 활동 배경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저질러 온 일들에 대하여 사실대로 자세히 알렸다가는 영국과 미국의 외교 관계가 크게 틀어질 터이므로 공사로서는 매우 언짢아할 일이었다.

나는 갑자기 화가 났고, 단골 코카콜라 가게와 휴대용 의료 장비와 지나치게 큼지막한 자동차와 별로 신식이 아닌 총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 아메리카 패거리 모두에 대하여 짜증이 치밀었다.

베트남은 중세 유럽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족들의 반란이 준동하는 나라였다.

이 전쟁에서 유럽인의 얼굴이란 일종의 혜택이었으므로, 일단 유럽인이라면 적의 첩자이리라고 의심 받지 않았다.

아이의 시체 밑으로 한입 물어뜯었지만 미처 먹지 못한 빵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했다. ‘난 전쟁이 정말 싫어.‘

그러면 파리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프랑스인들은 아메리카를 대신하여 피를 흘리지만 아메리카는 중고품 헬리콥터조차 보내주지 않는다.‘라고 떠들어 대겠고요.

그 질문은 민주주의와 명예에 대한 개념을 영국과는 다른 시각에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이 물려받는 미국인들의 대단히 단순한 심리 세계에나 어울리는 명제였다.

독일군 공습이 벌써 증명한 바이기는 하지만 사람이란 항상 겁에 질린 상태로 살아갈 순 없으므로 일상적인 직장 생활과 우연한 만남과 막연한 불안감이 폭격처럼 이어지는 와중에도 누구나 개인적인 두려움을 잠깐 잊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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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푸른빛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조르주 바타유 지음, 이재형 옮김 / 비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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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바타유는 1897년 9월, 프랑스 오베르뉴 지방의 빌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조제프-아리스티드 바타유로 그 지역의 세금 징수원이었고, 모친은 앙투네트-아글라 투르나르드로 비교적 평범한 여성이었습니다. 1898년이 되던 해에 그의 가족은 랭스로 이사하고 그곳의 유서 깊은 랭스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습니다. 부모님이 행한 세례에도 불구하고 그는 특별한 종교적 자각 없이 유년 시절을 보내게 되는데요. 하지만 1914년부터 약 9년 동안 누구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가 됩니다. 이때 바타유는 잠시 사제가 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고, 실제로 가톨릭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이후 바타유는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École Nationale des Chartes PSL를 다니기 시작해, 1922년 2월 학업을 마치게 됩니다. 이때에 바타유는 러시아 실존주의자인 레프 셰스토프와 교류를 시작했고 동시에 학문적으로는 니체, 도스트예프스키, 플라톤에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학업을 마친 그는, 여러 저널과 문학 그룹 창립에 관여하고 경제, 시, 철학, 예술, 에로티시즘 등 여러 분야를 넘나들며 동시대인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비록 장 폴 사르트르는 그를 신비주의 옹호자로 비웃기도 했지만 미셸 푸코, 필립 솔레르, 자크 데리다와 같은 지식인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작품은 원제, "Le Bleu du ciel "로 초고는 1935년에 완성했지만, 프랑스 내 출간은 1957년되어서야 시도됩니다. 또한 국내 번역은 2017년 3월에 이뤄졌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앙리 트로프만은 어느 정도는 작가인 조르주 바타유의 젊은 시절을 투영한 캐릭터입니다. 그렇지만 극에서는 상당히 자기파괴적인 인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실제 조르주 바타유가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해, 부르주아 계층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면 여기의 트로프만은 비정기적으로 글을 쓰는 등, 지식인의 터울을 두르고 있긴 하지만 세상에는 아예 담을 쌓고 사는 인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트로프만은 화류계 여성이나 평범한 여성을 가릴 것 없이, 여자들을 희롱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나락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가 걸핏하면 내뱉는 '죽음'이라는 단어, 자신이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심각한 자기 비하에 빠지는 점도 어떻게 보면 극단적인 인물 조성을 통해, 마치 시대적 허무를 냉소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스페인으로부터 카탈루냐가 독립을 시도하는 1934년 10월, 그 즈음으로 여겨지는데요. 다만 소설의 극적인 요소를 위해, 바타유는 나치 독일의 시기를 후반부에 앞당겨 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소설의 분위기는 매우 음울하고 어두운 편이며, 여주인공인 도로테아(약칭으로서 디르티)가 유럽에서의 전쟁 분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작품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물이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물론 수위 높은 성적 묘사와 앙리와 디르티 간의 아주 노골적인 섹스신은 어떻게 보면 에로티시즘 자체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일관된 절망적인 서사 가운데, 시대를 개인의 타락과 대비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습니다.

극중에서 칼 마르크스가 투영된 소년이 몇몇 장면에서 의미심장한 의미로 등장하고 다른 여주인공인 라자르가 프랑스인임에도 불구하고 카탈루냐에서 혁명의 투사로 그 본신이 드러나는 것을 보면, 트로프만으로 규정되는 개인의 타락과 시대와 철저히 괴리된 인물상은, 아마도 조르주 바타유 본인이 실제로 겪은 시대적 절망과도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기에 디르티는 트로프만으로 하여금 '순수함 속의 방탕함'을 드러내는 인물로 끊임없이 과도한 욕망에 몸을 맡기며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가는 인물입니다. 이런 그녀와 트로프만은 끊어지지 않는 서로 간의 유대로 연결되어 있고 특히 디르티는 트로프만의 불확실한 내면을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습니다. 시대가 평범한 사람들을 분절시키는 그러한 '악'의 가운데, 그야말로 내쳐진 인물의 자포자기함과 극도의 자기파괴적 행동은 작품을 읽는 내내 제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공교롭게도 그를 둘러싼 또 다른 두 여인이 등장하는데요. 앞서 진술했듯이, 라자르는 공산주의와 혁명에 전도된 여성으로 인종적으로는 유대인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혁명을 부르짖는 자들은 전부 유대인들'이라는 전형적인 인종적 요소가 마찬가지로 '혁명을 이해하는 한계'로 대치시는 것으로도 읽힙니다. 특히 트로프만이 라자르를 향해, 그녀야말로 '프랑스 대혁명'을 직접 이해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문 삶의 지향을 반증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럼에도 트로프만은 그런 라자르를 향해, 육체적으로 끌리는 매력이 없는 여성으로 묘사되고 있었는데요. 그런 연유로 그는 오늘날 애정이 전혀 없는 남녀간에 나눌 수 없는 진실한 고백들을 라자르에게 만큼은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내 자신이 라자를 사랑하게 될까봐 두렵다"고 언급하기도 하는데요. 이것이 서사 속의 의도된 진술이라 할지라도 이 두 사람의 관계 역시, 디르티와의 그것 만큼이나 트로프만에게는 중요한 의미가 되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라자르와는 다른 의미로 트로프만에게 중요한 여인이 된, 크세니는 가진 돈이 많은 상당히 부유한 여성이지만 따로 하는 일이 없이 바깥을 전전하는 여성입니다. 특히 여기 크세니는 작가인 바타유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는 '희생제의'라는 측면에서 자기 희생과 헌신적 사랑을 표징하는 인물입니다. 트로프만이 특유의 비틀림과 자기 혐오로 일관해, 보통 평범한 여자들이라면 분명 질색할 남자지만, 아마도 여성 특유의 모성애와 아픈 그를 병간호하고 싶은 선한 의도와 일관된 애정을 견지하는 캐릭터입니다. 더욱이 직접 그를 만나기 위해 혁명의 기운이 오를대로 오른 바르셀로나로 찾아와, 개인적 비극을 겪게 되는데요. 결국 서사의 분명한 전환이 되는 그녀의 희생을 통해, 디르티와 트로프만은 재차 연결된,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에게 있어 무엇보다 누군가가 필요할 때, 디르티와 트로프만은 그 짧은 시간동안 서로만을 향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바타유의 이 작품에는 노골적인 성애 묘사와 여성의 성적 부위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단어들이 등장합니다. 다만, 이러한 구조적 요소는 극단적인 두 남녀의 파괴적 행위에 반하는 내면의 자기 연민과 처연함을 드러내는 쓰임을 갖고 있어, 단순히 노골적인 에로티시즘의 전형으로 국한지어 여길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전반적으로 사회 부조리와 악에 대한 트로프만의 자기 혐오적 이해와 그런 시대의 혁명과 계급 투쟁이 결국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어떠한 도움도 되지 못했다는 작가의 자기 고백과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했습니다. 절정을 치닫는 디르티와 트로프만의 무덤에서의 섹스 장면은 죽음과 새로운 삶이라는 서로 대비되는 요소를 드러내는 것 이상의 엄청난 충격이기도 했는데요. (트로프만의 충격적인 성적 취향은 서사의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되니 여기서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물론 크세니를 통해 '아방가르드'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프랑스 아방가르드 문학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어느 정도 이 작품을 통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설명해줘야 할 것 같군요." 나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눈물이 뺨 위를 지나 입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내가 런던에서 디르티와 함께 저질렀던 온갖 추잡한 짓을 최대한 노골적으로 라자르에게 설명했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라자르처럼 추하게 생긴 처녀들을 비웃고 경멸했다.

