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정서
프레데리크 로르동 지음, 전경훈 옮김 / 꿈꾼문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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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프레데릭 로르동은 프랑스 파리 공과 대학의 일원이자, 소위 ENPC로 알려져 있는, 그랑제콜인 École nationale des ponts et chaussées (굳이 번역하자면, 국립 교량 도로 공과 대학)를 거쳐, 파리 남서쪽 외곽인 주이앙조사에 소재한, 대학원인 HEC파리 에서 MBA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École des hautes études en sciences sociales (프랑스 사회 과학 고등 연구 학교) 에서,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프랑스를 넘어 유럽 전체에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는 파리에 있는 '유럽 사회학 및 정치 과학 센터 CNRS'의 책임 연구원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로르동은 프랑스와 유럽 정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프랑스 방송 및 인쇄 매체에 기고했고, 활발한 저서 활동, 글 기고,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공산주의를 옹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오늘날 프랑스에서 가장 두드러진 급진 좌파 지식인 중 한 명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전반적인 로르동의 지적 작업은 스피노자를 기반으로 인간의 경제 활동 및 정치적 정념을 다루고, 과거 2008년 대위기 당시,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누구보다도 유럽 연합을 비판하기도 했고, 역시나 신자유주의에 대한 일관적이고 매우 강도 높은 비판자이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해 스스로의 이름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게 된, 자본주의에 대한 인간의 자발적 예속 또는 자발적 노예는 꽤나 유명세를 탄 '한 줄 개념'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es Affects de la politique"로 지난 201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0년 1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로르동의 이 책 역시, 얼마전에 일독했던 지젝의 '자유'에서 의미있게 인용된 학자이기에 문득 호기심이 일어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이 이 글을 접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로르동의 이 논저를 총 4장의 분량으로 구분해 본다면, 서문을 스피노자의 철학과 그가 고안한 세계의 분석 도구들을 이를 해석할 수 있는 인간과 앞선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녹여냈다면, 2장부터는 그러한 확장된 논증이 정념과 정서를 기반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만 제게는 3장, '반란의 정념', 중후반부의 창의적인 논리와 그것을 바탕으로 체계적으로 논증되는 그의 고유한 사유가 무척 인상 깊었는데요. 그런 인상에서 저는 이 3장의 스피노자 철학 개념과 결합된 정치와 현실의 비판적 분석을 많은 분들이 읽어보셨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이 책의 국문으로 번역된 제목이 '정치적 정서'이기는 하나 원제가 가리키는 "정치의 영향"이 전반적인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 좀 더 합리적인 제목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서문의 처음 구분된 제목이 우리에게 강조하는 것처럼, 현시점에서 우리 자신은 좀 더 '스스로의 바깥에서 읽을 기회를' 만들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로르동이 스피노자를 빌려 개념화 하고 있는 '확산시킬 수 있는 정치적 정서 내지는 반대로 정념의 오염'을 증명하고자 하는 목적을 엿볼 수 있는데요. 즉, 이 점은 우리가 그동안 관성적으로 관념에만 주목했던 흡사 관행에 제동을 거는 목적으로도 읽힙니다. 다시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해석해 보자면, "인간적 기질을 가진 우리가 인간의 육체적 관점을 세계에 투사 하기 때문"이라고 지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물론 뒤에 도출되겠지만 각자가 육체에 깃든 정신으로 생각하고, 이를 바탕으로 견지하고 있는 정치적 주장들이 실제로는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에 어느 정도 맞물려 있다는 로르동의 이론적 제시 역시, 철학적 맥락에서 충분한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또한, 여기에 주목되고 있는 '정념의 삶'이나 정치 자체에 정념이 깃들어 있다는 저자의 지적도 어떻게 보면 존 듀이나 토크빌 식으로 바꿔, 규명해 볼 수도 있을 텐데요. 즉, 이처럼 정치 본연의 혼란스럽고 복잡한 상황은 이런 수많은 정치적 정념들로 이루어진 정치의 본질적인 형태이기에 어느 정도 이 진술에 대한 철학적 근거나 보충 설명이 뒤따라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이 진술의 제한적인 한계라면 말입니다. 그래서 저자인 로르동은 "정치 뿐만 아니라, 현실의 기본 구조를 설명하는 '그 방법'을 비교적 단순하게, 개괄적으로 묘사하며, 보다 쓸모 있게 쓰일 수 있도록 하는 연유로서, 그리고 그렇게 개념화"된 우리의 정치 구조적 분석이 무엇보다, 스피노자의 결정론을 재차 답습하는 것으로 여기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취소된 구조주의로서) 결정론적인 역사 질서를 따르는 것에 원칙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는 고정된 생각을 해체하는 것에서 우리는 시급히 출발해야 한다고 그는 제안합니다. 