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복지국가 - 약탈, 인종 학살, 공범들
괴츠 알리 지음, 최준영 옮김 / 생각의힘 / 202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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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독일 바덴뷔르템 주, 하이델베르크에서 태어난 괴츠 알리는 1600년대 프로이센 궁정의 시종장이었던 개종 터키인의 부계 후손이기도 합니다. 그는 독일 언론 학교를 졸업한 후, 베를린 자유 대학에서 역사와 정치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까지, 그는 독일 좌파 학생 운동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요. 그의 개인적 회고를 통해, 이때 참여한 세대들이 "1933년 세대"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알리의 주요 관심사는 홀로코스트 역사와 나치의 인종적인 정책 수립에 관여한 인물들의 비판적 연구입니다. 특히 그는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 해결책"에 관한, 초기 정책과 행정적 차원의 실행까지, 그 전반을 연구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연구는 여러 학자들로부터 인용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중 일부의 학자는 비판적이기도 한데요. 특히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J. 에반스는 무엇보다 면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그의 경제적 환원주의에 대한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다른 학자들과는 달리, 2차 대전 당시의 나치 정권의 판에 박힌 인종주의적 성격보다 이들이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들을 최종 처분한 것이 중요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Hitlers Volksstaat : Raub, Ressenkrieg und nationaler Sozialismus"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이미 저자인 괴츠 알리가 수차례 언급하고 있지만 유대인들과 관련된 '최종 해결'과 그들의 재산 몰수와 관련된 통치 자료가 조직적인 문서 소각에 의해 거의 사라졌다는 점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이는 과거 연합군에 항복한 일본 제국이 경성, 그러니까 서울 총독부의 보관된 통치 자료들을 한반도를 떠나기 전에, 철저히 소각했다는 점 역시, 언급하고 싶은데요. 역사 연구와 관련된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이 앞선 사례들처럼 철저하게 제거되었다 하더라도 시대의 기억들은 여전히 남기 마련입니다. 이는 국내에 있는 일부 친일에 가까운 학자들이, "아무리 일본 제국을 거악巨惡으로 취급하더라도 당시 제국을 이루던 관리들과 통치자들이 상식을 벗어난 일을 했을리가 없다"는 등의 발언을 하는 것을 봤을 때, 이들이 기대고 있는 것은 분명 조선총동부에 있던 통치 자료들의 소각으로 인한, 사료 부족일 겁니다. 증거를 대라는 말은 경우에 따라, 그것을 위선적으로 입에 담는 자들에게는 그만큼 달콤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영상 매체와 각종 영화 및 드라마 등을 통해, 아돌프 히틀러와 그가 만든 나치 정권에 대한 일정의 인식 등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특히 600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가스실에서 살해한 역사적 사실은 그만큼 나치에 대한 인종적 인식을 갖게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독일의 패전 후,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영양 실조로 깡마른 유대인들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그만큼 유대인 학살과 관련된 인상은 비참할 정도로 전형적입니다. 하지만 이 논저의 저자인 괴츠 알리는 당시 나치 정권은 프리드리히 니체의 그림자를 드리운 소위 '아리안화'의 인종적 이미지 뿐만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정권과 특히 독일 제국 내의 중간 계급 이하의 국민들이 유럽 내의 유대인 말살을 통한, 경제적 및 재산의 이익을 분명하게 누렸다고 분석합니다. 글 1장에서, 명확히 드러나고 있지만 1933년에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했을 때, 요제프 괴벨스가 35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28세, 알베르트 슈페어는 27세, 아돌프 아이히만이 26세, 요제프 멩겔레는 21세, 하인리히 힘러와 한스 프랑크는 32세, 헤르만 괴링 역시, 이제 40세가 되었을 뿐인데, 이들이 다른 나이 많은 세대들과 달랐던 것처럼, 당시 독일인들은 젊은 제국에서, 재빠르게 도덕적 양심이 끼치는 제약을 벗어 던졌다는 서사 자체는 의미심장합니다. 이 지점의 도입에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제3제국을 이끌었던 나치들과 마찬가지로 대다수의 독일 국민들도 이들의 역겹고 혐오스런 정책에 동조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단순히 정권에 대한 지지를 넘어, 당시 독일인들이 그야말로 극악한 범죄 행위에 적극적 동참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독일은 1930년대 초반의 짧은 경제적 호황기를 거쳐, 1918년의 트라우마를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해가 될, 1938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독일은 재무장과 다름 없는 군비 증강 계획을 교묘하게 실행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음을 통한, 우회 자금 조달로 당시 제국은행 총재였던 샤흐트가 고안했던 발상이었습니다. 동시에 군은 1939년에 110억 마르크에 달하는 금액을 요구했는데 당시 제3제국은 경상지출을 감당하기 위해 국채를 발행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편법이 항상 유용할 수는 없어서 1938년 4월 26일,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들은 5000 마르크를 초과하는 모든 개인 자산을 세무 당국에게 신고"하도록 의무화하기에 이릅니다. 저자인 알리는 바로 이때 '유대인들의 소득 신고'가 1937년에 히틀러가 초안을 잡은 '독일 내의 아리안 민족 이외의 다른 인종을 분류'하려는 시도와 어느 정도 맞물려 있는 정책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아니더라도 독일 국민을 통한 징세는 정권의 아킬레스 건이라 여겼던 히틀러와 괴링에게, 독일 내에서 생산 활동을 하고 있던 유대인들의 존재는 이들의 인종적 편견 만큼이나 이익을 가져다 줄 유의미한 자산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1937년 말까지 독일 유대인들의 재산이 체계적으로 몰수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첨언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당시 제3제국의 경제 정책을 보다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유럽 국가들도 공통된 이해를 갖고 있었던 '인플레이션에 따른 통화 발행'을 매우 경계했다는 부분을 전제로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독일이 재무장 시기에 국채 발행을 통한 간접적 소요 충당은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이기도 했지만 이 메커니즘은 일종의 '빚의 돌려막기'로 보면 지나치지 않습니다. 특히 2장에서 나치 정권의 정치적 이해이기도 했던, "세수원으로 활용하고 싶은 저소득 계층에 대해서는 어떠한 강력한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맥락의 문제 역시 다시 한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 시기의 나치는 소련의 공산주의 혁명에 유럽 국가들이 대항해야 한다는 명목을 걸기도 했지만 원천적으로 저소득 계층과 하위 계급에게 세금을 더 거둬들여 종래에는 국내 내부에서 이들이 '혁명의 원인'이 되는 것을 경계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 지점에도 아리안 민족은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그 역겨운 이데올로기와 맞물려 있기도 합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허를 찔러, 벨기에와 네덜란드를 점령한 나치는 현지에서 군에 필요한 비용을 조달하게 됩니다. 이것은 일종의 '주둔 비용'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독일군이 소요하는 비용 전반을 제국의 재무부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프랑 대 마르크'와 같이, 고정된 환율을 근거로, 직접적 현지 화폐로 조달하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인용되고 있는 당시 경제학자 게오르크 홀츠아우어는 '점령군 재정 운영의 표준적 관행'이 될 방안인, 현금을 포함한 현지 조달과 그에 따른 체계적인 징발과 수탈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나치 정권의 교묘한 군대 운영 방식을 목도할 수 있습니다. 즉, 군대에 소요되는 비용은 독일 국민과 제국 재무부가 전부 대는 것이 아니라, 제국군이 국외에 주둔하게 될 경우, 현지 주둔 비용을 점령 지역의 국가가 철저히 부담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 언급되는 벨기에의 경우, 독일군의 주둔 비용을 대기 위해, 국가 차원의 예산 확보가 필요했습니다.

