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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길 - 경제학은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ㅣ Philos 시리즈 40
조지프 스티글리츠 지음, 이강국 옮김 / arte(아르테) / 2025년 4월
평점 :
조지프 유진 스티글리츠는1943년 2월 9일, 미국 인디애나 주 레이크 카운티의 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나다니엘 데이비드 스티글리츠로 보험 판매원이었으며, 모친인 샬럿 스티글리츠는 퍼듀 대학의 교사였습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애머스트에 위치한 사립 인문 대학인 애머스트 대학을 졸업한 스티글리츠는 이후 MIT에서 석사 과정을 밟게 됩니다. 1965년이 되자 미국 국립과학재단 (NSF) 의 연구 보조금을 받은 일본인 경제학자 히로후미 교수의 지도 아래에서 연구를 하기 위해 시카고 대학으로 옮겼으나, 1966년부터 1967년까지 MIT에서 박사 과정을 마쳤고, 그 기간 동안 MIT에서 조교수를 겸임하게 됩니다. 명예로운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를 시작했고, 그곳에서 그는 케인스와 거시경제 이론에 대한 남다른 이해를 갖게 됩니다. 이후 그는 예일, 스탠퍼드, 옥스퍼드, 프리스턴 등을 거치면서 교수직을 역임하는데요. 2001년부터 스티글리츠는 컬럼비아 대학의 경영대학원, 경제학과, 국제공공정책대학원 (SIPA)에서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이런 그는 전세계 학자들로부터 신케인즈주의 경제학자로 알려져 있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의 경제 이론을 그런 몇 단어로 정의할 수 없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그의 긴 이력들 가운데, 1995년부터 1997년까지,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대통령 경제자문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세계은행에서 수석 부사장 겸 수석 이코노미스트로 자리를 옮기게 됩니다. 특히 2001년에는 정보의 비대칭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연구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합니다. 2008년 뉴욕발 세계 금융 위기가 발생하자 오바마 대통령에게 경제 자문을 제공했지만 그는 당시 오바마 행정부의 은행 구제 계획과 관련된 실무자와 그의 조직이 당시 월스트리트와 한 배와 다름없다는 것을 알아채고, 이를 서슴없이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10월에는 유엔 총회 의장의 요청으로 '2008년 금융 위기의 원인과 해결책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는 위원회의 의장을 맡게 되었습니다. 특히 주류 경제학을 신봉하는 여타 경제학자들과는 달리 스티글리츠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이것이 구축한 '세계화'에 대한 분명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고, 특히 만연한 경제적 불평등 문제와 OECD의 선진국 클럽이 (UN 이외의) 세계 경제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면서, 개도국들에게 벌이고 있는 초법적 행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Road to Freedom : Economics and the Good Society"로 지난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4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에 앞서, 그동안 접했던 경제학자들 가운데 스티글리츠처럼 신자유주의를 직접적으로 비판한 학자가 있었는지, 책을 일독한 후에 잠시 고민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글의 13장 서두에서, "나는 현재가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너무도 명백해서 신자유주의가 폐기되는 역사의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이미 다른 학자들의 입에서 언급되기도 했지만, "이익은 마땅히 사유화하고 부채와 실패는 공공으로 돌린다"는 2008년 이후의 신자유주의자들의 저 두꺼운 얼굴을 드러내는 표현이 저에게는 마치, "신자유주의의 제2막"으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일전에 마틴 울프도 인정했고 파리드 자카리아 역시 비슷한 맥락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만, 2008년의 대위기 시점으로 월가의 경제 엘리트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했던 '교리'에 완전히 반대되는 7000억달러에 이르는 '공적 자금'을 수용하게 되면서, 사실상 신자유주의는 죽었다고 봐야했습니다. 