물론 역사가 인간 행위의 산물이라면 무조건적으로 결정론으로 전도될 필요는 없을 겁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측면에서 개인의 삶을 규정하게 만드는 운명론적인 시각을 극복하는 것이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옛 시대 사람들의 말처럼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만큼 결정론도 그러한 매개물의 산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각을 갖고 어떤 결과를 도출해 내기 위해 자주 '변용'을 감행합니다. 물론 감행이라는 단어가 논리적 규칙에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선거에 자신의 표를 던지는 행위 자체도 실질적으로 정치적 변용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변용은 아주 간단히 말해,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일종의 사변적 활동의 총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자인 로르동은 여기의 이 변용을 특히, 오늘날 정치인들을 위해 특별히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교묘하면서 부정적으로 말이죠. 저는 오늘날 새롭게 등장한 이들 정치인들의 유형을 어떻게 개념화 해야 되는지 지금도 약간의 난해함을 갖고 주저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극단주의로 옭아매야 하는지에 대한 주저함이 내면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저자는 단순한 개인의 변용보다도 정치인들의 '의도적인 변용'이 정치 전반을 더욱 옳고 그름의 문제를 더욱 바깥으로 내몰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권력의 존재 의의는 현실에서 더욱 '도덕의 질문'과 멀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 2장에서 규명되긴 하겠지만 자본주의적 상황에서 정치 전반이 그저 단순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논리가 모든 영역에서 지배적 위치에 놓이는 현상을 우리는 목도하기까지 했는데요. 흔히 '재분배의 정치'를 말하는 정치 및 정치인들을 '반자본주의'로 몰아가는 논법 또한, 어쩌면 정치적 번용의 극명한 일례라고 여겨집니다. 철학의 논의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신이 아닌 것은 분명하고 더 나아가 여기에서 귀결되는 것처럼 인간의 철학적 구조를 육체와 정신으로 구분하는 과정에, 스피노자의 인게니움, 즉, 보다 간략히 말해 사물의 타고난 본성과 특질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는 고유한 정치적인 본질이 있다고 말하는 부분은 마치 인간의 특수성을 강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그가 말하는 정서가 믜미심장하게 다가오는 이유이겠죠. 덧붙여 여기에 '반자본주의의 본성'이라는 지적 자체는 어떻게 보면, 이런 인게니움의 정치적 본성이 어느 정도 투사된 의미라고 여겨지는데요. 이것을 천편일률적으로 모두가 동의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물론 인게니움과 더불어, 로르동은 들뢰즈의 고유 개념인 '주름'도 이와 비슷하게 상당히 많은 주장에서 차용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인 로르동이 구분하는 '관념'역시 우리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요. 관념이 실체적인 힘을 갖고 있느냐의 의문부터 출발해, 관념이 그저 정신적인 그것의 일부분으로 작용했다 하더라도 이러한 작용이 인간과 사회를 추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느냐는 로르동의 회의적 분석은 제게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 '정념'은 (누군가에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감염'시킬 수도 있겠는데요. 아마도 서로 간에 느끼게 되는 정치적 동질감이 이런 맥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로르동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한 부분을 언급하며, 작금의 극단주의적 행태에 마치 '종속된 노예'가 된 개인들은 실제로 사물이나 사건에 대한 실체에 결코 접근하지 못했다고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스피노자의 유명한 한 구절처럼 인간이 지닌 한계일 수도 있을 겁니다. 한 눈에 보기에도 일차원적인 현상에 쉽게 매몰되는 그런 인간 말입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관념 자체가 묵시적으로 작용하여 어떠한 사회 변혁을 이끌 수 있다고 확신하기는 아마도 어려울 겁니다. 이는 행동하지 않는 사유와 비슷한 매커니즘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물론 이런 관념이 극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된다면, 우리가 역사에서 경험한 인간을 원천적으로 배제했던 그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암울한 측면을 재차 목격할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2장의 논증에서 "관념에 능력을 부여하는 수단 혹은 그 힘의 원천"은 여기서 말하는 변용의 기술이기도 합니다. "어떤 관념이 그러하듯, 이성의 관념은 정서에 의해 전달될 때만 효력이 있으며, 정서의 도움 없이는 우리를 어떠하게도 결정하지 못할 것이다"라는 본질을 꿰뚫은 진술은 철학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시대의 진실을 말하는 것으로도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그런 연유로 우리에게 앞선 이성은 '실존의 결과' 내지는 그 존재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한계가 내재해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여기서 로르동의 진가는 "관념은 쉽게 말해, 스스로 일어날 수는 없지만 다수의 정념이 여기에 잠식될 때, 그것은 힘을 가질 수 있으며, 변용의 사전적 의미처럼 어떤 결과를 도출하는 능력이라 본래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마찬가지로 분석되는 변용 역시, 각자가 스스로 바라고 원하는 가능성 등을 실제로 도출하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 양식으로도 읽힙니다. 