지금도 독일인들에 대한 여러 이미지들 가운데, '철저한 계산성'은 꼭 언급될 정도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당시의 나치 정권 역시, 돈과 재정에 관련된 문제 만큼은 매우 철저했는데요. 유럽 내에서 자신들의 평판과 합리적인 외양 유지를 위해, 자신들의 통화인 마르크화 뿐만 아니라, 현지 통화로도 비용을 받는 식의 복잡한 계산을 거쳤습니다. 이는 여기에 소개된 벨기에, 네덜란드, 비시 프랑스 정부 역시, 이러한 쳬계에 놓여 있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에 개발된 '새로운 지불 수단'인 제국신용금고 증서 (RKK) 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RKK 증서는 마치 지폐처럼 생겼는데 50페니히부터 50마르크까지 다양한 액면가로 발행"되었습니다. 일종의 어음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제3제국 재무부가 보증하는 어음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특히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 은행들은 이 RKK 증서를 프랑 화(貨)로 교환하도록 하는 '강제 법령'이 시행되었습니다. 이는 점령국을 아주 철저하게 수탈하겠다는 나치 독일의 계산이 기저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1939년 9월 3일, 당시 독일 병사였던 하인리히 뵐은 "25 마르크라는 엄청난 급여"를 어떻게 써야 될지 모르겠다고 쓰기도 했는데요. 전쟁 초기에 독일 병사들은 한 달에 최대 50마르크까지 송금 받을 수 있었는데 가족이 육군 우편서비스를 통해 돈을 보내면 병사들은 주둔한 국가의 통화로 지급 받게 됩니다. 또한, 주둔 비용이라는 명목으로 병사들에게 들어가는 급여와 계속 늘어나는 가족들의 송금액은 현지 쇼핑 매대를 동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나치 역시, 독일 병사의 사기 유지를 위해, 이러한 쇼핑을 묵인했고 이렇게 보내진 유럽 각지의 상품은 가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동시에, 독일 내에서 '암시장'이 열릴 정도로, 전쟁 특수를 누리게 됩니다.

