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촘스키, 우리의 미래를 말하다
노암 촘스키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황금나침반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1928년 12월 7일, 미국 필라델피아 이스트 오크 레인의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독자적 민족 집단인, 아슈케나지 유대인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노엄 촘스키는 개혁적 지식인으로, 자신의 조국에서는 철학자, 언어학자, 정치평론가, 사회 비평가 등으로 명성을 쌓았고, 또한 분석 철학 분야의 주요 인물이자 인지 과학 분야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읽힙니다. 그는 현존하는 저자들 가운데 가장 많이 인용되는 인물로 언어학, 전쟁, 정치, 신자유주의, 도덕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약 150권이 넘는 논저를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다시 앞으로 돌아와, 그의 부모인 윌리엄 촘스키와 엘시 시모노프스키는 아슈케나지 유대인들로, 부친인 윌리엄은 1913년 징집을 피하기 위해 당시 러시아 지배하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탈출하여, 볼티모어의 열악한 소규모 작업장과 히브리어 초등학교에서 일하다 대학에 진학합니다. 모친인 엘시는 현재 벨라루스 지역 출신의 유대인이었습니다. 1945년, 16세가 된 촘스키는 펜실베니아 대학에서 일반 학위 과정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철학, 논리학, 언어학 등의 학문에 집착합니다. 1947년 한 정치 모임에서 만난, 언어학자 젤리그 해리스와의 만남이 그의 진로를 바꾸게 되는 큰 계기가 되었으며, 이와 동시에 대학 시절의 철학자 헨리 넬슨 굿맨의 영향을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촘스키는 MIT에서 모리스 할레와 로만 야콥슨이라는 두 언어학자와 개인적 친분을 쌓았는데, 이때 야콥슨의 도움으로 1955년에 MIT 조교수 자리를 얻게 됩니다. 그는 1965년 『구문론의 측면』을, 1966년에는 『생성문법론의 주제』를, 또한 같은 해에 『데카르트 언어학 : 합리주의 사상의 한 장』을 포함하여 10년 동안 연이어 자신의 언어학적 아이디어를 세상에 공개합니다. 이때 그는 정치적으로 1962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여 교회와 일반 가정에서 열린 소규모 모임에서 열렬히 이 주제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합니다. 1967년 뉴욕 리뷰 오브 북스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기고한 글 중 하나인 "지식인의 책임 (The Responsibility)은 그에게 지적 명예를 가져다주는 동시에 '반체제 인사'라는 별명도 얻게 만들었습니다. 이와 별개로 촘스키는 오랫동안 나치즘과 전체주의 전반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는데요. 여기에 1983년에 미국이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을 자국의 목적과 이익을 위해 지속적으로 관리 및 이용해 왔다는 주장을 펼친, 『운명의 삼각관계 : 미국,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을 출간합니다. 이에 1988년, 촘스키는 이스라엘의 점령하에 놓인 팔레스타인을 몸소 살펴보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에 방문하게 됩니다. 1990년대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 활동에 매진하기 위해 노력했고, 당시 동티모르 독립 운동에 대한 그의 헌신과 동시에 1995년, 현지에 마련된 동티모르 독립 운동에 대한 강연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이 되자, 촘스키는 MIT에서 은퇴했지만 명예교수로서 캠퍼스에서 연구와 세미나를 지속했습니다. 2011년에는 뉴욕 발 세계 금융 위기에 따른 시민들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을 공개적으로 지지했으며, 캠프에서 연설하고 이와 관련된 논저를 출간하기도 했습니다. 2015년이 되자 촘스키와 그의 아내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거주할 곳을 구입하고 이때부터 브라질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 하기 시작하는데요. 2017년에는 애리조나 대학에서 단기 정치학 강좌를 열기도 했고, 이후로 언어학과에서의 강의와 공개 세미나를 포함한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제 교수직을 맡게 됩니다. 2023년 6월, 갑작스런 뇌졸중을 겪은 촘스키는 아내의 조언으로 브라질로의 완전 이주를 결정하게 됩니다.