"그래요 방탕함이 그것으로 먹고사는 창녀들을 타락시킨다고 생각하면서, 어떻게 그 방탕함 때문에 그 여자를 고귀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지,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일어날지도 모르는 전쟁과, 죽음과 관련되는 것을 혐오한다던 라자르를 결합시켜줄 만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너무 부자라서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처녀일 뿐이었다. 크세니의 접시 앞에는 그녀가 늘 들고 다니는 녹색 표지의 아방가르드 잡지가 놓여 있었다.

나는 그녀가 미처 말릴 겨를도 없이 서둘러 그녀의 넓적다리에 입을 갖다대고는 흐르는 피를 빨았다.

난 역겹지는 않지만 파멸한 인간이었다. 원했던 대로 지금 당장 죽어버리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신열과 극도의 두려움에 지쳐서 그녀에게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었다. 사실 나 자신도 뭐가 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쓰레기였고, 내 자신의 악의에 운명의 악의가 덧씌워져 있었다. 언제나 불행을 내 머리 위로 불러들였고, 이제 여기서 죽어가고 있었다. 외로웠고 비겁했다.

나는 앓는 내내 그녀를 그럭저럭 참아냈지만, 여자와 육체관계를 맺는 일이라면 별로 사랑하지 않는 여자 쪽이 더 견딜 만하다. 매춘부들과 잠을 자는 데는 진저리가 나 있었다.

그녀는 소름 끼치는 여자이지만, 프랑스대혁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스페인 노동자들 역시 대혁명을 이해하고 있다고.

결국 라자르와 관계를 맺고 있던 카탈로니아 무정부주의자들은 자기들끼리 뭉쳤지만 아무 성과도 얻지 못했다.

파리에서는 내가 사태의 핵심에 위치해 있었는데 바르셀로나에서는 사태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투를 벗어버리고 내 품에 안긴 디르티는 나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의 붉은색을 연상시키는 진홍색 실크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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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883년 6월, 영국 케임브리지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존 네빌 케인스는 경제학자이자 케임브리지 대학의 인문 과학 강사였고, 모친인 플로렌스 에이다 케인스는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진보적 사회 개혁가였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그의 부모는 메우 사려깊고 세심했으며, 케인스 본인은 아버지로부터 상당한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했는데요. 더구나 그가 이튼에서, 장학금 프로그램에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전문적인 코칭 프로그램의 지원도 부친이 도맡아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려서부터 그는 수학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면서, 1897년 케인스는 영국 버크셔 주의 이튼에 소재한 13세에서 18세 사이의 남학생들을 위한 수준 높은 기숙 교육을 제공하는 이튼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고 수학하게 됩니다. 그는 이 시기에 수학, 고전, 역사 등 다양한 분양에서 특별한 재능을 드러냅니다. 또한, 1901년에 그는 수학 부문에서 톰라인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02년이 되자, 케인스는 좀 더 수준높은 수학을 공부하기 위해 케임브리지 대학의 킹스 칼리지로 진학합니다. 물론 이곳에서도 장학금을 받게 되었는데요. 당대 가장 영향력있던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셜이 그에게 강력하게 경제학자가 되라고 조언하지만, 반대로 그는 조지 에드워드 무어의 윤리 체계를 포함한 철학에 끌리게 됩니다. 이후 학업을 마치고 케인스는 1906년, 런던에 소재한, 인도 행정을 총괄하는 인도 사무소의 공무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같은 시기에 알프레드 마샬과 아서 세실 피구가 개인적으로 지원한 경제학 강사를 역임하면서 '확률론'을 연구하게 됩니다. 더불어 그는 1909년에 더 이코노믹 저널에서 세계 경제 침체가 인도에 미친 영향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기사를 발표하고, 이곳의 산하에 '정치경제 클럽'도 설립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연유로 1911년 케인스는 더 이코노믹 저널의 편집자가 되고, 1913년에는 자신의 첫번째 논저인, "인도 통화와 금융"을 출간하게 됩니다. 이후 요동 치는 유럽 정세속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15년 1월에, 영국 재무부에서 공식적인 정부 직책을 맡습니다. 1919년이 되자 비로소 대전이 종식되고 이어지는 전후 처리와 관련된 영국 재무부 재정 대표로 케인스는 임명되는데요. 바로 그의 이 논저는 베르사유 평화 회의와 연합국에 대한 독일의 전쟁배상금과 관련된 글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Economic Consesquences of the Peace"로 지난 1919년에 출간되었고, 번역을 위해 쓰인 판본은, 1973의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부본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이 번역본의 출판은 2024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서두에서 혹여 글이 장황해질 수 있어, 케인스의 1920년 이후의 이력은 따로 적지는 않았습니다. 그동안 여러 평론과 해당되는 비평에 따라, 케인스의 이 글은 꽤 많은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특히 제가 개인적으로 크게 인상받은 부분은 케인스를 향해, "당신 노골적인 친독파 행세를 하는거냐"라는 거의 인신공격과 다름 없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이 베르사유 평화 회의의 결과로 나온, 독일의 징벌적 전쟁 책임은 사실상 카이저의 퇴임과 시작된, 독일 민주주의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소멸을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저 오스트리아인에 불과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유화적으로 말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일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워, 대다수 국민의 증오를 정치적으로 부채질한, 그리고 인류 역사상 최악의 대전을 다시 한번 답습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베르사유 회의가 비이성적인 측면으로 치달은 원인을 꼽는다면, 조르주 뱅자맹 클레망소의 독일 제국을 향한 프랑스인을 대표하게 되는 그 증오와 혐오의 감정, 그리고 계속 파행으로 치닫는 상황에서 중간자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우물 안의 이상주의자'였던 미 연방 대통령인 우드로 윌슨의 정치적 무능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1870년 보불 전쟁 이후, 프랑스인들의 마음 속에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던, 베르사유 궁전에서 카이저와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독일 제국의 선포는 이 시점의 클레망소에게 독일을 짓밟는 매우 중요한 명분이 되었을 겁니다. 물론 연합국의 한 축으로서의 프랑스의 지위, 특히 군사적으로 역할을 한 국가의 총리라는 인물을 중재하지 못한 것은 유럽의 권력의 역학 관계를 고려해 본다면 전후 처리가 모두에게 패착이 되었던 점은 분명합니다. 이를 과거 역사에서 도출해 본다면 이런 평화는 결국, 케인스의 말마따나 "카르타고식 평화'라는 수식 자체는 크게 지나치지 않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에 와서 우드로 윌슨으로 대표되는 고결한 학식이라든지 종교적 신념 혹은 원초적 국제주의에 대한 그의 아이디어를 터무니 없는 이상주의의 원천으로 몰아갈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유럽의 막대한 채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미 연방 대통령이라는 신분이라면 본인이 그리는 유럽의 미래가 미국에 경제적으로 종속되는 유럽(특히 서유럽)이 전후 복구 과정에서 국가적 이익을 따질 계재는 분명 필요했을 겁니다. 이것을 현실적인 측면이라고 본다면 윌슨이 주창했던 민족자결주의는 그야말로 현실과 이상, 어느 지점에 있는지 우리는 좀 더 명확하게 판단해야만 합니다. 물론 주요 강대국의 이러한 이상주의적인 수사가 매번 이성적이지는 않겠지만 특히 윌슨의 그 우유부단한 본성 자체로 말미암아, 실질적인 유럽 평화에 별반 도움이 되지 않았던 점은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통치할 수 없는 다른 여타 민족들에 대한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관점을 주장한 인물이 도덕을 부르짖지만 스스로의 웅변에 빠져, 현실을 도외시하는 태도로 일관한 것은 엘리트 정치인의 전형적인 무능으로만 평가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베르사유 회의로 도출된, 소위 14개조 조항은 일반적인 맥락에서 '전쟁 방지'를 추인하고 있습니다만 명시적으로 알자스-로렌 지역과 관련한 1871년에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가한 잘못을 바로잡는 것과 육상, 해상, 공중에서 연합국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가해진 모든 피해에 대해 배상을 요구하는 연합국의 '추가 주장'이 반드시 더해져야 한다는 조항 문구 등은 논란의 여지를 남겨 놓습니다. 이와는 별개로 폴란드의 독립이 공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프랑스와 폴란드가 왜 동맹 관계(물론 서류상의 동맹이지만)에 이르렀는지, 어느 정도 그 배경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과거 나폴레옹 전쟁 당시, 곳곳에 넘치는 혁명의 기운이 폴란드인들에게 자신들의 독립이라는 목표에 다가설 수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역사적 변혁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프랑스와 폴란드의 연대, 그리고 이들의 동맹이 추후에 자신들에게 어떠한 여파를 끼치게 될지 고민한 영국인들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조항은 그저 허망한 정치적 결과로 남은 국제 연맹 창설의 의의였습니다.


