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의 회전 기담총서 1
헨리 제임스 지음, 임명익 옮김 / 크로노텍스트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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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1843년 4월, 미국 뉴욕의 맨해튼 자치구, 워싱턴 스퀘어 인근 워싱턴 플레이스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헨리 제임스 시니어와 메리 월시로, 부친은 총명하고 거기에 호감가는 인물로 강사이자 철학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모친인 메리는 뉴욕시에 오랫동안 정착한 부유한 집안 출신의 여식이었습니다. 이런 헨리는 사남일녀 가운데 둘째로, 한 살 위인 윌리엄과 남동생인 가스 윌킨슨, 로버트슨이 있었습니다. 헨리가 한 살이 되기 전에 그의 부친은 워싱턴 플레이스의 집을 팔고 가족 모두를 데리고 유럽으로 기한 없던 이주를 하게 됩니다. 1845년까지 영국 윈저 그레이트 파크의 작은 저택에서 머물던 그들은 그해 뉴욕으로 다시 돌아왔고, 헨리는 유년 시절 대부분을 알바니에 있는 친할머니 집과 맨해튼 웨스트 14번가 58번지에 있던 집을 오가며 지내게 됩니다. 이후 1855년과 1860년 사이, 그의 가족은 아버지의 주된 직업적 관심사와 출판 사업의 향방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불로뉴쉬르메르, 본, 로드아일랜드의 뉴포트를 오가게 되었고, 간혹 가족의 자금이 부족할 때는 미국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헨리 제임스의 첫 출판물은 1863년에 출판된 연극 공연 평론으로, 첫 단편 소설인 "오류의 비극 (A Tragedy of Error)" 이 익명으로 출판됩니다. 이어지는 1869년부터 1870년까지 그는 14개월간 유럽 여행을 하게 되는데요. 이때 헨리 제임스는 존 러스킨, 찰스 디킨스, 매튜 아놀드, 윌리엄 모지스, 조지 엘리엇 등과 만남 및 교류를 이어가게 됩니다. 1875년이 되자, 그는 네이션 (The Nation)지에 매주 글을 기고하기에 이릅니다. 그해 가을이 되자, 그는 파리의 라틴 지구로 이사를 하게 됩니다. 미국으로 두 번 장기간 들른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이후 30년 간의 남은 생애를 유럽에서 온전히 보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헨리 제임스의 작품 활동 역시, 1875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되는데요. 그해, "로더릭 허드슨"을 시작으로 "아메리칸", "워싱턴 스퀘어", "여인의 초상", "보스턴 사람들"과 같은 의미심장한 장편들을 세상에 내놓게 됩니다. 그의 작품 초기, 신대륙에서 구대륙인 유럽으로 향한 지식인이자 작가로서, 그의 작품에서 미국과 유럽, 양쪽으로 병렬적으로 경험한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유럽의 오래된 문학 역사에서 그도 역시, 일종의 이방인과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헨리 제임스는 그의 많은 작품을 통해, 각 인물 간의 의식의 변화 혹은 자신만의 분명한 인지를 갖고 살아가는 인물들에 대한 애정을 표함과 동시에, 당시 시대와 관습이 배타적으로 강요하는 '인습의 굴레'에 대해서도 뚜렷한 비판 의식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시대상과 관습에 어느 정도 얽매여 있는 여성 캐릭터들을 잘 그려낸 것으로도 유명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Turn of the Screw"로 지난 1898년에 출간되었고, 이번에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8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접해보셨을 것 같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은 당시에도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이후 한 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에도 여러 평론가들과 소설을 쓰고 있는 작가들에 의해 색다르고 다양한 분석으로 이름이 높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이 작품이 예전의 고딕 형식을 어느 정도 오마주한 공포 소설로 독자들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내면의 공포심과 그것을 부추기는 드러나지 않는 '거대한 악'에 대해 일종의 작가 나름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일전에 히틀러의 나치가 사람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던 저열한 측면을 끊임없이 부추긴 것처럼 일견 호의에 기반한 사람의 의도가 어떻게 붕괴될 수 있는지를 이 작품은 잘 그려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초반 전개부터 정확히 어떤 의도로 쓰였는지 파악해야 될 수많은 수사와 수식어구(영문법의 표현으로)는 사건과 그에 따른 맥락을 이해하는데 상당히 난해한 부분으로 작용했습니다. 특히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작품에서 만큼은 그다지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는데요. 작품의 서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가장 중요한 축이라고 볼 수 있는 어린 마일스가 퇴학을 당한 이유가 명확히 설명되지 않고 있는 점은 오로지 독자들의 상상과 그에 따른 추론에 일임 되어 있어, 극의 결말의 해석 부분과 맞물려, 꽤나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처음 자신의 소설을 쓰기 시작한 소위 견습 작가들과 어느 정도 명성을 얻은 중견 작가들에게서도 이 작품의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이러한 부분은 사전에 인지해 두고 극을 읽어 내려간다면 독자에 따라 꽤나 흥미로운 부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이 이르게 되는 블라이 저택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그로스 부인'에 대해 본의 아니게 많은 숙고를 하게 되었습니다.  


