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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 치유할 수 없는 질병
슬라보예 지젝 지음, 노윤기 옮김 / 현암사 / 2025년 1월
평점 :
지젝은 1949년, 당시 유고슬라비아였던 류블랴나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인 요젝 지젝은 슬로베니아 동부, 프레크무르예 지역 출신으로, 당시 이 지역에서 촉망받는 경제학자이자 국가 공무원이었습니다. 또한 모친인 베스나는 슬로베니아 리토랄의 고리치아 힐스 출신으로, 국영 기업의 회계사로 일했습니다. 특이하게도 그의 부모 모두 무신론자였습니다. 지젝은 어려서부터 영화 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이런 희망을 과감히 포기하고 대신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로부터 1967년이 되던 해에, 지젝은 티토가 주도한 자유화의 분위기에서 류블랴나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공부합니다. 즉, 그는 이 모교에서 학사와 문학 석사, 문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때 지젝은 대륙 철학에 기반한 헤겔 철학에 몰두하게 되는데요. 앞선 1967년부터, 그는 자크 데리다와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의 글을 탐독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1980년대에 지젝은 자크 라캉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루이 알튀세르의 글을 편집하고 또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자크 라캉의 글들을 통해, 헤겔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해석하기도 했는데요. 그에게는 라캉으로부터 시작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적 인식, 그리고 그것을 수정하는데 몰두하기도 합니다. 1986년에 지젝은, 프랑스 파리 8 대학에서, 자크-알랭 밀러의 지도하에 두 번째 박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학문적 기반과 성취를 통해, 서구 유럽의 민주주의와 자유, 평등, 사회 문제, 관념론 등에 목소리를 높이고, 상아탑 지식인이 아닌 대중 지식인으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현재 전세계 슬로베니아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로 꼽히기도 하는 지젝은 이러한 여러 강단 활동과 출판 등으로 명성을 쌓은 것이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그는 영국 런던 대학의 인문학을 위한 버크벡 연구소의 국제 이사, 뉴욕 대학의 독일어 세계 명예교수, 유럽 대학원 (EGS)의 철학 및 정신분석학 교수, 모교인 류블랴나 대학의 사회학 및 철학 연구소의 수석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Freedom : A Disease Without Cure"로 지난 202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1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지젝의 이 논저는 '자유'라는 광범위한 의미의 테제를 기반으로 이것이 인간과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으며, 현재에 이르러 '실질적 자유'의 의미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유가 유럽과 미국에서 우익에 의해 오도되어, 자신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범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데 이용되어 왔다는 점과 지젝이 그동안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비자유'의 메커니즘으로 유지되어 왔다는 점을 서슴없이 폭로한 이력이 있기도 합니다. 물론 지젝은 자신의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이기도 한, "그동안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인간의 역사에서, 이 자유를 통해 우리가 인간 해방에 보다 가까이 다가갔는지"에 대해선 따로 언급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을 약간 풀어본다면, 조지 오웰의 수사처럼 "자신들이 명백하게 자유롭다고 외치는 사회가 결국에는 자유롭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식으로 이해가 가능합니다. 이를 통해 그동안 계몽주의자들의 노정으로 시작된 자유에 대한 쟁취가 현시점에 이르러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는데요. 더욱이 표면적으로 민주주의를 내세우는 국가조차도 안으로 들어가보면 모두가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세계의 언론을 통해 드러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저 입으로 외치는 자유와 반대로 '비자유'와 '자유의 결핍'에 대해 시민들이 그만큼 고민해 볼 시점에 이르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젝은 서두에서 임마누엘 칸트의 도덕 법칙을 근거로 자유는 단지 왜곡되거나 병에 감염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자유는 하나의 질병과 같으니 그런 인간을 훈육하고 가르칠 주인이 필요하다고 강조합니다. 