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이렇게 도출된 권력의 근원은 무엇인가? 에 대한 스피노자의 대답은 내재성의 응답으로 "그것은 대중 자체가 권력의 근원이자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저자가 부분적으로 막스 베버의 카리스마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도 읽히지만, "카리스마적 인물이 자기 발로 서 있는 하나의 공통된 정서, 즉 인물로 드러난 공통된 정서"라는 이해는 대중들에 기반해 있는 개념임을 다시금 새롭게 도출하기도 하는데요. 이 부분에서조차 정치의 변용 기술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치의 변용 기술 자체가 표상에 의해 앞으로 나간다는 해석이나, 이런 측면에서 대의의 본질을 확신시키기 위해, '심정 심상'으로의 구축 필요성을 그는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해수면 상승, 사회적 빈곤, 직장에서의 억압, 인종차별로 인한 수난, 망명의 고통 등등 대의는 보는 자들의 사안"이라는 요점은 대의에서도 이런 변용이 효과적으로 쓰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그런 선제 조건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기 위함으로 여겨지는데요. 서두에서 이미 강조했던 바대로 정서는 각자에게 감염되거나 영향을 끼칠 수 있고 마찬가지로 이런 기반에서 정서가 "대의의 규명과 확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은 그 말하는 바가 명백합니다. 이는 앞선 진술부터 요약해, "그 핵심으로 권력은 대중으로부터 시작되고 대중이 항유하는 '정념'은 체계적으로 대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에까지 이어지는 논증의 바탕으로, 2장의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주장을 제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우리가 그저 대의 뿐만 아니라 각자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고, 자본주의가 개개인에게 강요한 이 자본주의적 논리가 첨예화 된, 현시점의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우리가 각자를 구체적으로 돌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서사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자본주의가 더욱 시민들을 갈라 놓으려고 할 때, 우리는 여기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2장의 후반부 논증부터는 본격적으로 오늘날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저자의 일목요연하고 체계적인 비판이 시작됩니다. 그는 도입에서 분명하게 소비된 것이 여전히 그 자체로는 변함없는 자본주의적 착취의 조건에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도 없고, 특정한 상표의 물품이 '있고 없고'의 차이로 구분되는 계급적 차이나, 일정 부분 소비 자체가 결국은 '불평등의 표징'으로 나타나는 실체적 진실도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받아들여 집니다. 여기에 더 나아가 로르동은 체제 비판적 경제학자답게, "자본주의는 집합적인 물질적 재생산에서 주어지는 것들을 모두 빼앗고 우리에게 그 (자신의) 편집 방식을 강요한다"고 그 실체를 드러내기까지 하는데요. 저는 이 부분에서 자본주의가 실상 모두에게 이익이 되지 못한다는 저간의 오래된 비평과 함께, 누구에게나 경제활동을 통한 자아 실현이라는 이상이든 가치이든 간에, 현실은 누구에게나 그렇지 못하다는 진실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는데요. 그동안 고도로 구축된 노동의 분업과 그로인한 분업화로 인해, 노동자들의 이익이 실질적으로 감소해왔다는 분석 또한, 자본주의의 실체를 폭로하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번 장에서도 로르동은 통치자들이 피통치자들의 삶의 조건과 지향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권력을 준 사람들의 이익과 삶의 개선"을 쉽게 입으로만 강조해 온 사실을 에둘러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진술의 핵심인, 피통치자들의 삶을 전혀 알지 못하는 통치자들의 존재는 자본주의가 체제 유지를 위해 인간을 노골적으로 도구화 하는 것만큼이나 이 양자가 '부정적 시너지'를 어떠한 각고의 노력없이 그저 수월하게 천착시켜 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구조적 상황이 다수 시민들의 삶을 치열한 경쟁과 일방적인 자본주의적 논리를 강요하는 것으로 논증 가운데 개념화 되기도 합니다. 이에 로르동은 다른 비판적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이런 진실을 시민들에게 알리지 않는 지식인들과 앞선 괴리된 정치인들과의 야합을 은연중 실토하기도 합니다.
