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의 고삐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김인환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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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6월 21일, 프랑스 옥시타니아 주 로트의 카자르크에서 태어난 사강은 어린 시절 대부분을 로트에서 보냈는데 자연의 동물들과 함께한 기억은 그녀에게 평생 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부친은 알려지지 않은 회사의 고위 임원이었고, 어머니느 유서 깊은 프랑스 지주 가문의 딸이었습니다. 그녀의 가족은 2차 대전 당시, 도피네로 피난을 떠났고, 이후 알프스 산맥의 서쪽 지역인 베르코르에서 안착하게 됩니다. 유복한 집안답게 그녀의 집안은 파리의 17구에 집을 보유하고 있었고, 전쟁 후에는 그곳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어지는 사강의 개인적 삶은, 두 번의 결혼으로 점철되었는데 그녀 스스로도 연애 감정에 있어 꽤 자유로운 여성이기도 했습니다. 1960년의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문학 활동을 관통하는 주요 주제에 관하여 그녀는 "고독과 사랑"이라고 언급하고 당시 누보 로망이 유행하던 프랑스 문단에서, 주제와 형식으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던 작가이기도 했습니다. 제법 파란만장한 삶이 진행되는 가운데 2000년대에 이르자 그녀의 건강이 나빠지기도 했는데요. 이와는 별개로 2002년에는 전 프랑스 대통령인 프랑수아 미테랑과 관련된 세금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기고 했습니다. 결국 그녀는 2004년 9월 24일, 칼바도스 주의 옹플뢰르에서 폐색전증으로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La Laisse"로 지난 198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1990년에 초도 번역으로 출판되기도 했으며, 제가 읽은 판본은 추측하건대 완전히 다른 번역본으로 2022년에 다시금 소개되었습니다.

저는 사강의 이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가장 이해하게 된 점은 여성들의 삶 속에서, 유년 시절의 경험과 주변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구축된 감정들이 얼마나 평생을 좌우하게 되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린 시절의 혹독한 기억과 친부모에게 받은 안좋은 영향들을 스스로 극복하고 다른 감정들로 채워가는게 물론 우리가 긍정적으로 지향해야 될 점이긴 하지만, 사람에 따라 그것이 잘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것을 단순히 '나약한 인간의 전형' 정도로 비난을 가하기보다는 인간에게 '환경'이 얼마나 중요하게 작용하는지 충분히 인식하는 계기가 모두에게 필요해 보입니다.

주인공인 뱅상은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일찍이 고아가 되어, 세상의 냉정한 경험을 몸소 겪은 인물입니다. 그는 외형상 자유로움과 유쾌함으로 포장하고 있지만 내면은 매우 불안정한 양태를 보이는데요. 사람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겉으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무장하듯, 뱅상의 인물 조형 자체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는 7년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준 로랑스라는 아내가 있습니다. 둘은 20대 초반에 벼락같이 결혼을 시작해, 남들이 보기에는 경제적으로 안정적이고 또한 부부라는 틀에서 봤을 때도 크게 문제가 없어 보이는 커플입니다. 로랑스는 약간 성마른 듯 보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감정 표현이 서투르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전형적인 여성성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저는 흔히 서구 유럽의 드라마와 같은 영상 매체로 접한 여성의 인물상이 이 로랑스에게는 잘 들어맞지 않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강이 만드는 여성 인물에 대한 감각 자체가 독특하다는 것을 감안해 보더라도 다른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부정적으로) 개성이 현존한 여성이었습니다.

