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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멈춰버린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
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희상 옮김 / 원더박스 / 2024년 12월
평점 :
1982년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태어난 프리데만 카릭은 니더바이에른 주의 유일한 대학인 파사우 대학에서 미디어 연구 및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고, 라인 강 유역에서의 독일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설립된 퀼른 대학에서 경제학을 배웠습니다. 현재 그는 베를린과 뮌헨을 오가며 일에 매진하고 있는데요. 그는 팟캐스트인 "Piratensender Powerplay"를 진행하고 있는 동시에 쥐트도이체 차이퉁 (SZ)과 디 차이트 (Die Zeit)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기도 합니다. 또한, 2023년 12월부터 2024년 3월까지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소재한 토마스 만 하우스의 펠로우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Was ihr wolt : wie Protest wirkliich wirkt"로 지난 2024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도 같은 해인 2024년 1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국내 출판 업계가 해외에서 출간된 책의 원제를 있는 그대로 번역하지 않고 판매고를 올리기 위해 좀 더 자극적이거나 아예 원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제목으로 출판하는 것이 뭔가 업계의 관행이 되기도 했습니다. 카릭의 이 책도 이런 범주의 출판물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원제는 "시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로 요약할 수 있지만 번역된 제목은 가히 어두운 정치적 붕괴로서의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일독하고 나서 번역된 제목과 여기의 내용이 아주 거리가 멀다고 볼 수는 없겠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상당히 자극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강하게 듭니다. 이 부분은 정말 유감이라고 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일정 부분 공론장의 아이디어와 연관된 위르겐 하버마스의 유명한 언급인 "시민 불복종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신뢰한다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는 문장 자체는 저에게는 무엇보다 민주주의적 다원성을 떠올리게 합니다. 일전에 존 듀이가 이 정치적 다원성과 시민 불복종을 동일한 선상에서 해석을 했는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시민 불복종의 근원적인 배경에는 민주주의적 다원성이 자리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애초에 1943년 이전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이 아돌프 히틀러와 자신들이 고안한 전체주의에 맞서 광범위한 불복종이 왜 실패했는가를 짐작케 합니다. 이 글의 1장과 2장의 핵심이기도 하면서 카릭의 이 글 전반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로 여겨지는 "극우 포퓰리즘과 같은 극단주의에 맞서, 민주주의의 다원성에 기반한 시민들의 정치적 불복종 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맥락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2018년 이후에 전세계에 닥친 극단주의의 범람에 "2024년 1월, 독일에서 역사의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진술은 우리의 정치적 환경이 어떠한 상황에 놓여있는지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흐름에서 시민들에게 각인시킨 "민주주의 사회는 극우에게 표를 주지 않는다"는 원칙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유럽의 시민들이 전반적으로 민주주의 의식이 투철하다는 종래의 평가와 더불어 이들의 사회 참여가 정치 왜곡에 따른 극단주의 세력의 확장을 불식시키는 보루라고 인식되어 왔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저자인 카릭은 스스로 독일인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정치가 두려워 하는 부분인, 다시는 나치와 같은 극단주의 세력이 등장해서는 안된다는 공감의 역사를 간접적으로 묘사합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독일 정치의 리더십'이 부분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과거 역사에서 독일의 대중운동과 관련해, "나치즘이 '유대 민족'이라는 꾸며낸 적을 상대로 하는 끔찍한 대중운동을 성공시킨 사례"라는 확고한 인식은 독일인들이 내면에 자리하고 있는 대중의 정치적 활동에 대한 의구심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2장 서두에서 저자는 "권위주의나 유사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사회 변화에는 강력한 다수의 저항이 필요하고 여긴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우리가 지난 윤석열의 불법적인 계엄 선포와 관련된 정권 퇴진에 우리 국민 다수의 저항이 있었다는 것과 동일한 이해라고 여겨지는데요. 또한 2장에서 저자는 우리와 튀르키예를 언급하며, "튀르키예와 한국의 학생운동이 군사정권을 성공적으로 무너뜨렸다"고 언급하며 이 저항운동에 대한 의미를 되새깁니다. 물론 이 대목에서 프리데만 카릭은, 간디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인도인들의 권리를 위해 행동에 나선 것처럼 "어떠한 폭력도 용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운동을 강조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영국에서 일어났던 여성 참정권 운동 가운데, "우편 폭탄 공격까지 서슴치 않고 왕의 말 앞에 몸을 던져 목숨을 잃을 정도로 치열했던 운동"과 같이 몸을 내던지는 상황까지 발생하는 것은 운동의 성과를 떠나 모두에게 불행한 일임은 자명해 보입니다.