이것에 기반한 스피노자 철학의 핵심인 결정론에 그도 역시 인정하고 있지만, 그 변화 가능성 역시 '인간의 본성'으로 이를 애써 부정하지 않는 점은 그의 일관된 철학적 체계의 소산이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도출된 권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은 내재성의 응답으로 "그것은 대중 자체가 권력의 근원이자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부분적으로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도 읽히지만, "카리스마적 인물이 자기 발로 서 있는 하나의 공통된 정서, 즉 인물로 드러난 공통된 정서"라는 이해는 대중들에 기반해 있는 개념임을 다시금 새롭게 도출하기도 하는데요. 이 부분에서조차 정치의 변용 기술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치의 변용 기술 자체가 표상에 의해 앞으로 나간다는 해석이나, 이런 측면에서 대의의 본질을 확신시키기 위해, '심정 심상'으로의 구축 필요성을 그는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해수면 상승, 사회적 빈곤, 직장에서의 억압, 인종차별로 인한 수난, 망명의 고통 등등 대의는 보는 자들의 사안"이라는 요점은 대의에서도 이런 변용이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런 선제 조건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기 위함으로 여겨지는데요. 서두에서 이미 강조했던 바대로 정서는 각자에게 감염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이런 기반에서 정서가 "대의의 규명과 확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은 그 말하는 바가 명백합니다. 이는 앞선 진술부터 요약해, "그 핵심으로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시작되고 대중이 항유하는 '정념'은 체계적으로 대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까지 이어지는 논증의 바탕으로, 2장의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장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우리가 그저 대의 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고,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강요한 이 자본주의적 논리가 첨예화 된, 현시점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우리가 각자를 구체적으로 돌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서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본주의가 더욱 시민들을 갈라 놓으려고 할 때, 우리는 여기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장의 후반부 논증부터는 본격적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자의 일목요연하고 체계적인 비판이 시작됩니다. 그는 도입에서 분명하게 소비된 것이 여전히 그 자체로는 변함없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조건에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도 없고, 특정한 상표의 물품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구분되는 계급적 차이나, 일정 부분 소비 자체가 결국은 '불평등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실체적 진실도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 집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로르동은 체제 비판적 경제학자답게, "자본주의는 집합적인 물질적 재생산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모두 빼앗고 우리에게 그 (자신의) 편집 방식을 강요한다"고 그 실체를 드러내기까지 하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가 실상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저간의 오래된 비평과 함께, 누구에게나 경제활동을 통한 자아 실현이라는 이상이든 가치이든 간에, 현실은 누구에게나 그렇지 못하다는 진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그동안 고도로 구축된 노동의 분업과 그로인한 분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이익이 실질적으로 감소해왔다는 분석 또한,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번 장에서도 로르동은 통치자들이 피통치자들의 삶의 조건과 지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권력을 준 사람들의 이익과 삶의 개선"을 쉽게 입으로만 강조해 온 사실을 에둘러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진술의 핵심인, 피통치자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통치자들의 존재는 자본주의가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을 노골적으로 도구화 하는 것만큼이나 이 양자가 '부정적 시너지'를 어떠한 각고의 노력없이 그저 수월하게 천착시켜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구조적 상황이 다수 시민들의 삶을 치열한 경쟁과 일방적인 자본주의적 논리를 강요하는 것으로 논증 가운데 개념화 되기도 합니다. 이에 로르동은 다른 비판적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지식인들과 앞선 괴리된 정치인들과의 야합을 은연중 실토하기도 합니다. 