뒤이어 등장할 루소의 자유 의지를 논하지 않더라도 인간이 스스로 사고하는 존재로서, '신체와 정신의 자유'를 주장할 권리는 마땅히 침해받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지젝이 후술되는 인간과 자유의 원천적 문제와의 결부된 문제를 철학적 수단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저는 이 글의 후반부에서, 극우 네오 파시스트에 가까운 극단주의자들과 그것을 등에 업은 대중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기반해, 기존 정치체를 부정하면서도 결국은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는데 소위, "화려한 외피를 두르고 있다"는 점은 아마도 민주주의 내에서 자유의 근본적인 의미를 탐색하는 데 주요한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왜 인간이 스스로의 자유를 인식하는 경우에 있어, 왜 훈육과 자기 교육이 필요하는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물론 지젝은 이런 기본적인 탐구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 그것을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속에서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자유를 누리고 있는지를,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도 한) 라캉과 그외 여러 사상가들 및 작가들의 작품 들을 매개로 면밀히 분석해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목도할 수 있는 자유의 한계라는 것은 이 글에서 논의되는 바와 같이, 정치적 자유의 극명한 역설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대안은, "새로운 정치를 위해 우리가 지금의 혼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책임있는 자세로 전략적인 선택을 마련하는 일"이라고 저자인 지젝은 강조합니다. 이 정치적 혼란의 근본 원인인 이 극단주의적 파고는 세계 도처에서 쉽게 수그러들 기미가 없어 보이는 것은 앞으로의 정치적 미래가 그만큼 어둡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결국 지젝의 분석대로 인간은 이 자유가 근본 목적이자 가치로 구축한 체제조차도 (가련한 현실을 드러내는 의미에서) 누군가가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다는 점도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지금 도널드 트럼프를 떠올려 본다면 앞선 서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 권력을 가진 자이거나 아니면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정치인이라면 필요한 도덕적 선명성이나 정치적 이상, 심지어 진보에 대한 그림까지도 진정성 따위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허위와 다름없는 혀놀림'으로 대다수 시민들을 농락할 수도 있습니다. 작금에 이르러선 헝가리, 스페인, 오스트리아, 독일 등지에서 이러한 일들이 발견될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현실에서, 지젝은 데카르트의 영향을 받은 라캉의 '주이상스'를 인간의 권력에 대한 욕망과 절묘하게 매치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권력을 갖기 위한 욕망과 그런 행위 자체가 분명히 자기 이익에 기반한 것이기도 합니다. 이 주이상스는 라캉에게 있어, 쾌락의 추구, 아니면 쾌락 그 자체로, 만약 인간에게 쾌락에 대한 본능 혹은 쾌락 그 자체를 제거한다면 과연 "그 혹은 그녀"가 인간일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 쾌락에 있어 주이상스는 실체와 허구와 혼재된 욕망과 충동적인 향유를 이르는 말이기도 한데요. 인간에게 페니스가 쾌락의 근원이자 그것을 가능케 하는 원초적인 무언가로 지칭될 때, 반대로 거세는 그것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이는 사회심리학적인 근본 원인의 탐구 주제가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연계를 다른 식으로 구성해 본다면, 다분한 자기 이익적 태도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무턱대고 러시아를 두둔하기 시작했을 때, 이들을 모조리 싸잡아 '옳고 그름의 문제', 즉 도덕적 본성이 거세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이 현상 자체로만 보자면 인간의 본성에서 무언가가 일부 배제되었거나, 인식의 자유에 기반한 자기 합리화의 강한 욕망이 발휘되었다고 읽힙니다.
인간과 관련된 자연의 본성이 어느 정도 규명되고 나자, 뒤이어 이성이라는 측면에서 일군의 계몽주의자들이 탐구했던 것은 아마도 기본적 '의지'와 관련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다른 유명한 구절로 말하자면 그것은 '자유 의지'였습니다. 거의 말장난과 다를바 없이, 우리 인간이 갖고 있다고 여겨지는 '자유 의지' 혹은 이와 별개로 자유 자체에 인간으로 하여금, 이를 추동하는 의지가 있는지에 대해, 지젝은 본래의 이야기를 벗어나 색다른 분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자연과 그것을 해석하는 과학의 범주 안에, 인간 본성으로서의 자유 의지를 지젝은 논하면서도 프랜시스 후쿠야마를 통해 일단의 결정론을 들고 나오는데요. '인간성'이라는 개념 자체는 우리가 물려받고 부여받은 '인간 본성'의 개념과 유사하다는 그의 분석은 자유 의지와 관련해, 제법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버마스의 이론을 들어, "과학의 결과가 인간의 자유와 자율성의 지배 담론에 의협이 된다"는 논증 또한 새겨들을 만하다고 여져지는데요. 이 부분의 설명은 역시나 우리가 생각하는 그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이를테면 AI 같은 것 말이죠. 