카릭의 이 글에는 역사의 한 획을 차지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운동의 공감대를 이끌었던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여기서는 자신이 성소수자임을 최초로 인정했던 인권 운동가 '하비 밀크'와 '마틴 루터 킹 목사'에 관한 상당한 지면을 할애하고 있었습니다. 밀크와 루터 킹 목사에 대한 진지하고 상세한 설명은 이 독일인이 얼마나 진보적 시민운동에 영감을 주었던 이들 선구자들에 어떠한 애정을 갖고 있는지 짐작케 할 만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있었던 '유로마이단 혁명'에 대한 특별한 관점도 내비치고 있었는데요. 최종적으로 시민들의 손으로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퇴진 시킨 이 혁명은 서구 유럽의 눈에는 상당히 독특하고 예상치 못한 정치적 사건이기도 했습니다. "유럽 연합이 제시한 협정을 당시 우크라이나 정부가 거부"하여 촉발된 시위는 애초에 많은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그저 외교 정책 노선과 관련된 문제로 치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시민들 사이에선 혁명으로 비화 될 정도가 아닌 단순한 사건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야누코비치가 특수기동대에 이 시위대를 급습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나서, 이 만행에 대한 반대급부로 지켜만 보고 있던 많은 시민들이 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무고한 시민들에게 린치를 가했던 '부도덕한 정부'에 대한 분노는 우크라이나 역사에서 아주 극적인 전환점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에서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권리는 보호 받아야 될 원칙일 겁니다. 굳이 헌법을 논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굳이 지금까지 진술한 이러한 시민적 저항 운동에 대한 필요성과 결부지어, '참여의 문제'를 강박적으로 논하고 싶지는 않지만 다수 시민들이 자신의 양심으로 표출된 의견 개진과 그로인한 저항운동의 참여는 이들이 속한 정치가 민주주의라면 응당 용인 되어야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미 글의 7장에서, 하버마스와 관한 분석에 이어, 마찬가지로 한나 아렌트 역시, "장기적인 정의를 위한 단기적인 법 위반이 정당하다고 보는 사람들 편에 섰다"는 언급 역시 의미심장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마누엘 카스텔은 "정부에 대항해 행동에 나선 많은 시민들에게 경찰의 공권력이 내포하고 있는 공포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내용을 밝힌 바가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행동 가운데 다수 시민들은 무조건 비폭력 저항을 견지할 필요가 있는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생각합니다. 폭력을 수반한 원초적인 저항 운동이 성공 가능성이 낮은 것은 원칙적으로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 글의 후반부인 10장에서, 시민들이 '체제가 가하는 폭력'에 마땅히 저항할 필요가 있다는 대목에서는 앞서 보였던 비폭력 운동에 대한 확고한 저자의 인식에 저는 약간의 혼란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앞서 도널드 트럼프의 선동에 분별력을 잃은 "총기로 무장한 지지자들"이 워싱턴 D.C의 미국 연방 의회에 벌인 "2021년 미국 의회 점거 폭동"은 이들에 맞서는 일반 시민들의 대결 구도 그 자체보다는 정치를 나락으로 몰아가는 극우 포퓰리즘을 우리는 어떻게 인식해야 하는지를 요구하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이러한 전무후무한 폭력적 상황에도 중도적 의견을 내세우며 기회주의적 사고에 매몰된 일부 시민들은, 저자의 분석대로 "설사 정당한 요구라 할지라도 지나친 이기적 성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공공공간을 유례가 없는 폭력으로 점거하는데도 대부분 방관한다"는 우파적 속성에서 기인한 극단주의적 행태에 대한 자정이 사회에서 거의 전무하다는 점을 반증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러한 극우 포퓰리즘적 극단주의 행태는 직설적으로 "특정 인구 집단을 정체성(인종, 성별)에 따라 적으로 간주하면서 이 집단 구성원의 존엄성 그리고 민주주의에 참여할 권리를 부정하는 가장 명백한 구조적 폭력"을 행사하고 추구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들과 동일한 시민들을 단순히 성적 지향과 성별, 인종 등으로 단순화하여 이들을 배제하거나 이들의 민주주의적 권리를 박탈하는 식으로 이어지는 "무분별한 선동 정치인과 분별력을 잃은 지지자들의 결합"으로 나타났습니다. 일전의 미국 정치에서 티파티 운동이 드러낸 극단주의적 속성이 이를 여실히 드러낸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10장에 도출된 일부의 결론이 이를 명백하게 증명하고 있습니다. 즉, "극우 포퓰리즘은 국민의 불만과 불안을 이용해 민주주의의 퇴행을 부추기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더 크게는 그 정부에 권력을 부여하는 민주주의 체제 전체를 적으로 삼아 공격하려고 국민을 동원한다."는 소름 끼치는 분석 말입니다.