이런 촘스키와 대담을 진행한 데이비드 바사미언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으로서, 라디오 방송인이자,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촘스키와 그가 함께한 프로젝트로서의 대담집 출간은 자주 있어 왔으며, 두 사람은 여전히 친분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과거 바사미언은 1978년, 콜로라도 볼더의 KGNU 라디오에서 방송을 시작했고 이후에도 콜로라도 주 알라모사의 KRZA에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바사미언의 글(인터뷰를 포함하여)은 더 프로그레시브, 더 선, Z 매거진에 정기적으로 게재되기도 했습니다. 다만, 2011년에 바사미언은 인도에서 추방되기도 했는데요. 이것의 이유는 과거 잠무 카슈미르의 인권 침해에 따른 그의 보도 때문이라는 점이 알려졌습니다.
따라서, 촘스키의 이 책은 원제, "Imperial Ambitions : Conversations on the Post-9/11 World"로 지난 2005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6년 10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책은 절판된 상황입니다.
원제와 달리 번역된 책 제목이 상당히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촘스키의 이 논저는, 크게 2001년 이후 미국의 팽창적 대외 정책과 그 속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의 확산과 그리고 나날이 위기를 맞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그의 생각을 담고 있는 일종의 대담 형식의 글입니다. 언론인인 데이비드 바사미언이 원고(아마도 사전 준비된 형태로)에 따라, 주제에 맞는 질문을 촘스키에게 던지고, 이에 대해 숙고해서 바사미언에게 답을 전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바대로, 촘스키는 그 누구보다 많은 독서를 통해, 주장에 대한 촘촘한 근거를 구축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의견에 대한 근거조차 부실한 다수의 인사들과는 다르게 그의 글은 남다른 설득력을 답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개인적으로는 그의 유명한 논저인, "지식인의 자격'을 통해서 사회의 지적 유산(일종의 헤리티지와 같이)을 탐구하여, 남들과 다른 지적인 지위(복합적인 측면에서)에 오른 지식인들은 자신의 사회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갖고 있으며, 이것은 개인적 열망이나 욕구에 따른 원초적 문제가 아니라, 지식인이 인지해야 할 마땅한 공적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계몽주의 시대에 배운 자들의 의무가 바로 이런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공의라는 명목으로 움직이지만, 결국은 자신의 사활적 이익이 달려 있는 정책에 매달려 있는 엘리트 기득권에 대한 촘스키의 신랄한 비판은 사회에 있어서 매우 귀중한 지식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작금의 미국 민주주의 위기로서, 시민이 효과적으로 폭주하는 정부를 견제할 수 없게 만드는 현재의 프로파간다의 문제는 실로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민주 사회의 시민은 조작과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지적인 자기방어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미국 헌법의 제1조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원칙을 강조한 것이라고 봤을 때, 미국 시민은 우선 "적절한 근거에 의해 도출된 표현"자체를 객관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언은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지식인의 의무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시민들 역시, 사회 구성원으로서 '시민의 의무'가 있다고 저는 믿고 있는데요. 이미 많은 정치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이 이에 동의한 바가 있습니다. 많은 진보적 지식인들은 SNS의 구조적 확대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기반한 거짓 뉴스에 따른 선동의 문제에서 '다양한 책과 글의 필요성'을 예전만큼 요구하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단순히 고등 교육을 받은 시민들의 존재가 적지 않다는 측면의 단순한 양적 지위에 국한되지 않고 더 나아가 자신을 성찰하고 또한 수많은 책과 글을 접하며, 온전히 지적 능력을 키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전무해지는 시대에 '노출'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것은 두려운 측면의 서사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슬라보예 지젝이 광범위한 논증을 통해서, 엘리트 기득권층이 시민들 스스로 교육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취지의 서사를 꺼내 놓은 것을 접한 기억이 납니다. 