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여기에 더해, 오늘날 전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이 '바이마르적 혼란'이 무엇보다 세계화의 영향임을 밝히고 있었는데요. 우리가 현재 다시금 '민족주의 대 민주주의'라는 폭력적 대결 구도를 목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자인 카플란이 이 글을 통해, 경고하는 바는 아주 명확합니다.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권력을 쟁취하고자 하는 왜곡된 정치 권력은 언제든 체제를 위협할 수 있으며, 이것의 노골적인 조장은 점진적이고 누적된 '세계화의 실패'가 그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는 진단 내지는 진실에 가까운 현실입니다. 1장에서 이미 저자는 히틀러가 민주주의 체제를 통해 권력을 잡고, 독일 국민을 조종하기 위한, 나치즘을 확고히 만들었듯, 지금 세기에서도 극단주의 세력에게 민주주의는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다는 일견의 진술은 우리가 깊이 새겨 들을 만한 부분입니다. 이러한 분석의 아주 극명한 서사는, "이 세상은 복잡한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한 소셜미디어 구호와 취약한 금융 도미노 때문에 불안정해지는 경향이 있다."는 단언은, 1장 중반에서의 오늘날 '신기술'에 대한 회의적 이미지로 점철됩니다. 이미 데이빗 코츠, 리민치를 비롯한 세계화 비판의 이론가들은, 신보수주의자들과 신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쉽게 영합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추동한 체제의 결과물은 약간의 앞뒤 맥락을 제하고 언급하자면, "극우 포퓰리즘과 극단주의가 설 정치적 토양을 제공한" 심각한 불평등의 확산과 그로 인한, 시민들의 삶이 위협 받는 체제의 불안정성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 가운데 서로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더욱 확산시킨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1장의 서두에서, "개발도상국에는 상당히 많은 바이마르식 민주주의 체제가 존재한다"는 역설 아닌 역설은, 이들의 표면적인 불안정한 민주주의 체제를 기본적으로 폭로하는 동시에, 이후 독재로 이어질 가능성이나, 이미 권위주의 독재나 다름없는 상태임을 은연중 드러내는 냉혹한 현실 인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저자는 1장의 논증 가운데, "독일인들이 히틀러를 피할 수도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고, 확실히 다른 가능성 등도 존재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지만 이를 지금의 현실에 빗대어 해석해 본다면 "체제를 불식시킬 수 있는 현저한 위기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저자의 현실 인식 자체는 그저 비관주의로 몰고 갈 문제는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논증을 통해서, 과거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정치인의 거듭된 실패처럼, 뒤에 언급되겠지만 엘리트들과 기득권 세력의 부패와 무능이 기존 체제를 부정하는 극단주의 내지는 독재 권력이 목소리를 높이는 기회가 되었다는 잠정적 분석도 그저 부정할 수 없는 지점입니다. 더욱이 오로지 국익 만을 앞세우는 행태인 "우크라이나, 대만, 가자 지구'에서의 군사적 행동이 더욱 세계를 불안정성으로 내모는 기폭제가 될 수도 있는 부분인데요.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또한 사활적 이익이라 포장된 군사적 행동에 나서는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강대국의 지도자가 충분한 성찰이나 깊은 사고 없이, 그저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등의 편협하고 오만한 모습을 보인다면 이것의 부정적 시너지는 저자가 우려하는 바대로, 질서 없음 즉, 전세계의 '바이마르화'로 조장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즉, 이런 바이마르화는 매우 복합적이고 다분한 것이어서, 기존 체제에서의 엘리트들의 무능, "지식이 거의 없는 부분에서 자신들이 지식이 있다고 믿는 엘리트 계층 전반"과 전혀 감사를 모르는 "중산층의 존재"는 그저 표면적인 요인으로 치부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극단주의 정치의 부상 자체가 이런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초래된 결과물이라고 해석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가 자신의 목표로 삼았다는 전자의 "엘리트의 실태를 폭로"하는 