과거 프랑스 혁명을 통해 드러난, '자유 의지'는 그것의 역사적이면서 혁명적인 의미를 되짚기에 앞서, 입으로 자유를 추구하고 심지어 추종했던 자들이 모조리 '테러'로 귀결된 한 줄의 비극적 역사를 새기고 말았습니다. 지젝 역시 이 부분에 대해 깊은 소회를 독자들에게 돌리고 있었는데요. 약간의 논외이긴 하지만 이 프랑스 혁명과 다소간 비교되는 레닌과 소비에트 혁명 역시, 그것의 결과물이 '억압받는 인간'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권력 투쟁으로 끔찍하게 귀결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이해하는 우리의 눈이나 그 구성 요소에 대해, 과연 인간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철학적 탐구 내지는 인간 본성과 결부된 우리 세계 자체를 면밀히 분석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변질된 스탈린주의에 대한 지젝의 비판은 나약하고 안일한 이상주의자들에게 향하는 조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과 한 몸인 것처럼 세계는 그렇게 결부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 인간에 의해 세계 자체가 변혁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부분에서 지젝이 인용한 칸트의 초월적 존재 (혹은 인간을 빗대어 해석할 수 있는)에 대한 탐구나 오랫동안 철학자들의 관심을 이끌었던주체와 객체의 관계성 역시, 앞선 자유 의지와 유사한 맥락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 인간이 소중한 자유를 기반으로 동시에 삶의 건전한 목적성을 추구하는, 전반적인 삶 자체에 있어 그것을 실질적으로 파괴한 것은 바로 '자본주의'라고 지젝은 강조합니다. 즉, 이는 4장에서, "실제 삶 자체가 투기적 자본의 광기 어린 춤의 하위 순간으로 축소되었다거나, 그토록 건강한 삶은 자본주의적인 소외에 의해 파괴되고 없기 때문"이라고 그 분석을 확장하는데요. 이미 그레이엄 그린이 "순진함은 폭력과 다름없다"고 말한바와 같이, 전면적인 헤겔주의에서 우리의 역사와 사회가 진보하지 못하는 이런 '역사적 고착 상태'는 바로 우리의 순진한 무관심에 있었습니다. 물론 이 무관심 자체가 앞선 고착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런 무관심을 이끌게 한 것이 과연 무엇이냐에 대해선 적지 않은 이들이 아마 '자본주의의 소외적 측면과 평범한 삶을 도덕과 유리시키는 이기심 추구'라는 측면으로 이해하고 있을 겁니다. 지젝의 진술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결국 그가 앞서 설명한 바대로, 자본주의에서 변형된 이 투기적 금융 자본주의가 더욱 이러한 상황을 고착화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이런 투기 금융 자본이 주가 된 자본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사회를 충분히 부유하지 않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빈곤을 퇴치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그의 말처럼 '부의 과잉 상태'라고 생각됩니다. 이 부분의 진술 또한 쉽게 수긍이 되는 부분입니다. 또한 지젝은 글 후반부에서, 우크라이나가 현재 러시아와의 극명한 전쟁 상황에서 잠시나마 서구에 의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주춤해지자, 그동안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개인의 무분별한 탐욕과 이익 추구로 인한, 부패와 뇌물 문제가 점차 해소되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결국 신자유주의는 전쟁 상태가 되어서야 그것의 실질적 폐해가 중단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자, 지젝이 비판하는 자유주의적 좌파가 왜 그동안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다소 순진한 태도를 보였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미국의 방위 산업체가 막대한 이익을 거두고 있다는 식은 결국 전쟁의 본질을 대면하지 못하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젝의 촘스키에 대한 비판은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지젝은 신자유주의하에, 하이에크식으로 "시장은 자유가 실현되는 공간"이라고 언급합니다. 그동안 데이빗 코츠와 리민치가 신자유주의의 본질을 파헤쳤던 것처럼, 소위 변형되고 완전히 다른 방면의 '자유'를 위의 신자유주의자들이 거의 안면몰수된 이데올로기처럼 주장했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거의 이데올로기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앞서 지젝이 자유에 대한 우익들의 오용이 사회적으로 어떤 식으로 개념화되고 있는지, 그리고 그러한 결과가 이민과 인종 차별을 우회하여 다수의 시민들을 배제하는 양상을 드러내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2008년에 들어서 그리고 작금의 전쟁에서 지젝은 겸허히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쇠퇴했다"고 강조합니다. (데이빗 코츠가 이를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의문입니다만) 바로 이런 쇠퇴에서, 앞으로 벌어질 전쟁은, "신자유주의와 그 이후의 싸움이 아니라 장차 도래할 두 형태의 싸움이 될 것인데, 하나는 공포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약속하며 우리를 계속 꿈꾸게 하는 기업 (저커버그의 '메타버스'와 같은) 신봉건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를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모색하도록 강제하는 가혹한 각성"이라고 메시아적 경고를 우리에게 내립니다. 