케인스가 이 글 4장에서, 전면적으로 논하고 있듯, 독일은 과거 농업 생산국이었으나 나중에는 영국을 위협할 정도로 2차 산업국으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여기에는 루르 지역, 고지 실레시아, 자르 분지의 풍부한 탄전을 기술적으로 훌륭하게 개발하여, 놀라운 산업적 성취를 얻은 것인데요. 조약에 따라 앞서 언급된 루르 탄전이 15년 간의 국제연맹의 관리 끝에, 프랑스에 완전히 할양된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유럽은 석탄과 철광이 기반이 된 산업이 국가 경제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독일 역시, 탄광을 통해 비약적으로 산업 개발을 달성한 후발국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석탄은 국민들의 난방과 취사를 위해 필수적인 자원으로 케인스는 무엇보다 '독일의 내부 수요'에 대해 주목합니다. 이는 독일 국내의 석탄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연합국 배상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그가 밝히는 주요 논점은, 앞서 대전에서 독일이 끼친 연합국의 민간인 재산 피해에 대해 이것을 연합국이 피해 배상에 나선다면, 이미 경제적 붕괴에 이른 독일 경제가 끝내는 독일인들의 사유 재산을 통해 이를 갚을 수밖에 없다고 피력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사유 재산을 중요하게 여기는 자유주의적 연원을 갖고 있는 서유럽을 떠올려 본다면, 이는 어불성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게 일반적인 정의의 입장에서 독일인들에게 합당한 것이냐는 점을 되물어 보게 됩니다. 

이러한 독일을 향한 모호한 전쟁 배상 책임은 '독일과 그 동맹국'의 공격이라는 문법을 내세워, "오스만 제국이 수에즈 운하에 입힌 피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잠수함이 아드리아해에서 입힌 피해와 관련해 과연 독일이 배상 책임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고 케인스는 이렇듯 주장합니다. 결국 그는 이런 요망한 전쟁 배상 책임이 "독일이 그 지급 능력의 한계에 이를 수밖에 없고 이 청구 총액에 대한 과학적이고 정확한 추산의 기초가 될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프랑스의 의도대로 이 사악한 독일이 후에 더이상 날뛰지 못하도록 이참에 아예 이들을 회생불능의 상황으로 내몰아야 한다는 숨은 정치적 의도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물론 법학자들이나 관료들에 의해, 국가가 전쟁을 통해 감당해야 될 '배상'이 국민들에게 어떠한 식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와 그렇다면 국민들 모두가 이 배상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는가에 대한 법적, 정치적 책임의 한계를 명시할 어떠한 이유가 있는지 거의 무지와 가까운 관점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일반 독일 국민들에 대한 인간적 동정을 윌슨 뿐만 아니라, 여기에 참여한 다른 정치인들도 갖고 있었겠지만 결국 그것은 그저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케인스는 여실히 밝히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소극적인 정치적 접근은 당시 로이드 조지 총리가 선거를 앞두고 있는 혼란스런 상황이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케인스는 로이드 조지 총리가 자신의 정치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저 무능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지적하고 있었는데요. 전쟁 배상과 조약 협약에 따른 영국 국내의 정치적 상황에도 그 여론과 다음 권력을 위해, 다시금 표를 얻어아먄 하는 결단 사이에서 로이드 조지 역시, 무능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 케인스가 당시 영국의 국내 상황이 어느 정도는 '총리가 자초한 문제'라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측면을 차치하더라도 독일로부터 전쟁의 전반적 비용을 확보하겠다는 선거 공약은 역사상 영국의 정치인들에게 귀책사유가 있는 가장 심각하고 무모한 정치적 행동 중 하나"라고 케인스는 비판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영국 수상은 이러한 국내외적 기대감과 이를 조정하는 정치적 무능에 빠져, 독일과 체결할 조약에 불공정하고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경제적 근거를 내세우고, 윌슨 대통령과도 의견을 일치시키지 못한 당시 엘리트 정치권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관되게 독일의 배상금 지급의 불가능성을 강조한 케인스는 현재의 붕괴된 독일 경제와 산업 기반 시설이 실질적으로 회복되기가 어려운 정치적 환경, 이런 상황에서 독일 국민의 사유 재산까지 쥐어짜내야 하는 문제에, "독일은행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경우 독일 마르크화는 평가절하될 것이고, 이 평가절하는 독일의 미래 배상 전망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정도로 독일의 신용을 악화시킬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특히 독일 마르크화가 적정 수준 이하로 평가 절하된다면 그 자체로 유럽 경제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는 독일 경제를 회생불능으로 만드는게 미국과 서유럽에 결코 이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추정되는 독일이 갚아야 할 배상금이 50억 파운드로 일부 제시되기도 하지만, 케인스는 이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본 결과, 연합국 측이 독일에 요구할 배상금이 실제적으로는 80억 파운드가 초과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합니다. 이것은 독일이라는 국가의 경제 붕괴를 자의반 타의반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는 수치이기도 했습니다.

19세기 후반 이후, 유럽은 이전과는 다른 산업 발전의 규모로 시민들에게 있어 삶의 풍요로움이 증대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영국을 포함한 유럽 각국이 미래에 대한 낭만주의적 사고가 점차 대세가 되기도 합니다. 인류의 이런 진보가 서로간에 더이상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긍정론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는 생산 수단의 발전과 그로 인한 소비의 증대, 시장의 발전은 이러한 경제적 관계를 통해, 평화를 촉진시킨다는 경제학자들의 완고한 아이디어와도 꽤 맞닿아 있는것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요. 이런 상황에서 참혹한 대전은 많은 사람들의 순진함을 깨뜨렸고 전후 유럽인들의 사고관은 이전과는 크게 달라지게 됩니다. 대전 가운데 정치지도자들의 아주 지독한 인명 경시는 몰론이거니와 자신들이 겪은 전쟁이 이전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었다는 것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에 케인스는 과연 앞으로의 세대가 살아갈 유럽이 이전과는 다를 것이라고 예견하고 그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다시 주지되는 결핍과 분노, 증오를 부추기는 정치와 교묘한 정치인들에 의해 좌지우지될 미래의 유럽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이 전후의 대책에 있어 그만의 해법을 마지막 장에서 제시하기도 하는데요. 일종의 '처방'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7장은, 전반적인 이 '평화조약 개정'을 제시하고, 최소한이나마 독일 산업에 기반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만이라도 생계 수단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그는 조언합니다. 특히 이러한 관계 개선을 위해 민주주의 국가들의 서로간의 이해와 미국의 경제적 지원을 어느 정도 바라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당시 요건으로도 꽤나 이상적인 해법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과연 정치적 이합집산에 놓인 유럽 정치가 이를 수용할 수 있을지는 불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나 싶기도 한데요. 조약이 철저하게 이행되었던 그 결과는 그것이 주된 요인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다음 대전을 초래하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독일인들이 바랬던 연합국의 최소한의 배려는 현실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웠고, 그렇게 독일의 패전 책임은 불행한 역사의 한 페이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겠다는 정치인들의 허위와 다름없는 발언과 국가간 이해관계에 매몰된 국제관계,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안일주의에 기반한 전후 체제는 다시금 인간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독일 국내의 식량 수요에 따른 식품 수입이 연합국에 의해 전면적으로 용인되지 않아 대다수 독일 국민들이 기아 상태에 있었다는 점은 참으로 충격적인 진술이었습니다. 전쟁의 범위 그 자체를 치열한 전투 속에서 이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종전이 급박하게 이뤄졌다 하더라도 패전국의 시민들이 하루하루 먹고 자는 것을 걱정해야 한다는 현실이 누구보다 권력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그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시대를 다른 모든 시대와 구분하는 특징은 고정적 부와 자번 개선이 대규모로 축적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바로 부의 분배에서 존재한 불균등이었다.

다만 지금 나는, 불평등에 근거한 자본 축적의 원리는 전쟁 이전의 사회질서에서, 그리고 그 당시에 우리가 이해하던 의미의 진보 개념에서 중추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이 원리가 불안정한 심리적 상태에 좌우되며 이 심리적 상태를 다시 살려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독일인은 협박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협상에서 어떤 관용이나 후회도 보이지 않고, 상대방을 기회 삼아 이득을 얻을 수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하며,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을 위해 자신을 낮추는 일도 서슴지 않고, 명예나 자존심이나 자비심이 전혀 없다는 견해가 그것이다.

프랑스와 클레망소의 정책은, 구질서는 항상 똑같은 인간 본성에 기초해 있으므로 본질적으로 바뀌지 않는다는 믿음, 그러므로 국제연맹으로 대표되는 원칙은 모두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에서 논리적으로 도출되었다.

따라서 가능한 한 최대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놓는 것, 1870년 이후 독일이 발전하면서 이뤄놓은 것은 모두 원상 복귀시키는 것이 프랑스의 정책이었다.

따라서 워싱턴에서 효과를 보았던 초연함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비정상적일 만큼 내성적인 그의 성격 때문에 도덕적으로 자기와 동등하기를, 또는 자신에게 계속 영향을 미치기를 원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했다.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주요 연합국 및 관련국 사이의 조약에서 확정될 국경의 범위 안에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인정하고 엄격히 존중한다. 독일은 국제연맹이사회의 동의가 없는 한 이 독립이 양도 불가하다는 점에 동의한다.

이에 더해 독일은 연합국이 요구하는 경우 향후 5년 동안 매년 최대 20만 톤의 선박을 연합국이 지정하는 형태로 건조해 연합국에 양도하며, 이 선박들의 가치는 독일이 지급해야 할 배상금 총액에서 차감된다.

왜냐하면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채무 권한을 실현하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게 자신들의 이익에 절대적으로 부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이드 조지는 여러 조언자의 의견 사이에 존재하는 넓은 간극 뒤에 자신을 숨긴 채, 독일이 지급할 수 있는 금액의 정확한 크기는 자신이 조국의 이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다뤄야 할 미해결 문제라고 치부할 수 있었다.