이 글의 주제 의식이 담긴 3장 전체는 '반란의 정념'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됩니다. 유럽의 68혁명의 사실상 성찰과도 맞닿아 있는 이번 장은, 인간의 '자유 의지' 내지는 '의지의 자유'에 대한 분석이 언급되는데요.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분석해 본다면, 의지의 자유가 역사의 필연적 요소로 읽히는, 소위 결정론으로 이를 갈음해 볼 수 있을 겁니다. 만약 이 의지의 자유가 그저 단순한 환영이나 환상이 아니라면 우리가 처한 현실에서 위기를 타개할 '실질적 선택의 의지'가 자유롭게 누구에게나 주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밀턴 프리드먼은 (역설적으로) 선택의 자유를 강조했는지도 모르겠는데요. 인본주의가 이미 인간을 동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이면에는 어쩌면 예외적인 현실이 가치를 부정하는 행태로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로르동은 이에 간접적으로 역사보다 사회과학의 뒤쳐짐을 꼬집고 있습니다만 앞선 인간의 철학적 규명을 부정하는 현실은 어떻게 보면 인식의 부조화를 역사가 거듭 증명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로르동의 의미심장한 분석은 "역사가 인간의 손으로 작동하는 변화의 궤적이라면, 변화 혹은 혁신의 관념은 오직 인간의 높이에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당위이기도 합니다. 즉, 다시 논의로 돌아와, 우리 내면을 뛰어넘는 결정들이 끝내 우리 자유의 존재 의의를 정하고, 그 결정들은 상대적 힘에 따라 작동한다는 스피노자의 생각은 이에 복잡한 심상을 더하기도 했는데요. 이 결정론 자체를 우리 인간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달리 생각해 봐야 한다는 로르동의 간접적 제시도 충분히 고찰해 볼 만합니다. 다만, 역사의 체계에서 봤을 때, 일반 권력이 대중들의 능력을 포획하여 그것을 자신의 힘으로 구축하고, 마찬가지로 스피노자 식의 결정론에서 이 과정의 의도적 변용은 결국 대중 전반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귀결되기도 했습니다. 과거 나치 독일의 특정화 계층에 국한된 '자유'와 그 범주 안에 속하지 않은 인종을 물리적으로 제거한 역사를 일견 고심해 본다면 결정론과 변용의 관계가 그저 손쉬운 문제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이렇게 쉽게 변용될 수 있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권력이 기반이 된 국가가 일반 개인들을 위해 어떤식으로 존재해야 하는지는 지난 신자유주의 혁명을 거치면서 우리는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본래적인 측면에서) 다수의 이익에 준하는 방식으로 그 목적이 선명해야 할 것인데요. 이것을 대의의 목적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물론 여기에서 민주주의와 헌법을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을 텐데요. 다시 한 번, 스피노자의 결정론은 사물과 사실 관계에서 인간이나 사물의 질서가 필연적으로 작용하는 표상의 근원적 존재 여부로 읽히기도 합니다. 앞선 자유에 대한 결정론도 마찬가지로 여기에서 언급되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라는 인식을 극복하려는 소위 인간의 노력은 로르동의 사유처럼 거부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과거 지그문트 바우만이 경제학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맹신하는 우리의 종속적 행태를 비판했던 바와 유사한 맥락이 그에게서 도출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의 자연 상태라면 자본주의의 결과들에 대항하는 것은 헛된 일인가?" 라는 본질적 질문 말입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이 이 자본주의 체제를 거스르거나 혹은 비판하면 안되는가에 대한 의문을 다시 여러분에게 던져보고 싶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가 몰입해야 될 진정한 숙고는 바로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논점으로로 돌아와, 이 지류의 시초에서 볼 때, 현재의 신자유주의적 체제는 "무역의 자유화, 직접 투자의 자유화, 금융의 탈규제화"는 모두 국가적 차원에서 결정되었다는 로르동의 진단은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지는데요. 이는 뒤이어 후술되는 논증을 감안하더라도 말입니다. 즉, 우리가 합법적으로 인정한 통치 체제, 혹은 국가 권력이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를 직접적으로 구축해 온 결과로, 이러한 사례는 많은 국가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인식적 상황의 가장 역설적인 측면이자 냉소적 현실은, 최근 영국인들이 유럽 연합 탈퇴라는, '브렉시트'를 감행한 국민투표였습니다. 로르동은 여기에 더해, 과거 그리스 정부의 유로화 탈퇴도 비슷한 맥락으로 언급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일반 시민들은 이런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는 소위 권력적 자본가 집단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을 상당히 꺼리고 있을 텐데요. 앞선 장에서 언급된 토머스 프랭크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알렉스 캘리니코스 역시도 우리 시민들은 이런 부분에서 여전히 주눅들어 있어 보인다는 진술은 세태의 암울한 측면으로도 읽힙니다. 