이 글의 주제 의식이 담긴 3장 전체는 '반란의 정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됩니다. 유럽의 68혁명의 사실상 성찰과도 맞닿아 있는 이번 장은, 인간의 '자유 의지' 내지는 '의지의 자유'에 대한 분석이 언급되는데요.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의지의 자유가 역사의 필연적 요소로 읽히는, 소위 결정론으로 이를 갈음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 의지의 자유가 그저 단순한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위기를 타개할 '실질적 선택의 의지'가 자유롭게 누구에게나 주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밀턴 프리드먼은 (역설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인본주의가 이미 인간을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어쩌면 예외적인 현실이 가치를 부정하는 행태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로르동은 이에 간접적으로 역사보다 사회과학의 뒤쳐짐을 꼬집고 있습니다만 앞선 인간의 철학적 규명을 부정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면 인식의 부조화를 역사가 거듭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로르동의 의미심장한 분석은 "역사가 인간의 손으로 작동하는 변화의 궤적이라면, 변화 혹은 혁신의 관념은 오직 인간의 높이에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당위이기도 합니다. 즉, 다시 논의로 돌아와, 우리 내면을 뛰어넘는 결정들이 끝내 우리 자유의 존재 의의를 정하고, 그 결정들은 상대적 힘에 따라 작동한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이에 복잡한 심상을 더하기도 했는데요. 이 결정론 자체를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생각해 봐야 한다는 로르동의 간접적 제시도 충분히 고찰해 볼 만합니다. 다만, 역사의 체계에서 봤을 때, 일반 권력이 대중들의 능력을 포획하여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고,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에서 이 과정의 의도적 변용은 결국 대중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했습니다. 과거 나치 독일의 특정화 계층에 국한된 '자유'와 그 범주 안에 속하지 않은 인종을 물리적으로 제거한 역사를 일견 고심해 본다면 결정론과 변용의 관계가 그저 손쉬운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쉽게 변용될 수 있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권력이 기반이 된 국가가 일반 개인들을 위해 어떤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는 지난 신자유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에 준하는 방식으로 그 목적이 선명해야 할 것인데요. 이것을 대의의 목적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헌법을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다시 한 번,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사물과 사실 관계에서 인간이나 사물의 질서가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표상의 근원적 존재 여부로 읽히기도 합니다. 앞선 자유에 대한 결정론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언급되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인식을 극복하려는 소위 인간의 노력은 로르동의 사유처럼 거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이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맹신하는 우리의 종속적 행태를 비판했던 바와 유사한 맥락이 그에게서 도출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자연 상태라면 자본주의의 결과들에 대항하는 것은 헛된 일인가?" 라는 본질적 질문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이 자본주의 체제를 거스르거나 혹은 비판하면 안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여러분에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몰입해야 될 진정한 숙고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논점으로로 돌아와, 이 지류의 시초에서 볼 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무역의 자유화, 직접 투자의 자유화, 금융의 탈규제화"는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되었다는 로르동의 진단은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는 뒤이어 후술되는 논증을 감안하더라도 말입니다. 즉, 우리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통치 체제, 혹은 국가 권력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구축해 온 결과로, 이러한 사례는 많은 국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인식적 상황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이자 냉소적 현실은, 최근 영국인들이 유럽 연합 탈퇴라는, '브렉시트'를 감행한 국민투표였습니다. 로르동은 여기에 더해, 과거 그리스 정부의 유로화 탈퇴도 비슷한 맥락으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일반 시민들은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소위 권력적 자본가 집단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고 있을 텐데요. 앞선 장에서 언급된 토머스 프랭크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시도 우리 시민들은 이런 부분에서 여전히 주눅들어 있어 보인다는 진술은 세태의 암울한 측면으로도 읽힙니다. 