극의 서두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주인공인 여성은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인물로 할리가의 아이들인, 마일스와 플로라를 적절한 지도와 정서적 보살핌을 제공하기 위해 블라이 저택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녀는 서사에서 잠깐 소개되고 있듯, "멸종되는 법이라고는 없는 유형인, 잘생기고 거침없고 호감형인, 소탈하고 쾌활한 독신남 할리 씨"의 크게 감화되어 (젊은 여성이 저런 축복을 타고난 귀족적 남성에게 받을 수 있는 인상은 아마 모두가 짐작할 수 있을 겁니다) 그의 동생의 아이들인 두 남매를 열성적으로 보호하고 가르칠 것을 스스로 다짐하게 됩니다. 이렇게 극에서 그녀의 수차례 언행과 바람을 통해, 이 '할리 선생'을 다시금 재회하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그와의 관계에 대해 꿈 같은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거의 상상과 같은 근거 없는 기대 말이죠. 이것은 단순히 여성의 신분 상승의 욕구라고 해석되기 보다는 그녀가 할리에게 받은 개인적 인상과 그로 인한 확고한 신념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특히, 어느 정도는 이 아이들을 자신의 시야에서 치워버리고 싶었던 할리가 그녀에게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타고난 재능으로 적절한 마음가짐을 그녀에게 추동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주인공인 그녀로 하여금 자신이 책무를 다하게 만들기 위한 약간의 술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에도 오롯이 그 책임이 할리에게 있다기보다는 자기 나름의 희망적인 재해석을 감행한 그녀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인 그녀가 이 아이들과 대면하는 가운데, 할리와의 숭고한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자신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갖고 어떻게 아이들을 인도할 것인지에 대한 일종의 압박과 사명감을 어떤 식으로 자신의 내면에 덧씌웠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규명된 여러 정신병증으로 대입해 본다면,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정신적 압박이 어느 정도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물론 이에 대한 연계가 아주 직접적으로 극에서 묘사되고 있지는 않지만 결국 그녀가 맞닥뜨리게 되는 일종의 환시(幻視)를 초래하게 된 것인데요. '자연의 섭리'를 위반하는 '영적 요소'라는 문제가 인간이라는 피조물로서는 도저히 극복하기 힘든 치명적인 균열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는 극의 전반부 서사에서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극의 중반 이전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녀와 마일스와의 인식적 불협화음과 그녀 자신의 일방적인 기대로 말미암아 파국의 조짐이 드러납니다.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이 두 사람의 파국을 작가 스스로 이해하는 인간 내면의 악을 드러내는데 이용합니다. 십 세 가량의 어린 남자 아이가 극에서 묘사되는 바와 같이, "애어른 혹은 어른아이"로 규정하고 그가 구사하는 언어들이 천진난만한 소년의 그것과는 대비되어 나타나는데요. 이런 측면에서 이런 장면들을 접하게 되는 독자들은 마일스에 대해 무언가 섬뜩함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단순히 "아이 치고는 영악하다"는 표현을 넘어, 전형적인 캐릭터 이상의 깊은 인상을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데요. 다만, 주인공인 그녀가 몸소 겪게 되는 환시에 대해선 아이의 수사와 행동에 의도적으로 겹쳐 놓게 됨으로써, 극 후반부에 그녀가 어린 마일스에게 추궁하는 대화가 거의 양쪽의 분열된 인식을 표출 시키기에 이릅니다.