이전에 영국이 엄숙하게 선언한 약속, 바로 그 적국이 무기를 내려놓을 때 믿고 있던 약속과는 다른 배상을 받아내는 것을 자신과 영국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만들었다.

독일의 재정적 파탄이 너무 심해서 독일은행의 금을 제외하면 당장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양이 상당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독일을 한 세대에 걸쳐 노예 상태로 격하하고, 수백만 인간의 삶을 퇴화시키며, 한 나라의 모든 국민에게서 행복을 박탈하는 정책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운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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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복의 길 - 제2차 세계대전 종식을 향한 카운트다운
에번 토머스 지음, 조행복 옮김 / 까치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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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미국 뉴욕 주의 서퍽 카운티의 헌팅턴에서 태어난, 에번 토머스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헌팅턴 인근의 콜드 스프링 하버에서 보내게 됩니다. 이후 그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스턴 인근의 앤도버에 위치한 사립 남녀 대학 진학 예비 학교인 필립스 아카데미를 거쳐, 하버드 대학, 그리고 최종적으로 버지니아 대학의 로스쿨을 졸업합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갖고 있었음에도 1991년부터 24년 동안 뉴스 위크에서 기자, 작가, 편집자로 경력을 쌓게 됩니다. 그의 기자 경력은 뉴저지 북동부에 있는 더 버겐 레코드 The Bergen Record 에서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경력과 관련해, 특별했던 경험은, 1992년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게이츠가 에반 토마스에게 CIA의 기밀 파일을 볼 수 있는 역사적 접근 권한을 부여했던 일입니다. 특별한 작가 경력을 더한, 그는 2003년부터 2014년까지 하버드와 프린스턴에서 글쓰기와 저널리즘을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작가로서의 이력으로 두 권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를 포함한, 도합 11권의 단행본을 출판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Road to Surrender : Three Men and the Countdown to the End of World War 2"로 2023년에 출간 되었고, 국내에는 2024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원제에도 간략하게 소개되어 있듯이 에번 토머스에 이 글은, 지난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종적으로 일본 제국이 연합국에 항복하는 1945년 8월까지의 서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당시 미국 전쟁 장관이었던 헨리 L. 스팀슨과 미국 육군 항공대 태평양 전략폭격 사령부 사령관인 칼 앤드루 스파츠, 그리고 일본 제국 외무대신인 도고 시게노리, 이 3인의 행적을 통해, 일본이 종전에 이르는 길을 마찬가지로 짚어나가고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이미 인류 역사에서 참혹한 무기로 드러난 '맨해탄 프로젝트'의 코드명, S-1인 '원자 폭탄'과 이 인류 절멸의 폭탄이 어떻게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되었는지, 그 정치적 과정에 대해 상세히 서술되고 있었습니다. 이에 저자인 토마스는 앞선 스팀슨과 스파츠의 일기와 비망록을 비롯, 개인 기록을 검토했고, 일본 쪽 자료 역시 세밀하게 분석해, 작금의 이 책을 출판하기에 이릅니다.

인류 최악의 대공황과 이후 두번째 세계 대전의 한복판에 서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매우 정력적인 인물로 그의 지지 기반인 뉴딜주의자들과 다수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던 대통령이었지만, 종전을 바로 앞두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이런 초당적 지지를 받았던 민주당 출신의 연방 대통령과는 달리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개인적으로도 귀족적 풍모와 자부심을 풍기고 있던 헨리 L. 스팀슨은 오늘날 공화당 정치인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던 인물입니다. 물론 개인적 능력이야 말할 것도 없이 그는 뛰어난 엘리트이기도 했는데요. 저자인 에반 토마스가 분석한 스팀슨의 개인 기록이기도 했지만 당시 전쟁 장관이었던 그는 전쟁 상황에서 아이들과 여자들이 포함된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반대를 표명했던 관료였습니다. 특히 스팀슨은 무고한 민간인 2만명 이상이 희생된 드레스덴 폭격의 효과에 크게 확신하지 못했던 것처럼, 앞으로 전쟁을 마무리 짓게 될 신임 대통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뢰하지 못했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저자에 의해 밝혀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에 대한 그간 알려지지 않은 모습(정치적, 개인적 면모를 포함한)은 쉬이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트루먼은 민주당의 대중 영합주의자이자 열렬한 뉴딜주의자였던 동시에, 스팀슨에 따르면, "골칫거리이자 신뢰하기 꽤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가를 받는데요. 또한, 이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각자가 어느 정도 서로를 존중하지만 그 이면에 서로를 향해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고 기록됩니다. 이는 스팀슨이 함께 일했던 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짙은 그림자가 여전히 직간접적으로 그에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습니다. 


신임 대통령인 트루먼은 제임스 F. 번즈 전 국무장관과는 막역한 사이로 그와 포커를 치며, 사적인 문제 혹은 정치적 의견까지 나누며, 특히 번즈의 조언은 그가 꽤 귀담아 들었던 것으로 나옵니다. 그러다 포츠담 회담 중에 번즈가 트루먼과 스팀슨 사이를 사실상 방해했다는 풍문은 이들 간의 개인적 호불호 관계를 넘어서 꽤 심각한 문제였던 것으로 보이는데요. 더욱이 트루먼 개인은 청렴했고 돈에 있어 상당히 거리를 두었지만, 캔자스 정치에 오랫동안 몸담은 그가 돈과 이권이 거래되는 상황에 적당히 모른 척 넘어가기도 했던 처세술의 달인이었습니다. 이는 과거 프랑스 혁명 당시, '절대 부패할 수 없는 자'로 알려졌던 막시밀리앙 로비에스피에르가 타인의 이익 추구와 권력 욕구에 대해 무지했던 것과는 달리, 이 신임 대통령은 그런 면에서 닳고 닳은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예나 지금이나 기존 정치 무대는 교육을 받았거나 그렇지 않든 간에, 사람을 그런 식으로 통달하게 만드는 구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트루먼 입장에서 스팀슨이 뉴딜주의자를 그닥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점을 애초에 느끼고 있었고, 공화당 출신의 귀족적인 변호사이자 도덕 원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스팀슨이라는 겸허한 인사에 대해 조심스러웠던 모양입니다. 특히 전쟁 종식과 관련해 부득이한 민간인 살상에 있어 두 사람의 근본적인 도덕적 접근 방식 차이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이에 스팀슨은 핵폭탄을 투하하게 될 그 전후 시점의 미국, 그리고 그런 미국의 "도덕적 위치"에 무척이나 고민하게 됩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 누군가 원자 폭탄이 초래할 수많은 인명 피해의 정확한 수치를 제시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한동안 이 신임 대통령에까지 프로젝트는 기밀 사항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물론 나중에는 트루먼 대통령도 "그 계획"에 대해 인지하게 되지만 말입니다. 당시 미군은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 있었던 일본군이 강제로 투입시킨 민간인들과 함께 벌인 처참한 자살 작전에 따른, 극심한 인명 피해로 그 여파가 정치권을 포함한 군부 모두에게 향하게 됩니다. 이러한 자살 작전은 유럽에서는 결코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20여 개의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들"이라는 본문에서 인용된 스팀슨의 우려스런 시나리오와 맞물려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당시 일본 군부가 일왕을 위해, 1억명의 일본 국민들이 미군에 맞서 옥쇄한다는 그 '일억옥쇄 一億玉碎' 저항론이 일본 군부의 허장성세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일왕을 위해 한 목숨을 다 바치겠다"는 자살 특공대를 고려해 본다면 상상 만으로 끔찍한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일본을 빨리 종전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 앞선 S-1의 일본 내 투하가 고려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스팀슨 역시, 시급한 종전과 더이상 불필요한 미군의 인명 피해를 줄이기 위해, 어느 정도 민간이 희생이 초래될 수 없는 핵폭탄 사용에 대한 잠정적 동의를 하게 됩니다. 그가 매번 미국의 도덕적 위치를 고민하고 그 내적 갈등에 힘들어 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과거 부계의 뿌리가 조선에 있었던 일본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는 임진왜란 당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들의 후예이기도 합니다.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그런 그의 가계까지 조사해 기록하고 있었는데요.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토머스는 도고를 향해, "일본인들과 다른 성향을 지닌 인물"로 그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도고는 대학에서 독일 철학을 공부했고, 괴테와 쉴러, 유럽의 고급문화에 관한 토론을 즐기기도 했는데요. 특히 그는 공공연히 히틀러의 나치를 악당이라 말하고 다니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직접적으로 피력하는 것을 상당히 꺼려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그는 유별난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제국은 일왕을 필두로 한, 신도神道 체제와 이를 떠받치는 군부가 우선되는 소위, 이런 국체國體의 보존이 지상 목표로 여겨지고 있던 국가였습니다. 즉, 일왕은 일본인들에게 그 자체로 신적인 존귀한 존재로 과거 야마토 문명의 적손이자 그리고 승계된 전통적 체제는 메이지 유신의 더할나위 없는 정치적 유산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 국체를 나름대로 분석하는 미국 언론인의 시각이 꽤 인상 깊었는데요. 사실상 일왕이 군부의 꼭두각시였다는 점과 일왕 히로히토에게 더할 나위 없는 충성을 보이고 있던 일본 군부 전체가 실상은 자신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신적인 관념의 일왕제와 히로히토, 이 양자가 필수불가결한 공생관계였다는 저자의 본질을 꿰뚫은 관점이었습니다.