이러한 자본의 놀라운 불평등한 축적은 "이런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의 형세가 자본의 압력을 억제하는 모든 제도적, 국가적, 국제적 장벽들의 쇠락" 혹은 그것의 구축으로, 이는 민주주의가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시녀 역할을 자임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노동자 집단을 학대했으며, 이러한 가운데 좌파의 무능은 실로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의 권리와 기본 가치를 지지하고 배려하지만 그 민주주의 속에서 팽창한 신자유주의는, 일전의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그저 사회 부조를 없애는 것이 아주 손쉬운 해법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해석해, 표상의 운명론적인 필연성으로 국한해,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러한 이행의 과정은 인류의 역사에서 보다 체계적이면서 집중적으로 거친 반대 없이, 아주 편안하게 시민의 삶보다 우선하는 체제의 제일 기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체제에서 이익을 얻는 소수의 관여자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부가가치 분배를 왜곡하고, 자기 사람들이 받는 보수를 끊임없이 늘린다"고 로르동은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지배자들의 만족을 모르는 탐욕은 어쩌면 스스로가 불러들이는 클리나멘이 될 수 있다고 논증됩니다. 여기서 클리나멘은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단초로서. 문득 그 고귀함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런 로르동의 일관된 전망과는 달리, 그를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은, 확연히 신자유주의는 쇠퇴했으며, 앞으로의 투쟁은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자들의 '메타버스'식 신봉건주의와의 싸움이 될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이것의 실질적 예측 여부를 가리기 전에, 저커버그의 메타버스 이론에 대해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체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도 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저물어가는 여명이 아닌, 아직도 현존한 현실 그 자체이며, 지금 이 순간 극단주의적 파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생명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대안으로 로르동은 과거 프랑스가 더할 나위 없이, 인정한 관용의 복귀와 이를 통해, 현 체제를 덜 나쁜 것으로 만드는 노력들을 시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유럽에 좌파라고 알려진 그가 이렇게 체제의 전면적 개선이 아니라, '악화의 개선'으로 갈음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적 학대가 무차별적으로 사회적 위계를 타고 올라오는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아마도 '지적인 표상'의 증명이라고 여기는 듯 보였는데요. 이 지적인 표상의 확대가 그의 말대로라면 현실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고, 좀 더 면밀한 이해와 성찰을 위한 각자에게 지적 표상의 확대가 어느 정도 실천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제가 이 지점의 논증을 너무 축약해서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선 독서를 통한 지식과 저변의 확대를 로르동은 언급하면서, 각자는 자신의 해방과 폭력과 구속의 해체, 더 나아가 이를 점진적으로 사회에 확장시켜,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기까지 하는데요. 전반적으로 로르동의 이 철학적 논저는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그것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인정하고,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사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이를 독자들에게 익히 알고 있는 정치적 각성의 마중물로 사용되길 바라는 듯 보였습니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은 원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본류라는 측면(에드먼드 버크가 살던 영국 의회를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에서 목숨과 같이 체화해야만 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현실에서는 많은 진보주의자들과 좌파 이론가들만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회복'을 더 바라고 염원하는 실정은 단순한 정치적 인지 부조화에서 뿐만 아니라, 순탄치 않은 현실을 반증하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이런 엄혹한 현실이 더욱 가중되어 시민들에게 고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 중후반부에, "한 도시의 평화가 오직 굴종만을 배우도록 가축처럼 인도된 국민의 무기력에 달려 있다면, 그 도시에는 도시라는 이름보다 고독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는 로르동의 서사는 읽는 내내 마음에 와닿았는데요. 작금의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 문장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정치의 제반 활동이 그 정치적 변용에 의해 추동된다면, "내가 당신들을 위해 이렇게 육체의 힘과 정념이 깃든 관념의 실체화로 움직이고 있으니, 당신들은 마땅히 나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심한 당신들의 정념을 내가 실체적으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현실과 같은 소설을 로르동의 이 철학적 논저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독한 현실 인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와 극단주의가 뒤섞인 흔한 논리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반란의 시간이라는 대역은, 결정론적 구조주의가 재개된 역사의 질서를 따르는 모든 것에 원칙적으로 접근할 수 없으리라는 잘못된 생각을 해체하는 데 특별히 유용하다.