하지만 스티글리츠의 도출대로 이 신자유주의가 결국에는 포퓰리즘이 성장하는 데 일조하게 되었으니, 그 자체로 쉽게 믿겨지지 않는 역사적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의 등장이 그 왜곡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1970년대 혹은 1960년 후반부터, 미국의 공공지출 증가와 기업들의 영업 이익의 급격한 감소로 말미암아 이것의 타개책이 필요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사실상 프랭클린 루즈벨트의 뉴딜에 대한 완전 일소는 물론, 그동안 미국에서는 노동 조합을 성공적으로 안락사 시킴으로써 부유층과 기업 경영자들의 요구가 정치권에 직접적으로 먹힐, 제반 사항이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미 공화당과 밀턴 프리드먼과 같은 당시 자유 시장주의자들의 연계 역시,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게 되자, 전반적인 체제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글에서 스티글리츠의 분석대로 처음에는 시장을 완전히 자유롭게 만들고 (이면에는 독점 자본주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그 파이를 키우게 된다면 사회 역시 혜택을 입을 수 있다는 식의 낙수 효과 이론을 설파하게 됩니다. 물론 이 '낙수 효과'는 명백히 허위임이 밝혀졌지만 당시 그 주장의 반향은 분명했습니다. 당시 밀턴 프리드먼을 직접 대면했던 스티글리츠는 프리드먼에게 그가 왜 그렇게 생각하고 주장하는지에 대한 '증거'를 제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결국 제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와 프리드먼이 어떤 건전한 토론이 되었을지는 불명확하지만 이미 당시에 '거두'였던 프리드먼과 이제 갓 학계에 나온 스티글리츠의 위상은 명백하게 달랐을 겁니다.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여실히 주장했던 '자유'와 우리의 일반적인 '자유'가 완전히 다른 개체임을 증명합니다. 그의 책에서 수차례나 등장하는 문장인 "한 사람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부자유이다." 혹은 "일부에게는 자유를 주고 일부에게는 자유를 빼앗는다"거나, "나의 자유는 결국 다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과 같다"는 유사한 맥락의 서사는 경제학자인 그가 신자유주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11장에서 명시되고 있지만 미국은 신자유주의와 관련된 자유 시장과 작은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일방적인 내면화가 강고하여,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분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에 대한 미국인들의 독특한 정서, 즉 자유에 대한 과도한 감정 이입을 하는 동시에, 개인주의와 이기적 탐욕, 및 욕망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서사가 이들이 말하는 자유와 맞물려, 아주 잘 들어먹혔다는 점에 있습니다. 일전에 크리스 헤지스와는 '복지'와 관련된 미국인들의 부정적 서사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요. 마틴 길렌스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정부의 돈으로 살아간다"는 그 대체할 수 없는 인식적 거부감은 자신의 삶에 대한 결정, 혹은 좀 더 뒤로 가서 펜데믹 시절에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같은 최근의 맥락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물론 신자유주의자들의 '자유'는 정부의 개입 없는 원천적인 시장의 자유를 중시하는 가운데,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의 자유는 체제를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합니다. 그런면에서 샹탈 무페가 말한 우파와 신자유주의자들의 결탁은 그것대로 이익화의 과정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스티글리츠 역시, 글 후반부에서 "보수 우파의 승자 독식 사회에 대한 지지"는 부와 권력을 독점한 계층에게 있어서 "작금의 체제는 결코 불만일 수 없다"는 것을 외려 더 밝히는 꼴이라고 보여집니다. 미국 사회는 이미 신자유주의의 대한 내면화가 정치 및 사회에 깊게 뿌리 내리고 있고, 미국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무엇보다 "충분한 경제적 소득 위에서만 자유가 주어질 수 있다"는 환경에 놓여 있음에도 그저 시민들이 뜬구름 잡는 '자유 타령'으로 일종의 관념화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입니다. 스티글리츠가 전체적인 논증에서 신자유주의가 결국에는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을 초래하고 말았는데, 미국 사회에서 이 부분에 대한 건전한 논의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신자유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식으로 치부되기 일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월스트리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는 미국 재무부의 단면을 통해,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재무부가 마치 월스트리트의 한 지점으로 여겨질 정도이다"라고 냉소하기까지 했는데요.