이런 일본 내부의 정치는 정치와 군부, 주요 인사 6인으로 구성된, 총체적 권력의 '6인 회의' 였는데요. 이들의 정치적 기반은 매번 발생했던 고질적인 우익의 물리적 폭력과 군 내부에서 수차례 시도된 쿠데타 음모로, 정치적 구조에서의 정상적인 권력 체제가 아니라, 최소한의 군부 통제도 이뤄지지 않는 모순을 안고 있었습니다. 앞선 '6인'이 일왕의 성스러운 결단을 바탕으로 그 권력을 대행하는 정당한 권력이었는지는 정치 역학적인 면에서 다소 불명확하지만 이러한 불안정한 권력 체제의 기원은 메이지 유신 과정에서 역력히 드러난, 그 특유 일본인들의 왜곡된 심상과 과거 쇼군 체제에서 비롯된 비상식적인 '숭무'는 결국 사회 전체를 왜곡하는데 일조합니다. 이런 정치 체제의 모순은 일왕을 신격화하고 그런 맹신의 신도 체제가 군부의 야욕을 제어하지 못하고, 특히나 민간의 군부 통제를 가능하지 않게 만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1945년 8월 8일, 히로히토의 내각이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 채, 당시 소련과의 중립 조약 유지에 모든 외교적 수단을 기울였다가, 스탈린이 만주로의 진격 결정을 그저 눈뜨고 보고만 있었던 이들의 무능은 이처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저는 이 책에서 아주 숱하게 등장하는 '일본인의 정신'이 패전을 앞둔 현실을 깡그리 무시하고, 1억 명의 일본인들을 분사시키더라도, 자신들의 국체를 수호하는 일에만 국한하는 일방적인 정신의 수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느껴졌습니다.

외무대신이었던 도고 시게노리가 자신이 모시던 일왕 히로히토의 인간적 본성을 간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개 개인으로서' 히로히토는 군부의 과격분자들이 점차 소름끼치게 되었고, 도쿄에 미 공군의 소이탄이 쏟아질 때마다 자신이 이대로 죽는 것이 아닌가 걱정하는 평범한 인간이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자신을 옥죄는 그 극명한 정체성, 즉 이대로 계속 군부의 손아귀에 놓일 수밖에 없다는 자괴감과 이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자신은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참담한 심정은 에번 토머스의 입으로 재차 설명되기도 했습니다. 전쟁이 그렇게 마무리되고 여전히 일왕의 위에 있던 히로히토는 1975년 10월, 미국을 방문했고, 태평양 전쟁 당시 해군으로 복무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극진한 대우를 받게 됩니다. 이 때 히로히토는 자신의 입으로, 미국과의 "영원한 우애"를 밝히기도 했는데요. 이러한 그의 제스처와 몹시 상반되게도 1978년에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시 정부 지도자 14명의 이름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명예로운 전사자로 추가되었음을 히로히토는 알게 되지만 이 전대 일왕은 결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게 됩니다. 우리가 그동안 신문지상으로 익히 접하고 있었던, "일왕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답게, 전범들의 위패가 놓여 있는 야스쿠니에 참배를 할 수 없었다"가 진면목이 아니라, 그저 치욕스런 패전의 기억과 결국엔 십 수 년간 자신을 손아귀에 넣고 흔든, 그 시절 지독한 군부 통치의 기억과 그런 체제에 자신이 일조했다는 '묻힌 기억'을 다시는 떠올리기 싶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평화를 사랑한 일왕의 본질이라는 측면은, 마찬가지로 대전을 면밀히 고찰한 미국인의 시각으로 봤을 때, 사실상 역겨운 일왕의 맨얼굴을 직접 대면하게 되었을 겁니다. 

군부와 내각을 설득하여 최종적으로 일본을 종전으로 나아가게 만들겠다는 도고 시게노리의 의지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최종적으로 S-1의 사용을 전쟁 수뇌부가 결정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투하 지점의 후보지로 일본의 옛 고토였던 '교토'가 고려되기도 했지만 스팀슨의 강력한 반대로 철회되는데요. 그는 교토가 일본에게 갖는 상징적인 의미와 옛스런 건물들과 문화가 있던 도시를 파괴하는 것에 양심상 탐탁치 않아 했던 것 같습니다. 더욱이 일왕의 궁이 있던 도쿄는 이미 막대한 소이탄 투하로 온전한 건물이 몇 채, 남아 있지 않은 폐허지가 되었기에, 군수 공장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다른 도시들을 미 군부에서는 고려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는 현지의 기상 조건도 함께 포함된 내용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칼 스파츠는 방사능 폭탄의 투하를 민가나 민간인이 집중되어 있지 않은 도시 외곽의 한 지점으로 삼고 일종의 경고성 투하를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미국 군부는 국내 여론에 있어 강한 종전 요구를 압박 받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전문가들로부터 민간인 희생이 대략 3만 내외로 추정된다는 보고서로 끝내 군부는 신무기인 '핵폭탄 투하'를 사실상 불가피한 일로 만듭니다. 또한, 두 기의 핵폭탄 투하 이후에도 일본이 항복의 제스처를 즉각적으로 보이지 않아 세번째 폭탄의 조립도 이미 승인이 되었던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앞으로 있지도 모를 규슈를 비롯한 일본 본토에 군이 상륙하게 되어 초래될 수많은 병사들의 희생 가능성을 인식한 미국 정부는 사실상 전쟁을 끝내기 위해, 모든 수단을 고려할 수밖에 없던 상화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앞서 언급하기도 했지만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의 결전에서 초래된 막대한 미군의 인명피해가 여전히 이들 군 수뇌부의 머리 한 쪽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선 외무대신 도고 시게노리의 행적을 통해, 빠른 종전의 방해자로 해석되는 육군대신 이나미 고레치카는 과거 일본의 군사 교육을 받은 초창기 우리 군 장성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끼친 인물이기도 합니다. 일왕에 대한 사적인 깊은 충성심은 차치하더라도 육군 내부의 신망이 두터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라게이'라는 과거 유산의 신봉자이자, 실제적으로 중대한 위기 앞에 우유부단했던 인물입니다.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최소 10만이 넘는 인명 피해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본심이 어떻든 간에, 군부에 총력전을 부르짖습니다.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과거 젊은 장교들에 의한 군사 쿠데타에 대한 두려움을 이나미가 갖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설명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찌됐든 여기에 그려지는 일본 군부의 내부 분위기를 짐작해 봤을 때, 실질적으로 군부내 다수 강경파들을 통제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이 책의 말미에 저자는 사실상 이나미가 '자신의 총아'라고 불리는 하타나가 겐지의 쿠데타 기도를 조장한 것이 아닌가 예측하고 있었는데요. 그는 일왕의 충심에 배반했다는 이유로 할복으로 생을 마감하지만 자신들이 강조하는 군부의 대의는 일왕을 정점으로, 종교 및 정치적으로 구축한 체제에 대한 종말을 용인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국체의 핵심인 일왕이 미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 사령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항복을 한다는 게, 자신들의 영광스런 일본 제국에게 있어 결코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현실을 아득히 넘어서는 왜곡된 관념이란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이겠죠.

우리는 정규 교육 과정을 통해, 일본이 두 발의 원자 폭탄 투하를 맞고 USS 미주리 호에서 항복 문저에 서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친미 국가인 우리 나라에게 이 '미국의 결단'과 그것이 초래한 국제정치적 영향에 대해, 진실을 위한 본질적 접근을 해보는 것이 그동안 어려웠던 점은 분명합니다. 두 기의 핵폭탄 투하가 초래한 정치적 파급의 문제도 종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겠지만, 1945년 8월 초까지 일본 외교력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 소련의 참전을 막고자 했던 시도가 무산되어, 만주가 고스란히 소련군의 진공에 놓인 점도 역시, 일본 지도부의 종전 결정에 영향을 끼쳤던 것을 아마 부정할 수는 없을 겁니다. 특히 스탈린이 실질적으로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이미 그리스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분할 점령 시도는 미국이 쉽게 용인할 수 없는 문제였을 겁니다. 이미 새롭게 권력을 이어받은 해리 트루먼에게 스탈린은 점차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대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정치적 신화처럼 트루먼이 스스로의 정치적 각성을 통해, 1945년 이후의 국제 질서를 가늠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당시 동맹국이었던 불확실한 소련의 정치 권력이 남은 임기 내내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이 농후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퇴임을 앞둔 스팀슨이 비망록을 통해 밝힌, 트루먼 대통령에게 핵폭탄의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자는 발상 자체는 공화당 보수주의자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면모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저는 이 책을 통해 무엇보다, 일본 극우의 뿌리가 어디에서 시작되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는데요. 그만큼 메이지 유신의 그 맹목적 아이디어는 단순히 교묘히 숨겨 놓은 개혁의 이미지가 아니라, 예전처럼 다수 국민들을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두고 전국 시대에 특수 계층으로 군림했던 사무라이 지배 체제의 그 단순하고 폭력적 기반에 저들이 매료된 근본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금의 일본 정치의 전통적 근원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매커니즘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는데요. 바로 그렇기에 일본 극우와 현실 정치권이 매우 지근거리에서 서로에게 야합하게 되는, '고래로 이어진 동질감'은 민주주의 체제 안의 지지층과 정치권이라는 단순한 양자 관계로 치부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런 진술 가운데 상당히 놀라웠던 부분은 그 당시에도 미국 정치권이 이런 일본 내부를 여실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점인데요. '국체의 보존'이라는 미끼로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그 과정 자체가 미국에서 이러한 문제를 잘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여기에 과거 일본 제국이 추동한 대동아 공영을 이유로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각지의 인명 피해가 2천만이나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투하된 핵폭탄 두 기로 말미암아 자신들을 심지어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더욱이 그 참혹한 전쟁의 수괴라고 볼 수 있는 히로히토가 아무런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천수를 누린 그 '종전의 결과'가 단순히 미국의 지정학적 이익에 기반한 문제로 쉽게 치환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일본인들에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역사가 그만큼 자신들 입에 담을 수 없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겉으로 드러난 것과는 달리, 일본인들의 민도民度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기까지 합니다. 역사를 배반하는 식의 아주 비극적으로 말이죠.   