앞서 얼핏 언급한대로, 소위 지참금으로 갖고 온 로랑스의 계좌로 말미암아, 뱅상은 자신의 인생 그 어느때보다 풍족한 생활을 지속합니다. 그는 자유로운 예술가의 기질을 갖고 있고 본업이라고 볼 수 있는 음악에 대한 태도 역시, 일견 독자들이 수용할 만합니다. 자신이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믿는 한 인간에게 스스로 접하고 택한 음악이라는 어떤 '탈출구'가 그에게는 삶의 전부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뱅상에게서 드러나는 불안한 심리가 단순히 자신의 업(業)으로 충분한 경제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보다 장인과 심지어 아내에게서 심정적 동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진행되는 서사전반 에서 그런 느낌을 받은 것이죠. 다만, 몇 년간의 지지부진한 답보 상태에서, 한 영화 작품에 자신이 참여한 앨범이 큰 히트를 보이면서, 비로소 '음악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주변과 세상이 알게된 것은 어떻게 보면 그의 개인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독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미 뱅상에 대한 장인의 화해의 제스처를 통해 잘 드러나는 바와 같이, 장인은 남편과 아버지로서 그닥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재력과 권력을 가진 남자들은 프랑스와 같은 개방된 사회에서 소위 정부(情婦)를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인물인데요. 그가 뱅상에게 하는 말들을 추론해 본다면,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자유로운 경험을 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어린 시절의 딸들에게 불행한 어머니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된다는 것은 그 아이의 인생 전반을 결정하는 아주 중요한 사태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어떤 부유한 사내가 자신이 구축한 가정에는 충분한 경제적 여력을 투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떤 '능력'으로 삼고 자신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근거로 삼아, 가족의 불행을 자초한다면 단순한 그 '경제적 안정성'으로 스스로의 행동의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은 아닐겁니다. 더욱이 가부장적인 모습을 보이는 가장이 자신의 아내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는 어느 정도 추측이 가능할 정도입니다. 이런 대부분의 것들을 어린 시절부터 체험한 로랑스는 결국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안전하고 보장된 틀 내에서, 뱅상을 옭아매고 말았습니다. 이 점은 극중에서, "부정한 남편의 교만과 야비함을 피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했을지도 모른다"는 해석에서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도 로랑스는 이런 부분에서 사로잡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물론 일차적으로 그러한 행동이 어느 정도 뱅상을 향한, 그녀의 선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두 사람의 결혼에 흡족하지 않았던 장인의 화해 시도가 드러나는 장면은 여기서 상세히 언급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극의 주요한 전환점이 되어 독자 여러분들이 직접 보시고 판단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이후, 뱅상의 행동은 로랑스의 의도가 담긴 자신에게 가한 행동들을 불신하고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극은 불행한 마무리로 점철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뱅상이라는 캐릭터 역시, 부모를 여읜 남들과 다른 세상의 멸시를 몸소 겪은 인물이면서, 자본주의적 사회에서 아내를 경제적으로 건사하지 못하는 일종의 '기둥 서방'과 같은 상황을 복합적으로 자조하면서 어두운 내면으로 더욱 빠져버리는 자학의 표상이기도 합니다. 사실상 개인의 자유와 스스로를 얽매이게 만드는 로랑스의 실상을 대면하고 나서, 더욱 주변을 불신하게 되는 상황 자체는 인격적 개연성을 답보하고 있긴 하지만 중후반부의 대사나 그에 따른 서사가 음울한 느낌을 자아내게 합니다. 뱅상의 자포자기하는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나, 그가 나아가는 발걸음이 더욱 최악으로 치닫고 있어 어느 정도는 제어판이 없는 극단의 인물로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은 남녀 사이의 사랑이라는 감정이 진정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한 숙고를 자아내게 하는데요. 불행한 어머니를 목도한 로랑스는 자신은 결코 그런 경험을 하지 않겠다는 내면의 다짐에서 철저하게 로랑스를 비롯한, 주변과 삶을 의도대로 조정했고 그것이 결국 두 사람의 파국이 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에 직업이 없는 가운데 가히 열정적이고 순수해 보이는 상대를 아마도 시작점에서 자신이 그 관계 전반을 조정할 수 있겠다고 믿고 그러한 과정 자체가 상대에게도 최소한 납득할 수 있는 응답을 기대했다는 점에서, 이 부부의 문제가 어디에서 근원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극의 결말에서 뱅상의 감정선을 살펴보는 것에 집중하기 보다, 로랑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애달픈 말들과 고통들이 너무나 직접적으로 다가와서, 저의 마음 역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사강이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말하는 바는, 인생 자체는 거의 도박과 같아서 많은 이들의 삶이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씁쓸한 결과가 재촉될 수밖에 없다는 점과 그간 온갖 경험을 해 본 성인이라 할지라도 그녀가 말하는 주제들은 여전히 우리에게 다시금 생채기를 남겨주고 있었습니다. 