물론 이러한 사회적 기저 양상은 지금도 분명한 모습인데 신자유주의 자체에서 이 체제가 요구하는 '시장 자유'라든지, 자유 무역, 공정한 경쟁과 관련해서는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의 출현으로 간단히 말하자면, 예측할 수 없는 다른 양상으로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기존의 세계 경제에 관한 자유 무역의 기조가 도널드 트럼프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다고 후술 하고 있었습니다.이처럼 2장에서 저자는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는 손실이 사회화되고 이익은 사유화 되는 모조 ersatz 자본주의"라고 밝히고 있었는데요. 더 빠른 성장과 경제적 안정은 이미 허위임이 드러났지만 펜데믹이나 기후 변화 혹은 시장의 독점화와 같은 외부효과로 인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이론상에서의 아주 혁력한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없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자본주의가 통제할 수 없는 외부효과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입장은 명백합니다. 경제학이 숫자에 기반한 설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면 외부효과 자체는 통제할 수 없는 변이이기도 합니다. 이는 숫자로 분석하거나 더 나아가 통제선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군다나 4장에서, 보수 우파나 주류 경제학 (즉, 신자유주의)이 인간의 본성을 오도했지만 여기서 드러난 바와 같이, 다수의 시민들이 '계몽된 사익'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공공의 이익에 관심을 갖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저는 그래서 일찍이 밀턴 프리드먼이 정치적 자유 만큼이나 경제적 자유도 중요하다는 인식의 맥락이 그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정치적 근본에 대한 분석이 제대로 이뤄지지도 않은 시점에서 시장을 옹호하고자 경제적 자유를 섣부르게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스티글리츠의 말처럼 경제학자들과 보수 우파가 생각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이처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신자유주의자들이 애덤 스미스를 이렇게 편파적으로 해석한 것이 시장과 경제를 위에 놓고 그 밑에 인간과 사회를 놓은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물론 극우 포퓰리즘이 등장한 이 시점에서 신자유주의자들이 과연 무엇에 어떤 목적으로 봉사했는지는 어느 정도는 명확하지만 경제학이 인간을 초월한 물리학과 같은 위상을 바란다는 일부 경제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감안해 본다면, 이상하게도 소름끼치는 그림이 하나가 절로 그려지게 됩니다. 시장은 결코 종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앞서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신자유주의들의 반복되는 주장은 원천적으로 정부의 시장 개입을 차단하고 이에 사회가 경제에 요구하는 것들을 마땅히 시장이 해줄 수 있을 것이라는 '메가폰의 외침'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자는 글의 5장의 비판적 논증, 특히 금융 자본의 과도한 지대 추구, 그리고 이어지는 11장의 신자유주의적 금융 자본주의가 초래한 사회적 위기 등을 분석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자인 스티글리츠는 "막대한 소득을 올리고 있는 부유층의 소득 상당 부분이 도덕적 정당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위 계층의 불평등 한 소득 역시,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최근에 읽었던 케빈 필립스의 글도 신자유주의가 종래에 없었던 금융의 기술적 시도인 증권화와 더불어, 금융 자본주의의 기술적 맥락 등은 결국 사회의 심각한 양극화를 불러 일으켰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9장에서 도출된, "엘리트들 가운데 일부가 미디어를 장악하여 사회적 메타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데 불균형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주장을 강조합니다. 