-저자인 에번 토머스는 자신의 이 논저를 통해, 과거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핵폭탄의 실사용에 대해 불길해 하고 심지어 반대 의사를 표시했으면서도 그가 임기 내에 사실상 초안한, MAD Mutual Assured Destructrion, 즉 핵무기에 의한 상호 확증 파괴를 확립한 인물로 분석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정치인의 도덕적 근원과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 자체는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어쩌면 "인간의 역사와 투쟁해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처음 접하게 된 내용이지만, 일본도 전쟁 중에 핵폭탄을 제조하려고 어느 정도 시도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실제로 트루먼 대통령은 8월 14일 늦은 오후 (일본 날짜로는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을 듣기 불과 몇 시간 전에, 도쿄에 세 번째 핵폭탄을 투하할 수밖에 없다고 동맹국인 영국에 전했다.

75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히로히토 천황은 그를 신으로 숭배하는 궁정 신하들에 의해서 장막에 가려진 채로 여전히 불가사의한 인물로 남아 있다.

존 매클로이는 나중에 상관(스팀슨)이 핵폭탄을 어떻게 생각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매클로이는 이렇게 답한다.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예의 그 잔학행위는 독일 정부가 살인과 질식 등 사람을 죽이는 방법으로 수많은 러시아인과 폴라드인, 유대인, 기타 그들이 보기에는 살 가치가 없는 집단을 몰살하려는 의도적이고 체계적인 시도를 보여주었다."

스팀슨은 그로브스에게 교토의 세월을 뛰어넘는 찬란함을 다소 상세히 설명한다.

어쨌거나 소련은 나치의 지배에서 막 해방된 폴란드에 민주주의를 허용하겠다는 얄타 회담의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버리고 꼭두각시 국가를 만들고 있다.

그로부터 25년도 더 지난 1945년 7월, 대통령직을 수행한 지 3개월째에 덥어들 때 트루먼은 오키나와 섬의 치열한 전투로 인한 미군의 사상자 숫자에 소름이 끼친다.

중간급 장교들이 혈맹단 따위의 이름으로, 주로 대령이 중심이 된 비밀 결사를 만들고는 일본에 봉건 시대의 영향을 되찾아주려는 자신들의 고귀한 노력에 걸림돌이 되는 자라면 누구든 제거할 계획을 세운다.

그(아나미)는 정신적인 순수함에 관한 격언을 들먹이며, 손에 잡히지 않는 지정학을 논하느니 차라리 죽도를 들고 싸우는 편이 낫다고 말한다.

차를 타고 뼈대만 남은 베를린을 둘러보고 얼빠진 생존자들을 목격한 스팀슨은 핵폭탄이 일본의 도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구심이 든다.

실제로 트루먼과 마셜은 소련이 너무 많은 영토, 즉 만주와 한국, 어쩌면 일본 북단의 홋카이도까지 집어삼키기 전에 일본에 항복을 강요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웰러스틴의 주장에 따르면, 전쟁부 장관이 너무도 강경하게 교토가 민간인 거주지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그곳과는 달리 히로시마는 "순수하게 군사적인"표적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트루먼이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이 핵폭탄을 사용하는 최초의 국가가 되는 것을 내키지 않아하던 아이젠하워의 태도는 스팀슨의 심기를 건드렸을 것이다.

크렘린의 스탈린은 몰로토프가 사토 대사를 만나 고노에 공작의 강화 임무를 논의하기로 한 시간인 8월 8일에 일본이 점령한 만주를 침공하라고 명령한다.

영국은 주간에 군사 시설과 산업 시설의 표적에 마구잡이로 폭격하는 방식을 그만두고 자신들처럼 야간에 "구역폭격", 즉 "주택 파괴"에 나서서 독일군의 사기를 꺾자고 미국에 집요하게 권했다.

스파츠는 아널드에게 자신은 민간인의 대량 살상을 초래하는 도시 폭격에 반대한다고, 늘 반대해왔다고 말했다.

가와베 장군은 일본이 핵폭탄을 제조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했으나 너무도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려서 포기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도고는 현실주의자이기 때문에 포츠담 선언의 수용에 조건을 내거는 것이 애초에 가망 없는 짓이며 미국이 즉각 이를 거부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트루먼의 기본적인 준거는 친절한 신사의 시골 농장이 아니라, 유력한 정치인들과 상원 휴게실이다. 뒤통수를 맞을까 경계하는 대통령은 히로히토를 못된 전범으로, 일본 국민을 교활한 자들로 본다.

매클로이의 일기를 보면, 스팀슨은 일본의 강경파가 여전히 저항하고 있어서 추가 핵폭탄 투하까지 포함하는 더욱 강력한 조치가 요구된다는 현실에 대면한다.