것은 이들로 인해, 체제가 오도될 수 있다는 점을 알리는 동시에, 곧 후술 되겠지만 이들 엘리트들이 쉽게 집단적 무능 혹은 무지에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유념하고 더 나아가 이를 경계하는 지식인의 책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왜 노엄 촘스키가 자기 이익에 함몰된 무능한 지배 엘리트 계급을 비판하고 진정한 각성을 요구했는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이어지는 2장의 강대국의 쇠퇴에 대한 논증은 특히, 푸틴의 치하에 놓여 있는 현재의 러시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금의 러시아를 과연 민주주의 체제가 제대로 뿌리내린 국가로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미 푸틴의 체제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요. 더군다나 푸틴 자신이 정적들로 규정한 '올리가르히'를 어떠한 법적 근거 없이 사적으로 권력을 동원해, 이들을 축출한 것만 봐도 명확히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영향권에 놓거나 최소한 나토와 상관없는 중립 지대로 만드는 것이 러시아의 이익이었기에 푸틴이 그 즉시 군사력을 투입한 것은 유럽의 안보 불안을 초래했습니다. 저자는 여기에 더해, 초기에 유엔이 조직되어 안정 보장 이사회를 구성할 때,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이 5개국이 다른 국가를 군사적으로 침략할 수 없다는 도덕적 함의를 몇 번이나 무시한, 이런 행태들이 결국에는 국제 정치의 소위 바이마르화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이런 강대국들이 존재하는 전쟁 직전의 세계는 유엔을 작아지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극명한 서사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국제 정치에서 어떤 일관된 질서를 기대하는 것이 다소 무리한 시각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강대국들이 주도하는 국제 정치 전반이 노골적인 세계화가 완료된 시점에서, 이러한 긴박한 연결성이 각국의 이해 관계가 보다 첨예하게 부딪칠 수밖에 없는 기본적인 환경의 서사는 충분히 설득적입니다. 이러한 서사 가운데, 저자가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강대국들이 보유한 핵무기들이 지구를 몇 번이나 원시 시대로 돌려놓을 수 있고 (MAD라는 미명하에), 이러한 불안정한 평화가 정치 군사적으로 거듭 지속될 수 있는지 규명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분명 러시아가 내부적으로도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외부적으로도 쇠퇴에 이르고 있지만 '핵을 보유한 강대국의 쇠퇴'는 좀 더 다른 관점에서 분석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 지점은 어떻게 보면 저자의 분석 한계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푸틴의 존재 자체는 어떻게 보면 독재 정권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저자의 일관된 논증을 저 나름대로 해석해 본다면 푸틴 혹은 푸틴 현상은 질서를 찾아 볼 수 없는 바이마르화에 따른 어떤 결과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푸틴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핵보유국 러시아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국제 질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런 푸틴의 독주가 러시아를 더욱 쇠퇴에 이르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는 어느 정도 수긍이 되는데요. 다만, 러시아의 쇠퇴처럼 지금의 중국이 쇠퇴에 이르고 있는지는 아직 단정하기 이르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저자는 앞선 강대국의 쇠퇴에 대한 의미를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강대국의 쇠퇴는 아무리 점진적이고 불균등하더라도 2, 3차적 파급 효과로 개발도상국과 국제 체제에 더 많은 불안정을 가져올 것이다."라고 강조합니다. 어쩌면 이 부분의 진술은 1인에게 집중된 독재 권력으로 강화된 러시아와 중국의 기본 이해로, 이 독재적 강대국이 그저 시간이 흘러, 자연의 한 과정처럼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 오판을 통한 국제정치적 질서를 무너뜨리고, 힘에 의한 쇠퇴를 맞이하게 된다면, 가깝게는 주변국과 멀게는 이들과 별 상관없는 일반적인 개도국들까지 영향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이 서두에 언급한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의 연결성 때문일 겁니다.