따라서 그 끝에 놓이게 될 이 '어리석음의 정치'는 복합적인 양상에서, 시스템과 시민들 사이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만드는 부정적 관계에 놓여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노엄 촘스키가 써 내려간 미국 정치의 비판적 단면들은 어떻게 보면 계몽주의의 유산을 스스로 짓밟고, 가장 중요한 불평등의 문제를 그저 분노의 대상을 찾는 식으로 해결한 최근의 움직임, 그리고 증오로 점철된 적나라한 서사들 가운데, 그저 일부만이 이제야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2장의 핵심은 실제 교육 환경 내에서, 미래의 시민이 될 주역들에게 그저, "소극적으로 순종적인 추종자가 되라고 배우는" 그 시스템적 요구에 시민 대다수가 사실상, 반항하지 못하는 현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과거 조지프 슘페터가 민주주의의 한계에 분명하게 언급했듯이, 투표로 인한 선출 정치의 본모습은 사실상 간접 민주주의의 한계이자, 그 기저에 있는 '교육 부족'의 시민들이 절반 정도는 스스로 자초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특히 최근의 미국에서 조지 W. 부시와 네오콘이 만든 이라크 전쟁을 미국 국내 여론이 너무나 크게 갈려 있었다는 이번 장의 분석은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야 조지 W, 부시가 딕 체니의 충견이었다던가 아니면 네오콘의 꼭두각시였다는 그의 지도력에 대한 의구심이 비틀린 수사로 전해지지만, 당시 미국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 자체는 마크 트웨인 식으로 꾸며내자면 소위 '짙은 안개에 가려진 부두'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당시 이라크 후세인의 대량 살상 무기의 보유 문제가 미국이 이라크를 몸소 응징하는 근거가 되었지만 나중에는 사실무근으로 밝혀진 바가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2장에서, "미국 국민만이 이라크를 두려워한다"는 촘스키의 극적인 언급은 이후 벌어진 전쟁 자체에 대한 수많은 희극적인 소묘를 드러내는 장치라고 여겨지기까지 합니다. 물론 딕 체니의 블랙 워터로 수식되는 사적 이익 추구, 그리고 이라크를 강제로 민주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벌였던 정치적 이행 과정 자체가 현지인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조치였음이 드러났기에 그래서 더 희극적이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이에 촘스키는 미국이 다른 전제 독재 국가를 자유 민주주의로 강제하는 것은 사실상 미국의 오만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를 이식하는 것이 그들 나라에 좋은 것이다"라고 치부하는 것이 미국 시민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새뮤얼 헌팅턴 식의 사고 방식이라 에둘러 말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오만에 가까운 논법일 것입니다. 이 지점의 서사는 최근에 미국 정치사를 세로 쓴 게리 거스틀도 익히 동의했던 부분입니다. 더구나 이라크 포로를 다루는 과정에서 아부 그라이브 수용소의 그 잔혹한 고문 사건은 미국이 그동안 지지해 왔던 인권과 자유를 옹호하는 국가로서의 도덕적 이미지를 아예 저버린 사건이기도 했는데요. 이와 관련해서도 그 윗선의 책임자를 처벌하지 못하고 그저 일개 병사 (즉, 린디 잉글랜드)를 불명예 전역시킨 것으로 끝낸, 그와 같은 일처리는 미국 정치 권력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를 아주 여실히 보여줬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극우들이 노엄 촘스키의 글을 전혀 읽지도 않고 좌파라고 냉소하는 것처럼, 그 자신이 남들과 다른 아주 확연한 도덕론자라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의 논증 가운데 애덤 스미스를 오독한 뻔뻔한 인사들을 대충 꾸짖고 있긴 하지만 도덕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이를 아우르는 계몽주의에 대한 회복이라든지 복귀라든지 앞으로 이런 전환에 그가 아예 관심이 없다고 볼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 미국이 초래한 불명예스런 여러 사건들과 이라크 전쟁에서 수많은 군인들의 생명으로 치른 전쟁의 결과에 대해 이어지는 3장에서, "도덕적 타락은 결코 계량화 될 수 없다"고 작심하여 비판합니다. 