이러한 자본의 놀라운 불평등한 축적은 "이런 세계화된 신자유주의의 형세가 자본의 압력을 억제하는 모든 제도적, 국가적, 국제적 장벽들의 쇠락" 혹은 그것의 구축으로, 이는 민주주의가 그동안 신자유주의의 충실한 시녀 역할을 자임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노동자 집단을 학대했으며, 이러한 가운데 좌파의 무능은 실로 더욱 도드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에 민주주의는 자유와 평등이라는 인간의 권리와 기본 가치를 지지하고 배려하지만 그 민주주의 속에서 팽창한 신자유주의는, 일전의 데이빗 코츠의 언급대로 그저 사회 부조를 없애는 것이 아주 손쉬운 해법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를 스피노자 식으로 해석해, 표상의 운명론적인 필연성으로 국한해, 해석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이러한 이행의 과정은 인류의 역사에서 보다 체계적이면서 집중적으로 거친 반대 없이, 아주 편안하게 시민의 삶보다 우선하는 체제의 제일 기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체제에서 이익을 얻는 소수의 관여자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도록 부가가치 분배를 왜곡하고, 자기 사람들이 받는 보수를 끊임없이 늘린다"고 로르동은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렇게 지배자들의 만족을 모르는 탐욕은 어쩌면 스스로가 불러들이는 클리나멘이 될 수 있다고 논증됩니다. 여기서 클리나멘은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단초로서. 문득 그 고귀함이 떠오르기도 하는데요. 이런 로르동의 일관된 전망과는 달리, 그를 인용한 슬라보예 지젝은, 확연히 신자유주의는 쇠퇴했으며, 앞으로의 투쟁은 마크 저커버그와 같은 자들의 '메타버스'식 신봉건주의와의 싸움이 될 것이라 예견했습니다. 이것의 실질적 예측 여부를 가리기 전에, 저커버그의 메타버스 이론에 대해 큰 힘으로 작용한 것은 분명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 체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 역시도 이 신자유주의적 체제가 저물어가는 여명이 아닌, 아직도 현존한 현실 그 자체이며, 지금 이 순간 극단주의적 파고에도 불구하고 그것의 생명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끝으로 현재의 대안으로 로르동은 과거 프랑스가 더할 나위 없이, 인정한 관용의 복귀와 이를 통해, 현 체제를 덜 나쁜 것으로 만드는 노력들을 시도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강조합니다. 유럽에 좌파라고 알려진 그가 이렇게 체제의 전면적 개선이 아니라, '악화의 개선'으로 갈음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신자유주의적 학대가 무차별적으로 사회적 위계를 타고 올라오는 상황에 대한 인식에 있어,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아마도 '지적인 표상'의 증명이라고 여기는 듯 보였는데요. 이 지적인 표상의 확대가 그의 말대로라면 현실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 있고, 좀 더 면밀한 이해와 성찰을 위한 각자에게 지적 표상의 확대가 어느 정도 실천적인 의미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듯 했습니다. 제가 이 지점의 논증을 너무 축약해서 쓰기는 했습니다만 우선 독서를 통한 지식과 저변의 확대를 로르동은 언급하면서, 각자는 자신의 해방과 폭력과 구속의 해체, 더 나아가 이를 점진적으로 사회에 확장시켜, 개선해 나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담기까지 하는데요. 전반적으로 로르동의 이 철학적 논저는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과 그것을 바탕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는 현실이 녹록치 않음을 인정하고, 스피노자와 들뢰즈의 사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이를 독자들에게 익히 알고 있는 정치적 각성의 마중물로 사용되길 바라는 듯 보였습니다. 사실 민주주의에 대한 확신과 신념은 원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사상적 본류라는 측면(에드먼드 버크가 살던 영국 의회를 생각해 본다면 말입니다)에서 목숨과 같이 체화해야만 했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현실에서는 많은 진보주의자들과 좌파 이론가들만이 '민주주의의 실질적 회복'을 더 바라고 염원하는 실정은 단순한 정치적 인지 부조화에서 뿐만 아니라, 순탄치 않은 현실을 반증하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이런 엄혹한 현실이 더욱 가중되어 시민들에게 고통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글 중후반부에, "한 도시의 평화가 오직 굴종만을 배우도록 가축처럼 인도된 국민의 무기력에 달려 있다면, 그 도시에는 도시라는 이름보다 고독이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는 로르동의 서사는 읽는 내내 마음에 와닿았는데요. 작금의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 문장을 통해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정치의 제반 활동이 그 정치적 변용에 의해 추동된다면, "내가 당신들을 위해 이렇게 육체의 힘과 정념이 깃든 관념의 실체화로 움직이고 있으니, 당신들은 마땅히 나에게 돈을 지불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소심한 당신들의 정념을 내가 실체적으로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는 현실과 같은 소설을 로르동의 이 철학적 논저로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지독한 현실 인식을 증명하는 것이 아닌가 글 말미에 잠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신자유주의와 극단주의가 뒤섞인 흔한 논리처럼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