저자가 서두에 도출했던 바와 같이, 권위주의 정부에 처해 있는 많은 시민들이 자신들의 저항권을 바탕으로 체제에 반대하는 것은 이들이 단순한 반란자들로 몰아갈 수 없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권위주의 정부가 휘두르고 있는 억압과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위축되는 상황에서는 이 사회의 시민들이 명백하게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는 배경이 되는 것인데요. 이렇게 중반의 논증을 거치며 저항 운동에 대한 분명한 맥락을 짚어 본 저자는 후반부에서는 아마도 독일 정치에서 네오 나치와 같은 불온한 움직임을 염두해 두고 진술과 논증을 병행한 것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10장에서, 극우 포퓰리즘에 대한 경계를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번역된 이 책의 제목인, "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직접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것이 "극우 포퓰리즘과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라면 충분히 인정이 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영향력을 키운 극단주의 정치에 대한 수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의 경고는 앞서 설명한, 2021년의 미국 연방 의회 점거와 오버랩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 지젝과 같은 지식인들이 이 연방 의회 점거에 보인 태도는 아주 분명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들이 반민주주의적인 반동 세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이는 과거 히틀러가 선동질을 통해 바이마르 의회를 무력화 시켜 민주주의 체제를 끝장내버린 역사와 절묘하게 수렴되기까지 합니다. 나치가 주도한 대중운동이 반유대주의를 근거로 600만의 유대인들을 가스실로 보냈던 것처럼 극우 포퓰리즘이 다수의 무고한 시민들을 그것에 준하는 폭력으로 귀결되지 않을 보장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우리 역시도 괴물을 맞이해, 모두가 전혀 원치 않는 상황을 맞이할 뻔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책 제목처럼 극단주의와의 전쟁은 아마도 이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민주주의가 허락한 저항권을 악용해 민주주의 체제 또는 민주주의 근본 가치를 공격하는 극단 세력이 그런 예이다.
직관적으로 우리는 권위주의나 이와 유사한 정권을 무너뜨리는 거대한 사회 변화에는 강력한 다수의 저항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극심한 폭압에 맞서 정권을 전복할 수 있으려면, 최소한 근소한 차이라도 과반이 넘는 다수 또는 매우 큰 목소리를 내는 강력한 소수가 떨쳐 일어나야만 정권의 수혜자, 기회주의자, 하수인, 기득권자 세력을 누를 수 있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일설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르봉의 책을 읽고 군중을 사랑이나 증오 같은 단순한 감정으로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는 믿음 이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함께 작용한다. ‘소셜네트워크‘로 연결된 수십만 명의 ‘팔로워‘들은 단지 정치적인 이유에서만 노이바우어를 따르는 게 아니다. 이들은 일종의 사회적 관계, 말하자면 오늘날 ‘인플루언서‘와 대중 사이에 형성되는 가상의 친밀함을 갈망한다.
우리는 너 나 할 거 없이 모두 자기 자신이 사회를 떠받드는 기둥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래봐야 달라질 것이 없어"라는 태도로 정치와 저항운동에 멀찌감치 거리를 두고 무관심한 태도만 보이는 사람은, 사회가 지금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는 것에 공동 책임이 있다.
더 나아가 시민 불복종은 법을 준수해야 하는 의무와 자유를 지켜야 하는 의무 사이의 "의무 갈등"이 일어날 때 자유를 지키는 방향으로 갈등을 풀어줌로써 사회의 헌법 정의를 안정시켜줄 수 있다고 롤스는 보았다.
극우 포퓰리즘은 국민의 불만과 불안을 이용해 민주주의의 퇴행을 부추기며,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더 크게는 그 정부에 권력을 부여하는 민주주의 체제 전체를 적으로 삼아 공격하려고 국민을 동원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을 반대하고 심지어 폐지하려고 하는 저항도 용인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지만, 그 딜레마는 어디까지 자유민주주의의 규칙을 지키는 상대에게만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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