즉,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사회 전반을 심각한 양극화와 경제적 불평등 속으로 몰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의 주류 산업이 된 미디어 업계가 미국 헌법이 그토록 강조하는 '표현의 자유'에 대한 중요한 비판적 기능을 상실하게 된 원인이 바로 시민들이 체제에 순응하게끔 교묘한 논법을 지속하고 있는 이들 미디어 환경도 한 몫을 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부분은 약간의 논외이지만 최근의 읽은 캐서린 스튜어트의 글에서 현재 미국 내 극우주의자들의 자아 정체성이 너무나 비대하여, 소위 "헌법 위에 자신들이 있다"는 식의 기술이 보여주는 실체는 마치 주류 엘리트들과 '그들이 원하는 체제에 대한 해석'이 무엇보다 중요할 수밖에 없다는 전제와 맞닿아 있습니다. 작금의 미국 내 현실에 대해 스티글리츠는 글의 여러 부분에서. "현재 미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의 등장은 이 신자유주의가 기여한 바가 크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끝으로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이라는 저 아름다운 표현은 결국 신자유주의 체제에서는 그저 공허한 외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종종 정직하지 못한 시민을 만들어 냈으며 신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3부 초입의 문제는 결코 과장이 아닐 겁니다. 저자는 이미 밀턴 프리드먼과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주장의 명확한 근거나 객관성 없이 이들이 레토릭에 능한 왜곡된 달변가임을 밝히기도 했었는데요. 글 중간에 '위선이 판치는 사회'에 대한 스티글리츠의 평가는 특히 엘리트 계층이 자신들의 부와 권력에 대한 어떠한 정당성 내지는 필수불가결한 원칙으로 포장하는 등의 위선을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는 노엄 촘스키의 말마따나 다수의 시민들의 이익에 봉사하지 않는 지식인들의 존재는 물론, 신자유주의가 개인의 이기심과 욕망을 마치 '좋은 것'으로 부채질 하면서 기본적 절제를 잃어버린 엘리트들의 존재는 1980년 이후로, 시민의 평범한 삶을 구렁텅이로 몰아 넣었습니다. 저자는 글의 서두에서 밝힌, "(신자유주의자들과) 우파의 자유에 대한 잘못된 개념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다"는 분명한 분석이 바로 이 논저의 제목이 밝히는 바를 명확히 짚어냈다고 보여집니다. 또한, "사회의 일부 사람들은 지극히 이기적이고 권력에 굶주려 있는 만큼", 신자유주의가 인간의 전반적인 본성을 너무 쉽게 치부했으며, 밀턴 프리드먼이 대중을 향해, 교묘하게 말을 건넨 것처럼 소위 많이 배웠다는 지식인들과 이들의 일부가 스스로 부역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숙고할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저자인 스티글리츠가 자본주의 내에서 과도한 지대 추구의 위험성을 목도한 시점의 경계심과 도덕성의 배제를 이뤄낸 '이기심의 권력 추구'가 신자유주의를 더욱 관념적으로 강화시켜 나간 것은 분명해 보이며, 앞선 미국 내 교육이 이런 신자유주의가 주장하는 그들만의 '자유'와 시민의 삶 전반을 '그 안의 삶'으로 교묘하게 내면화 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를 단순히 경제 기술적 측면에서만 해석하려는 자들에게 마땅히 경종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일전에 지그문트 바우만이 경제학이 시민들에게 중요한 학문으로 자리매김한 것이 1세기도 되지 않았는데 많은 이들이 이 '경제학'을 우리가 비판할 수 없는 신성 그 자체로 여기고 있다는 점을 제가 보기에는 이를 안타깝게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저는 스티글리츠가 좋은 사회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경제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는 언급이 이상하게도 앞선 바우만의 시선과 오버랩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자가 비판적으로 분석한 신자유주의에 대한 전반이 좋은 사회 더 나은 삶에 있어 전혀 기여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그럼에도 이 신자유주의가 도널드 트럼프가 등장하고 나서야 변질되기 시작했다는 분석된 이해가 뭔가 역사의 아이러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다른 학자들과 달리 저자는 글의 말미에서 여러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그 부분은 따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이데올로기는 규칙을 만들 자유를 포함하여 일부에게는 더 많은 자유를, 다른 일부에게는 더 작은 부여하는 제도와 규칙을 정당화하는데 도움이 된다.