순결하거나 그 반대의 두려운 의미로 함께 쓰이는 영체를 경험하는 주인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두 사람의 영혼 혹은 (가능성이 높은) 환시를 겪게 됩니다. 마일스와 곧잘 어울렸다는 저택의 하인 피터 퀸트와 그녀의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이 가히 목격되는 것인데요. 그녀는 내가 '귀신'을 본 것 같다는 의미의 고백을 처음 그로스 부인에게 하게 되고, 일절 본 적이 없던 피터 퀸트와 제슬 선생의 추정되는 이미지를 부인에게 전달하게 되자, 그녀는 쉽게 '그 사건'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는 두 영혼의 외형상 보여지는 모습을 이 그로스 부인이 확인 시켜 준 것입니다. 바로 이 행동이 그로스 부인의 행적의 분석하는 가운데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부분입니다. 물론 단순하게 작가인 헨리 제임스가 그로스 부인조차도 주인공이 겪고 있는 '현상'을 같이 경험했다고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녀와 그로스 부인이 나누게 되는 대화나 그녀를 향한 부인의 일관된 동조와 신의는 단순한 극의 함정 요소를 넘어, 해석 상 난해한 설정으로 자리매김 합니다. 이 때문에 결말에 대한 많은 해석을 낳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 그로스 부인에 대해 첨언을 해보자면 그녀는 신분 상의 지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인물로 자신이 처해 있는 신분 상의 위치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고용인인 할리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주인공에게 쉽게 수용되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로스 부인이 어느 정도 저택 내의 주인공의 권위를 인정하고 이것에 대해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저택 질서를 유지하고 있는 부인의 위치로 봤을 때, 갑자기 나타난 가정 교사에 대해 은연중 저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는 않습니다) 극의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물론 이는 작가의 의도된 상황 설정이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극의 후반부에서 마일스가 학교에서 퇴학 당한 이유에 대한 추궁이 마일스를 (물론 스스로 감행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의문이 들지만) 비극적 결말로 이끌게 됩니다. 그가 자신의 여동생과 이 저택에서 지낼 수 있게 된 것이, 큰아버지인 할리의 배려임을 일찍부터 인식하고 그 자신이 여동생의 안위까지 책임지고 있다는 점을 정신적 압박으로 지배 당하고 있었다면 아마도 '퇴학의 이유'를 추궁하는 (미처 서로 신뢰를 쌓지 못한) 가정교사의 압박은 어린 아이의 감수성으로는 아마도 쉽게 극복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극에서는 이미 그를 향해, 영악한 어른아이로 설명되고는 있지만 일상의 어른과 같은 보편적 인식과 태도를 갖추었다고는 볼 수는 없기에, 아이의 측면에서는 이러한 분위기가 원치 않는 압력이 되었음은 분명합니다. 졸지에 고아가 된 아이들의 심리 상태가 일반적일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고 극 중반부터 이어지는 주인공의 의뭉스런 행동과 그를 향한 억측의 오해들이 중대한 압박이 되어, 굳이 영체나 자연의 흐름을 벗어나는 현상을 내밀지 않더라도 결말은 어느 정도 파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구글에 떠도는 이 작품의 해설 등을 살펴보니, 어느 블로거가 헨리 제임스의 이 작품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다른 단편 들을 포함한 중요 작품을 일독해야만 한다고 언급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의 의견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일부 단편들은 읽어볼 필요가 있어 보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작품의 후기에서는 주인공인 가정교사가 일종의 성적 압박에 놓여 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관점도 있었는데요. 앞의 서사에서 그러한 인식을 뒷받침하는 간접적 문장들이 있어서 그런 쪽의 추론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또한 주인공이 사망한 전임자였던 '제슬 선생'의 아름다운 용모를 간접적으로 그로스 부인에게 구술하는 장면이나 이를 바탕으로 내려지는 전임자의 외모 평가는 이런 분석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 본문 164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 이 작품의 역자는 '거시기'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었는데요. 굳이 원문이 궁금하지 않더라도 이 단어를 쓰게 된 연유는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이 신선하기 보다는 조금 부자연스러운 측면이 있지 않나 생각해 보게 되는데요. 더욱이 번역된 작품 내에서 한자어와 같은 의도된 의미의 번역들이 여러 곳에서 보여서 저는 역자가 이 작품을 영어로 된 원전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일본어나 중국어로 번역된 작품을 중역한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역자가 번역한 글을 재차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풍채 좋고 단순하고 소박하고 깔끔하며 건전한 아낙, 그로스 부인이 무척 반가운 나머지 너무 티를 내지 않으려고 확연히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음을 인지하기까지는 도착 후 반 시간도 안 걸렸다.