이러한 가운데, 1941년 12월, 나치당의 이데올로그 알프레드 로벤베르크는 파리와 그 밖의 "서유럽의 모든 점령지"에서 "도주했거나 도주 중인 유대인들의 가재도구를 몰수"하자고 제안합니다. 이는 곧 히틀러에게 승인되어, 유대인들에 대한 '최종 해결'에서 군에게 국한된 책임을 반박하는 사례이기도 했습니다. 독일 적십자사 총재였던 쿠르트 폰 베어는 "침구, 식탁보, 리넨, 도자기, 식기, 은 식기, 가전제품 등 희소한 생활용품의 배분"을 총괄합니다. 이들 물품은 배분의 첫 작전에서, 연합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오베르하우젠, 보트로프, 레클링하우젠, 뮌스터, 뒤셀도르프, 퀼른, 오스나브뤼크, 함부르크, 뤼베크, 카를스루에 등지"로 보내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생활 용품을 강제 징발하여, 독일인들에게 배분한다"는 아이디어는 실로 끔찍할 정도입니다. 가스실에서 최종 처분을 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재산을 괴링이 강조한 '순수한 아리안들'에게 전리품처럼 배분된다는 독특한 행정 체계는 당시에 수혜를 입었던 독일인들이나 그들의 후손들이 히틀러와 그 일당들이 벌인 '유대인들의 절멸'에 어떠한 감정을 가지게 될지 짐작하게 만드는데요. 이때의 혜택을 전해 들었거나, 자신의 친족이 그 해당인 일 경우, 결코 그 사실을 입 밖으로 내뱉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들의 말살'을 대하는 독일인들의 양심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대단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역사의 실체적 진실은 그 이면을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매번 맨 얼굴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잔인할 정도로 말입니다.

