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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큰 하버 ㅣ 더블린 살인수사과 시리즈
타나 프렌치 지음, 박현주 옮김 / 엘릭시르 / 2023년 1월
평점 :
1973년 미국 버몬트 주 버링턴에서 태어난 타나 프렌치는 현재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동시에 현직 연극 배우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개발도상국의 자원 관리에 힘쓴 경제학자였던 부친 밑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아일랜드, 이탈리아, 미국, 말라위 등지에서 보내게 됩니다. 프렌치는 어려서부터 글쓰기와 연기 모두에 매료되었지만 결국 연기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녀는 아일랜드 더블린의 유서 깊은 대학인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그곳에서 연기를 전공하게 됩니다. 1990년부터는 아예 아일랜드에 정착해, 현재는 남편과 두 딸과 함께 더블린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미 국내에도 "살인의 숲"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출판된, 그녀의 처녀작 "In The Woods"는 '더블린 살인수사과'의 시작인 작품으로, 2007년에 전세계적 관심을 받은 바가 있습니다. 2016년에는 앞선 '더블린 살인수사과'의 여섯 번째 작품인 "침입자 The Tresspassr"가 출간되었는데요. 바로 이 '브로큰 하버'는 위 시리즈의 4번째 작품이기도 합니다. 특히,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유사성 The Likeness"은 2008년에 출간되어 여러 나라의 베스트셀러 목록에 빠르게 순위에 올랐고 이에 여러 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꽤 순도 높은 형사-스릴러 서사에 강점을 가지고 있지만 2008년 뉴욕 발 금융 위기 이후, 아일랜드 국내의 변화된 경제 상황과 이런 급격한 여파가 평범한 사람들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를 작품에 투영하기 시작했는데요. 이 브로큰 하버가 바로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장편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Broken Habor"로 지난 2012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3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타나 프렌치의 이 작품은, 얼마전에 서평을 남긴 슬라보예 지젝의 '지유"에 몇차례 인용이 되어, 개인적으로 든 호기심 때문에 구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구입하기 전부터 이 소설이 적잖은 분량임은 알고 있었으나 받아보고 나니, 족히 800페이지가 넘는 긴 장편이었는데요. 이미 서평을 쓸 책의 대기가 상당히 적체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이 시점에서 이 책을 소화해야하나 싶었지만 완독을 하게 되니, 여러모로 적잖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여기에 약간의 논외지만, 번역 역시 크게 나무랄데가 없었는데요. 양질의 번역 때문에 시간을 들이며, 이 소설의 서사를 따라가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리를 빌어 역자의 노고에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이 작품의 지리적 배경이자, 동시에 살인 사건의 무대이도 한, "브로큰 하버"는 말 그대로 스산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수도인 더블린에 인접해 있지만 주변에 여느 타운이 없는 점이나, 그저 인적 드문 해변가 일대를 뜬금 없이 주택 단지로 개발한 이력도 한 몫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 브로큰 하버라는 지역은 '브라이언스 타운'의 이명이기도 합니다. 작중에서 소개되는 브라이언스 타운의 뜻은 동틀 녘을 뜻하는 아일랜드 방언인 브레카드 Breacadh 에서 유래했다고 짧게 언급됩니다. 소설 속에서 이 지역은 현실적으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데요. 2008년 이전의 부동산 버블에 의해, 신규로 계획된 주택 단지가 들어선 곳으로, 드문드문 입주해 있는 고립된 지역의 을씨년스러움 뿐만 아니라, 패트릭, 제니퍼 부부와 이들의 어린 아들과 딸 모두가 비극적인 살인 사건을 맞이하는 장소이기도 합니다. 이 살인 사건을 수사하게 되는 더블린 경찰청의 마이클 케네디, 리처드 커런 형사가 주요 극을 이끌게 되고 여기에 관련된 참고인들과 목격자들, 그리고 용의자에 근접한 인물의 동선을 따라, 그들의 삶이 추적당하게 됩니다. 물론 타나 프렌치의 이 작품은 '더블린 살인수사과'라는 시리즈에 포함된 작품 답게, 일관된 추리 스릴러의 구조를 따라가고 있는데요. 이는 단순히 구조적인 측면에서 분류될 수도 있지만, 작품에 내재되어 있는 "평범한 사람의 삶이 당면한 경제적 위기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현실 인식과 또한, 그것은 한 개인의 의지로 분연히 극복될 수 없다"는 점이 주제 의식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이 점은 앞서 언급한 지젝의 분석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인데요. 그래서 그는 신자유주의의 경제적 파국이 낱낱이 파괴하고 있는 한 가정에 대한 연민과 형사의 그 선택을 인간적인 감정에서 어느 정도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소설의 기준이 되는 아일랜드 사회가 유럽의 대표적인 형법 체제 상의 체계적으로 구축된 국가 인지 그런 판단을 내리기 다소 성급할 수 있지만, 여기서 드러나는 더블린 경찰국의 일처리와 수사 과정은 꽤나 진보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주인공인 마이클 케네디 형사의 사법 체계에 대한 신뢰나 그의 말대로 수사와 법 적용에, '선을 지킨다'는 일종의 그런 주의는 꽤나 명료한 확신으로 전해졌는데요. 