"그 꼬마 신사에게는 정신없이 휩쓸리실 거예요."

잘 생각해 보니 나의 첫 임무는 내가 동원할 수 있는 가장 부드러운 솜씨로 아이를 구슬려 나를 아는 삶으로 느끼게끔 하는 일이었다.

거기서 내가 품었던 공상은 우리가 거의 대형 표류선에 타고 있는 한 줌의 승객만큼 길 잃은 신세라는 것이었다.

확실히. 이 소년의 학교 행실이라는 영역이 계속 알 수 없는 어둠에 파묻혀 있었던 것이다.

특히 마일스에게서 이를테면 과거라는 게 없는 아이 같다는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난다. (중략) 내가 아는 그 애 또래의 누구보다 매일 인생 새출발을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아이였다.

"퀸트만 좋아라 했던 거죠. 도련님을 데리고 노는. 그러니까 제 말은, 도련님을 망치는 걸요."

그래서 나는 얼른 해당 화제에 대한 나의 관심이 이제는 거기서 탈출하는 방안을 모색하는 형태를 취하느라 난리라는 말로 부인을 안심시켰다.

부인이 그토록 친밀한 연대의 적절성을 비평하고 부조화를 암시하며 심지어 제슬 선생에게 대놓고 건의를 할 정도로 나섰던 일은 기실 매우 적합한 진상이었다.

내가 압박하자 부인이 실토하길,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은 각각의 위치를 잊지 않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적어도 그런 소년이 학교장에게 쫓겨났다는 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유의하기도 했었다.

"우리의 기묘한 숙명 속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 배울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어떻게 갑자기 무너졌는지, 틀림없이 저 애도 내가 자기에게 어떻게, 시쳇말로 넘어갔는지 알리라는 생각에 떠밀려 침대 가장자리에 주저앉았는지.

"그 한 쌍이 그 소름 끼치는 시절에 아이들에 쏟아부은 만악 때문이죠. 또, 그 죄악을 아이들에게 계속 더 권하려고, 계속 마귀다운 짓에 매진하려고, 그러려고 다른 자들이 다시 돌아오는 거예요."

원래 남자가 여자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하는 방식은 그저 본인 인생의 낙이라는 신성한 원칙을 더욱 신나게 즐기는 식이기 일쑤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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