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격화된 내전의 다른 돌발 원인이기도 한 용어인 '지위 격하 downgrading'는 다른 말로 지위 상실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필리핀 남부에서 존경과 신망을 받았던 다투 우드토그 마탈람 Datu Utdog Matalam 이라는 인물의 비극적 행적으로 살펴 볼 수 있겠는데요. 그는 과거 2차 대전에서 일본군과 용감히 싸운 전쟁 영웅이자, 근래에 이르러서는 지역민들 사이의 분쟁을 현명하게 조정하는 공정한 중재자였던 인물입니다. 지역 내의 신망과 권위를 갖고 있던 일종의 지도자이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앞선 이력은 주변 사람들에게 충분히 인정과 존중을 받을만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북부의 카톨릭 교도인 필리핀인들이 경제적 기회를 찾아, 그가 살고 있는 남부로 내려오면서, 그의 평온한 일상은 지옥으로 변하기 시작합니다. 카톨릭과 이슬람이라는 종교적 이분법은 차치하더라도, 땅과 경제적 이익을 가운데 놓고 벌이기 시작한 실질적 대립은 마탈람의 장남이 정부 요인으로부터 살해 당한 시점부터 격화되기 시작합니다. 전통적인 이슬람 사회에서 지도자인 마탈람의 아들이 이교도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 당한 사건은 그에게는 상당한 모욕이 되기도 했는데요. 결국 그는 분연히 일어나 양손에 총을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사례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국가의 다른 인종, 각기 구분되는 종교적 혹은 관습적 차이가 양자 사이에 중재 되지 않는다면 힘의 논리에 의해, 어느 한 쪽의 지위 격하를 발생 시킬 가능성이 커지고 이것은 결국, 곧 권력의 불균형한 차이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타 많은 이유로 밀려나게 될 기존 계층이 새롭게 유입되는 종교적 및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유입에 의해, 그동안 별 무리 없이 누려왔던 지위에 따른 경제적 이익의 박탈까지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내몰린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야말로 앞선 지위 박탈의 요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많은 사회에서 이러한 지위 추락이 직접적 내전의 발발 원이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꼽는 이와 유사한 내전은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진 구교도와 신교도 사이의 비극적 폭력 사태와 콩고 내전에서 자행된 '인종 말살'이 있습니다.
약간 이른 결론일 수도 있지만, 저자인 바바라 F. 월터는 앞에서 논증된 서사를 바탕으로 역설적으로 민주주의에서 내전에 의한 정치적 혹은 물리적 테러가 무고한 다수를 향해 발생할 수 있고, 이것의 근본적 원인은 일부 시민들의 좌절감과 그것을 이용하는 극단적 정치인에서 비롯된다고 거듭 강조합니다. 이 극단적 정치인의 가장 대표적 사례는 도널드 트럼프가 될 것 같습니다. 물론 헝가리와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 트럼프와 비슷한 궤를 보이는 여러 극우 포퓰리스트들이 있지만 사실상 세계 패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 미합중국의 연방 대통령은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이라는 차원에서, 다른 국가들의 정치인들과는 실로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우려하는 미국 정치의 극단주의화, 그리고 슬프면서 역설적인 상황인, 민주주의에서 "자신들의 요구가 토론이나 타협을 거쳐, 원할하게 수용되지 않는다면 그때부터는 극단적인 선택 사항인, 마땅히 실질적 물리 행사, 즉 폭력이다" 라고 그녀는 이러한 구절을 인용해 그 심각성을 폭로합니다. 이미 세계 최대 총기 보유 국가인 미국은 일반적인 총기 사고 및 범죄는 물론, 시민들이 일상에서 수많은 총기로 인한 유무형의 위협에 놓여 있는 사회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저자는 민주당이 정권을 잡거나, 선거에서 크게 이겼을 경우, 그 해의 총기 판매량이 월등하게 높았다는 것을 미국만의 극명한 예로 들고 있었는데요. 이는 미국 정치가 단적으로 파벌주의의 온상이 되었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6장에서 여실히 논증되는 바와 같이, "한 파벌이 이기적으로 권력을 욕심 내면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상황 말이다"라고 이어지는 폭력적 상황의 결과물을 폭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그동안 미국 내의 좌절된 '저학력의 백인 노동자'라는 서사는 이미 잘 알려진 바가 있습니다. 