다만, 건조한 서사와 극이 갈등으로 인해 고조될수록 한층 더 범인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선호하는 분들이라면 이 작품이 온전히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어려서부터 사랑을 확신하여, 사랑하는 연인과 단란한 가정을 꾸린 패트릭 부부의 연애사 내지는 가족사는 꽤나 선명한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어려서부터 패트릭은 절대 절제의 범위 바깥을 벗어나거나 스스로 자기 통제를 벗어난 경우가 없었다는 작가의 캐릭터 구축은 여성적인 감성이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왜냐하면 간혹 감정 기복을 다스리지 못하는 일반 남성들을 여자들은 살면서 숱하게 경험하게 되므로 어쩌면 그것에 대한 반대 급부라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스스로를 적절하게 이성으로 통제할 수 있는 남자는 그만큼 이 사회에서 매우 귀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이미 십대 시절의 청소년들이 즉흥적이고 통제불가한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고 많은 작품에서 이를 여실히 다루고 있기도 합니다. 사춘기 시절의 그 질풍노도와 같은 심경 변화와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행동들을 말이죠. 작가인 프렌치 역시 이를 작품의 요소로 여러 곳에서 차용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앞선 패트릭의 저런 구별되는 기질은 극의 중후반부 반전에서 더욱 극명하게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매우 비극적으로 말이죠.
모든 인간이 과거 한때의 눈부신 기억으로 현실을 망각한 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은 거의 분명합니다. 또한 일찍이 서로 간의 사랑을 확인한 한 커플이 모두의 부러움과 시샘을 살 정도로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는 그 명확한 서사는 이들 가족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는데요. 제니퍼와 여동생인 피오나의 서로를 향한 이해의 부족은 바로 이런 측면을 설명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를 포함한, 가족의 불행을 향해 치닫는 서사는 모두 이들만의 책임이 아님은 명확합니다. 오로지 가정의 안위만을 바라보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동네로 들어간 부부는 결국 자신들의 믿음과 확신에 반하게 되는 냉엄한 현실과 그 속의 자신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당시 2008년의 아일랜드가 여느 유럽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거품'에 의해 평범한 가족들이 무일푼으로 거리에 내몰리게 되는 장면은 이미 자료가 입증하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아이슬란드로부터 시작된 재앙은 영국을 거쳐, 아일랜드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태에 이르러 가족을 먹여살려야만 하는 평범한 가장의 보잘것 없는 수완까지도 원천적으로 봉쇄시켜, 그 가장을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몬 것이, 이 비극의 근본적 원인이라 볼 수 있습니다. 작가인 타나 프렌치는 바로 이 점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했습니다. 패트릭에 빙의된 작가가, "그것은 오로지 당신만의 책임이 아니다"라고 말이죠.
다만, 이 비극적 상황에서 아내인 제니퍼까지도 패트릭의 망상에 어느 정도 정신을 잠식당하며, 휩쓸리게 되는데요. 그것의 단초가 이들과 매우 밀접한 한 인물의 단순한 행동거지 때문이라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그런 요소를 잘 활용한 작가의 재능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사건을 해결하게 되는 결정적 단초나 반대로 급격한 사건의 몰락으로 이어지는 근본 원인이 우리가 미처 주목하지 않는 사소한 행동 때문일 수도 있다는 점은, 어쩌면 현실에서는 누군가에게 교훈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이는 자신이 온전히 믿고 확신하는 선의로 빚어진 행동이 누군가에는 절대 그렇지 않은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고금의 진리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 작가인 타나 프렌치는 코너 브레넌이라는 인물을 통해, 과거의 찬란했던 추억과 그때의 자신과 함께했던 소중한 친구들이라는 뇌리에 진지하게 각인된 장면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결핍 즉, 평범한 가정'을 대체하고, 더 나아가 이것을 숭배하는 인물의 진면목을 가감없이 묘사하고 있었는데요. 이처럼 코너 브레넌의 인물 조성은 다분히 의도된 작가의 설정이기도 합니다. 물론 중후반부 서사에서 코너 브레넌의 존재 자체가 반전의 주요 요소이므로 그의 정체와 앞선 두 부부와의 내밀한 관계가 어느 정도 베일에 쌓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어린 시절에 각인된 한 소녀의 대한 이미지와 그녀에 대한 숭배는 그 시절 남자들에게는 드물지 않은 감정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것을 본인이 먕백한 사랑이라고 확신한다 하더라도 그 감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고, 내게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누구나 이성적으로 이를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인간이 아무리 감정의 동물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내 자신과 또한 밀접한 그 상대를 위해서 말이죠.