더욱 최근인 2021년 1월 6일의 반란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평화로운 권력이행을 뒤엎기 위한 공격이었다. 당시 많은 공화당원이 유사종교처럼 보이는 집단이 되어 근거 없이 대통령선거가 부정선거였다고 주장했고, 미국의 민주주의와 미국인들이 그렇게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 왔던 자유가 위험에 빠졌다.
어느 정도의 신뢰 없이는 경제가 잘 돌아갈 수 없으며 모든 것이 소송에 달려 잇는 세상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다.
불평등이 (엄청나게) 확대되더라도 가장 부유한 사람들의 이득이 모든 타인들에게 흘러내려 모두가 이득을 얻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더 빠른 성장과 더 높은 생활수준이 널리 공유될 것이라는 신자유주의의 장밋빛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어떤 형태로든 사기나 착취가 일어나지 않는 곳은 찾아보기 어렵다.
프리드먼과 같은 보수 성향의 경제학자들은 자기 이념에 너무 집착하여 기초적인 이론적 결과를 받아들이기를 꺼렸다.
그들은 소득과 부의 분배에 반영된 것처럼 고삐 풀린 시장과 기존의 권력관계를 옹호하려 했다.
그들은 경제가 본질적으로 경쟁적이어서 착취가 존재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경쟁 패러다임에서 벗어난 이러한 일탈의 중요성을 경시했다.
경제학은 오랫동안 물리학처럼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규범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과학이 되기를 열망했다.
우파가 추진하는 이러한 규칙과 규정 (그들이 암묵적으로 사회 계약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항)은 사회의 행복과 권력과 부의 분배에 명백한 결과를 초래한다.
공적으로 제공하는 사회적 보호에 대한 많은 반대는 집단행동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정부가 언제나 비효율적이라는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의해 추동된다.
만약 그것이 도덕적 정당성이 결여된 방식으로 정의되고 할당(또는 재할당)된다면 재산의 소유에서 나오는 소득에도 도덕적 정당성이 없다.
미국에서는 회사가 합법적으로 독점력을 획득하면 약품이 필요한 암 환자나 보험회사로부터 얼마든지 높은 가격을 매겨 강탈하는 등 회사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할 수 있다.
우리의 다윈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는 노동자들에 최소한의 임금을 지급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며 무자비해야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가 승리한 시대에 이들은 매우 성공적이었고 자유에 관한 그들의 프레임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불행히도 플랫폼 기업들은 종종 협조적이이지 않았는데 실제로 그들은 잘못된 정보의 단속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 대체로 저항하며 그 결과로 발생한 피해로부터 책임지지 않는 자유를 요구해 왔다.
나는 평등, 더 정확하게는 부자의 희생으로 가난한 사람의 소득을 늘리는 것은 또한 가난한 이의 자유를 증대하고 부자의 자유를 축소한다고 주장했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의 양극화를 심화시켰고 이기적이고 물질주의적이며 종종 정직하지 못한 시민을 만들어 냈으며 신뢰를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주어진 양의 재화가 더 균등하게 분배되는 사회가 그 재화가 소수의 사람에게만 돌아가는 사회보다 더 정의롭고 더 좋은 사회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 수십 년간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 혁신 대부분은 기초과학의 토대 위에 서 있는데 흔히 정부가 자금을 지원하고 수행한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동이 한 부문에서 다른 부문으로 이동하는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가정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현재가 신자유주의의 실패가 너무도 명백해서 신자유주의가 폐기되는 역사의 순간이 되기를 바란다.
밀턴 프리드먼은 자유시장의 사도였고 로널드 레이건과 마거릿 대처 같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주장을 제시하며 엄청난 설득력을 발휘했다.
그때도 지금도 권위주의는 큰 정부를 지닌 사회민주주의 국가가 아니라 극심한 불평등과 높은 실업률로 특징지어지는, 정부가 너무 작은 역할을 한 국가에서 발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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