공화당은 이제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이런 불만과 증오에 빠진 일부 계층의 표로 이어가고 있는데요. 여기에 이런 저학력의 백인 노동자들을 더 들끓게 만들었던 소위 '불법 이민자 문제'는 그것의 본질적 진위 여부를 가리기 전에, "경제적, 사회적 쇠퇴를 실감하는 이들 백인들이 볼 때, 미국 정부는 마치 벵골인들에게 아삼으로 이주하도록 장려하는 인도 정부나 자바인들에게 서파푸아로 이주하도록 권하는 인도네시아 정부, 또는 싱 할라인들에게 타밀 지역으로 이주하도록 부추기는 스리랑카 정부와 같았다"고 자신들의 처지를 증오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왜곡된 인식으로 자포자기하는 심정에서 혹은 로버트 달과 같은 민주주의자들이 중요하게 여겼던 다원주의를 거부하는 인종 혐오 그 자체이든 이러한 현실은 미국 정치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도 한데요. 또한 이들 백인들은 인도나 중국 출신의 젊은이들이 미국의 유수 명문 대학이나 첨단 IT기업,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영어가 아닌 자신들의 모국어로 대화를 나누고 비싼 커피를 마시고 있을때, 더욱 비참한 굴욕감을 느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 자리는 분명 나의 것인데, 백인들이 쌓아 올린 유산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유색인종들이 내 자리를 빼앗아, 마땅한 내 권리도 앗아갔다"고 말입니다. 이는 극단주의화 된 '폭스 저널리즘'을 낱낱이 까발린 리스 펙의 주장과도 일정 부분 연계되기도 하는데요. 결국 이 점은 저학력 백인 노동자들의 실질적 삶의 개선에 하등 관심이 없는 정치인과 언론인들이 이들의 지지와 표를 이용하기 위해, 그들의 불만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실질적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현재 미국의 정치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저자의 이 논저를 통해 충분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근래 미국 정치가 오랜 독립 역사에서 명예로운 증거로 규정된, '민병대의 역사'와 이 조직된 군대라는 소위 헌법의 어디즈음에 존재하는 '총기로 무장한 민간인들'이 오늘날 인터넷의 발전으로 등장한 SNS 시대의 실질적 수혜자임을 저자는 다시금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일전의 마누엘 카스텔이나 조르조 아감벤의 기대와는 달리, 이 SNS는 민주주의에서의 모두를 위한, 긍정적 영향이 아니라, 극단주의자들의 아주 훌륭한 연락책이자, 극단화의 매개물이 되었습니다. 이 정치적 극단성이라는 적극적으로 회피하고 개선시켜야 할 무언가가 이 거대한 SNS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개성'정도로 쓰이고 있는 희극적인 현실을 우리는 목도하게 됩니다. 특히 이 소셜미디어가 분노에 사로잡힌 극단적 아웃사이더들에 의해 한 국가의 제도에 관한 거짓말을 퍼뜨릴 수 있다는 점은 우려할 수준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일각에서는 이를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아직도 토론이 이뤄지고 있습니다만 이 와중에, '잘 조직화된 민병대'는 네오 나치와 인종주의를 매개로 흡사 '총기로 잘 무장된 병사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총기로 무장하여, 오도된 정치적 관념으로 맹목적인 민병대, 그리고 여기에 유입된 전직 군인들은 왜 "미국이 내전 상황으로 촉발될 수 있는지에 대한 근본 이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는 도널드 트럼프의 책략가였던 스티브 배넌의 노골적인 의도와도 잘 들어맞기도 했는데요. 바로 이러한 미국 정치의 민낯 혹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은 저자의 입을 통해, 이러한 파벌주의와 극단주의적 정치의 원인은 바로 금권정치와 첨예화 된 양극화라고 규정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 그녀는 시장에 좀 더 기여하기 위한 민주주의의 희생, 그리고 그로 인한 시민 다수의 경제적 불평등도 중요하지만 여기에 무엇보다 정치적 체제의 개선 실패와 시민들 자신이 건전한 의견을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의 부재, 그리고 극단주의자들이 더 발언권과 힘을 얻는 왜곡된 정치적 구조 및 지지 기반 등을 문제의 핵심으로 짚어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미국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아노크라시 어디쯤에 놓여 있는 사실상 '내전 상황'이냐는 질문에 그녀의 답은, "그렇다"였습니다.