촘스키는 아주 명확하게 이 정치권에게 누가 전쟁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지, 아니면 자신들은 안전한 상황에서 오로지 군인들을 전쟁에 내모는 '치킨 호크'와 같은 입만 나불거리는 정치인들의 철면피와 같은 도덕적 불감에 대해서도 비판을 가합니다. 물론 앞선 이들은 국익의 문제를 거론하며 전쟁의 필요성, 혹은 예방 전쟁에 대한 시급한 근거를 늘어놓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저는 과거 에드먼드 버크와 같은 보수주의자들이 거의 목숨과 같이 여겼던 '도덕적 의무'를 망각한 현대적 하이브리드 보수주의와 비슷한 분위기로 데이빗 코츠가 비판했던 이익을 뽑아낼 수 있으면 '군사적 신자유주의'라도 좋다는 이들, 그리고 신자유주의와 손쉽게 "결탁한 권력들"이 나쁘게 말하자면 오늘날 전쟁을 군사 무기의 경연장이자, 이것들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한 시험 무대이거나, 아예 새로운 산업의 부상으로 증명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 분석에서 촘스키가 말하는 아무도 이들에게 '전쟁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는 점은 그만큼 현실의 부조화를 깨닫게 만듭니다. 이렇게 정치 권력이 전쟁에 대한 편의주의적 태도와 안일한 인식, 그리고 국익에 부합한다는 식의 근거 없는 논리들로 무장한 이들의 낯짝을 떠올리게 만듭니다. 여기에 "우리는 그들을 자유시장으로 인도하고, 그들에게 정직한 정치와 자유 및 문명의 산물을 안겨주고 싶었다"는 사실상 영합한 네오콘과 신자유주의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개인적으로도 절로 역겨운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4장의 초입에서 촘스키는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른바 '5명의 쿠바인' 사건을 정리하고 있었는데요. 이 사건의 요지는 간단히 말해, 쿠바에 대해 테러 공격을 한 테러리스트들을 미국이 교묘히 숨겨주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예를들어 올랜도 보슈라는 인물이 있는데 이 자는 1976년 쿠바 항공 소속의 민간기를 폭파시켜 73명의 목숨을 앗아간 테러에 가담했다는 사실 관계가 언급됩니다. 그런데 조지 H. W. 부시는 아들인 플로리다 주지사 였던 젭 부시의 의견을 받아들여 보슈를 대통령 특사로 석방합니다. 2년 후, 그는 정식으로 미국 행정부로부터 영주권을 받게 됩니다. 이 올랜도 보슈 (혹은 보쉬)에 대한 기사는 꽤 많이 검색되고 특히 위키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분석되고 있었는데요. 촘스키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테러와의 전쟁, 그리고 테러리즘에 대한 확고한 반대 의사를 갖고 있는 미국 정부가 테러리스트인 올랜도 보슈를 왜 사면했는지, 이처럼 정책의 불일치에 대해 비판을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조지 W, 부시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인 이라크 전쟁이 끝나고 나서 대통령을 비롯한 네오콘들은 이라크가 드디어 해방되었다고 열의에 찬 비명을 질렀지만 과연 그 진실은 무엇이었는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아주 명확합니다. 이라크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던 전쟁의 도덕적 근거가 "미국이 왜 이라크에 침공을 했느냐?"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70%의 이라크인들이 이를 부정하기에 이르는데요. "자원을 탈취하고 중동을 재편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고 응답한 이들은 이 전쟁의 성격을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 글의 6장에서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의 더할 나위 없는 선의'였다는 프로파간다와 많은 당시 미국인들이 2001년 9월 11일 테러에 이라크가 깊숙이 관여 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다른 내용을 확신하기도 했는데요. 이미 4장에서 촘스키는 "민주주의는 정부가 우리에게 시키는대로 하는 조건 하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라는 거의 체념하는 듯한 분석을 내립니다. 이미 그는 미국의 교육 현장에서 이러한 목적의 교육이 이뤄지는 것을 뒤이어 논증하고 폭로하기에 이르는데요. 