앞선 저커버그의 거대 인터넷 기업이 모든 시민들의 취향과 소비 행태 등을 묶어 과거 봉건주의 시대의 영주가 자신의 영지민들에게 일일이 거부할 수 없는 지시를 내린 것처럼, 사실상 우리 사회가 저 인터넷 기업의 지배하에 놓이게 될 것을 지젝은 분명 그런 경고를 했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본다면 그의 말이 완전히 허무맹랑한 소리는 아닐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만큼 자유를 강조한다는 이 자유 민주주의 사회가 실상은 어떻게 보면 감시에 가까운 은밀한 검열이 서서히 확장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글 후반부에서 지젝은 자신의 이 논저를 통해, 우리가 구축해 왔던 자유에 대한 담론과 그것을 바탕으로 시민의 자유와 그것을 보장하는 국가 체제가 과거 후쿠야마 식의 자유 진영이 사회주의 진영에 이념적으로 승리한 그것은 아니라고 여러 논증 가운데 밝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더욱 악화시킨 인간 소외의 문제 그리고 심각한 불평등 문제는, 공리주의자들로부터 혹은 밀과 같은 자유주의자로 이어진 사회적 협력과 공공의 이익이라는 개념을 사회의 외적인 문제로 여실히 '배제되어'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젝은 "우리가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야 하며, 착취받고 지배받는 이들을 우선시하면서도 중립적인 보편성의 형태를 갖추어야 되고, 그것이 새로운 법으로 도피하지 않도록 제한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는 법에서 평등을 보장한다는 이유로 우리 사회가 충분히 평등하다는 세간의 인식을 경고하는 동시에, 이민 유입된 많은 사회에서 인종 차별과 종교적 차별이 분명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법에서는 그러한 차별과 종교적 관용을 보장하고 있다는 식으로 회피하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를 앞선 지젝의 제언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 새로운 보편성의 제안이 어떻게 보면 이는 진보에 대한 아주 본질적인 가치면서, 오히려 과거 좌파들이 신자유주의에 무력했던 사회사를 뒤돌아보게 하는 장치로도 읽힙니다. 그동안 물신화된 자본주의는 사회의 비판적 목소리와 왜곡되는 구조 자체에 대한 이견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모습을 거의 자임했습니다. 사회에서 이에 반하는 의견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분명 많은 지식인들이 이에 동조하는 경향을 띠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한편으론 지식인들이 변질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노엄 촘스키는 지식인의 의무에 대해 언급하기까지 했지요.
본격적인 냉전이 시작되자 하이에크와 밀턴과 같은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가 매개된 시장 자유주의에 대해 목소리를 높입니다. 신자유주의적 개혁들이 그저 기업들의 이윤을 위해, 국가의 사회 부조를 끊어내어 세금을 줄이는 목적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이 인간을 자유케 하리라"는 무슨 복음과도 같은 말들을 엮어내면서 말입니다. 고도화된 금융 자본주의가 다수 인간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고, 혹여 앞으로의 자본주의가 인간이 철저히 배제된 채로 지속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저자는 마찬가지로 경고합니다. 작금의 인간성이 결여된 이 자본주의가 어떠한 식으로 귀결될지 AI의 비인간성과 함께 고려해 볼 때, 이는 매우 두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에 8장에서 지젝은 "인간은 그 정념에 의해 우선적으로 충동되고, 그 정념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구조에 의해 결정된다"고 언급하고 우리가 마땅히 주체가 되는 체제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철학을 바꾸어야 되는 시점이 왔다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근래 읽었던 지젝의 여러 책들 가운데, 이 책은 인류가 현재에 이른 전쟁과 자본주의의 비정상적 양상, 그리고 극단주의 세력의 대두와 그것을 통해 이들이 정치적 이익을 얻게 되는 민주주의 전반의 첨예한 갈등 구조가 어떤 식으로 거대한 불협화음과 그로 인한 궤멸의 원인이 될 수 있는지, 우리는 어느 정도 미래를 유추해 보는데 그의 이 글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물론 여기에 드러나는 논증의 방식이나 그것의 근거가 모두 설득력이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논증의 단초가 된 것은 바로 이 '자유'이며, 자유가 본래의 의미가 아닌 그동안 점층이 이데올로기화가 되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마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으면서도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치는 자들의 경우처럼 말입니다. 이에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체제가 부정적 순환 구조 위에 놓여 있다는 것과 더불어 자본주의와 전쟁, 디지털 기업들이 주도하는 봉건주의화와 같은 각각의 개별 주제들로 연계되는 점은 지젝의 특별한 사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만, 기본적으로 지젝의 이 글은 독자들의 관련된 면밀한 배경 지식을 요구하고, 특히 라캉에 대한 사전 지식 또한 특별히 요청되는 사항이기도 했습니다.