그럼에도 극 서사 전개에 대해 일부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 가운데, 마이클 케네디와 리처드 커런 형사의 일정 부분 관계를 넘나드는 대립과 이어지는 갈등 해소 등은 다소 전형적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케네디의 파트너이기도 한 리처드의 사건 중심에 있는 인물에게 보이는 과도한 감정적 동조 상태 내지는 편집증적인 상황은 읽는 내내,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었습니다. 물론 심문 가운데 보이는, 마이클 케네디의 과도한 행동과 감정 변화 역시, 극 전반의 일관된 시점을 위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었으나, 그의 불행한 가족사가 연이어 등장하면서 후반부 케네디와 제니퍼 간에 비극적으로 마무리 되는 대미까지도 매끄럽게 이 두 가족사거 연결된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브로큰 하버'를 놓고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체험하게 되는 참혹한 결말이 바로 케네디와 제니퍼를 심정적으로 연결해 준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는데요. 각 캐릭터가 갖는 복잡하고 어려운 심정과 그것의 배경을 납득할 수 있는 꽤나 합리적인 묘사는 어쩌면 거듭된 작가의 재능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이러한 세밀한 설정과 독자들에게 안타까움과 비통함을 충분히 공감케 하는 가족사들의 연이은 배치는 여성 작가 특유의 분석이 바탕이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공감과 동질감이라는 감정적 측면은 캐릭터들 간의 행동을 극적으로 유인하고 이러한 맥락에서 극의 전개가 비극의 한 형태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감정적 개연성에 따른 서사의 확립이라고 말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독자들에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것은 거의 분명해 보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저는 패트릭이 맞닥뜨린 절망적인 상황과 가족을 건사해야만 하는 가장의 의무로서 자신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그의 불행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을 정신적 나락으로 내모는 요인은 이 현대 사회에서는 너무나 많고 다양하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을 경제적으로 건사하지 못할 수 있다는 일종의 한계 내지 좌절은 우리가 유토피아라고 믿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쉬이 극복할 수 없는 과제일 겁니다. 아마도 이 시대의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한 고민을 매일, 아니 거의 쉴 틈 없이 매번 하고 있겠지요. 더불어 이 작품에는 개인과 개인 간의 올바르고 도덕적 관계에 대한 고심과 오늘날 현대인들이 매번 변화하는 현실 조건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러한 단면들을 마찬가지로 설득력 있게 드러내고 있었는데요.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이 단순한 형사-스릴러 물에 이러한 의식들을 여러모로 녹여낸 작가의 창의적 능력이라고 상찬할 수도 있지만, 작가인 그녀가 글을 쓰고 탈고할 때마다, 방안에 있는 자신의 자녀들을 바라보며 들었던 복잡한 심사도 간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일련의 참혹하면서 매우 아련한 대미가 저에게는 깊은 여운이 되었다는 점을 글 말미에 밝혀두고 싶었습니다.
-164 페이지에 제니퍼의 동생의 성이 스페인으로 번역되어 있었는데요. 제니퍼는 남편인 패트릭의 성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여기에 남동생의 성도 '스페인'일수는 없을 겁니다. 철자가 다른 스페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역자의 설명이 따로 있지는 않았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처럼 꽉 감은 얇은 눈꺼풀. 세계가 살인자가 되어 미처 돌아갈 때 아이들은 안으로, 뒤로, 즉 처음 안전하게 머물렀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듯이.
부서져가는 정신의 잔해 속 어딘가에서 그들은 최선에 미치지 못한 모습으로 발견되면 기분이 언짢을 거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자살자는 죽음이 완전히 닥칠 거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한 남자에게는 심각한 압박이 아니었을까요. 자기가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는 것이."
"그 여자는 가족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마지막 순간을 쓰고도 남을 사람처럼 보이던데,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가 꾸민 연극일 수도 있지."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 수사의 남은 기간 동안 ‘경찰들은 소시민에게는 신경 쓰지 않는다‘며 히스테리를 부리는 언론 태풍과 싸우며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스페인 가족이 반은 신화적 존재, 아무도 살아 있는 것을 본 적 없는 숨은 꾀꼬리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인지 집이 사뭇 다르게 보였다.
내가 이제까지 잡아넣은 극악무도한 살인범들은 고양이처럼 부드러워 보였으며 늘 살인 후에는 가장 고분고분하고 기진맥진하며 쾌락에 배부른 상태였다.
"자기 작업을 끝낸 후에 순수 표백제로 목욕을 하는 거나 다름없는 범인들은 봐았지만 자기 차를 청소하는 데까지 신경을 쓰는 놈들이 있겠어?"
"제니와 팻이 그 집을 샀을 때 코너는 그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어요. 저도 그랬어고요. 하지만 언니네는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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