1978년 히로히토는 A급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전시 정부 지도자 14명의 이름이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에 명예로운 전사자로 추가되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를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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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정서
프레데리크 로르동 지음, 전경훈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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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프레데릭 로르동은 프랑스 파리 공과 대학의 일원이자, 소위 ENPC로 알려져 있는, 그랑제콜인 École nationale des ponts et chaussées (굳이 번역하자면, 국립 교량 도로 공과 대학)를 거쳐, 파리 남서쪽 외곽인 주이앙조사에 소재한, 대학원인 HEC파리 에서 MBA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프랑스 사회 과학 고등 연구 학교) 에서,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파리에 있는 '유럽 사회학 및 정치 과학 센터 CNRS'의 책임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로르동은 프랑스와 유럽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프랑스 방송 및 인쇄 매체에 기고했고, 활발한 저서 활동, 글 기고,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급진 좌파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전반적인 로르동의 지적 작업은 스피노자를 기반으로 인간의 경제 활동 및 정치적 정념을 다루고, 과거 2008년 대위기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누구보다도 유럽 연합을 비판하기도 했고, 역시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관적이고 매우 강도 높은 비판자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스스로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예속 또는 자발적 노예는 꽤나 유명세를 탄 '한 줄 개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es Affects de la politique"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로르동의 이 책 역시, 얼마전에 일독했던 지젝의 '자유'에서 의미있게 인용된 학자이기에 문득 호기심이 일어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이 글을 접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로르동의 이 논저를 총 4장의 분량으로 구분해 본다면, 서문을 스피노자의 철학과 그가 고안한 세계의 분석 도구들을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인간과 앞선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녹여냈다면, 2장부터는 그러한 확장된 논증이 정념과 정서를 기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만 제게는 3장, '반란의 정념', 중후반부의 창의적인 논리와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논증되는 그의 고유한 사유가 무척 인상 깊었는데요. 그런 인상에서 저는 이 3장의 스피노자 철학 개념과 결합된 정치와 현실의 비판적 분석을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이 책의 국문으로 번역된 제목이 '정치적 정서'이기는 하나 원제가 가리키는 "정치의 영향"이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 좀 더 합리적인 제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서문의 처음 구분된 제목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처럼, 현시점에서 우리 자신은 좀 더 '스스로의 바깥에서 읽을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로르동이 스피노자를 빌려 개념화 하고 있는 '확산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정서 내지는 반대로 정념의 오염'을 증명하고자 하는 목적을 엿볼 수 있는데요. 즉, 이 점은 우리가 그동안 관성적으로 관념에만 주목했던 흡사 관행에 제동을 거는 목적으로도 읽힙니다. 다시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인간적 기질을 가진 우리가 인간의 육체적 관점을 세계에 투사 하기 때문"이라고 지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뒤에 도출되겠지만 각자가 육체에 깃든 정신으로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견지하고 있는 정치적 주장들이 실제로는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에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는 로르동의 이론적 제시 역시, 철학적 맥락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에 주목되고 있는 '정념의 삶'이나 정치 자체에 정념이 깃들어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어떻게 보면 존 듀이나 토크빌 식으로 바꿔, 규명해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즉, 이처럼 정치 본연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은 이런 수많은 정치적 정념들로 이루어진 정치의 본질적인 형태이기에 어느 정도 이 진술에 대한 철학적 근거나 보충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 진술의 제한적인 한계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저자인 로르동은 "정치 뿐만 아니라, 현실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는 '그 방법'을 비교적 단순하게, 개괄적으로 묘사하며, 보다 쓸모 있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연유로서, 그리고 그렇게 개념화"된 우리의 정치 구조적 분석이 무엇보다,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재차 답습하는 것으로 여기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취소된 구조주의로서) 결정론적인 역사 질서를 따르는 것에 원칙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고정된 생각을 해체하는 것에서 우리는 시급히 출발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합니다. 물론 역사가 인간 행위의 산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결정론으로 전도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 개인의 삶을 규정하게 만드는 운명론적인 시각을 극복하는 것이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옛 시대 사람들의 말처럼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결정론도 그러한 매개물의 산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자주 '변용'을 감행합니다. 물론 감행이라는 단어가 논리적 규칙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선거에 자신의 표를 던지는 행위 자체도 실질적으로 정치적 변용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변용은 아주 간단히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일종의 사변적 활동의 총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로르동은 여기의 이 변용을 특히, 오늘날 정치인들을 위해 특별히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교묘하면서 부정적으로 말이죠. 저는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이들 정치인들의 유형을 어떻게 개념화 해야 되는지 지금도 약간의 난해함을 갖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극단주의로 옭아매야 하는지에 대한 주저함이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자는 단순한 개인의 변용보다도 정치인들의 '의도적인 변용'이 정치 전반을 더욱 옳고 그름의 문제를 더욱 바깥으로 내몰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권력의 존재 의의는 현실에서 더욱 '도덕의 질문'과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 2장에서 규명되긴 하겠지만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정치 전반이 그저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논리가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 위치에 놓이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기까지 했는데요. 흔히 '재분배의 정치'를 말하는 정치 및 정치인들을 '반자본주의'로 몰아가는 논법 또한, 어쩌면 정치적 번용의 극명한 일례라고 여겨집니다. 철학의 논의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더 나아가 여기에서 귀결되는 것처럼 인간의 철학적 구조를 육체와 정신으로 구분하는 과정에, 스피노자의 인게니움, 즉, 보다 간략히 말해 사물의 타고난 본성과 특질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고유한 정치적인 본질이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마치 인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가 말하는 정서가 믜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겠죠. 덧붙여 여기에 '반자본주의의 본성'이라는 지적 자체는 어떻게 보면, 이런 인게니움의 정치적 본성이 어느 정도 투사된 의미라고 여겨지는데요. 이것을 천편일률적으로 모두가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인게니움과 더불어, 로르동은 들뢰즈의 고유 개념인 '주름'도 이와 비슷하게 상당히 많은 주장에서 차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인 로르동이 구분하는 '관념'역시 우리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관념이 실체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의 의문부터 출발해, 관념이 그저 정신적인 그것의 일부분으로 작용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작용이 인간과 사회를 추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느냐는 로르동의 회의적 분석은 제게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정념'은 (누군가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염'시킬 수도 있겠는데요. 아마도 서로 간에 느끼게 되는 정치적 동질감이 이런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로르동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한 부분을 언급하며, 작금의 극단주의적 행태에 마치 '종속된 노예'가 된 개인들은 실제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실체에 결코 접근하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한 구절처럼 인간이 지닌 한계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일차원적인 현상에 쉽게 매몰되는 그런 인간 말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관념 자체가 묵시적으로 작용하여 어떠한 사회 변혁을 이끌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이는 행동하지 않는 사유와 비슷한 매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런 관념이 극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된다면, 우리가 역사에서 경험한 인간을 원천적으로 배제했던 그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암울한 측면을 재차 목격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2장의 논증에서 "관념에 능력을 부여하는 수단 혹은 그 힘의 원천"은 여기서 말하는 변용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어떤 관념이 그러하듯, 이성의 관념은 정서에 의해 전달될 때만 효력이 있으며, 정서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어떠하게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본질을 꿰뚫은 진술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시대의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도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에게 앞선 이성은 '실존의 결과' 내지는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내재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여기서 로르동의 진가는 "관념은 쉽게 말해, 스스로 일어날 수는 없지만 다수의 정념이 여기에 잠식될 때, 그것은 힘을 가질 수 있으며, 변용의 사전적 의미처럼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 능력이라 본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분석되는 변용 역시, 각자가 스스로 바라고 원하는 가능성 등을 실제로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양식으로도 읽힙니다. 이것에 기반한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인 결정론에 그도 역시 인정하고 있지만, 그 변화 가능성 역시 '인간의 본성'으로 이를 애써 부정하지 않는 점은 그의 일관된 철학적 체계의 소산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출된 권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은 내재성의 응답으로 "그것은 대중 자체가 권력의 근원이자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부분적으로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도 읽히지만, "카리스마적 인물이 자기 발로 서 있는 하나의 공통된 정서, 즉 인물로 드러난 공통된 정서"라는 이해는 대중들에 기반해 있는 개념임을 다시금 새롭게 도출하기도 하는데요. 이 부분에서조차 정치의 변용 기술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치의 변용 기술 자체가 표상에 의해 앞으로 나간다는 해석이나, 이런 측면에서 대의의 본질을 확신시키기 위해, '심정 심상'으로의 구축 필요성을 그는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해수면 상승, 사회적 빈곤, 직장에서의 억압, 인종차별로 인한 수난, 망명의 고통 등등 대의는 보는 자들의 사안"이라는 요점은 대의에서도 이런 변용이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런 선제 조건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기 위함으로 여겨지는데요. 서두에서 이미 강조했던 바대로 정서는 각자에게 감염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이런 기반에서 정서가 "대의의 규명과 확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은 그 말하는 바가 명백합니다. 이는 앞선 진술부터 요약해, "그 핵심으로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시작되고 대중이 항유하는 '정념'은 체계적으로 대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까지 이어지는 논증의 바탕으로, 2장의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장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우리가 그저 대의 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고,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강요한 이 자본주의적 논리가 첨예화 된, 현시점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우리가 각자를 구체적으로 돌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서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본주의가 더욱 시민들을 갈라 놓으려고 할 때, 우리는 여기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장의 후반부 논증부터는 본격적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자의 일목요연하고 체계적인 비판이 시작됩니다. 그는 도입에서 분명하게 소비된 것이 여전히 그 자체로는 변함없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조건에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도 없고, 특정한 상표의 물품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구분되는 계급적 차이나, 일정 부분 소비 자체가 결국은 '불평등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실체적 진실도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 집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로르동은 체제 비판적 경제학자답게, "자본주의는 집합적인 물질적 재생산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모두 빼앗고 우리에게 그 (자신의) 편집 방식을 강요한다"고 그 실체를 드러내기까지 하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가 실상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저간의 오래된 비평과 함께, 누구에게나 경제활동을 통한 자아 실현이라는 이상이든 가치이든 간에, 현실은 누구에게나 그렇지 못하다는 진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그동안 고도로 구축된 노동의 분업과 그로인한 분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이익이 실질적으로 감소해왔다는 분석 또한,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번 장에서도 로르동은 통치자들이 피통치자들의 삶의 조건과 지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권력을 준 사람들의 이익과 삶의 개선"을 쉽게 입으로만 강조해 온 사실을 에둘러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진술의 핵심인, 피통치자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통치자들의 존재는 자본주의가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을 노골적으로 도구화 하는 것만큼이나 이 양자가 '부정적 시너지'를 어떠한 각고의 노력없이 그저 수월하게 천착시켜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구조적 상황이 다수 시민들의 삶을 치열한 경쟁과 일방적인 자본주의적 논리를 강요하는 것으로 논증 가운데 개념화 되기도 합니다. 이에 로르동은 다른 비판적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지식인들과 앞선 괴리된 정치인들과의 야합을 은연중 실토하기도 합니다. 