이와는 별개로 2장에서, 시진핑 정권이 이른 시일 내에, 1000여개에 이르는 핵무기를 확보하려는 시도 자체가 단순히 미국을 견제하는 목적 하나만으로 규정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장 말미에 "고립주의는 과거"라는 최종 논법에 저 역시, 동의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새로운 형태의 트럼프식 고립주의는 '질서 없음'의 국제 질서을 더욱 부채질 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미국의 우방과 동맹, 모두를 민주주의 진영의 (함께 가는) 동반자식으로 구체화하는 것은 무리가 있지만 미국이 지난 전쟁에서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무리한 민주주의 이식 (다른말로 신자유주의적 질서 이행)은 결과론적으로 군사적 모험으로 귀결된 점은 교훈으로 삼아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인 카플란은 이라크 전쟁에 대해, 에둘러 표현하거나,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전에 브레진스키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와 네오콘들이 9. 11을 정치적 셈법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을 명확히 했었는데요. 나중에 여러 전문가들 (예를 들어 게리 거스틀이나 브레진스키 등)이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 패권 쇠퇴를 촉진한, 한 갈래의 원인이 되었다는 점을 일관되게 밝히고 있습니다. 특히 게리 거스틀의 진술은 신자유주의와 관련해서 더욱 구체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당시 백악관이 이라크의 종교와 민족을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민주주의를 강요하게 만든 군정과 관련해서도 말입니다. 이제 대만에 대한 중국의 군사적 모험주의가 남아 있지만 이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미국은 자신이 이끄는 자유 진영의 신뢰와 그 자신이 바라는 자유주의적 번영을 위해서, 적절한 개입과 균형 전략, 및 질서의 회복에 나서야 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이에 국내의 전문가들은 미국이 중국과 같은 지역 내 패권국을 제대로 견제하지 않고 그저 역외 균형자의 입장에 국한된다면 큰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서태평양 지역은 미국의 사활적 이익이 걸린 곳이기에 그럼에도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어지는 3장의 주된 맥락처럼, 미국의 지식인들은 과거 이데올로기 대결과 후쿠야마식의 종말, 그리고 신자유주의화에 따른 기득권 엘리트 계층의 노골적인 사익 추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반 시민들의 정치적 관심을 낮추는 데 기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토머스 프랭크와 같은 학자들처럼 말입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는 보다 비극적으로 오스발트 슈펭글러를 통해 현재 우리의 정치를 조망하고 있었습니다. 슈펭글러는 정작 유럽의 종말과 다름 없는 비참한 전쟁을 목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럽 문명의 몰락에 대한 매우 중요한 예언적 통찰을 보인 지식인이었습니다. 슈펭글러와 관련해서 저자는 그가 여러 방면에 있어 매우 박학다식했고 따라가기 어려운 담론들에 대한 특유의 이해를 보이면서,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심지어 나치에 이르기까지 그들 나름의 논란을 일으킨 인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3장에서, 슈펭글러에 대해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지만 이를 아주 간단히 축약하자면, 슈펭글러는 유럽 문명의 거의 모든 지접에서의 쇠퇴를 예견한 인물이라고 강조됩니다. 18세기를 거쳐, 도시의 확장과 그곳에서의 교육과 자원 집중을 통해 성장한 엘리트들이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게 됨으로써, 소위 정치문화적 위계가 강화됩니다. 물론 슈펭글러의 비판처럼 이들 초기 엘리트 계급들이 제대로 된 성찰과 많은 독서를 등한시 함으로써, (자신은 주도하는 엘리트 계층이기 때문에 책 따위는 필요없다는 식으로 자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전혀 지식이 없으면서 지식이 있는 척 하는' 계급의 단면을 폭로하게 됩니다. 이는 단적으로 "이런 형편없는 판단이 인구 전체, 특히 엘리트들에게 퍼지면 셀 수 없이 많은 나쁜 결정의 잔해가 감지하기 힘들 만큼 조금씩 문명을 악화시킨다"는 슈펭글러식의 결론을 마주하게 됩니다. 