- 작가인 사강은 작중의 뱅상을 통해, (제 해석이지만) 마초에 근접하는 남성적인 인물상, 혹은 그런 남성들의 동경에 대해 장면을 할애해 분석하고 있었는데요. 자신이 어느 정도 남성적이지 못하다는 (외면과 내면 모두) 일종의 절규에서, 그녀는 약간 물러선채로 뱅상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랫동안 여성 작가들은 대부분의 남자들이 동경하는 남성다움, 그리고 그것을 전형적으로 갖춘 남성들에 대해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것은 사실입니다. 가부장제에 대한 대부분의 비판이 바로 이런 남성다움에 기인한 것으로 치부하고 실상은 이들이 이것을 평범한 남성들에게 강요하는 사회적 압박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고려하지 않는 양상을 낳았던 것은 양쪽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 연유로 저는 극중 그 장면에서 많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 극 대미에 로랑스는 뱅상을 향해, 자신을 사랑했느냐고 절규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실상 뱅상은 여러 독백과 대화를 통해서 자신이 로랑스를 사랑하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는 남녀의 사랑이 굳이 이성적인 측면의 독해를 발휘하지 않더라도, 입장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며, 또한 사랑을 자기식으로 해석하고 어느 정도의 응답과 고백을 원한다는 점에서 모두가 사랑의 근본적인 측면을 간과하기 마련이라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그녀는 네가 그냥 그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지."

그러다가도 로랑스가 그녀의 친한 친구 중에서도 가장 못생긴 오딜을 내 비서로 택했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말하자면 내 몸과 마음은 언제나 함께 행동하기 때문에 나의 요구는 친밀감과 유대감을 느낀 후에야 뒤따르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성적 무능함만이 그들이 열정을 훼손하는 고통스럽고 결정적인 그 유예기간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럴 수 있는 형편이 되는 즉시 로랑스와 헤어지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짓인 것 같았다.

로랑스는 우리 부부 사이에 긴장이 지속되는 동안이면 높임말을 쓰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로랑스를 보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녀의 목소리도 자연스럽고, 격분한 그녀의 표정은 거의 속되기까지 했다. 나는 이처럼 그녀가 뻔뻔스럽고, 격분하고, 자연스럽고, 냉정할 때가 아주 좋았다.

그런 말은 이처럼 오랫동안 같이 살았고, 동침하였고, 또 사랑의 말들을 나누었던 두 사람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말들이 아니었다. 그리고 로랑스는 도덕주의자적인 자기 모습을 고수했다.

"나는 당신이 트루와 카르티에 백화점의 옷보다 샤넬 의상을 더 좋아하는 이유를 묻지 않겠어. 그건 말로도 표현할 수 없으니까."

"당신같이 순수한 사람에게는 당신에게 붙어서 먹고사는 기생충 같은 인간들이 달라붙어 다 빼앗아 가기 마련이고요,"

반면 그녀는 나를 속였고, 나를 이용해 먹었고, 나에게 기대어 살면서 명랑했던 나의 성격, 나의 남성적 기질, 내 선천적인 쾌활함에 얹혀서 살아온 셈이었다.

이번 일에서 제일 하기 어려운 것은 내가 오랫동안 모욕을 당해온 남자 노릇을 장시간 참아내야 하는 것이리라.

로랑스는 어린 시절 내내 그러한 혼란스러운 삶을 보고 자라왔기 때문에 부정한 남편의 교만과 야비함을 피하며 살아야겠다고 작정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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