끝으로 지젝은 자유가 그저 법으로만 존재하는 상태의 그것처럼, 체제가 보장하고 인정하는 자유를 마땅히 향유해야 하는 시민들이 사실상 '비자유'에 놓인 지경이라고 진단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놓인 비극적 결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기도 합니다. 많은 학자들과 지식인들이 판단하는 바와 같이,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예전에 계몽주의자들이 고민했던 수준의 것들보다 심각한 수준임은 거의 분명합니다. 이에 중립을 겉에 두른 양비론과 같이, 시민 모두가 그저 냉소주의에 빠져 현실을 정확히 회피하는 식으로 기본적인 의무 (너무나 많이 언급해서 입이 아플 정도로) 를 방기한다면 체제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관계성 마저, 비극적으로 모호해질 것입니다. 마치 하인을 섬기는 주인의 방식과 같은 상징적인 수사는 이를 대변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젝은 글 말미에 우리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있었는데요. 지젝이 파헤친, 우리가 직면한 세계의 불완전성과 그에 따른 위기 그리고 나날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조건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담대하게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그가 말하는 시민 개개인의 '영웅적 면모'로 진정으로 연대할 수 있다면, 왜곡된 체제에서 이익을 거두는 그 체제 본연과 그것에 기생하는 자들이 키우는 위기를 점차 개선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젝이 강조했던 것처럼 이러한 사태에 있어, 우리는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철학적으로도 스스로를 무장시켜야 하는 근본 이유가 되지 않나 글 말미에 다시금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지만 궁극적인 인간 해방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누구나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되새기고 향유하는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스스로에 대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 아닌가 거듭 생각해 보게 됩니다.
사회적 공간 안에서 우리는 언제나 추상적 자유와 구체적 자유 사이의 긴장 속에 있다. 우리는 우리의 자유를 매개하는 ‘소외된‘ 기관들인 시장, 국가, 대의민주주의 등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정치적 탄압은 물론이고, 환경 파괴와 농촌 빈곤 상황 등을 연구하는 성가신 지식인들을 국가 기밀 누설죄로 수년간 감옥에 가둔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규범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상황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진정한 자유는 우리 삶의 결여, 즉 우리의 운명을 결정할 무언가를 선택하도록 강요받을 때 발생한다.
여기서 지옥은 무엇일까? 라캉은 분명히 밝혔다. "인간의 욕망이 지옥이며, 욕망의 작용이야 말로 어떤 것을 이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칸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이러한 자유는 언제나 병리적인 동기들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에 인과성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계급투쟁은 정확히 말해서 세상이 두 개의 계급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으로 명확하게 양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스스로를 신비로운 존재로 포장하며 은밀히 숨겨진 것을 가리키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뒤에서는 자신이 저지르는 (또는 정당화하는) 범죄를 은폐한다.
언젠가는 ‘강렬하고 충만한‘ 완전한 의미의 주이상스를 경험함으로써 유아적 환상에서 벗어날 것이라는 약속 자체가 궁극적 환상이다.
여성에 대한 억압은 여성이 적절히 통제되지 않으면 과도한 쾌락이 그녀들을 앗아갈 것이라는 두려움에 의해 유지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국가적 대의를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자신의 이익 추구를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부의 과잉에도 불구하고 시민 사회가 빈곤해진다"기보다는, 사회를 충분히 부유하지 않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빈곤을 퇴치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부의 과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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