1940년 5월, 벨기에를 신속히 점령했던 독일 군부는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원수 명의로 "유대인을 경제 영역에서 신속히 배제하고, 유대인 기업의 재고 물품은 군이나 제국을 위해 처분해야 한다"고 명령합니다. 또한 나치는 점령지 국가였던 벨기에와 네덜란드 등을 공범으로 끌어들이는 형태로 "네덜란드 금융 관료들을 공범으로 끌어들이고, 다소 억지 논법이긴 하지만 네덜란드의 유대인 재산을 직접 몰수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펼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독일군이 튀니지에 상륙하자마자 튀니지의 여러 유력 유대인 인사들을 체포했습니다. 이들 튀니지 유대인들은 공군 기지 건설에 투입한 노동자들을 유지하는 비용으로 3,100만 프랑이 넘는 돈까지 부담해야 했습니다. 결국 나치 정권은 유대인들을 절멸로 이끌기 전에, 이들 모두가 독일 민족과 정부에 '속죄금'을 낼 필요가 있으며,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파리 내의 유대인 재산 몰수를 앞선 속죄금 납부의 명분으로 삼았습니다. 프랑스 정부 역시 이러한 속죄금 징수 명분에 따른 이해를 공유할 수 있도록 부추겼는데요. 다만 독일군이 그리스를 점령했을 당시, 살로니카에 있던 유대인들, 총 4만 6000명을 절멸 수용소인 아우슈비츠까지 수송하는 데 소요된 193만 8,488마르크를 누가 부담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재차 느끼는 것이지만 실로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이미 글의 지면에서,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수송될 때, 이들이 먹을 식량과 식수의 제반 비용까지 쏠쏠하게 챙겼던 것이 저 나치들인데, 앞선 일례로 밝혀진 친위대와 살로니카 군정 사령관의 비용 논쟁은 이들이 얼마나 양심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괴물들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 논저를 관통하는 저자의 일관된 주장은 이렇습니다. 과거 제3제국을 통치했던 나치들 및 나치주의자들이 그저 인종주의에 눈이 먼, 미친 자들이 아니라, 철저하게 계산된 현실 인식을 갖고 있던 자들이라는 규명된 본질이었습니다. 즉, 이들은 독일 전체를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논리 하에 국가를 운영했고, 특히 국내 인플레이션 관리에 철저한 계산을 기울였으며, 국가 재정에 소요될 수 있는 대체 수단이 있다면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독일인들을 마치 프리드리히 니체가 묘사한 것처럼, 아리안 민족이라는 우위의 인종적 이데올로기 자체에 몰입한 역겨운 국가적 정책을 도출시켰지만, 그보다 그 안의 본심은 철저히 이익적이고 계산적이었다는 면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소위 참혹한 '유대인 최종 해결'은 단순한 인종적 배제 및 강제적 분리에서가 아니라, 유대인 전부를 철저히 이용할 수 있겠다는 합리적 숙고를 통해 실행된 통치 행위 과정 그 자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금니'까지 모조리 축출되고, 가스실로 보내져 그 시신마저 화장되는 유대인들의 비참한 현실에 몇 번이나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런 서사가 제법 익숙한 저에게도 말입니다. 글의 후반부인 11장에서 노골적으로 명시되지만 "독일과 피점령지의 경제 관료들이 유대인 자산을 전시 국채로 전환하여 유대인들을 마치 참전국이나 피점령국의 채권자로 만드는 것" 자체는 그저 눈속임에 불과한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역겨운 짓이지만 이들 모두가 "집단학살의 결과로 직접적 이익을 얻었다는 사실과 그로인한 집단 학살의 성공에 마찬가지로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다"는 설명은 그만큼 괴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7장을 거쳐, 이내 등장하는 "모두가 이익을 거뒀다"는 문장 자체는 이러한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일관된 저자와는 달리, 역사학자 애덤 투즈는 괴츠 알리의 이해가 때로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 역시 저자가 인용하기까지 하는데요. 알리는 전시에 나치가 끝내 유대인들의 재산을 통해, 거둬들인 직접적인 세수 증가가 70%에 달한다고 판단했지만, 투즈는 그것이 과장된 수치라고 밝혔습니다. 물론 투즈가 제시하는 수치는 당시 제3제국의 국가 채무를 모두 포함하여, 제국의 국가 재정 비율을 따지게 될 때, 도출될 수 있는 수치이기도 합니다. 물론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그저 외형적 숫자가 아니라, 그만큼 나치 독일이 유대인들의 '사후 재산'에 대한 철저하고 불법적인 수탈에 확정적인 이익을 얻었다는 진실입니다. 많은 공범들을 양산하면서 까지 저들은 매우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점일 텐데요. 저는 그런 측면에서 괴츠 알리의 이 논저가 많은 이들에게 읽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현지 유럽 사회에 동화된 많은 유대인들을 아무런 죄도 없이, 편의적으로 인종 청소에 나서, 사후 그들의 생활 집기, 옷, 귀금속 등은 물론 채권과 증권 및 현금 자산까지 남김없이 뽑아낸 히틀러와 그의 정권에서 부역한 자들의 죄과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이 책의 자료와 나치 정권의 핵심 관료들의 행적등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현재의 독일 국민들이 어떠한 죄업 위에 국가를 다시 재건하게 되었는지, 이를 분명하게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에 대한 사과 뿐만 아니라 명확한 죄를 이들 모두가 재인식할 필요는 충분히 있어 보입니다.       


끝으로 독일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유대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나치의 복잡하고도 일관된 작업은 현재 우리 역사계에 있어 단순한 인종주의적 망상 또는 극도의 나르시시즘적 실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어떤 역사학자들은 이를 1차 대전 전후로 폭발적인 폐쇄성을 드러냈던 민족주의의 배타적 발현의 한 사례로 제시하고 있기도 한데요. 저는 10장에서 다시금 드러낸 유대인들의 마지막 행로, 즉,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이들의 삶이 강제적으로 끝나게 된 진정한 연유를 밝히는 것이 우리 세대를 포함한 이후 사람들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역시도 "모든 연구자들이 주목해야 할 문제는 그동안 알려진 대중적인 이데올로기 외에 어떠한 구조적 요인들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려 하도록 만들었는가"를 규명하는 일이라고 그 과제를 11장에서 담담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전유럽에서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게 되는 과정에서 독일 뿐만 아니라,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스,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지의 당시 경제 관료 및 현지 정책 관련자들의 책임이 적지 않다는 사실 자체는 유대인 절멸과 이들의 불법적인 재산 확보에 대한 공통의 범죄를 드러내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기간에 그리스에서 유대인들에게 몰수된 최종적 금 수십 톤이 증발된 사실은 이처럼 분명한 증거로 남았습니다. 이것을 파헤치기 위해서라도 역사가들의 새로운 의무로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의 명분은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이미 몇 가지 가설을 통해, 당시 중립국 스위스의 막대한 돈세탁 가능성을 마찬가지로 이 책을 통해 다시 고찰해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NARA)의 자료가 당시 나치가 약탈한 유대인 출처의 금이 전쟁 중 독일 제국 은행에서 스위스 국립은행으로 넘어갔다는 사실이 확인 되기도 했죠. 이 나치 골드에 대한 스위스 당국의 책임 있는 발언이 나오지 않고 있는 점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줍니다.  