끝으로, 제가 몇몇 서평에서도 자주 언급했습니다만, 일전의 미국 정치 내에서, 과거 보스턴 차 사건을 차용한 '티파티 운동'은 아이러니하게도 진보 즉, 리버럴 대부분을 사회에서 없애야 될 '격멸'의 대상으로 치부했습니다. 토머스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으로 대표되는 건국의 아버지들은 다수에 의한 정치적 폭압, 즉, 소수의 권리 약화를 우려했고, 그런 연유로 연방 정부와 헌법,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매우 견고한 '균형주의적이면서 권력 분립적인 체제'를 고안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유산을 이어 받은 후세인들이 '자신들과 생각이 다르다'고 같은 미국인들을 격멸과 제거의 대상으로 지칭한 것을 무덤에 있는 저 건국의 아버지들이 과연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저로서는 매우 궁금할 따름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글을 쓴 저자 역시, 자신의 나라가 이런 극단주의적 파고에 휩쓸리게 된 현실을 연구자이자, 혹은 지식인으로 심대한 고민의 밤을 숱하게 보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결국 그녀 자신이 대면하게 된 현실은 '파벌주의적 내전에 빠진 미국 정치' 그 자체였습니다. 이에 그녀는 작금의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법치를 강화하고, 모든 시민에게 동등한 투표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며, 정부 서비스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전반적으로 과거 로널드 레이건으로부터 시작되어, 빌 클린턴에 의해 완성된 신자유주의 체제의 상당한 개선 노력으로도 읽힙니다. 기존의 엘리트 지배 체제를 부정하는 포퓰리스트 조차도 선동 이면에는, 결국 기존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답습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이는 어떻게 보면 지금의 미국이라는 국가는 개인의 극대화된 이기심과 그것이 발휘될 사회적 조건과 그 기본 자원의 유용성이 오직 부유층에게만 주어진다는 것을 망각하게 만들고, 오히려 자원 배분의 불평등성을 더욱 조장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수립으로 더욱 내밀화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자유와 개인의 이기심을 글로 더 펼쳐낼 생각은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이러한 체제 하에 극단주의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누군가의 분노를 먹고 커져 가는 정치는 결코 성공해서 안된다는 점은 거의 명백합니다. 과거 우리가 알고 있는 토머스 홉스와 존 스튜어트 밀의 이야기들이 이를 대변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재등장으로 미국 정치는 더욱 수렁 속에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정치학자들의 경고는 단순한 우려 만은 아닐 겁니다. 어쩌면 미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그렇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한쪽의 극단주의 세력이 주도하는 그런 자기파괴적 정치는 더 이상 유럽 사회에 뿌리 내릴 수 없다고 단언했다죠? 하지만 그의 단언은 여실히 거짓이 되고 말았습니다.
- 물론 저자인 바바라 F. 월터가 작금의 한국 상황을 예상하고 쓴 내용은 아니겠지만 "새롭게 민주주의를 이행하는 거의 모든 나라는 선거의 적정성을 보호하기 위해 중앙의 독립적인 선거 관리 체계를 만든다. 이는 선거 과정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된다"고 분석하고 여기에 속한 국가들 가운에 우리 나라를 열거하고 있었습니다. 전술된 내용은 완벽히 한국을 가리키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현대사에서 반민주적 성향의 포퓰리스트가 집권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 아니다"는 5장의 저 극명한 문장은 작게는 개인사를 헤쳐나가는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게 하고, 크게는 국가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토대 위에 놓여 있는지 실로 깨닫게 만듭니다. 마치 그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는 깊은 메아리를 듣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