정치가 왜 어리석고 우둔한 측면으로 왜곡되는지는 버틀란드 러셀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앞선 진술은 그 결과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이렇게 정치가 일반 시민들이 원하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서 곧 등장하게 되는 소셜미디어가 결국에는 민주주의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현실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새삼 '군중'을 언급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이 전혀 없는 군중 혹은 패거리들에 대한 저자의 일침은 가혹합니다. 이런 군중들이 주도하는 정치란 가히 민주주의 정치를 병들게 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무리지어 있는 군중들의 위협을 예견한 귀스타브 르 봉도 그렇거니와 여기에서 언급되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 뒤이어 나오는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론 또한 이렇게 연결됩니다. "나치와 공산주의는 군중속에 있을 때, 안정감과 순수성에 대한 열망을 공유했다"고 저자는 강조합니다. 이것은 작금의 나르시시즘적 도취에 빠져 있는 포률리스트들에 대한 강한 지지를 외치고 있는 현재의 군중에도 해당되는 논법일 텐데요. 스탈린이 군중을 소와 개처럼 관리해야 되는 대상으로 여겼던 것처럼, 극단주의 정치 그 정상에 있는 이 포퓰리스트들이 과연 성찰이 없는 이들, 즉 군중들을 위해 뭔가를 할 것이란 기대는 허구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자들은 오직 자신의 사익 추구만을 위해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에 이르는 모든 수사와 행위들은 "선한 민주주의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저자 역시, 과거의 에드먼드 버크처럼, 군중의 광기와 저항할 수 없는 극단주의적 힘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이들 군중들이 '외로운 개인'을 무리에 끌어들이고 쉽게 광기에 휩싸이는 등의 통제력 상실의 광분 상태에 이르게 된다면 지독할 정도로 회의적인 "민주주의 체제의 붕괴"를 목도하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게 될 겁니다. 이러한 심각한 메커니즘에서 우리가 구축한 자유 민주주의 자체는 최종적이고 그것의 대안을 찾을 수 없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인 것은 분명하기에, 앞선 군중이 상식적인 대중, 문화를 이해하는 대중,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시민, 그리고 의무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진정한 시민에 이르게 될 수 있는 "자신을 위한 혁명"이 필요한 것도 거의 분명해 보입니다. 3장 말미에, 과거의 흔적으로 여겨지는 역사적 자유주의를 저자가 언급하며, "개인의 주체성과 열린 마음을 옹호하면서 대중에게 궁극적인 비판을 가하는" 일종의 합리적인 사고의 전통이 다시금 필요하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보수주의적 인상을 떠나, 스스로를 통제하지 않는 군중들의 선택이 최종적으로 정치를 붕괴하게 만들고, 그 자리에 노골적인 테크노크라시와 조지 오웰식의 감시 사회로 이어진다면 "그야말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붕괴했다"는 서사를 체념하게 될 것입니다.
- 카플란의 이 글은 첨예한 역사를 바탕으로 국제 질서에 대한 냉혹한 서사처럼 예견되었지만 본질적인 내용은 이보다 더 비관적입니다. 전혀 성찰하지 않고 더이상 글을 보지 않는 엘리트 계급이 (그 무능에서 분화되어) 기술 엘리트들에 의한 야만 (예를 들어 AI에 의한 인간지배)과 그 과정에서 군중에 의한 정치 붕괴, 그리고 그런 정치 붕괴에서 테크노크라시에 의한 다수를 향한 폭력적 지배 내지는, 여기에 더해, 국제 정치에서 예견되지 않은 푸틴의 몰락이 초래할 혼돈의 무질서를 경고하고자 쓰여진 글로도 해석됩니다. 독재 국가 러시아의 정치적 쇠퇴가 마냥 기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저자는 논증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역사와 정치가 혼합된 이런 식의 수많은 인용들이 이어지고, 그 흐름에서 연역적으로 도출된, 그 '경고할 만한' 미래는 마치 지그문트 바우만이 떠오르기도 합니다만, 저자는 분명하게 정치 질서와 군중이 아닌 시민의 정치를 기대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민주주의와 그것이 바탕이 되어 '통제'가 될 수 있는 세계를 원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