  

이 책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평범한 독일인들이 얻은 이익에 주목함으로써, 그동안 기울어져 있던 역사 해석의 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이다.

베를린의 정책 입안자들은 두 가지 철칙에 따라 움직였다. 전쟁 중 누군가가 굶주려야 한다면 독일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전쟁 중 인플레이션이 불가피하다면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유럽인들을 착취하기 위해 자신들이 동원한 온갖 수법이 과거의 굴욕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었다.

베를린 정권은 1933년에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1935년에는 베르사유 조약을 공식적으로 파기했다. 이 두 조치는 정권의 인기를 더욱 높여주었다. 대다수 독일인의 눈에 이 조치들은 1차 대전 이후 독일에 "전쟁 책임이 있다는 거짓말"과 "치욕적인 평화"를 강요하고, 1920년대 내내 독일을 괴롭히고 모욕해온 세력에 맞서겠다는 의지로 비쳤다.

얼마 후 경제부 수석법률고문인 알프 크뤼거는 이 칙령을 "독일 경제에서 유대인을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배제하기 위한 선행 조치"로 규정했다.

독일의 재정 상황이 날로 악화되자, 베를린의 나치 지도부는 체코슬로바키아 병합과 국내 유대인 박해를 서둘러 밀어붙이려 했다.

사회 개혁을 추진하려는 의지가 나치당 내에서도 집단학살 정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던 지도자들에게서 가장 강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나치 지도부는 관료들에게 "전선 병사의 가족들이 겪는 고충과 필요를 충분히 이해하고, 모든 국민에 대한 특별한 책임을 가지고 행동하라"고 분명하게 지시했다.

1934년에 태어난 한 군인의 딸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시절의 작은 기쁨 중 하나는 아버지가 동부전선에서 보내주시던 소포였어요. 리가에 계시던 동안 보내주신 질 좋은 버터 통조림과 향이 좋은 홍차가 특히 기억납니다."

독일군이 전장에서 참담하게 패배하던 1943년 한겨울에도, 레닌그라드 인근의 제18군 병사들은 군 우체국 통계에 따르면 300만 개가 넘는 소포를 본국으로 보냈다.

그해 10월에는 베를린, 퀼른,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뒤셀도르프에서 유대인 8,000 명이 강제로 (폴란드) 우치 게토로 이송되었다. 10일 후에는 브레멘, 함부르크, 베를린, 빌레펠트, 뮌스터, 하노버, 카셀, 프랑크푸르트 등 이미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거나 공습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은 도시에서 1만 3,000명이 추가로 추방되었다. 이들은 리가, 카우나스, 민스크의 게토로 보내졌다.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 중 일부는 소련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독일과 프랑스의 공동 투쟁을 위해 가구를 징발했다는 구실을 내세워, 국제법을 위반한 단순 절도 행위를 은폐하려 했을지도 모른다.

네덜란드 경제를 담당한 독일 관료들은 RKK 증서를 이용한 독일 측의 비정상적인 대량 매입을 모두 점령비용으로 처리해 네덜란드 정부에 떠넘기는 일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다.

이미 가장 비옥한 지역을 독일군에 빼앗긴 비교적 작은 나라 세르비아는 추가로 10만 톤의 밀과 옥수수를 납부해야 했다. 프랑스와 벨기에에도 비슷한 명령이 하달됐다. 독일인이 유럽 전체를 대신해 피를 흘리고 있다는 명분 아래, ‘반볼셰비키‘투쟁에 기여하라는 것이었다.

1942년, (친위대의) 힘러는 제국은행 총재 발터 풍크와 논의하여 유대인들이 절멸수용소로 끌려갈 때 지녔던 금, 보석, 현금을 모두 제국 은행에 인도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모든 연구자들이 주목해야 할 문제는, 대중적인 인종주의 이데올로기 외에 어떤 구조적 요인들이 독일군으로 하여금 유럽 대륙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려 하도록 만들었는가를 규명하는 일이다.

독일이 소련 점령지에 수립한 극도로 잔혹한 통치 체제는 비록 대가가 현지 주민들의 기아와 빈곤, 강제노동, 죽음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평범한 독일 국민의 장래 생활수준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라는 논리로 정당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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