저는 이 지점에서 과거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 가졌던 선명한 인상이 작금에서는 시민들이 미디어와 정치권에 붙잡힌 (인식의 차원에서) 거의 노예와 다름없는 상황임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이 글의 사실상 결론이라고 볼 수 있는 7장과 8장에서, 무너진 미국의 교육이 어떻게 이들의 미래를 암울하게 만드는지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국의 대학 교육이 거의 전세계적인 좋은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미국 시민들이 보수 정치권과 이들을 추종하는 일부 언론들의 조직적인 소위 정치적 세뇌에 따라, 생각할 의지를 상실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민중을 오직 자신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병적인 괴물, 결국 쉽게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병적인 괴물로 전락시키려는 압박이 대대적으로 가해진다"는 것은 미국 내에서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는 사회보장제도를 공격하는 감춰진 의도가 바로 이렇게 연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민하고 슬기로운 시민을 민주주의의 초석으로 삼으려고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8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부자들에게는 거의 소용없는 사회보장제도가 돈이 없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희석하고 망각하는데 (부유층의) 막대한 로비 자금이 의회에 투입되고 있는 현실은 미국의 자유주의가 과연 어느 길에 놓여 있는지 짐작케 합니다. 이는 의회 자체가 정치의 시스템적 본산이고 이러한 의회 경력을 쌓은 사람들이 행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게 되고, 또한 신자유주의자들의 화신이라 볼 수 있는 경제 엘리트들이 마찬가지로 현실 정치에서 손쉽게 권력을 쥘 수 있는 위치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까지 폴 하이드먼이나 크리스티안 마라찌가 지칭하는 경제 엘리트들의 부상에 대한 본질은 바로 이렇게 신자유주의와 얽혀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자원과 한정된 자리 배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도 합니다. 이에 촘스키는 사회보장제도가 시민들의 연대와 상호부조에 기반하고 있고, 과거 애덤 스미스조차 동정을 인간의 핵심 가치로 여겼고, "사회는 동정과 상호부조라는 본성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구조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게다가 스미스의 시장론에 따르면 "시장은 완전한 자유 경쟁하에서 완전한 평등을 지향해야 한다"고 밝히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사회를 재조직화 했을때, 앞선 애덤 스미스의 바람은 이들에 의해 철저히 도려내지는 것으로 보답 받기에 이릅니다.
지금도 자주 읽게 되는 콜린 크라우치의 『포스트 민주주의』는, 경제적 요인이 추동되어, 과거의 민주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가 된 민주주의를 폭로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러한 양상의 형태를 경제학자인 대니 로드릭도 우려했던 바가 있었습니다. 소위 신자유주의 3.0이 기반이 된 민주주의가 과연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계화가 완벽히 이식된 자유 세계와 이것을 기반으로 경제적 부를 쌓고 있는 주요 국가들의 소위 "시민들은 가난해지고 국가는 더 부유해지는" 양상 속에 우리의 민주주의 자체는 더 악화되어 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최근에 평론가가 이제 우리 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그저 알량한 자유와 표현의 자유 (배설에 가까운) 밖에 없다는 냉소는 그만큼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극우 포퓰리즘은 이 쇠퇴를 더욱 가속화 시키는 부정의 모멘텀이 되었던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사회내에서 철저하게 궤멸되었던 노동조합의 사례를 안타까운 지식인의 눈으로 그려내고 있었지만 아마도 다시는 미국 사회에서 아무런 조건 없이 시민들이 연대할 수 있었던 노동 조합의 부활은 사실상 어려울 것으로 판단됩니다. 더욱이 여기에 더해, 미국 내에서 기독교적 근본주의가 나날이 위세를 떨치고 있는 상황은 촘스키의 말마따나 "현대화가 진행된 여타 산업 국가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비대칭과 다름없는 종교적 위세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켜켜이 진행되어 온 미국 사회에서의 민주주의에 반하게 되는 (거의 기저에 깔린) 반동적 움직임이 도널드 트럼프라는 현상을 초래하게 된 근본 원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이라는 것은 거의 허구에 가까운 말놀음이고, 이들 모두는 신자유주의자들에 버금가는 나르시스트들이자 자신들의 이익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가차없는 무리들이기도 합니다. 