이 글의 주제 의식이 담긴 3장 전체는 '반란의 정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됩니다. 유럽의 68혁명의 사실상 성찰과도 맞닿아 있는 이번 장은, 인간의 '자유 의지' 내지는 '의지의 자유'에 대한 분석이 언급되는데요.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의지의 자유가 역사의 필연적 요소로 읽히는, 소위 결정론으로 이를 갈음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 의지의 자유가 그저 단순한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위기를 타개할 '실질적 선택의 의지'가 자유롭게 누구에게나 주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밀턴 프리드먼은 (역설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인본주의가 이미 인간을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어쩌면 예외적인 현실이 가치를 부정하는 행태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로르동은 이에 간접적으로 역사보다 사회과학의 뒤쳐짐을 꼬집고 있습니다만 앞선 인간의 철학적 규명을 부정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면 인식의 부조화를 역사가 거듭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로르동의 의미심장한 분석은 "역사가 인간의 손으로 작동하는 변화의 궤적이라면, 변화 혹은 혁신의 관념은 오직 인간의 높이에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당위이기도 합니다. 즉, 다시 논의로 돌아와, 우리 내면을 뛰어넘는 결정들이 끝내 우리 자유의 존재 의의를 정하고, 그 결정들은 상대적 힘에 따라 작동한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이에 복잡한 심상을 더하기도 했는데요. 이 결정론 자체를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생각해 봐야 한다는 로르동의 간접적 제시도 충분히 고찰해 볼 만합니다. 다만, 역사의 체계에서 봤을 때, 일반 권력이 대중들의 능력을 포획하여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고,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에서 이 과정의 의도적 변용은 결국 대중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했습니다. 과거 나치 독일의 특정화 계층에 국한된 '자유'와 그 범주 안에 속하지 않은 인종을 물리적으로 제거한 역사를 일견 고심해 본다면 결정론과 변용의 관계가 그저 손쉬운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쉽게 변용될 수 있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권력이 기반이 된 국가가 일반 개인들을 위해 어떤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는 지난 신자유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에 준하는 방식으로 그 목적이 선명해야 할 것인데요. 이것을 대의의 목적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헌법을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다시 한 번,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사물과 사실 관계에서 인간이나 사물의 질서가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표상의 근원적 존재 여부로 읽히기도 합니다. 앞선 자유에 대한 결정론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언급되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인식을 극복하려는 소위 인간의 노력은 로르동의 사유처럼 거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이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맹신하는 우리의 종속적 행태를 비판했던 바와 유사한 맥락이 그에게서 도출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자연 상태라면 자본주의의 결과들에 대항하는 것은 헛된 일인가?" 라는 본질적 질문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이 자본주의 체제를 거스르거나 혹은 비판하면 안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여러분에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몰입해야 될 진정한 숙고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논점으로로 돌아와, 이 지류의 시초에서 볼 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무역의 자유화, 직접 투자의 자유화, 금융의 탈규제화"는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되었다는 로르동의 진단은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는 뒤이어 후술되는 논증을 감안하더라도 말입니다. 즉, 우리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통치 체제, 혹은 국가 권력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구축해 온 결과로, 이러한 사례는 많은 국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인식적 상황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이자 냉소적 현실은, 최근 영국인들이 유럽 연합 탈퇴라는, '브렉시트'를 감행한 국민투표였습니다. 로르동은 여기에 더해, 과거 그리스 정부의 유로화 탈퇴도 비슷한 맥락으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일반 시민들은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소위 권력적 자본가 집단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고 있을 텐데요. 앞선 장에서 언급된 토머스 프랭크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시도 우리 시민들은 이런 부분에서 여전히 주눅들어 있어 보인다는 진술은 세태의 암울한 측면으로도 읽힙니다. 이러한 자본의 놀라운 불평등한 축적은 "이런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의 형세가 자본의 압력을 억제하는 모든 제도적, 국가적, 국제적 장벽들의 쇠락" 혹은 그것의 구축으로, 이는 민주주의가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시녀 역할을 자임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노동자 집단을 학대했으며, 이러한 가운데 좌파의 무능은 실로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의 권리와 기본 가치를 지지하고 배려하지만 그 민주주의 속에서 팽창한 신자유주의는, 일전의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그저 사회 부조를 없애는 것이 아주 손쉬운 해법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해석해, 표상의 운명론적인 필연성으로 국한해,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러한 이행의 과정은 인류의 역사에서 보다 체계적이면서 집중적으로 거친 반대 없이, 아주 편안하게 시민의 삶보다 우선하는 체제의 제일 기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체제에서 이익을 얻는 소수의 관여자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부가가치 분배를 왜곡하고, 자기 사람들이 받는 보수를 끊임없이 늘린다"고 로르동은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지배자들의 만족을 모르는 탐욕은 어쩌면 스스로가 불러들이는 클리나멘이 될 수 있다고 논증됩니다. 여기서 클리나멘은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단초로서. 문득 그 고귀함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런 로르동의 일관된 전망과는 달리, 그를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은, 확연히 신자유주의는 쇠퇴했으며, 앞으로의 투쟁은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자들의 '메타버스'식 신봉건주의와의 싸움이 될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이것의 실질적 예측 여부를 가리기 전에, 저커버그의 메타버스 이론에 대해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체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도 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저물어가는 여명이 아닌, 아직도 현존한 현실 그 자체이며, 지금 이 순간 극단주의적 파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생명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대안으로 로르동은 과거 프랑스가 더할 나위 없이, 인정한 관용의 복귀와 이를 통해, 현 체제를 덜 나쁜 것으로 만드는 노력들을 시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유럽에 좌파라고 알려진 그가 이렇게 체제의 전면적 개선이 아니라, '악화의 개선'으로 갈음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적 학대가 무차별적으로 사회적 위계를 타고 올라오는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아마도 '지적인 표상'의 증명이라고 여기는 듯 보였는데요. 이 지적인 표상의 확대가 그의 말대로라면 현실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고, 좀 더 면밀한 이해와 성찰을 위한 각자에게 지적 표상의 확대가 어느 정도 실천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제가 이 지점의 논증을 너무 축약해서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선 독서를 통한 지식과 저변의 확대를 로르동은 언급하면서, 각자는 자신의 해방과 폭력과 구속의 해체, 더 나아가 이를 점진적으로 사회에 확장시켜,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기까지 하는데요. 전반적으로 로르동의 이 철학적 논저는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그것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인정하고,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사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이를 독자들에게 익히 알고 있는 정치적 각성의 마중물로 사용되길 바라는 듯 보였습니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은 원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본류라는 측면(에드먼드 버크가 살던 영국 의회를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에서 목숨과 같이 체화해야만 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현실에서는 많은 진보주의자들과 좌파 이론가들만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회복'을 더 바라고 염원하는 실정은 단순한 정치적 인지 부조화에서 뿐만 아니라, 순탄치 않은 현실을 반증하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이런 엄혹한 현실이 더욱 가중되어 시민들에게 고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 중후반부에, "한 도시의 평화가 오직 굴종만을 배우도록 가축처럼 인도된 국민의 무기력에 달려 있다면, 그 도시에는 도시라는 이름보다 고독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는 로르동의 서사는 읽는 내내 마음에 와닿았는데요. 작금의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 문장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정치의 제반 활동이 그 정치적 변용에 의해 추동된다면, "내가 당신들을 위해 이렇게 육체의 힘과 정념이 깃든 관념의 실체화로 움직이고 있으니, 당신들은 마땅히 나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심한 당신들의 정념을 내가 실체적으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현실과 같은 소설을 로르동의 이 철학적 논저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독한 현실 인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와 극단주의가 뒤섞인 흔한 논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반란의 시간이라는 대역은, 결정론적 구조주의가 재개된 역사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것에 원칙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해체하는 데 특별히 유용하다.

인간이 정념적 조건 속에 산다는 말은 인간이 정서적 인과성의 제국 아래 산다는 말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말하길, 이것이 바로 관념 자체로서의 관념이 우리의 육체에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 데 무능한 까닭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이며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다른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고, 하나이며 동일한 사람이 하나이며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다른 순간에 다른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다.‘

특히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 사회집단 사이의 불평등 등등, 정치에 관해서 판단하고 말하는 합법성의 감성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개인은, 변용하는 것에 의해 자극된 고유의 기질을 따라, 그리고 뒤이어지는 정서를 따라, 경험하고 판단하고 사유하고 욕망하고 행동한다.

‘이해하기‘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자신의 기질을 자발적으로 투사하면서 세상을 의미 속에 넣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설명하기‘란 심상과 관념과 의미작용과 판단의 산출을 인과적으로 재구성화 하면서 이 ‘이해‘ 활동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다.

너무 잘 보이는 이런 극단적 변화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중간에 있는 혼합주의를 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중대 사안은 여론조사를 하되 조직적으로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오장육부는 물로 그들의 욕망과 정념까지 조사하는 것이다.

정서 사이의 반복은 실존의 물질적 조건들의 변용에 맞서, 이 조건들이 임의적으로 의식의 형식들을 결정짓는다는 너무 단순하게 구성된 언명을 조절할 수 있으며, 때로는 전복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한 거대한 임금노동자 계층에 대한 학대에서 좌파 정당의 자산이 기계적으로 형성되지도 않았고, 스스로 반자본주의라 말하는 운동들은 위기 상황이 닥치자 폐기되었다.

캔자스의 가난한 임금노동자들이 공화당의 품속으로 몸을 던지는 동안, 유럽 여러 나라의 임금노동자들은 극우의 품속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건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입증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은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오직 그 자신으로서는 우리의 실존에 결과를 산출할 능력이 없다.

정치가 ‘관념에 관한 사안‘이 아니라 변용하는 관념을 산출하는 것에 관한 사안이라는 사실이 재자 확인된다.

철도원의 구체적 삶이 정말 어떠한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의 기상 시간, 그의 주말 당직, 휴일 당직,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밤, 위협받는 그의 가정생활, 위계에 따른 괴롭힘 등 축적된 이 모든 것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정치적 원의는 , 각자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편에서 싸우는 개인들에게 제공된 ‘윤리적 해결책‘이라는 위상으로부터 이 실험들을 끄집어내, 전체 구조를 변형시키는 하나의 프로젝트 안으로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학적인 학자들은 온갖 미디어에 계속 등장해서 변용의 메타 기제들의 능력에 대학의 권위, 공인된 ‘전문가‘의 권위, ‘과학‘의 권위 등 그들의 사회적 권위의 능력을 부가한다.

절대 사람들을 보지 말 것, 지친 사람, 괴로운 사람, 우울한 사람,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는 것, 그건 ‘경제적 합리성‘이 인간성에 의해 흩트러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한 도시의 평화가 오직 굴종만을 배우도록 가축처럼 인도된 국민의 무기력에 달려 있다면, 그 도시에는 도시라는 이름보다 고독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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