인간이 정념적 조건 속에 산다는 말은 인간이 정서적 인과성의 제국 아래 산다는 말 이외의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스피노자가 말하길, 이것이 바로 관념 자체로서의 관념이 우리의 육체에 어떤 효과를 산출하는 데 무능한 까닭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이며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다른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고, 하나이며 동일한 사람이 하나이며 동일한 대상에 의하여 다른 순간에 다른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다.‘

특히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불평등, 사회집단 사이의 불평등 등등, 정치에 관해서 판단하고 말하는 합법성의 감성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개인은, 변용하는 것에 의해 자극된 고유의 기질을 따라, 그리고 뒤이어지는 정서를 따라, 경험하고 판단하고 사유하고 욕망하고 행동한다.

‘이해하기‘란,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자신의 기질을 자발적으로 투사하면서 세상을 의미 속에 넣는 인간이 하는 것이다. ‘설명하기‘란 심상과 관념과 의미작용과 판단의 산출을 인과적으로 재구성화 하면서 이 ‘이해‘ 활동을 알아차리게 하는 것이다.

너무 잘 보이는 이런 극단적 변화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중간에 있는 혼합주의를 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중대 사안은 여론조사를 하되 조직적으로 사람들의 가장 깊은 곳까지, 오장육부는 물로 그들의 욕망과 정념까지 조사하는 것이다.

정서 사이의 반복은 실존의 물질적 조건들의 변용에 맞서, 이 조건들이 임의적으로 의식의 형식들을 결정짓는다는 너무 단순하게 구성된 언명을 조절할 수 있으며, 때로는 전복할 수도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의한 거대한 임금노동자 계층에 대한 학대에서 좌파 정당의 자산이 기계적으로 형성되지도 않았고, 스스로 반자본주의라 말하는 운동들은 위기 상황이 닥치자 폐기되었다.

캔자스의 가난한 임금노동자들이 공화당의 품속으로 몸을 던지는 동안, 유럽 여러 나라의 임금노동자들은 극우의 품속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건 그러한 사실을 충분히 입증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성은 그 자체로서, 다시 말해 오직 그 자신으로서는 우리의 실존에 결과를 산출할 능력이 없다.

정치가 ‘관념에 관한 사안‘이 아니라 변용하는 관념을 산출하는 것에 관한 사안이라는 사실이 재자 확인된다.

철도원의 구체적 삶이 정말 어떠한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한다. 그의 기상 시간, 그의 주말 당직, 휴일 당직,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내는 밤, 위협받는 그의 가정생활, 위계에 따른 괴롭힘 등 축적된 이 모든 것들을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정치적 원의는 , 각자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자신의 편에서 싸우는 개인들에게 제공된 ‘윤리적 해결책‘이라는 위상으로부터 이 실험들을 끄집어내, 전체 구조를 변형시키는 하나의 프로젝트 안으로 포괄하는 것이다.

그리고 현학적인 학자들은 온갖 미디어에 계속 등장해서 변용의 메타 기제들의 능력에 대학의 권위, 공인된 ‘전문가‘의 권위, ‘과학‘의 권위 등 그들의 사회적 권위의 능력을 부가한다.

절대 사람들을 보지 말 것, 지친 사람, 괴로운 사람, 우울한 사람, 자살 직전에 있는 사람을 보지 않는 것, 그건 ‘경제적 합리성‘이 인간성에 의해 흩트러질까 두렵기 때문이다.

한 도시의 평화가 오직 굴종만을 배우도록 가축처럼 인도된 국민의 무기력에 달려 있다면, 그 도시에는 도시라는 이름보다 고독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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