촘스키가 이 글을 통해, 강조하고자 했던 "보통 사람들을 결집시켜 자본과 권력의 집중에 대항할 수 있는 여건과 기회"가 다시금 가능하기 위해서는 시민들 모두가 끊임없이 성찰하고 동시에 수많은 지식을 머리에 쌓아, 교묘한 프로파간다에 넘어가지 않을 역량을 갖춰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한 두개가 아니고 또 단기간의 노력으로 이를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서, 우리가 민주주의 내에서 어떠한 희망을 찾을 수 있을지, 현실적으로는 매우 비관적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리석고 오만한 정치인이 더욱 들장하면 등장할수록 무조건적으로 반사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체제의 뒤안길이 제공하는 수렁은 그만큼 가깝고, 우리에게는 그만큼 어려운 상황임은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아마도 큰 의미는 없겠지만 본문 97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본문 7장의 논증 가운데, 촘스키는 일개 시민에게 오로지 자신의 일에만 몰입하게 만들어 주변을 전혀 돌아보지 못하게 만드는 조장이 이 사람을 괴물로 만들어 버린다고 이해하고 있었는데요. 그렇습니다. 비대화된 자기 이익 추구의 욕구, 그리고 그것의 결과가 무엇이든 간에 오직 그 자신의 책임이며, 이러한 매커니즘의 몰입된 아주 '철저한 개인'으로 만드는 과정 자체는 권력이 이들을 쉽게 다룰 수 있고 지배할 수 있는 아주 기본 요건이 된다는 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현실 문제를 그의 특유의 수사적 표현으로 드러내는 대목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애치슨은 미국의 생존을 위협하지는 않더라도 미국의 지위와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에게는 방어전쟁을 할 권리가 있다고 천명했습니다.
이란은 군사대국이기도 하지만 경제력도 상당합니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이란을 공격하라고 압력을 가했던 겁니다.
현 정부는 시민을 체포해서 가족이나 변호사의 접근을 금지한 채 무기한으로 구금할 수 있는 권리를 비롯해, 과거 정부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권리까지 요구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하여간 그 6년 동안 부시 행정부는 사회보장 프로그램의 질을 현격하게 떨어뜨려놓을 것이고, 모든 결정을 공공의 장에서 개인의 손으로 넘김으로써 민주주의 가치까지 크게 훼손시킬 겁니다.
실제로 프로파간다는 몇 개월만에 성공을 거두며, 상대적으로 평화주의자이던 미국 국민을 반 독일 광란자로 돌변시켜 놓았습니다.
독립적인 기자라면 침략군의 텔레비전에서 인터뷰 하는 것이나 침략당한 나라의 텔레비전에서 인터뷰하는 것이 다르지 않아야 합니다.
예컨대 관타나모에서 자행되는 잔혹행위는 2차 세계대전 이후, 즉 그런 류의 범죄가 나치의 만행으로 인해 공식적으로 범죄로 규정된 이후로 인권에 관련된 국제법의 기본 원칙을 철저하게 유린한 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도덕적 타락은 계량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타락은 틀림없이 존재하며 중대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프랑스에서 전쟁성 장관이 알제리 원주민을 절멸시키러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프랑스는 스스로를 ‘문명화를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 미화했습니다.
존경받는 지식인이 되면 뭐가 유리한 줄 아십니까? 무슨 말을 하더라도 증거를 제시할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하기야 민주주의는 "정부가 우리에게 시키는 대로 하는 조건 하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체제"를 뜻하니까요.
따라서 민중을 오직 자신 문제에만 관심을 갖고 다른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갖지 않는 병적인 괴물, 결국 쉽게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병적인 괴물로 전락시키려는 압박이 대대적으로 가해집니다.
레이건에 따르면 우리 불쌍한 미국인은 캐딜락을 끌고 와서 생활 보조금을 타가는 ‘그 부자 흑인 여성들‘에게 억압받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